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찬거리 사면서도 부부싸움 하면서도 자기를 반조하십시오 -
또 한철 가을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대자연의 이치는 어김이 없습니다.
우주의 대자연은 제 갈 길을 어김없이 가는 것입니다.
소나무가 변함없이 서 있고
개울물 흐르고 바윗돌들이 아름다운 저 산은
산이기에 앞서 대자연입니다.
그래서 저 산에서도 대자연의 순리대로
끝없는 변화가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해가 뜨고 지고 하는 것도 대자연의 말없는 변화고,
산이 변화 속에 사시사철 모양을 바꾸는 것도
대자연의 호흡입니다.
해와 산과 나무와 개울물만 자연인 것은 아닙니다.
우주 속의 모든 것이 자연입니다.
대자연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대자연 속의 인간은 무엇이냐.
인간은 소자연입니다.
우주의 대자연과 다를 것이 없지만
소규모의 자연입니다.
우리의 몸뚱이는 대자연 속의 소자연이란 얘기입니다.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는 소자연 말입니다.
주부님들이 살림살이를 해 나가는 데 있어
큰 살림이니 작은 살림이니 나눠서 말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큰 살림이나 작은 살림이나
갖추고 있어야 할 것은 다 갖춰야 살림살이가 되는 법이지요.
마찬가지로 대자연이나 소자연이나
갖출 것은 다 갖춰야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소자연도
대자연과 마찬가지로 살아야 합니다.
대자연의 말없는 흐름과 같이
인간도 원칙을 무시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살아야 편안한 것입니다.
대자연을 버리고
소자연인 인간이 편하게 살 수는 없다는 이치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대자연을 정복한다는 것이나 보호한다는 것도
소자연 단속이 앞서야 가능한 것입니다.
소자연인 인간은 자연스럽지 않은데
대자연을 정복하거나 보호하는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내 소자연을 못 다루면서
어떻게 마음대로 대자연을 부릴 수 있겠습니까.
소자연인 나 자신을
먼저 다스릴 줄 알아야 하는 겁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소자연인 나 자신을 잘 다스리는 것일까요.
소자연의 완성이 곧 대자연의 완성인데
어떻게 소자연을 완성 시켜야 하느냐 이 문제를 풀어낸다면
대자연도 없고 소자연도 없는
대각의 경지로 오를 수 있을 것입니다.
소자연의 완성,
다시 말해서 나의 완성을 위해
꾸준히 참선을 해야 합니다.
대승적 수선(修禪)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대승적 수선이란 무엇입니까.
대승적으로 선을 닦는 것입니다.
대자연의 완성을 자연스럽게 만들어 내는
그런 선을 닦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부처님이나 역대조사 여러 큰스님들의 길을
오늘의 우리도 똑같이 가는 겁니다.
그 길을 가기 위해 우리는
스스로의 성품과 행실을 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반조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소자연을
밝은 눈으로 살피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강요된 반성은 반조가 아닙니다.
스스로 자신의 성품을 돌이켜보며
제 사는 길을 돌이켜보고
완성의 길이 어디로 가는 것인가를 알아내야 합니다.
나 스스로 나를 비추는 일이야말로
나의 진면목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참선해야 합니까.
이런 생각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참선을 하는 시간이 따로 있을 수 없으니까요.
시시각각 하루 스물네 시간,
이틀이면 마흔여덟 시간,
그 모든 시간이 바로 자신을 비추는 반조의 시간이요,
참선의 시간이 돼야 한다는 겁니다.
인생살이가 모두 반조의 시간이요,
참선의 시간이 돼야 합니다.
반찬거리를 사러 가서도,
부부싸움을 하면서도
스스로를 비춰보십시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행위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지 못하면
한낱 몸뚱이의 움직임일 뿐이고
그것을 알면
인간의 생명을
가치 있게 이어 나가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권투선수가 상대편과 권투를 하고 있다고 합시다.
그것은 운동경기입니다.
그러나 그 운동경기를 하는 선수가
자신의 행위를 비춰보지 않고
상대편을 무작정 이기기만하려 한다면
그것은 싸움질이 될 뿐,
운동경기가 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반조하는 것,
돌이켜 자신을 알아보는 것,
이것이 참선인 것입니다.
참선은
화두만 붙들고 앉아 있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화두란 것에만 붙들려 있으면
운동선수가 싸움질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기고 지는 것을 뛰어넘은 생각,
그 한 생각을 가져야 하는 것이
참다운 운동하는 자세이듯
참선의 바른 자세도
화두에만 묶여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진면목을 보려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생각만 하나 옳게 들고 있으면
그것이 부처되는 길입니다.
또 한 생각을 잘못 들고 앉아있으면
한낱 중생의 길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옛 조사스님들도 말씀하셨습니다.
'한 생각 바로 갖고 들어가는 것이
뭐 그리 어렵냐.'고 말입니다.
한 생각 바로 들어가는 것이 부처라 했으니,
32상 80종호를 다 갖춰야 부처가 아니고
한 생각을 바로 갖춤으로 해서
부처의 열매를 따먹는 것이니,
한 생각을 놓쳐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그것은 시일이 걸리는 일일 수도 있지만
나를 돌이켜보는 반조의 순간은 눈 깜빡할 사이가 아닙니까.
한 생각을 다 잡아 지니고 나를 비추는 일을
애기가 커서 어른이 되고 늙고 죽어가듯
끝없이 해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마침내는 나의 실제 모습,
진면목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는 대승을 실천해야 합니다.
옛날 삼장법사가 인도를 왜 갔습니까.
도를 구해서 인도에 갔고,
그 목적은 바로 대승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소승은 나 혼자만을 구하는 도리이고
대승은 나와 동시에 내 이웃을 같이 구하는 도리입니다.
물론 내 자신이 부처님 마음과 같이 돼야 하겠지만
나 혼자 부처님 마음같이 되고 나서
아들, 딸과 이웃은 다 어쩌란 말입니까.
모두가 부처님의 마음이 돼야 합니다.
소자연이 완성돼야
대자연이 완성되는 이치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대자연에 속한 인간이
누구는 완성되고 누구는 완성되지 않았는데
대자연이 어떻게 완성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대승의 수선이 필요하고
우리 불자들이 그것을 해내야 하는 겁니다.
금강경에 나오는 한 말씀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형상을 형상 아닌 것으로 보면
바로 여래를 보는 것이란 뜻인데,
이것을 어렵게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나도 예전에는 이 부분이 이상해서 많이 생각했는데
'형상을 형상 아닌 것으로 봐라.'는 것은
곧 집착을 버리란 뜻입니다.
형상을 형상 아닌 것으로 보라는 말에 대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
결국 그 말이라는 형상에 집착되어
의미를 못 밝히는 것입니다.
형상을 보면서 형상이 아닌 것을 보려면
형상에 집착하지 않으면 됩니다.
집착하지 않으면
형상 아닌 것은 저절로 보여 집니다.
「무」라거나 「이 뭣꼬」라거나 하는
1700의 공안이 다 무엇입니까.
집착을 끊으라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참선의 길을 바르게 걷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바로 스스로를 비추는 일이 필요합니다.
어두운 곳에 앉아서
내 얼굴에, 내 옷에 무엇이 묻었는지 보입니까.
밝은 곳에 앉아있어야
내 얼굴에 묻은 흙과
내 옷에 묻은 오물이 보이지 않겠습니까.
“스님,
화두를 생각하면 일이 잘 안되고
일을 하려면 화두가 생각나지 않으니
어쩌면 좋습니까?”라는 질문을 자주 듣습니다.
그것은 길을 잘못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참선의 길을 잘 못 찾아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늘 참선하라고 하셨지요.
여기서 한 이야기들 들려 드리겠습니다.
사리불 존자가 나무 밑에 않아 참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옆을 유마거사가 바삐 지나고 있었죠.
꼼짝도 않고 앉아있는 사리불을 보고
유마가 그냥 지나갈 리가 없었겠지요.
"여보시오, 사리불 존자."하고 부르니까
그제서야 사리불이 눈을뜨고
"아니, 처사님 어디를 가십니까?"하고 인사를 했겠지요.
유마는 "존자님,
참선 하느라고 지나가는 사람도 못 보고
도대체 참선을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아무 것도 생각 않고 손끝 발끝 하나 꼼짝 않고
그렇게 앉아 있는 것이 참선이요."
"아휴, 안타깝습니다.
이 세상에서 탐진치를 나타내지 않는 것이 참선이요.“
그렇게 말하고는 유마는 가던 길을 가버렸습니다.
이 세상에서 탐진치를 내지 않고 사는 게 참선이라니,
이 뜻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탐진치를 나타내지 않고 사시겠습니까.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비춰보는 것입니다.
자신을 환히 비춰보는데
더러운 것이 묻었으면 그것을 빨리 닦아내지
그냥 놔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자신을 비춰보는 삶은 언제나 깨끗하고
결국은 탐진치를 나타내지 않는 참선,
유마가 사리불을 질책한 참선의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나를 비춰보는 사람이 참선을 제대로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행복하고 일도 잘하고
또 돈도 많이 벌게 됩니다.
불교를 믿는다고 해서
모두 행복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를 믿는다는 것이
그저 뭐든지 초월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옛날에 한 노파가 있었습니다.
그 노파는 아들도 딸도 모두 출가해 스님이 됐고
자신도 열심히 절에 다녔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 노파가 길을 가는데
옆에서 서 있던 소가 옆구리를 들이받았습니다.
그럴 수도 있는 것이죠.
그런데 그 노파는
'내가 이렇게 열심히 절에 나가 부처님을 믿었는데 소에 받히다니.
예끼, 이제는 절에 다니지 않을 테다.'하고 했습니다.
잘 되면 좋아하고 못 되면 싫어하는 것은
중생의 마음입니다.
잘 되고 못 되고를 구별해 보지 말아야 합니다.
그 분별심이 있어서는
바른 길에서 참선도 못하게 되고
바른 불교를 믿지도 못하게 됩니다.
형상을 보지 말고 형상 아닌 것을 보라고
앞에서 말했습니다만
형상도 형상 아닌 것도 봐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둘로 나눠놓고 보느니 안 보느니 하면
아무 것도 안 되는 것입니다.
집착입니다.
그 집착의 무거운 짐을 벗지 못하면
끝내 밝은 마음을 못 얻게 됩니다.
집착 속에 헤매는 사람은
절대 자신을 비춰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노파가 소에 받혔다고 절에 안 나가면 어쩌란 말입니까.
불교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참선의 길, 대승적 수선의 길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의 모습을 스스로 비춰보며 사는 것이
불교요 참선이요 대승적 수선인데,
사람들은
부처님이, 신장들이, 조사들이,
깨닫게 해주고 복도 주고
그러는 것이 불교인 줄 알고 있으니 문제입니다.
앞에서도 누누이 강조했다시피
자신의 모습을 비춰봐야 합니다.
어리석게 비춰지면 지혜롭게 살려고 정진해야 하고
티가 묻었으면 닦아내야 합니다.
그래서 항상 밝고 깨끗한 자신의 모습을 지켜가야 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른 참선의 길이니
여러분은 그 길로 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웃에게 그 길을 안내해야 합니다.
인간의 일입니다.
어김없이 진행되는 대자연의 순리처럼
인간, 즉 소자연도
어김없이 더러움 없이
그렇게 완성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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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