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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한국성결회
교단 약사
Brief History of Church of God
1. 태동기(1884~1905)
⑴ 여명기(1884~1886)
초대 오순절 성령 역사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과 같은 성령 운동에 대한 성경적인 관심은 종교개혁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이러한 성령 운동은 최초에 어떻게 하여 시작되었는가?
교회사적으로 보면 말틴 루터가 윗덴버그 교회 문에 그의 논제를 붙일 때로부터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신앙 개혁 운동에 참여하여 왔다. 세상 사람들이 오순절 성령 운동을 하는 하나님의 교회의 탄생 소리를 듣게 된 것도 이 거룩한 신앙 개혁 운동 중의 하나였다.
① 방향모색(1884~1886)
일부 기성 교회에 있어서 복음주의 신앙 및 영적 생명력의 쇠퇴는 테네시(Tennessee)주 몬로(Monroe)군에 있는 코커 크리크(Coker Creek)부락 근처의 경건하고 겸손한 교회의 성도들에게 많은 괴로움이 되었다.
그리하여 1884년까지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부흥과 신앙 개혁에 대하여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 사람들 중에서 신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리챠드 지 스펄링(Richard G. Spurling)목사로서 그는 침례교회 목사였다. 그는 그의 아들과 몇몇 도지들과 함께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하여 계시를 받을 목적으로 성경연구와 기도에 전념하고 있었다. 이는 기성 교회의 신조와 의식에 대한 불만족으로부터 비롯되어진 것이다.
② 행동과정(1886)
시작될 새로운 교회의 머릿돌은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초대교회로 돌아가기를 희망하는 성도들의 신앙 속에 굳게 자리 잡혀 갔다. 영적으로 하나 되는 일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함에 있어서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같이 되기를 노력하면서 이 소수의 개척자들은 그들의 행동 지침을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성경적 교리를 재확인하기 위한 기독교인연맹(Christian Union)을 형성코자 한 회합이 개최되었다.
리챠드 지 스펄링과 이 소수의 성도들은 바니 크리크(Barney Creek)에 거친 통나무교회당을 세우고 1886년 8월 19일(목요일)에 남녀 8명의 회원으로 기독교인 연맹을 조직한 것이다.
이 조직의 궁극적인 목적은 초대 오순절 교회로의 부활과 모든 경건한 기독교 종파의 통합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기독교인연맹을 통하여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은 사람은 리챠드 지 스펄링 목사의 아들(Richard G. Spurling Jr.) 이었으며 1886년 9월 26일이었다.
⑵ 준비 시기(1886~1896)
처음 10년간은 괄목할만한 교회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교회의 초창기의 지도자들은 이 시기를 교회 부흥을 위한 준비기로 생각했다.
리챠드 지 스펄링 목사의 아들은 창립총회 첫날에 참석하지 못했으나 그 다음 날 그 아버지 대신으로 초대되어 기독교인연맹에 가입하였고 그는 창립총회 회원은 되지 못했으나 이 연맹의 목사로서 초창기 그의 아버지의 뒤를 계승했다. 이 준비 시기의 10년 동안 리챠드 지 스펄링 주니어 목사는 기독교인연맹에서 성결(Holiness) 역점을 두어 열심히 가르쳤으나 특기할만한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⑶ 캠프 크리크(Camp Creek)에 임한 성령
(1896~1900)
기독교인 연맹의 부흥은 드디어 북 캐롤라이나(North Caroli- na)주 체로키 지방(Cherokee County)에 있는 캠프 크리크의 쉐어러(Shearer)학교에서 일어났다. 기독교인연맹은 스펄링 주니어 목사와 그 회원들은 하루에 몇 마일씩 걸어서 전도하며 북 캐롤라이나주 체로키 지방의 캠프 크리크 집회에 합류했으며, 여기서 기독교인연맹과 캠프 크리크에 있던 교회 단체가 하나의 교파로 흡수, 통합되었다. 거기서 윌리엄 에프 브라이언트(William F. Bryant) 목사가 통합된 교회의 지도자로 선출되었으며, 스펄링 주니어 목사는 자유롭게 복음을 전하는 전도목사가 되었다.
전에 들어보지 못했던 열렬한 설교와 기도, 금식과 찬송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임재를 체험했으며, 오순절 날 제자들이 체험했던 것과 같이 성령의 충만과 더불어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했다. 이 집회기간에 쉐어러 학교에 모였던 회원들은 136명이었고 그들은 모두 방언으로 말하는 체험을 하였으며, 그 후 그들은 이 같은 신앙의 체험으로 인하여 다른 교회의 사람들로부터 많은 핍박을 받게 되었다.
⑷ 사탄의 방해(1900~1902)
새로 시작된 이 교회는 신앙의 훈련과 지도가 불충분했으므로 어려운 시련을 당했을 때 이를 보호하는 방비가 없었기 때문에 사탄의 공격에 약할 수밖에 없었다.
이 교회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나타난 구속 사역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나 급진적인 성장을 가져 올 때에 몇몇 광신적인 지도자들은 진실한 신자들을 감정에 치우치게 했다. 그 결과는 교회의 혼란과 무질서였다. 그리하여 사탄은 거짓 성령의 역사와 광신으로 성령 충만의 역사를 무효화하려고 기도했다.
그 당시에 사탄은 핍박을 통하여 성령의 역사를 제지할 수 없었으므로 광신 주의로 이를 제지하려고 했던 것이다.
⑸ 정비기(1992)
1902년 5월 15일 광신의 풍조에 휩쓸리지 아니한 약 20여명의 성도들이 교회의 혼란을 벗어나 새로운 질서를 회복하기 위하여 윌리암 에프 브라이언트 목사의 집에서 회합을 가졌다.
이 때 교회의 이름을 기독교연맹에서 캠프 크리크 성결교회(Camp Creek Holiness Church)로 바꾸고 새로이 단체를 정비하기 위하여 간단한 계획이 수립되었다. 기도, 상담, 그리고 복음 전파가 이 새로운 교회의 지침으로 강조, 선포되었다.
⑹ 확장 준비기(1902~1905)
오랫동안 계속된 기도와 열심히 전도함으로써 교회는 성도들로 하여금 잃어 버렸던 힘을 차츰 회복하게 하였다. 그러는 동안 초대 교회와 같은 오순절 신앙의 확신은 되찾아졌고 교회의 오랜 상처는 차츰 치유되었으며 보다 성경적인 교리의 가르침과 전도를 위한 열의는 그 목적을 훌륭하게 성취해 갔다. 그리고 성도들 상호간의 신앙 목적을 위한 공동 기도는 성도들을 하나로 결속시켰다.
1903년 6월 13일 미국성서협회 및 미국소책자협회의 권서인 탐린슨(A. J. Tomlinson)은 7년 동안 이 새로운 교회와 교제한 후에 가입했다. 그 후 그는 캠프크리크성결교회의 목사로 선출되었고 스펄링 주니어 목사와 브라이언트 목사는 전도목사로서 이 교회를 위하여 일하였다.
2. 교세 확장기(1905~1920)
이 교회가 확장기에 이를 무렵에는 급속도로 발전했다기보다 서서히, 그리고 착실하게 다른 교회들이 이 초창기 교회에 가입되었으며, 초대 오순절적인 메시지는 이를 듣지 못한 새로운 지역으로 그 영향력을 확대해 감으로써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교세 확장이 평탄한 가운데 성취된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새로 가입된 교회에서 많은 희생과 면직 사태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때에 교회의 지도자인 탐린슨 목사는 1904년 북 캐롤라이나 체로키 지방으로부터 테네시주로 교회를 옮겼다.
⑴ 제1차 총회(1905)
1905년 이 교회는 죠지아(Georgia)주에 1교회와 테네시 주에 2교회를 개척했다.
이 4교회는 보다 친밀한 교제와 교리적인 신앙 통일을 위하여 최초의 총회를 개최했다. 이 총회는 1906년 1월 26~27일까지 이틀 동안 북 캐롤라이나주 체로키 지방에 있는 머피(J. C. Murphy)의 집에서 개최되었다.
탐린슨 목사는 당시 이 총회를 주최한 캠프 크리크 교회의 목사였기 때문에 이 총회에서 사회를 맡아 진행했다. 이 총회에서 토의된 주요 내용은 주일학교 활동, 복음 전도, 그리고 금연 등에 관한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21명이 모인 이 총회는 공식적인 최초의 총회로서 하나님의 교회의 오랜 전통의 출발이 되었다.
그후 1년이 지나 제2차 총회가 테네시주 클리블랜드(Cleveland)시 근방에 있는 유니온 그로브(Union Grove) 교회에서 개최되었다. 그곳은 탐린슨 목사와 많은 성도들이 북 캐롤라이나 주 캠프 크리크로부터 옮겨온 브래들리(Bradely) 지방의 군청 소재지였다. 이 총회에서는 성령의 세례, 성령의 은사, 그리고 그리스도의 병 고침에 대하여 주로 토의했다.
또한 1907년 1월 11일에 이 교회의 이름이 캠프크리크성결교회로부터 성경적 명칭인 하나님의 교회(Church of God)로 변경되었다.
⑵ 선교지의 확장(1908~1910)
제3차 총회는 1908년 테네시주 클리블랜드에서 개최되었다. 이 총회의 주요 토의 내용은 교단의 성격, 즉 하나님의 교회는 행정기구나 입법부가 아닌 법인체(기관)에 의하여 운영한다는 것과 금연 문제, 교회와 정부와의 관계 즉 어떤 형태로도 정부와 교회의 결합을 반대하며(정교 분리의 원칙)이혼과 재혼에 관한 것이었다. 이혼과 재혼에 대해서는 간음에 한하여 자유로운 재혼이 가능하며, 이혼한 삶은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좋다고 권고하기로 하였다.
1908년 8월 11일부터 10월 14일까지 테네시주 클리블랜드에서 개최되었던 대부흥성회의 결과로 약 300명의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다.
그 때 클리블랜드 교회는 60명의 신자로부터 230명의 신자로 늘어난 교회가 되었다. 이 부흥회 기간 중에 특기할 만한 사실은 F. J. Lee가 구원과 더불어 성령의 세례를 받은 일이다. 그 후 그의 영향력은 이 교회 발전에 큰 역할을 했으며, 그는 1923년 총회에서 총감독으로 선출되었다.
1908년 하나님의 교회는 불과 12교회였으나, 1910년까지 테네시주 북캐롤라이나(North Carolina)주, 조지아(Georgia)주, 플로리다(Florida)주, 알라바마(Alabama)주, 켄터키(Kentucky)주, 버지니아(Virginia)주 등 7개 주에 58개 교회를 갖게 되었다. 목사 107명, 교인은 1,855명이었다.
1910년에 에반스(R. M. Evans)와 그의 아내가 하나님의 교회의 첫 번째 선교사로서 바하마(Bahama)로 파송되었다. 이 해에 어두움의 빛과 하나님의 교회의 복음(The Evening Light and Church of God Evangel)이라는 교단 기관지가 발간되었고 그 다음 해에 하나님의 교회의 복음(Church of God Evangel) 이라는 명칭으로 바뀌었다.
⑶ 교회 활동의 강화(1911~1919)
1911년부터 1919년 까지는 교회의 여러 가지 분야에서 그 활동이 강화된 시기였다. 이 활동은 다음 4가지 분야로 고찰해 볼 수 있다.
① 조직 분야
7개 주에 설립된 교회의 활동을 감독, 지도하기 위하여 1911년 총회에서 주 감독 제도가 처음으로 제정, 임명되었는데 그 7개 주의 감독들은 다음과 같다.
1) 테네시주 감독 : 브라이언트(Tennessee: W.F.Bryant)
2) 켄터키주 감독 : 페리(Kentucky: Sam C. perry)
3) 노스캐롤라이나주 감독 : 커티스(North Carolina: C. R.
Curtis)
4) 버지니아주 감독 : 로우만(Virginia: J. J. Lowman)
5) 조지아주 감독 : 케네디(georgia: H. W. Mcarthur)
6) 앨라배마 주 감독 : 케네디(Alabama: V. W. Kennedy)
7) 플로리다 주 감독 : 기덴스(Florida: J. A. Giddens)
탐린슨 목사는 모든 총회에서 의장으로 봉사했으며 1909년 총감독 직이 제정된 이래 매년 총감독으로 선출되었다가 1914년에는 종신 총감독으로 선출되었다.
하나님의 교회 총회는 1911년 총회로 하여금 25개항의 교의(Teachings)를 수락케 하고 1915년 총회에서는 3개항이 더 추가되었고 1976년 총회까지는 6개항이 더 추가되었다.
12인회는 총감독을 보좌하기 위하여 1916년 제12차 총회에서 설치, 결의되었으며 1917년 2월 13일자로 총감독에 의하여 임명되었다. 당시 이 모임은 12인 장로회라 했으며 이 회의 기능은 총회가 휴회 중일 때에 총감독을 보좌하여 교단의 제반 문제를 해결하고 다음 총회의 의안을 준비하는 일이었다. 이 해에 총재단이사회와 주재단이사회가 설립되었다.
② 전도 분야
이 기간 동안 미국의 북쪽과 서쪽 지방으로 복음이 전파되어 1917년에는 23개 주에 하나님의 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그리고 1913년에는 흑인 전도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이 마련되었고 에드몬드 바아(Edmond S. Barr) 흑인 목사가 감독이 되었다. 특히 캐라빈에서 흑인 선교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1918년 총회는 당시에 만연된 독감과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하여 그 개최가 불가능하여 취소되었다.
그리고 다음은 동 연대에 활약하던 하나님의 교회 부흥사들의 설교 형태이다.
1) 브라이언트(Tennessee: W. F. Bryant): 간결, 명료, 솔직 하다.
2) 페리(Kentucky: Sam C. perry): 균형 잡혀 있고 교육적이 다.
3) 멕크레인(T. L. Mclain): 신중, 침착, 완벽하다.
4) 레몬스(M. S. Lemons):조직적이며 이론이 정연하다.
5) 탐린슨(A. J. Tomlinson): 박력 있고 열정적이다.
6) 리(F. J. Lee): 부드럽고 매혹적이며 내용이 충실하고 이론 적이다
7) 버키류(Buckalew): 거칠지만 준비되어진 복음 전도자 타 입이다.
8) 엘리스(J. B. Ellis): 교수적이다.
1920년에 캐나다 선교가 처음 시작되었고 그 해에 하나님의 교회는 470교회와 14,606명의 교인으로 증가되었다.
③ 교육 분야
1912년 처음으로 하나님의 교육 개요가 작성, 출판되었으며 1916년에 정기 간행물과 주일학교 교재를 발간하기 위하여 출판국(Publishing House)이 개설되었다. 설립 당시에 초라하게 보였으나 뜻 깊은 하나의 조치가 1918년 1월 1일에 취해졌던 것인데, 그것은 노라 비 챔버스(Nora B. Chambers)교사가 당시 12명의 학생들과 함께 성경훈련학교(Bible Training School)를 개교한 일이다.
교단의 총감독인 탐린슨 목사가 초대 교장이 되었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교회가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갖게 된 최초의 신학교이며 오늘날 리 칼리지(Lee College)의 전신이다. 그 후 1922년 9월에 제2대 교장으로 F. J. Lee목사가 선임되었다.
④ 사회사업 분야
1919년 제14차 총회가 고아원 운영을 결정하고 브라이언트 목사가 감독으로 있는 북 캐롤라이나주 안에 설치키로 하여 1920년 12월 17일에 4명의 고아로써 첫 번째 고아원을 개원하였으며 릴리안 킨제이(Lillan Kinsey)부인이 초대원장으로 취임하였다.
3. 시련과 축복(1920~1923)
하나님의 교회 안의 시련은 갑자기 찾아온 것이 아니지만 교회 안에 여러 가지 사건들과 교단의 문제점들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⑴ 시련기
교단의 총감독인 탐린슨 목사는 거의 10년 이상 단독으로 교회 행정의 전반을 도맡아 운영했다. 그는 때로 지교회의 목사들에게 선교 자금을 분배하였고 제반 교육 계획과 모든 출판물에 대하여 업무를 지시하고 이를 감독했다.
1920년 제15차 총회는 지교회들로부터 상납되는 십일조 헌금의 효율적인 관리를 위하여 총회에 재정위원회를 설치하고 이 재정위원회의 위원을 7명으로 하되 총감독이 임명하는 규정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7명의 재정위원은 아무 이유도 없이 총감독에 의하여 임명되지 아니하였으며 탐린슨 목사가 단독으로 총회의 재정을 운영했다. 이러한 사태 때문에 교단 안에는 불안한 동요가 일게 되었는데, 새로 지은 강당의 건축 과정에서 나타난 많은 부채와 출판부 및 교단 기관지 에반젤(Evangel)의 적자 운영이 이 분규의 도화선이 된 것이다.
총회 재정의 운영과 부채에 대한 불만이 증대되어 1921년 제16차 총회에서는 교단의 기본법인 장정 개정을 했다. 이 장정은 어떠한 직책에 있는 자라도 그가 죄를 범하게 되며 다른 사람으로 대치시킬 수 있는 탄핵에 대한 것과 교회성장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하여 새로운 직책을 총회가 설치할 수 있다는 행정기구의 창설을 규정했다. 또 이 총회에서는 총감독이 임명하도록 되어 있는 12인회를 총회에서 선출하도록 결의하고 총감독의 과중한 업무를 보좌하기 위하여 70인회를 설치했다.
그러나 탐린슨 목사는 이 장정에 도전하여 1922년 제17차 총회에서 12인회(Council of Twelve)의 위원을 임명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탐린슨 목사의 주장은 거부되었으며 권한도 제한되었다. 그리고 총회 재정 운영을 위하여 총감독을 보좌하는 집행위원회(1st Executive Committee)가 선출되어졌으며 모든 위원들은 매 총회 때마다 선출키로 하는 규정이 1922년 총회에서 통과되었다.
첫 번째 집행위원으로 선출된 사람은 다음과 같다.
J. B. Ellis, 교육 책임자 F. J. Lee, 총감독 Tomlinson, 출판 책임자 J.S.Liewellyn(레웰린) / (Chattanooga)
당시 집행위원회의 임무는;
① 교단 행정에 관한
② 교단 재정에 대한 전반적인 관리
③ 주 감독의 임명
④ 총회 안건의 준비
⑤ 1년에 최소한 1회 이상 12인회와 전체 회의를 갖고 교단의 제반 문제를 협의하는 일 등이었다.
⑵ 시련의 극복
1923년 탐린슨 목사의 재정 정책을 심의하기 위하여 한 특별위원회를 설치하였다. 이 위원회는 3인으로 구성되었으며 그 위원은 F. J. Lee, J. B. Ellis, J. S. Liewellyn이었다. 당시 이 위원회는 테네시주 차타누가(Chattanooga)에 있는 Lee H. 회계감시기구(The Service of the Lee H. Battle Auditor Company of Chattanooga Tennessee)의 협력을 얻었다. 특별위원회의 회계 감사원인 F. J. Lee의 보고는 14,141불의 재정 부족과 31,000불의 횡령을 밝혀냈다.
탐린슨 목사가 그의 행동을 정당화 할 수 없게 되자 1923년 6월 21일 15개 항목에 의하여 교회 재판에 탄핵 소추되었다. 그에 대한 재판은 1923년 6월 26에 시작되어 7월 26일에 그의 비행을 확정했다.
탐린슨 목사의 탄핵 거부로 교단은 두 개의 Church of God의 명칭으로 분리 운영되다가 1952년 탐린슨 감독 측이 성서하나님의교회(Church of God of Prophecy)로 교단 명칭을 변경하였다.
탐린슨 목사 후임으로 F. J. Lee 목사가 1923년 7월 26일자로 총감독에 선출되었다. 새로 감독이 된 Lee목사의 탁월한 지도력으로 인하여 전임자인 탐린슨 목사에 의하여 잃어버린 손실에도 불구하고 교단의 각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얻게 되었다.
1923년의 총회는 하나님의 교회에 있어서 특히 축복 받은 총회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한 사람에게 너무나 큰 책임을 지게 함으로써 생긴 신앙적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이 시련을 극복함으로써 더욱 많이 성장했으며 하나님의 은총을 더 견고하게 믿을 수가 있었다.
4. 선교정책의 발전(1923~1935)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1923년에서 1935년까지를 2개의 시기로 구분한다. 이시기는 역사적 내용이 서로 다르면서도 상호 분리될 수 없는 그러한 시기였다. 그것은 17년 동안이나 의장이 전혀 바뀌지 않은 총회를 함으로써 교단 안에 여러 가지 어려운 많은 문제를 가져왔었으나 이제 새로운 지도자인 Lee목사가 회원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음으로써 교단의 선교 정책이 보다 발전하는 기초가 되었기 때문이다.
⑴ 재건기(1923~1928)
새로운 지도자인 F. J. Lee목사가 헌신한 10년간에 세계 선교를 위한 계획이 추진되었다. 그의 활발하고, 탁월한 지도력은 하나님의 교회로 하여금 시련 후에 어떤 분열이나 분과 작용도 허용하지 않았으며 커다란 손실을 방지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리하여 탈퇴 또는 분열 현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의무이행에 있어서 잘못을 범한 회원에 대하여는 엄격한 징계를 했다. 이것이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전통적인 교단의 자세가 된 것이다.
1924년 2월부터 7월 사이에 정기적으로 개최되는 법원 청문회에서는 탐린슨 목사가 하나님의 교회를 대표하고 있었을 때 저지른 잘못 때문에 법정출두를 요청하는 일이 몇 차례 있었다. 그러나 이 문제도 드디어 테네시 주의 고등법원에서 하나님의 교회의 이름과 재산에 대하여 유일하고 합법적인 교단임을 규명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924년 제19차 총회가 10월 29일 테네시 주 클리블랜드에서 개최되었는데, 이 때 처음으로 전도사(Exhorter)제도가 새로이 제정되었으며, 12인회를 총회에서 선출하는 것을 재확인하였고, 또한 각 주로 하여금 연초부터 시작하여 캠프 집회(Camp Meeting)를 하도록 결의했다.
1926년에는 출판국, 선교국, 그리고 교육국이 설치되었고, 1928년에는 부총감독 제도가 신설되어 S. W. Latimer 목사가 선출되었다.
또한 1928년까지는 32개주로 하나님의 교회가 확장되었으며 각 주의 캠프 집회(Camp Meeting)는 모범적으로 잘 발전되어 갔다.
그 동안 하나님의 교회를 지도해 오던 F. J. Lee목사가 1928년 사망함으로 부총감독인 S. W. Latimer 목사가 그의 뒤를 이어 총감독직을 계승했다. 그 때에 하나님의 교회의 신도는 24,902명이었고 789교회에 842명의 교역자로 증가되어 있었다.
⑵ 황금기(1929~1935)
해리슨(Alda B. Harison)여사는 1923년 봄에 테네시주 클리블랜드교회에서 지방 청소년 친교 활동을 시작했다. 해리슨 여사의 활동은 미시간(Michigan)주 및 플로리다(Florida)주의 청소년부와 함께 청소년면려회로 알려진 청소년 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1929년에는 영광의 길(Lighted Path Way)이 하나님의 교회 청소년들의 공식적인 대화를 위한 기관지로 창간되었다. 이것은 해리슨 여사의 착상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초대 편집장이 되었다. 1929년 총회에서는 목사회(General Coun- cil)를 설치하고 70인회를 폐지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총회에서 선출하던 12인회를 목사회에서 선출하기로 결의했다.
1934년에 교회 청소년들을 위한 봉사기관으로 북 다코타(North Dakota)주 마이나(Minot)시에 서북성서음악학원(North West Bible and Music Academy)이 설립되었다.
F. J. Lee목사의 행정은 교회들로 하여금 함께 협력하는 교회로 만들었고 S. W. Latimer목사는 개방적인 행정을 했기 때문에 교단에 부채가 생기는 것을 방지했다. 젊은 층의 지지를 얻은 이와 같은 행정방침은 하나님의 교회를 번영으로 이끈 원인이 되었다.
1935년 제30차 총회에서 워커(J. H. Walker)목사가 총감독으로 선출되었으며 그는 하나님의 교회를 가장 위대한 번영의 황금기로 인도했다.
5. 교구의 확장⑴ (1936~1955)
이 기간 동안에 이루어진 여러 가지 교회의 선교 사업은 하나님의 교회로 하여금 온 세계에 카리스마적인 복음 운동을 할 수 있게 했다. 하나님의 교회는 전 세계로 선교가 확장되고 선교사와 선교비가 새로운 선교 지역으로 보내어졌다. 뿐만 아니라 유사한 선교 단체들과 발전을 위하여 결연을 맺었다. 이 기간 중에 이루어진 선교 사업을 연대순으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⑴ 1936년
① 잉그램(J. H. Ingram) 목사의 황금의 희년 여행(Golden Jubilee Tour)은 확장되는 하나님의 교회 선교에 활력소가 되었다.
② 쿡(Robert F. Cook) 목사가 지도하는 서제도(West Indies)의 성령 운동이 하나님의 교회와 통합되었다.
③ 로스터(Herman Lauster) 목사와 그 가족이 독일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④ 국제성서대학(International Bible College)이 캐나다 (Cana- da)의 사스카췌완(Saskatchewan)주 에스테반이 설립되었다.
⑤ 부인자원전도대(Ladies Willing Workers Band)가 오클라호마(Oklahoma)의 에스. 티. 우르 부인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⑵ 1973년
① Paul C. Pitt가 지도하는 중국의 성령 운동이 하나님의 교회와 통합되었다.
⑶ 1938년
① 아프리카(Africa)주 앙골라(Angola)의 스탈크스(Starks)에 하나님의 교회가 선교되었다.
② 성서훈련학교(Bible Training School)가 남 캐롤라이나(South Carolina)에서 테네시 주 세비어빌(Sevierville)로 옮겨졌다.
⑷ 1940년
① 아르헨티나(Argentina)의 성령 운동이 하나님의 교회와 통합되었다.
⑸ 1943년
①하나님의 교회가 국제복음주의연맹(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에 가입되었다.
⑹ 1944년
① 1944년 제39차 총회에서 제니건(Jan C. Jernigan) 목사가 총감독으로 선출되었다.
② 총회본부 각부 책임자의 임기와 12인회 및 주감독의 임무, 임기 등이 새로 정해졌다.
⑺ 1946년
① 1946년 제41차 총회에서 매년 개최하던 총회를 2년제 총회로 변경하기로 결의하고 총회 본부에 주일학교 및 청년부를 설치키로 하며 윌리엄(Ralph E. Williams) 목사를 부장으로 임명했다.
⑻ 1947년
①테네시 주 서비어빌에 있는 성경훈련학교(Bible Training School)와 대학이 테네시 주 클리블랜드로 옮겨지고 이름을 Lee College로 개칭했다.
② 하나님의 교회 어린이의 집(고아원-The Church of God Home for Children)이 테네시 주 클리블랜드로부터 서비어빌로 옮겨졌다.
⑼ 1948년
① 하나님의교회의 2년제 총회(제42차)가 앨라배마(Alabama) 주 버밍햄(Birmingham)시에서 최초로 개최되었다.
② 하나님의 교회의 총감독으로 체서(H.L.Chesser)목사가 선 출되었다.
③ 하나님의교회의 신앙적 선언(Declaration of Faith)이 공 포되었다.
④ 하나님의교회가 북미오순절협의회(Pentecostal Fellowship of North America)의 창설을 도왔으며 세계오순절협의회(World Pentecostal Fellowship)에 가입되었다.
⑽ 1949년
① 현재 캘리포니아(California)주 프레즈노(Fresno)에 소재한 4년제 대학인 서해안 크리스천대학(West Coast Christian)이 캘리포니아주 파사데나(Pasadena)에서 서해안성서대학(West Coast Bible College)으로 개교되었다.
② 라틴 아메리카(Latin America) 선교가 크게 확장되었다.
⑾ 1951년
① 1951년 남아프리카의 순복음교회가 하나님의 교회와 통합하고 남아프리카 순복음하나님의교회(Full Gospel Church of God in South Africa)로 교단 명칭을 바꾸었다.
⑿ 1952년
① 제44차 총회에서 탑(Zeno C. Tharp)목사가 하나님의 교회의 총감독으로 선출되었다.
② 라틴 아메리카 선교가 크게 확장되었다.
⒀ 1954년
① 하나님의 교회의 총본부 건물과 출판국 건물이 클리블랜드 시에 건축되었다.
② Lee College가 정규 2년제 대학으로 되었다.
5. 교구의 확장⑵ (1956~1976)
⑴ 1956년
① 1956년 제46차 총회에서 모헤드(Houston R. Morehead)목사가 하나님의 교회의 총감독으로 선출되었다.
⑵ 1957년
① 세계 청소년 전도 호소기금(Youth World Evangelism Appeal Funds)이 교회 청소년들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⑶ 1958년
① 1958년 제47차 총회에서 크로스(James A. Cross)박사가 하나님의 교회의 총감독으로 선출되었다.
② 라디오 방송 전도가 시작되었다.
⑷ 1960년
① 1960년 제48차 총회에서 크로스(James A. Cross)박사가 하나님의 교회의 총감독으로 재선되었다.
② 선교 50주년 기념 여행을 바하마(Bahamas)섬으로 갔다.
⑸ 1962년
① 1962년 제49차 총회에서 호튼(Wade H. Horton)박사가 하나님의 교회 총감독으로 선출되었다.
⑹ 1963년
① 군인봉사부의 수양회 사업이 확장, 실시되었다.
② 전도 및 국내선교부(Evangelism and Home Missions)가 총본부에 설치되었다.
⑺ 1964년
① 1964년 제50차 총회가 텍사스(Texas)주 댈러스(Dallas)시 서쪽 미시시피(Mississippi) 강변에서 개최되었다.
② 국내평신도이사회(National Layman's Board)가 설치되었 다.
③ 부인전도회(Lady's Auxiliary)가 부인전도부(Lady's Auxiliary Department)로 개칭되어 총본부에 설치되었다.
⑻ 1966년
① 1966년 제51차 총회에서 칸(Charles W. Corn)박사가 하나님의 교회의 총감독으로 선출되었다.
② 백인 교인과 흑인 교인이 함께 예배하기 시작하였다.
⑼ 1967년
① 인도네시아(Indonesia)의 벧엘순복음교회(Bethel Full Go- spel Church)가 통합되었다.
⑽ 1968년
① 하나님의 교회의 총본부가 지하 1층 지상 4층의 새로운 건물로 신축, 준공되었다.
② 제52차 총회에서 칸 박사가 총감독으로 개선되었으며 일반교육부(General Board of Education)신설이 결의되었다.
⑾ 1969년
① Lee College가 4년제 B. A. 학위 수여 학교로 승격되었다.
⑿ 1970년
① 1970년 제53차 총회에서 케롤(R. Lenard Carroll)박사가 하나님의 교회의 총감독으로 선출되었다.
⒀ 1971년
① Lee College에 오순절연구센터(Pentecostal Research Center)가 설치되었다.
⒁ 1972년
① 1972년 1월 21일 총감독인 캐롤 박사의 사망으로 휴즈(Ray H. Hughes) 박사가 캐롤 박사의 잔여 임기를 승계하고 그 해에 개최된 제54차 총회에서 하나님의 교회 총감독으로 선출되었다.
⒂ 1973년
① 국제 선교 협의회가 멕시코(Mexico)에서 개최되었다.
⒃ 1974년
① 1974년 제55차 총회에서 호튼(Wade H. Horton)박사가 3번째로 하나님의 교회의 총감독으로 선출되었다.
⒄ 1975년
① 하나님의 교회 신학대학원(Church of God School of Theology)이 설립되었다.
⒅ 1976년
① 1976년 제56차 총회에서 나이트(Cecil B. Knight)박사가 하나님의 교회 총감독으로 선출되었다.
② 동해안신학대학(East Coast Bible College)이 북 캐롤라이나주 샤롯티(Charlotte)시에서 설립되었다.
6. 승리의 깃발
하나님의 교회의 회원이 된 사람들은 복음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생애와 교훈을 믿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의 가르치심과 행하심은 성령이 충만한 교회를 통하여 오늘날에도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가 됨을 발견하고 일상생활에서 그리스도의 살아계심을 체험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들은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그리고 세계를 복음화해야 하는 목적도 하나이다. 급격한 기술의 진보와 가속되는 인구의 증가와 세계 교육 수준의 일반적인 향상은 하나님의 교회의 전략을 변경케 하고 있다. 그러나 근본적인 이념과 메시지는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다.
교회의 목적은 동일하다. 즉, 기독교의 이상을 추구하고 신도들의 신앙을 북돋우며 잃어버린 영혼을 되찾는 일과 전 세계에 기독교의 영향을 미치게 하는 일이다. 예배와 친교도 중요하지만 교회가 힘써야 할 더 중요한 것은 복음을 전하는 일과 교육하는 일과 그리고 교회를 육성하는 일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인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것이고, 교육은 교회의 지식과 체험과 신앙을 후세대에 전해 주는 것이며, 육성은 전교회 즉, 어린이와 젊은이와 그리고 어른들을 영적이며 성숙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중요성들은 성경에 입각한 그리스도 중심적인 교회가 가지고 있는 성령의 권능 속에 포함된 계획들이다. 이리하여 교회는 모든 개인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고 예수의 제자로 성장하도록 돕는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일반 대중과 그들의 요구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며 그들에게 호소하는 대중을 위한 조직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교회로 하여금 개인을 위하여 프로그램을 짜게 하고 인간의 도덕적인 생활과 경제적인 복지에 대하여 관심을 표현하게 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관심사는 인간의 영적 요구에 관한 것이다.
복음전도에 있어서의 두 가지 요체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대중은 복음에 의하여 감화되어야 한다는 것과, 둘째는 복음 전파를 가능케 하기 위하여 성령의 권능이 나의 것으로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신도에 대한 교육과 교회의 육성과 대중의 요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하여 교역자를 양성한다.
부흥운동은 하나님의 교회의 특징이다. 전도에 대한 열정은 많은 결실을 맺게 하고 영적 심화에 대한 갈망은 국내외 선교 계획으로 표현된다.
초기 박해와 하나님의 교회의 특징이다. 전도에 대한 열정은 많은 결실을 맺게 하고 영적 심화에 대한 갈망은 국내외 선교 계획으로 표현된다.
초기 박해와 하나님의 교회로 하여금 위대한 지도력을 규합케 하였으며 선교 전략을 수립케 하고 급격한 속도로 온 세계에 하나님의 교회를 설립케 했다.
세계 선교가 시작된 1910년부터 첫 20년 동안은 많은 방해물과 싸우며 전진하였고 1930년대의 중엽부터는 착실한 기반을 구축하며 발전했다. 목사와 선교사들은 고용인들이 아니라 성령이 충만한 주의 사자들로서 사람들을 기독교인으로 개심시키는 능력을 가진 사역자로 인정한다.
전도야말로 교회가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과업이다. 임명받은 목사와 파송된 선교사들은 전진하는 교회를 인도하는 강력한 군대이며, 헌신적인 많은 평신도들은 국내외에서 교회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는 봉사자들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세계 여러 곳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의 노력에 의하여 성장하고 있으며 그 지방 특유의 토착적인 리더십이 적용되고 있다. 여러 나라의 목사들은 그들의 국민을 복음화하기 위하여 교육되어졌으며 무장되어졌다.
해외 활동에 있어서의 강조점은 기독교 교육이다. 미국 안에 있는 교회의 후원을 받는 학교에서 공부시키기 위하여 외국 학생들에게 장학제도들 마련하고 있다.
청지기 직분에 대한 강력한 프로그램은 전도의 열심과 결합되어 하나님의 교회를 작은 지방의 일개 집단으로부터 오순절 운동의 명성을 세계에 떨치게 하였고 복음주의연맹(Evangelical Community)에서 존경받는 회원이 되게 하였다.
개심자들과 이념을 같이 하는 동지들의 결속은 8명의 개척자로 시작된 집단을, 100년 동안 122개국의 약 1,200,000명의 교회로 성장시켰다.
시드누(Sydnors)의 연구에 의하면 오순절 교회의 수가 침례교회와 감리교회의 수에 가까워졌다고 나타나 있다.
이 놀라운 성장은 서반구에서 가장 빨리 성장하는 교회들 중에서 테네시 주 클리블랜드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가 리스트에 오르게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교회의 성령 운동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감독적인 운동이라고 말하고 있다.
기독교한국하나님의교회 선교 약사
1. 1963년
1.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문래동의 한 가정에서 한영철 목사 외 2명에 의하여 한국에서의 최초의 하나님의 교회가 개척되다.
2. 1964년
1. 국제하나님의교회 제50차 총회에서 한국 선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다.
2. 한국에서의 교단 명칭을 한국오순절하나님의교회로 하다.
3. 1969년
1. 예수교대한감리회가 통합되다.
4. 1970년
1. 한국 하나님의교회의 직영 신학교인 하나님의교회신학교가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공항동 79번지 소재 서울 중앙 하나님의 교회 교육관에서 개교되다.
2. 기독교한국오순절하나님의교회 제1차 총회가 개최되다.
5. 1972년
1. 기독교한국오순절하나님의교회가 2개의 지방회로부터 3개 지방회로 확장, 개편되다.
2. 12월 20일 하나님의교회신학교 1회 졸업생을 배출하다.
6. 1973년
1. 9월 제10차 세계오순절대회를 순복음중앙교회와 효창운동장에서 개최하다.
7. 1974년
1. 5월 20일 서울신학대학. 고신대학. 침례교신학대학. 아세아연합신학원 등이 구성된 신학협의회에 하나님의교회신학교 창립멤버로 가입하다.
8. 1975년
1. 제3차 정기총회를 11월 26일-27일. 영생교회에서 개최하다.
*명칭변경(기독교한국오순절하나님의교회→기독교한국 하나님의교회). 교단총무 선출(오세훈목사). 신학교 주일제정(매년 3월 첫 주일).
9. 1977년
1. 하나님의교회 세계 총본부가 Y. W. E. A. 선교기금을 한국하나님의교회신학교 건축을 위하여 한국에 배정하다.
10. 1978년
1. 하나님의교회신학교가 서울특별시 구로구 개봉동 신축 교사가 이전되다.
2. 기독교한국하나님의교회 교단본부 사무실이 위 신학교 구내로 이전되다.
11. 1979년
1. 하나님의교회신학교의 본관 및 제1교사 헌당식이 거 행되다.
12. 1981년
1. 하나님의교회신학교의 제2교사 헌당식이 거행되다.
2. 학교법인 한일학원이 문교부로부터 설립 허가되다.
3. 하나님의교회신학교가 문교부로부터 4년제 대학에 준한 신학교로 인가되다.
13. 1983년
1. 하나님의교회신학교가 아세아신학협의회(A. T. A)의 회원 신학교로 가입되다.
14. 1984년
1. 기독교한국하나님의교회의 제7차 사무총회가 개최되다. 하나님의교회 신학대학원 본교가 설립되다.
15. 1985년
1. 교단 하나님의교회신학교가 문교부로부터 4년제 정규 대학으로 학력인정을 받다.
16. 1994년
1. 교단 선교30주년 기념행사를 개최하다(주제: 추수하는 일 꾼이 되자. 10월 6-8일)
17. 1995년
1. 제17차 세계오순절대회(9월11-14일. 장소; 예루살렘)에 한영철감독 외 교역자 5명과 하나님의교회 신학생이 몇 명이 참석하다.
18. 1996년
1. 교단 하나님의교회 신학대학을 한영신학대학으로 명칭변경하다(9월1일).
19. 1997년
1. 교단 한영신학대학이 한영신학대학교로 3월 1일. 개편 되 다.
20. 1998년
1. 제18차 세계오순절서울대회(주제:21세기의 오순절)를 하나님의 성회와 같이 9월22-25일 잠실올림픽주경기장에서 개최하다.
21. 2000년
1. 한영철감독의 교단 및 한영신학대학교의 비정상적 운영에 대한 교단발전비상대책위원회(추진위원: 한영길. 한영훈. 윤 성열. 고병수목사)가 11.20. 유성 경하호텔에서 교단 교역자 대다수가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다. (임시본부사무실: 창곡교 회로 정함)
* 비상대책위원회가 구성되고 추진하는 과정에 한영철목사 는 미국으로 출국하고, 한영훈목사가 한영신학대학교총장, 한영길목사가 한영신학대학교 이사장이 되다.
2. 교단 한영신학대학교 비상발전위원회 사무총회 개최(12.18 양재횃불회관)하다.
22. 2001년
1. 교단비상총회(1월18일 한영신학대학교중강당)가 총대원 100명, 세계선교부장(로벨 R,케리) 아시아태평양 선교부장(해롤드 맥클라우드)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하다. 비상총회는 한국감독으로 고병수목사를 선출하다.
2. 고병수목사는 비상총회가 자신을 한국감독으로 선출하였으나 한영철목사가 교단과 교단 신학교 설립자임을 감안 한영철목사를 명예롭게 퇴진 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하여 윤성열목사와 한영철목사를 만나 교단 교역자들에게 모든 의혹에 대한 사실 여부를 밝히고 남은 임기동안(2002년 8월까지) 감독직임을 명예롭게 마치고 더 이상 한국감독직을 하지 않기로 약속하면 교단 교역자들과의 화해를 추진하겠다고 대화하여, 한영철목사가 약속한다 하고 각서를 씀으로, 고병수목사는 각 지방별로 교단 교역자들을 만나 한영철목사와의 화해를 설득하고 2001년 8월 1일 유성에서 화해를 위한 교단 교역자 전체 회의를 갖고 교단화합을 시도했으나 결국 한영길, 한영훈 목사 측과의 의견 차이로 교단이 분열되다.
* 2001년 8월 1일 이후 교단비상총회 운영을 끝내고 한영철목사가 교단감독으로 업무를 복귀하고 고병수목사가 부감독으로 교단행정을 함께 관장하게 되다.
* 한영길, 한영훈목사 측은2008년도에 예수교장로회(한영측)로 교단 명칭을 변경하다.
2. 2002년 8월에 개최된 국제하나님의교회 세계총회에서 한국감독을 임명하지 않았고, 한영철목사는 세계본부가 한국의 감독을 다시 임명하기 까지는 자신이 계속해서 한국의 감독직을 수행할 것이라 함으로 자신이 한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 고병수목사가 세계선교부에 세계총회에서 이 일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니, 세계선교부장(로벨 R 케리)은 11월 중에 나와서 한국감독 선거를 하겠다고 약속하였다. 한영철목사는 국제본부에 자신이 한영길, 한영훈목사 측과 화해를 모색하고 있으니 선거 일정을 연기해 달라고 요청하며 세계선교부장의 방한과 한국감독 선거를 지연 시켰다.
* 이로 인하여 12월 중순 이 후에 교단 교역자들은 다시 한영철목사와의 교단 행정업무에 비협조를 선언하였다.
23. 2003년
1. 2월 6일 고병수목사는 교단 교역자회의를 소집하고(유성경하호텔) 국제본부에 보내는 결의문을 채택하였다(내용: 2월 중으로 한국감독은 한국교역자 선거에 의하여 선출되도록 세계 선교부가 협조하여 달라).
2. 국제본부 세계선교부는 고병수목사를 2월 11일에 국제본부로 불러<한영철목사가 더 이상 한국의 감독을 하지 않고 고병수목사를 한국의 감독으로 임명할 것을 추천하였다>라고 하면서 본인의 의사를 물었다. 고병수목사는 단호하게 <앞으로 한국교단은 국제본부가 일방적으로 임명하는 감독은 수용하지 않을 것이며 국제본부는 한국교단의 감독은 한국교단 총회가 선출한 자를 임명하길 원한다>라고 하였다.
* 고병수목사는 세계본부 회의에서 제안하길 <귀국하는 즉시 한국교단교역자회의를 소집하고 국제본부가 고병수목사를 한국감독으로 임명한 일에 대한 찬, 반 투표를 해서 결정하겠다>고 하여 다 좋다고 하여 귀국해서 즉시 교역자 회의를 소집하고 투표하여 전체 교역자 찬성으로 고병수목사의 한국감독을 결의하다.
3. 교단 제2대 교단감독(고병수목사). 명예감독(한영철목사)취임식을 5월 8일 창곡교회에서 국제선교부장(로벨 R 케리) 아태극동선교부장(해롤드 맥클라우드)이 참석한 가운데 행하다.
4. 사단법인 기독교한국하나님의교회선교회 법인창립총회를 12월2일 개최하다.
(이사장(회장)은 교단감독이 하는 것으로 규약에 규정하였으나, 한영철 목사를 예우 차원에서 세우다).
5. 사단법인 기독교한국하나님의교회선교회 법인설립허가를 경기도청으로부터 받다(12월15일 경기 제2003- 01-32호).
24. 2005년
1. 세계오순절성회 개최(5월20-21일 창곡교회)하여 하나님의교회 소속으로 한국전역에 근무하는 미군들을 대상으로 성회를 개최하였다.
2. 제 17차 사무총회(주제: 성령충만한 일꾼이 되자!) 12월 5-7일 창곡교회에서 개최하여 교단규약 개정을 개정하고, 교단감독에 고병수목사를 선출, 5명의 실행위원을 선출, 고병수감독이 지방 감독 국장 위원 임명하다.
25. 2006년
1. 초대(설립자) 감독 한영철 목사 5월25일 소천.
2. 교단 사단법인 기독교한국하나님의교회선교회 임시총회(6월 13일 창곡교회)를 개최하여 이사장(회장)에 교단감독 고병수목사를 선출하고, 임원을 선출하다.
3. 국제본부는 10월 20일 한국총회와 상의 없이 일방적으로 미국에 거주하는 한상일목사를 한국 감독으로 임명하였다.
4. 제18차 교단임시총회(주제: 부흥의 역사를 이루자)를 11월 22일-23일 서부안좌교회에서 개최하다. 회칙수정 등 결의하다.
26. 2007년
1. 제19차 임시총회(6월25일 대전유성 경하호텔)개최하여 교단규약 개정, 국제본부가 한국교단총회의 의견을 존중하고 협력하는 집행부가 세워질 때 까지 국제본부와의 행정 보류를 결의하다.
2. 제20차 정기총회(주제: 사도적 신앙위에 서자)를 11월19-21일 오곡교회에서 개최하다.
고병수감독, 실행위원 선출, 복지사업 시행, 교역자 은급비, 교단 제도개선, 오순절교단과 적극적인 선교협력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29. 2008년
1. 제21차 사무총회(주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 자!!) - 11월 24-26일 창곡교회에서 개최하다.
30. 2009년
1. 제22차 정기총회(주제: 성령충만한 사역자가 되자!)
11월 16일(월)-18일(수) 창곡교회에서 개최하다.
* 중요결의 사항
1). 교단명칭 변경; <기독교한국성결회>로 변경하다.
2). 교단법인 명칭변경: <(사)기독교한국성결선교회>로 변경하 다.
3). 교단 규약. 정치. 교단사단법인 정관을 개정하다.
4). 제 3대 교단감독으로 윤성열목사를 선출하다.
* 본 교단은 근 40여 년간 설립자 한영철목사 시대에 국제본부의 피선교국 대상으로 국제본부가 일방적으로 한국감독을 임명하는 시대를 끝내고, 한국 교단총회의 결정이 존중되는 독립적 교단을 선언하고, 기존의 국제하나님의교회의 오순절신앙노선은 지켜 가되, 교단선교의 어려움을 주는 교단명칭을 바꾸고, 교단정치와 규례를 정비하여 교역자들이 기쁨과 소망으로 사역하며 모든 교회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연합하는 교단을 만들고, 이 시대에 오순절신앙운동을 함께 하는 모든 교단들과 연합하여 주님이 주신 복음사역을 이루어 가길 힘 쓸 것이다.
기독교 한국 성결회
편집 고병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