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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크하르트 톨레
나는 당신이 방금 묘사한 것을 가끔씩 혼자 있을 때나 자연에 둘러싸여 있을 때 순간적으로 경험하곤 합니다.
그렇습니다. 선사들은 그러한 통찰의 순간을 '삼매'라고 합니다. 그것은 완전히 현존하는 무심의 순간입니다. 삼매는 영속적인 변화는 아니지만 반가운 일입니다. 그 순간 우리는 깨달음을 맛보게 됩니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면서도 여러 번 경험했을 수 있습니다. 자연의 아름다움, 웅장함, 신성함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현존이 필요합니다. 맑게 개인 밤하늘의 무한한 공간을 응시하면서, 그 완전한 평온함과 불가해한 광할함에 위압당해 본 적이 있습니까? 숲 속에서 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면서 진정으로 그 소리에 귀 기울여 본적이 있습니까?
고요한 여름 저녁 해질 무렵에 이름모를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 것들을 의식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정지해야 합니다. 잠시 개인적인 고민거리를 털어 버리고, 과거와 미래, 그리고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보고 있어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합니다. 바로 완전한 현존이 요구되는 겁니다.
외부적인 형상의 아름다움 너머에는 이름을 부를 수도 없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 깊은 내면의 성스러운 본질이 있습니다. 아름다움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그러한 내면의 본질이 언뜻언뜻 비치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현존하고 있을 때에만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 불가해한 본질과 당신의 현존은 하나이며 같은 것이 아닐까요? 당신이 없어도 그것이 거기에 있을까요? 그 속으로 깊이 들어가 보십시오. 거기서 당신 자신을 찾아 보십시오.
우리는 그러한 현존의 순간을 경험하면서도 자신이 잠깐 무심의 상태 속에 있었다는 것을 쉽게 깨닫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그 상태와 생각의 유입 사이에 간극이 너무 짧기 때문입니다. 삼매는 마음이 들어오기 전에 단 몇 초 동안 지속되었을 뿐이지만, 여하튼 거기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 아름다움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마음은 아름다움을 인지할 수도 창조할 수도 없습니다. 잠시에 불과했지만 당신이 완전히 현존하고 있는 동안, 그 아름다움과 신성함은 거기 있었습니다. 그 틈새가 너무 짧고 당신이 충분히 각성하고 경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무심과 그것을 생각으로 분별하고 해석하는 마음과의 기본적인 차이점을 알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 시간의 틈새가 너무 짧아서 하나의 과정으로만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생각이 들어와서 당신에게는 기억으로 밖에 남지 않은 것입니다. 지각과 생각 사이의 틈새가 넓어질수록 깨어 있는 상태를 더욱 깊이 지속시킬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마음속에 같혀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자연의 아름다움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꽃이 정말 예쁘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단지 자동적인 정의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고요하지 않고 현존하지도 않으므로 꽃을 보고도 그 본질과 신성함을 진정으로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자신을 모르고 있으며, 그들 자신의 본질과 신성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는 마음이 지배하는 문화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현대의 미술, 건축, 음악, 문학 등에서 아름다움과 내면의 본질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은 그 때문이니다. 그러한 것들을 창조하는 사람들이 마음으로부터 잠시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진정한 창조성과 아름다움이 생겨나는 내면의 장소와 만나지 못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제멋대로 괴물을 창조해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화랑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산업화의 과정에서 폐허가 되어 버린 도시의 풍경을 돌아보십시오. 일찍이 어떤 문명도 이렇게 흉악한 몰골을 드러낸 적이 없었습니다.
순수의식의 실현
깨어 있다는 것은 현존하는 것과 같습니까?
우리가 존재를 의식할 때는 사실, 존재가 스스로를 의식하는 것입니다. 존재가 자신을 의식하게 되면 그것이 현존입니다. 존재, 의식, 그리고 삶은 동의어기 때문에 현존이란 자신을 의식하는 의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혹은 생명이 자의식을 획득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어네 집착하지 마십시오.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마십시오. 현존하는 전에는 아무것도 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방금 당신이 한 이야기는 현존, 즉 궁극적인 초월적 실재는 아직 완전하지 않으며, 지금도 발전 과정을 겪고 있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듯합니다. 신은 개인적 성숙을 위한 시간을 필요로 할까요?
그렇습니다. 물질화된 세상의 제한된 시각으로 보자면 그렇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느님은 선언합니다. "나는 알파요 오메가이다. 나는 살아 있는 유일자 이다."
시간을 초월한 신이 거주하는 왕국이자 우리의 집이기도 한 그곳에서는 시작과 끝, 알파와 오메가가 하나입니다. 만물의 본질은 일찍이 인간의 마음으로는 결코 상상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온전하고 완벽한 상태로 물질화되지 않은 채 존재해 왔으며 여원히 존재할 것입니다.
그러나 서로가 분리되어 있다고 느끼는 우리에게 시간을 초월한 완전함이란 불가해한 개념입니다. 영원한 근원으로부터 발산되는 의식이 하나의 발전 과정에 속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모두 우리의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시 이 세상 안에서 일어나는 의식의 진화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만물은 '존재' 를 신의 본질을, 어느 정도의 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돌멩이조차도 미미한 정도나마 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존재할 수도 없으며, 원자와 분자로 흩어질 것입니다. 모든 것은 살아 있습니다. 태양, 지구, 행성, 동물, 인간 등, 만물은 다양한 의식의 표현이요, 모습을 갖고 물질화된 의식의 표현입니다.
세상은 의식이 사고 형태와 물질적 형태를 취하면서 생겨납니다. 이 지구상의 수많은 생명체를 보십시오. 바다 속에서, 땅 위에서, 대기 중에서, 생명체가 오랜 세월 동안 되풀이 해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도대체 그 목적이 뭘까요? 누군가가, 혹은 무언가가 형태를 갖고 게임을 하는 것 아닐까요?
고대 인도의 선지자들은 스스로에게 그런 질문들을 했습니다. 그들은, 세상살이란 신이 벌이는 신성한 게임 같은 것 (릴라 lila) 이라고 보았습니다.
그 게임에서 개별적인 생명체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게 분명합니다. 바다 속에서는 대부분의 생명체가 태어난 지 몇 분도 되지 않아서 죽고 맙니다.
인간의 형태 역시 쾌 빠른 속도로 먼지로 변하며 언제 존재했느냐는 듯이 사라집니다. 이것이 비극적이거나 잔인한 것일까요? 우리가 스스로 분리된 개체라고 느끼는 한 그것은 진실입니다. 저마다의 의식이란 신의 본질이 형상 속에 스스로를 표현하고 있는 것임을 잊고 지내는 한, 인생은 분명 비극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당신 자신 안에 있는 순수의식으로서의 신의 본질을 깨닫기 전에는 진정으로 그것을 알 수 없습니다.
당신의 수족관 속에서 물고기 한 마리가 태어났다고 합시다. 당신은 그 물고기를 '존' 이라고 부르고, 출생 증명서를 작성하고, 족보를 만듭니다. 그리고 나서 2분쯤 후에 그 물고기가 다른 물고기에게 잡아먹힌다면 그것은 비극입니다.
그것이 비극인 이유는 당신이 '물고기에게 분리된 자아가 있다' 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역동적인 과정에 있는 하나의 단면, 하나의 분자가 추는 춤을 보고 거기에서 분리된 개체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의식은 형상들 안에서 자기 자신을 완전하게 잃어버릴 만큼의 복잡성에 이를 때까지 여려가지 형태로 변장합니다. 오늘날의 인간들에게 있어서 의식은 그렇게 변장된 형태의 것과 동일시되었습니다.
자신을 오로지 모습으로만 알고 있으므로, 육체적이고 심리적인 모습이 소멸될까봐 두려워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에고의 마음이며, 그로 인해 심각한 부작용이 일어납니다. 마치 진화과정에서 무언가가 심각하게 잘못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신이 하는 게임의 일부입니다. 결국 이러한 명백한 부작용에 의해 만들어지는 고통의 중압감으로 말미암아, 의식은 모습과의 동일시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고, 자신이 형상일 뿐이라는 꿈에서 깨어나게 될 것입니다. 결국은 자의식을 다시 찾게 되지만, 그 자의식은 그것을 잃어버릴 때보다 훨씬 차원이 깊어질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에크하르트 톨레
첫댓글 지금 이 순간을 살기^^
감사합니다 ^*^
잘 ~ 보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