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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은 사람의 외적인 삶과 내적인 삶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납니까?
누구나 자기가 잘 할수 있는 일, 즉 자신의 재능을 찾습니다. 명상을 하면 자신의 진정한 재능을 발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깨달음의 강력한 에너지로 인해 깨달은 사람들 또한 외적으로도 달라지는 경우가 있나 봅니다. 그와 관련된 오쇼의 강의 전해 드립니다....
문: 어떤 사람이 모든 사념과 욕망을 비워버린 경지에 이르면 그의 외적인 삶과 내적인 삶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납니까? 그는 어떤 식으로 행동하며 어떤 식으로 사물을 볼까요? 그는 이 세상 속에서 어떤 식으로 살아갈까요? 여기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답:
그것은 개인마다 다르다. 모든 개인은 저마다 독특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대해 정형화된 기준을 제시할 수는 없다. 바쇼(Basho)는 깨달음을 얻었을 때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붓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크리슈나는 깨달음을 얻었을 때 노래하고 춤추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하비라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마하비라는 깨달음을 얻은 후 몇 년동안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미라(Meera)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녀는 깨달음을 얻은 후 이 마을 저 마을을 떠돌며 춤추었다. 그녀는 신의 영광을 노래했다. 그러므로 여기에 대해 분명한 정설(定說)을 제시하기란 매우 어렵다.
어떤 사람들은 깨달음을 얻은 후 세상을 버리고 산 속으로 은둔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산 속에 있다가도 깨달음을 얻은 후 다시 세상 속으로 돌아와 사람들과 어울려 살기 시작했다. 깨달음을 얻은 후에도 황제의 자리를 지킨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선사(禪師)들은 전과 다름없이 평범한 삶을 살아간다. 만일 그대에게 꿰뚫어보는 눈이 없으면 그들을 알아보기 힘들 것이다.
임제선사(臨濟 禪師)에 대해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어느 날 황제가 임제를 만나려고 찾아왔다. 임제가 산문(山門) 앞에서 장작을 패고있는데 황제가 다가와 “그대의 스승은 어디 계신가?”하고 물었다. 그러자 임제는 “안에 계십니다.”하고 대답했다. 당연히 임제가 절 안에 있다는 말로 알아들은 황제가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임제는 다른 문을 통해 절 안으로 뛰어 들어가 법좌(法좌)에 눈을 지긋이 감고 앉아있었다. 안으로 들어온 황제가 그를 보고 “이 사람은 바로......아까 장작을 패던 그 자로구나.”하고 알아보았다. 황제가 말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그대가 누구길래 그 자리에 앉아있는 것인가? 나를 바보취급하는가? 아니면 정신이 어떻게 된 자인가?”
임제가 말했다.
“나는 이미 그 분이 안에 계신다고 말했는데 당신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소. 당신이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기때문에 나는 얼른 달려와 이 자리에 앉아야 했소. 아마 당신은 겉모습만 알아보는 모양이군요. 절 밖에서도 나는 이미 나자신을 내보일 준비가 되어 있었거늘 당신은 한시도 기다리지 않았소. 자, 내가 바로 그 스승이니 이제 말해 보시오. 원하는 게 뭐요? 그리고 내 시간을 너무 많이 뺏지 마시오. 밖에는 아직 패야할 장작이 많이 남아있소.”
선사들은 아주 평범한(ordinary) 삶을 살아간다. 그들은 장작을 패고, 우물에서 물을 길어오고, 부엌에 들어가 음식을 장만한다. 그러므로 눈이 없는 자는 그들을 알아보기가 매우 어렵다. 그들은 비범한(extraordinary) 삶을 살지 않는다. 그들은 “비범해지려는 욕망 자체가 에고의 발상이다.”하고 말한다. 평범해지고자 하는 것이 진정으로 종교적인 사람의 태도이다. 그리고 이것을 명심하라. 비범해지고자 하는 욕망은 아주 평범한 것이다. 여기엔 어떠한 비범함도 깃들어있지 않다. 모든 사람이 비범해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평범해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비범함이다. 평범해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대의 질문에 대해 특별한 기준을 제시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나는 어떠한 판단의 기준도 제시하지 않을것이다. 그 기준들은 아주 파괴적이고 해로운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일단 정형화된 기준을 갖게 되면 그대는 진짜는 알아보지 못하고 사이비에게 속아넘어갈 것이다. 그대의 기준을 만족시키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깨달은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예를 들어, 마하비라는 벌거벗고 지냈다. 그렇다면 벌거벗고 서 있는 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다. 거기엔 특별한 게 없다. 미친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다. 나체주의자 클럽에 가보라. 거기가면 온통 벌거숭이들 뿐이다. 그러나 그들은 마하비라가 아니다. 붓다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었다. 이것은 그대도 할 수 있는 일이다. 동양인에게는 아주 간단한 일이다. 그대가 서양인이라면 6개월 정도의 훈련이 필요하겠지만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이것이 그대를 붓다로 만들어주지는 못할 것이다. 물론, 흉내를 내는 것은 아주 쉽다. 온 세상에 흉내쟁이들이 만연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자이나교 승려를 만나보라. 그들은 완벽하게 흉내낸다. 하지만 흉내 외엔 아무 것도 없다.
깨달음은 항상 새롭고 신선하다. 깨달음은 모방이 아니다. 깨달음은 복사판이 아니라 언제나 원본(原本)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대에게 각자(覺者)가 정확하게 어떤 식으로 행동할지 말해줄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흡수해야 하는지는 말해줄 수 있다. 미지의 신비한 분위기를 발산하는 사람이 있을 때, 그를 어떻게 받아들여 하는가?
그대가 기준으로 생각하고 있는 모든 관념을 버려라. 그가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에게 그런 것을 요구하지 말라. 다만 그와 함께 존재하라. 그와 함께 조용히 앉아서 그에 대해 열려 있어라. 만일 그가 깨달은 자라면 돌연 그대는 지금까지 전혀 느끼지 못했던 진동이 내면에 일어나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대의 에너지가 용솟음치기 시작할 것이다. 그대의 주변에 거대한 침묵이 일어나고, 물방울이 떨어지듯이 그대 내면의 중심이 말할 수 없는 지복으로 젖어드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기만 한다면 깨달은 사람은 자명(自明)한 증거를 제시할 것이다. 그러나 이 증거들은 지적인 것이 아니다. 이 증거들은 마음의 주장이 아니다. 그의 존재 전체, 그의 현존 자체가 깨달음의 증거이다. 그러니 그의 현존을 허락하라. 어떠한 기준도 마음 속에 품지 말라. 만일 그대가 자이나교의 기준을 갖고 있다면 그대는 붓다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대는 크리슈나와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기독교인이라면 그대는 마하비라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대는 고정된 관념, 정형화된 사고 패턴에 물들어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정관념을 갖지 말라. 어떤 사람에게서 그가 그대보다 더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느낌, 그대보다 더 밝게 빛난다는 느낌, 그대보다 더 깊은 이해를 간직하고 있다는 느낌, 그의 존재로부터 자비가 흘러넘치는 느낌을 받는다면, 그럴 때에는 다만 그의 현존과 함께 존재하라. 이것이 우리가 사트상(satsang)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만일 그가 깨달음을 이룬 자라면 그대는 돌연 그대자신의 존재 안으로 끌려들어가는 것을 느낄 것이다. 미지의 중심을 향해 끌려가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대는 엄청난 아름다움과 지복, 축복이 그대 위에 쏟아져내리는 것을 느길 것이다. 이것이 유일한 기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먼저 그대가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
흔히 사람들은 “우리에게 객관적인 기준을 알려 달라.”고 말한다. 그러나 객관적인 기준은 없다. 그대가 열려있어야만 한다는 것, 이것이 기준이다. 이 꽃이 장미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 그대의 눈으로 보고 코로 냄새 맡는 것이 유일한 기준이다. 이것이 장미꽃의 존재를 알려줄 것이다. 그러나 그대에게 볼 눈도 없고 냄새맡을 코도 없다면 그 꽃이 장미인지 아닌지 알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플라스틱이나 종이로 만들어진 장미일지도 모른다. 그대는 이 조화(造花)에 속을 수 있다.
그러므로 깨달은 자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객관적으로 묘사할 수 없다. 그것은 개인에 따라 다르다. 결코 같을 수 없다. 다만 나는 그것을 느끼는 주관적인 방법은 제시할 수 있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미친듯이 날뛰는 검객이 마을에 들어와 남자와 여자, 어린아이 할 것없이 마구 베어 쓰러뜨리며 온 동네를 공포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어느 선원(禪院) 앞에 당도한 그가 문을 박살내고 안으로 뛰어 들었다. 그가 좌선(坐禪) 중인 선사 앞에 떡 버티고 서서 칼을 높이 들고 막 내려칠려는 찰라, 요지부동으로 앉아있는 선사의 고요함이 그의 마음을 건드렸다. 그가 분노에 차 고함을 터뜨렸다.
“당신 앞에 서 있는 이 사람이 눈도 깜짝하지 않고 당신을 두 동강낼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가!”
선사가 조용히 응답했다.
“그대 앞에 앉아 있는 이 사람이 눈도 깜짝하지 않고 두동강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가? 자,어서 계속하라. 나의 침묵때문에 망설이지 말라. 그대가 하고싶은대로 하라.”
그러나 선사의 침묵이 미치광이 검객을 건드렸다. 그 침묵이 검객의 가슴에 와 닿았다. 이제 선사를 베는 것은 불가능했다.
설령 그대가 미치광이라해도 열려있기만 하다면 깨달음을 알아볼 것이다. 깨달음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형상을 취하고 있는지 알아볼 것이다. 반면, 그대가 아주 지적이고 논리적인 철학자라해도 침묵과 지복의 영혼을 흡수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면 전혀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대는 최대한으로 열려있어야 한다. 모든 것을 내맡기고 완전히 방임(let-go)해야 한다. 이때, 깨달음의 증거가 너무나 강하게 다가온다. 그 증거가 너무나 확실하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부정할 수 있을지언정 깨달은 사람을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증명해 보일 수는 없을것이다. 증명할 방법이 없다. 그러나 그대에게는 너무나 확고한 일이다. 일단 이렇게 확고한 증거를 체험하고 나면 그대는 깨달은 자와 연결된다. 다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제 그대는 예전과 똑같은 사람으로 돌아갈 수 없다. 깨달은 사람을 알아볼 수 있었던 그 경험자체가 그대자신에게 깨달음의 토대를 마련해준다. 그것은 그대에게 새로운 방향, 새로운 존재, 새로운 탄생을 가져다 주기에 충분한 경험이다.
- OSHO -
첫댓글 깨달음은 항상 새롭고 신선하다. 깨달음은 모방이 아니다. 깨달음은 복사판이 아니라 언제나 원본(原本)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대에게 각자(覺者)가 정확하게 어떤 식으로 행동할지 말해줄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흡수해야 하는지는 말해줄 수 있다.
그대가 기준으로 생각하고 있는 모든 관념을 버려라. 그가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에게 그런 것을 요구하지 말라. 다만 그와 함께 존재하라. 그와 함께 조용히 앉아서 그에 대해 열려 있어라. 만일 그가 깨달은 자라면 돌연 그대는 지금까지 전혀 느끼지 못했던 에너지와 감동을 느낄 것이다
계율또한 없는것이지요. 아라한이 되고자 수행한다면 그것은 참다운 목적이 더더욱 아니겠지요!! 우린 본래로 가서 본래와 합일하여 다시 거듭나 즉, 부활하는 것 입니다. 그럴때 비로소 영생불멸의 존재로 완전함에 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