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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운동의 신학적 뿌리
- 오순절신학운동사
서 문
역사적 사건의 날짜를 결정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학도들은 때때로 미국의 오순절운동에 대해 귀를 기울이는 것을 환영한다. 오순절운동의 역사를 해석하는 하나의 방법은 그 운동이 켄사스주(州)의 토페카에서 있었던 치유예배 중 갑작스럽게 발생했다 고 보는 것이다. 거기에서 오즈만(Agnes Ozman) 양이 방언 으로 말허는데 그 것은 예수의 제자들이 오순절 첫날에 행했던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오순절의 그 현재적인 사건은 1900년을 여는 전야(前夜)에 발생하였다. 오즈만 양을 격려 하면서 그녀가 방언하는 것을 들었던 그 그룹은 20세기의 첫날인 다음날 아침에 다시 회합을 가졌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순절운동은 정확히 20세기의 사건으로 간주 될 수 있다. 이러한 면에서 또한 이 책은 19세기에 관한 것이다. 이 책은 기독교 세계를 휩쓸면서 많은 관심을 고조시켜 이제는 잘 알려져 있는 오순절운동의 선(先)역사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현대의 오순절운동이 단지 토페카 찻잔 속의 놀라운 폭풍우였고 그로부터 다른 놀라운 것들이 발생하게 되었다는 추측보다는 훨씬 복잡성을 지니고 있는 것임을 보여 주는 일은 당연히 저자인 데이튼(Donald W. Dayton)의 과업이다. 데이튼은 잎사귀의 성장에 관심이 있는데 차(Tea) 비유를 감히 사용할 수 있다면 이는 나무 배후의 뿌리 자체에까지 관심이 미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세기 전환점의 그 사건들로부터 일순간도 분리할 수 없는 여러 종류의 숲, 나무, 잎사귀, 찻잔들이 있음을 보여 준다. 오순절운동의 선(先)역사와 역사에 대해 아무도 소개한 적이 없었다는 주장은 더이상 타당하거나 공정한 것이 되지 못한다. 죤스(Charles Edwin Jones)는 1974년에 7,338권의 참고도서 목록인 Guide to the Study of the Holiness Movement를 발간했고, 1983년에 다른 한 짝인 A Guide to the Study of Pentecostalism을 냈다. 비록 이 책이 9,883개의 보다 많은 도서 항목을 더 추가했다고는 해도 물론 이 참고도서 목록들은 완성된 것은 아니다... 라고 데이튼은 말할 수 밖에 없다. 그 도서목록은 오순절운동이 현대 기독교 현상들 가운데 보다 잘 고찰되고, 기록되고, 보존된 것 중의 하나임을 보여 준다.
그런데 그 것이 왜 지금까지 간과되어 왔는가? 대부분의 사람들, 대부분의 미국인들, 대부분의 사가들, 심지어는 많은 미국의 기독교 종교사가들 조차도 이러한 수천 개의 도서목록들 중에서 하나도 읽지 않았다고 가정할 수 있다. 최근까지, 다시 말해서 한세대 전까지 오순절운동은 주목할만한 문헌을 필요로 하거나 남기는 일없이 문화의 가장자리(margin)에 그냥 남아 있기를 원하는 문맹자들인 농부 , 촌놈 , 뱀장수 , 또는 건달들 의 운동으로 간주 되었다.
그러한 상황은 변했다. 오순절파는 아프리카의 사하라 사막 아래 지역에서 기독교 성장의 주역으로 널리 퍼져 있다. 이 지역은 이 세대에 숫자상으로는 적어도 개신교의 중심부가 될 수도 있는 곳이다. 기독교가 성장하고 있는 곳에서 오순절파는 강력하다. 미국에서 오순절파는 초기의 중남부와 남동부의 본거지로부터 북쪽으로 퍼져 갔다. 오순절운동 창시자의 증손자들은 이제 수백만 달러의 텔레비젼 회사와 출판사를 경영하고 있고, 전자 교회 (역자 주: 텔레비젼을 통해서 예배를 방영하는 것을 지칭함)에 정기적으로 다이알을 맞추는 1,300만 혹은 그 이상의 사람들에게 친숙한 인물들이다. 데이튼이 잘 지적하고 있듯이 그들은 결핍론 (deprivation theories) 이 더이상 자신들을 설명하는 도구가 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단지 자신들의 이미지를 말쑥하게 꾸민 것만은 아니다. 이제 결핍되지 않은 중상(中上)계층의 카토릭과 몇몇의 중요한 개신교파가 실제적으로 오순절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오순절운동과 그 촉수(tentaaacle)와의 연결 기구들이 성장하고 그 운동의 현상들이 보다 가시화 됨에 따라 호기심도 그만큼 증폭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데이튼이 등장했다. 그 주제에 대한 그의 수천 권의 개인 소장도서가 첫 출발을 도왔고, 그의 도서목록 정리 작업이 그에게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시카고 대학 신학부는 이처럼 중요한 운동을 설명할 수 있는 그와 같은 배경, 지식, 능력을 구비한 사람을 열심히 찾았었다. 여기에 그의 노력의 결실인 선(先)역사에 대한 추적이 있다. 그 것은 대부분의 비 오순절파 독자들의 세계관을 비신화화하고 혹은 재신화화 하는데 일조할 것이다.
오순절 신자들 또한 이 작품을 참조할 이유를 발견할 것이다. 데이튼이 지적하듯 그들 중 어떤이들은 실제로 선(先)역사를 원하지 않는다. 몇몇의 성령충만한 자들은 비교적 조용했던 19세기 이후에 성령이 선조들에게 임했는데 그 성령은 오순절에 임했던 것과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만일 그 주장이 옳다면 이 새혈통(역자 주: 오순절파를 지칭함) 이전에, 혹은(다음의 본문에서 명백히 들어나게 될) 늦은 비 경험 이전에 발생했던 그 어떤 것을 연구하는 것은 요점에서 벗어난 것이 될 것이며 그 폭발적인 운동의 기적적인 특징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일이 될 것이다. 불꽃이 오순절파들에게 다다르기 전에 발화점이 있었다는 것과 그들이 거둬들인 성장에는 뿌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이 책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데이튼은 풍부한 지식과 공손한 태도를 지니고 있었기에 그가 이 설명에서 비판적인 역사가의 입장을 취했다고 할지라도 오순절파들은 그보다 더 동정적인 자를 선택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무역사적인 오순절주의자는 타인이 바라보는 바처럼 곧 자신을 보게 될 것이다. 이 말은 오순절 운동의 뿌리는 웨슬레 전통의 일부분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순절운동은 주로 웨슬레의 구원론과 영국에서 있었던 그의 개혁운동의 다른 면들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웨슬레 계통의 것이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관련이 있는 웨슬레 계통의 것은 시공간(時空間)이 있다. 데이튼이 결정적이라고 예시하는 것은 그 위에 미국제 특허와 도장이 찍힌 것이다. 어떤 부류의 완전주의 가 이끌어 낸 테마의 미국적인 발전이란 문제가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어느 시대에도 오순절운동이 방언하는 것 이상의 것이며, 참으로 방언과는 다른 어떤 것이라는 점에 시선이 유도된 일이 없다. 데이튼은 최소한 네개의 요소- 구원, 치유, 성령세례, 그리스도의 재림- 가 개척자들에 의해 어떻게 융합되게 되었는가를 보여준다. 그는 이 네 요소가 각각의 내적 논리를 지니면서도 전체적으로 하나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네개 중의 어느 것을 건드려도 다른 세 요소와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데이튼은 그 모두를 본질적으로 다루어 그것들을 엮는다. 논리의 일관성이 견지되고 있다. 오순절파 사람들은 일관성이 없는, 황홀경에 빠진
무지한 자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체험을 점검했고, 그들이 비록 일치할 수는 없었지만- 죤스의 책은 처음부터 자라난 수많은 교파들을 기록하고 있다- 완전히 논리 밖에 있던 자들과는 함께 할 수 없었다.
학문적 노력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은 축소주의 (reductionism)에 분개한다. 축소주의는 자신과 세상사람들에게 그들은 다만 어떤 것일 뿐이라고 말하는 축소이론 또는 방법의 한 형태이다. 오순절파들은 성령께 졸라댐으로서 하나님의 총애를 받아 영달을 얻고자 하는 다만 결핍된 자가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들은 문화 속에서 새로운 쐐기(wedge)를 필요로 하는 다만 변두리인에 불과한 자들이 아니며 그렇게 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다만 정신적이고, 성적인 집착이나 신학적 혼동을 지닌자에 불과한 자들이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사회 심리적인 성격의 판단을 할 수도 있다. 이러한 방법은 고교회 상층의 성공회나 어떤 다른 운동에 대한 연구를 조명해 주듯이 오순절운동에 대한 연구를 계발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순절운동은 그 이상의 어떤 것 (something more)이다. 그 이상의 어떤 것에는 여기에서 자세하게 설명된 류(類)의 신학도 포함된다.
데이튼이 죤스에게 말한 바대로 이 책은 완전한 것은 아니며 , 죤스의 책을 완성시키는 것 도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은 대단히 중요한 진술이다. 이 것이 없다면 후대의 연구자들은 오순절운동에 대해 지적(知的)으로 설명하는데 어려움이 있게 될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기독교 신학과 대중운동에 대한 새로운 공헌을 본다. 오순절파들이 데이튼의 주목을 끈 것은 잘한 선택이라고 본다. 오순절파들이 사려깊고 공정한 태도를 견지한다면 이러한 데이튼의 업적을 마지막 때의 축복 이라고 부르고 싶어할 것이며 앞으로도 그렇게 부를 것이다.
마티(Martin E. Marty)
The University of Chicago
제 1 장
오순절운동에 대한 신학적 분석의 시도
오순절운동- 운동이란 말을 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은 주로 그 운동의 가장 큰 특징인 그로소라리아(glossolalia), 혹은 방언(speaking in tongues)이라는 관점으로 해석되는 것이 통례였다. 이는 그 운동의 내.외부에서 모두 마찬가지였다. 칼 브럼벡(Carl Brumbeck)의 오순절운동에 대한 고전적인 변증서라 할 수 있는 What Meaneth This?는 본질상 glossolalia의 관습을 변호한 것이다.1 마찬가지로 비판문헌도 오순절운동을 현대의 방언 운동 이라는 경멸적인 언사로 공공연히 비난하는 경향이 있었다.2 로마 카토릭 교도인 맥도넬(Kilan McDonell)이 저술한 최근의 발전에 대한 외관상의 광범위한 연구서인 Charismatic Renewal and the Churches는 본질적으로 glossolalia에 관한 심리학적이고 사회학적인 개관서이다.3
물론 전혀 무가치한 것은 아니지만 오순절운동에 대한 이러한 연구방법은 몇가지의 제한성을 지닌다.
첫째로 glossolalia는 오순절운동을 다른 종교적 운동들과 완전히 구별하여 분명하게 정의하는데 어려움을 안겨준다. 최근에 전통적인 교회들 내에 은사운동 , 혹은 신(新) 오순절운동 이 등장하기 전에는 이러한 정의가 오순절 교회와 다른 기독교회들을 구분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오순절파 교회들은 그 구성원들이 방언을 하였다. 그러나 glossolalia의 관행은 실제로 다양한 여러 상황들 속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종교현상 4이다. 예를 들어 미국의 경우는 glossolalia가 19세기의 쉐이커교도(the Shakers)와 몰몬교도들 같은 단체들 속에서도 나타났었다.5 몇가지의 공통된 특색이 있기는 하나 이러한 운동들은 오순절운동과 단지 간접적인 관계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glossolalia 그 자체로 오순절운동을 정의하거나 오순절운동을 여타의 기독교 운동들 및 종교적 운동들과 구별할 수 없다.
둘째로, 오순절운동을 해석하는 자들이 이처럼 glossolalia에 전념하는 것은 각자가 신뢰하는 주장들에 근거하여 오순절운동이 성결운동 의 부흥사인 파암(Charles F. Parham)의 지도 하에 켄사스주 토페카 근방에 있는 자그마한 성경학교에서 1900년 경에 새로이 나타났다고 하거나 혹은 6년 후에 로스 앤젤리스 아주사 거리의 흑인 선교회에서 발생했다고 하는 반(反)역사적인 주장들을 조장하여 그 운동에 대한 적합한 이해를 저해한다.6 비평가들과 소수이기는 하나 변호론자들 모두가 기독교 전통 내에서 이 성령의 은사 를 옹호하며 실행하는 자들의 역사적인 노선을 무시하든지 아니면 정착시키려는 시도에다 그들의 공격이나 방어를 집중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glossolalia에 대한 이러한 태도(orientation)는 19세기 후반의 발전들을 신학적, 역사적으로 주의 깊게 분석하는 것을 방해했고, 영국 내에 오순절파와 비슷한 관습들과 신학적인 주장들을 대두케 한 어빙파 (Irvingites)같은 더 선행(先行)의 운동들에게로 직접 도약하게 하였다.7
세째로, glossolalia의 관습에 주의를 집중한 결과 해석자들이 신학적 범주의 분석으로부터 관심을 돌려 사회학적, 심리학적 범주의 분석을 지향하게 되었다.8 최근에 glossolalia가 문화와 교회의 주류 속에 등장하기 전에는 그 현상은 주로 사회학적이든 심리학적이든 어떤 형태의 결핍 에 대한 비정상적인 반응으로 이해 되었다.
심지어 신학적인 분석이 시도되었을 때에도 glossolalia에 대한 전념(專念)은 고찰할 질문의 형태를 제한함으로써 신학적인 분석을 축소시켰다. 그 결과 오순절운동에 대한 전형적인 신학적 분석은 거의 예외 없이 성령론 문제, 특히 성령세례론과 성령의 은사 문제에 집중되었다.9 비록 이러한 이해가 오순절운동을 단지 glossolalia로만 보는 해석에 비하면 결정적인 진전이지만, 적어도 초기의 오순절운동을 구성했던 보다 복합적인 형태의 신학적 테마 논리를 여전히 파악치 못한다는 것을 앞으로 보게 될 것이다. 오순절 신학을 다루는데 있어서 이러한 축소주의는 그 운동의 가장 완벽한 이해뿐 아니라 그 운동의 가장 특색있는 주장들에 대한 비판적 평가도 가로 막는다.
공통 유형의 탐구
오순절운동을 주로 glossolalia의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시도들의 제한점은 방언의 관행을 꿰뚫고 그 관행을 지탱해 주는 신학적 주장을 충분히 이해하게 하는 다른 분석을 제공할 수 있는가 없는가하는 문제를 불러 일으킨다. 즉 해석자로 하여금 오순절운동과 선행(先行)의 그리고 관련이 있는 신학과 교회 전통들과의 관계를 역사적, 신학적으로 정확히 이해하게 하는 방법으로 이것을 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언뜻 보기에는, 혼란스러울 정도로 다양한 전통들을 공통적인 신학 유형으로 간추리려는 어떤 노력도 실패할 수 밖에 없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다행히 오순절운동 내의 여러 다양성은 인종과 설립자에 대한 충성에 따른 분파 등의 문화적 요인들에서 유래한 것이다. 설립자의 카리스마적인 지도력은 기존의 분파로 하여금 자신들의 독특한 관습과 신념을 영속화하게 한다.10 우리의 신학적인 의도 때문에 이러한 요인들은 대부분 무시될 것이다.
그러나 오순절운동 내의 공식화된 신앙과 교리진술들은 오순절파의 특성들- 방언, 성령세례 등등- 위에 다양한 첨가를 통해 더 확대된 기독교회의 고전적인 공통의 교리들 뿐만 아니라 세족, 교회재산, 야외집회의 유용성, 비밀단체나 노조 가입 등의 논제에 대한 신앙개조들 을 포함해 놀랄만큼 다양하다.11 이러한 진술들은 오순절파의 신학 특징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항상 신뢰받을 수 있는 것은 되지 못한다. 그 진술들은 정통성 및 더 고전적인 기독교 전통과의 역사적 일치성을 주장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종종 다른 교회와 신학 전통에서 빌어와 오순절파 입장에서 확대한 것이다.
예를 들어 1948년의 북미 오순절협회(the Pentecostal Fellowship of North America)의 진리선언 은 제 5조를 제외하고는 복음주의자 협의회(the 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ricals)가 5년 전에 공포한 신앙선언 을 문자 그대로 따온 것이다. 제 5조는: 우리는 순 복음(full gospel)은 마음과 삶의 성결, 육신의 치유, 성령이 말하게 하심에 따라 방언으로 말하는 최초의 증거가 있는 성령세례를 포함한다고 믿는다.12
이 진술은 오순절파가 주장하는 특징의 형태를 찾는데 어떤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특히 그 때는 오순절파들이 하나의 유형을 발전시키려는 노력으로 의견의 일치를 보아 마련한 더 진전된 단서들에 의해 오순절파의 주장들이 증폭된 시기였다. 파우펠(David W. Faupel)은 켄드릭(Klaude Kendrick)과 무어(Everett Moore) 같은 선진들의 작품을 정교하게 다듬어 오순절 교회와 운동들을 그들의 특징적인 신학 테마들에 따라 세 그룹으로 분류한다:
1. 웨슬레적인 성결전통에서 성화교리(聖化敎理)를 가르치는 그룹( 은혜의 세가지 역사 - 기독교의 체험은 회심, 그 뒤에 오는 별개의 체험인 전적 성화 , 그리고 방언으로 입증되며 신자의 봉사와 증거를 위해 부여되는 성령세례로 보통 표현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오순절파);
2. 처음의 두 역사를 점진적 성화과정에 의해 보충된 하나의 완성된 역사로 보아 위의 유형을 은혜의 두가지 역사 로 축소시키는 그룹(그리하여 회심과 그 뒤에 있게 되는 성령세례에 촛점을 맞추는 유형이다);
3. 단일성 (Oneness) 혹은 오직 예수 (Jesus Only)라는 신관(神觀)을 지닌 그룹(그리하여 삼위일체의 제2 위격에 대한 복음적 유니테리안주의(Evangelical unitarianism)를 선언한다).13
세번째 유형은 여러 면에서 아주 새롭고 동정적인 분석의 대상이기는 하나14, 그것은 적어도 우리의 의도상으로는 부차적인 문제에 의해서 생겨난 제 2 유형의 하부그룹임이 분명하다. 그 단일성 운동은 마태복음 28장 19절에 있는 삼위일체적인 세례 방식을 사도행전(특히 2장 38절)의 일반화된 주 예수 또는 예수 그리스도 의 이름으로 주는 세례유형과 조화를 이루게 하려는 문자적인 노력에 의해 생겨난 오순절파 내의 한 변형이다. 오순절운동의 이 분파는 사도행전 2장 38절과 관계된 귀절들을 통해 그 유형을 확증시키고 골로새서 2장 9절을 근거로 하여 예수는 이 세대(dispensation)의 신성(神性)의 완전한 계시라고 주장함으로써 이 난제를 푼다. 이러한 견해는 비록 하나님이 인간 역사와 맺고있는 삼위일체적인 관계에 대한 이해와 성령의 사역을 그리스도의 사역과 연관시키는 더 큰 오순절적인 문제 등의 광범위한 논제들을 취급하기는 하지만 오순절파의 보편적 특성에 대해서는 전혀 아무 것도 나타내지 않는다. 예수의 유일성 운동은 신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공히 오순절파의 두번째 그룹, 즉 은혜의 두가지 역사 줄기에서 나온 것이다.
갈등을 일으키는 두가지 유형
그렇다면 그 운동의 두 주요 유형의 특징인 오순절운동을 신학적으로 분석하고, 가능하다면 오순절파가 왜 이 두 줄기로 분리되었는가를 설명하는 것이 우리의 문제이다. 그러나 은혜의 두가지 역사 와 은혜의 세가지 역사 간의 긴장에 너무 조급하게 연구의 초점을 맞추다보면 glossolalia에 지나치게 일찍 집중함으로써 생겨났던 것과 같은 구원론의 감소주의(reductionism)를 낳게 될 것이다. 북미 오순절협회(PFNA)의 진리선언 에서 인용한 조항에 보면 순 복음 (full gospel)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고, 성결 과 성령세례뿐만 아니라 육신의 치유 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순 복음 이라는 용어는 오순절파 내에서 독특하게 쓰이는 것으로써 PFNA의 광범위한 교리선언 속에 부분적으로 침잠되어 있는 테마군(群)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완전한 (full) 혹은 온전한 복음 (whole gospel)의 테마들은 초기 선언에 다음과 같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종교개혁시대를 통해 하나님은 세계에 이신득의(以信得義) 교리(롬5:1)를 회복시키기 위해 마틴 루터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을 사용하셨다. 후에 주님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성화의 복음(행 26:18)을 회복시키기 위해 위대한 성결운동을 통해 웨슬레를 비롯해서 여러 사람들을 사용하셨다. 후에 주님은 믿음에 의한 신유의 복음(약 5:14,15)과 예수재림의 복음(행 1:11)을 회복시키기 위해 여러 사람들을 사용하셨다.
이제 주님은 다음과 같은 표적이 따르는(막 16:17,181; 행 2:4; 10:44-46; 19:6; 1:1-28:31) 성령과 불세례(눅 3:16, 행 1:5)의 복음을 회복시키기 위해 위대한 오순절운동을 통해 여러 증인들을 사용하고 계시다. 우리가 지금 온전한 복음을 설교하는 자들을 갖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라.15
이 인용절은 온전한 복음 에 다섯가지 테마들을 포함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이는 오순절의 은혜의 삼단계 파 주장에 두가지, 즉 믿음에 의한 신유 와 예수의 재림 을 덧붙인 것이다. 이 두 별도의 테마들은 오순절 양파 모두의 가르침 속에 첨가되어 오순절운동의 독특한 테마록에 규칙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일단의 테마들은 전 오순절 전통을 망라하여 계속 반복된다.
예를 들어 그 유형은 베델 성서학교(Bethel Bible College) 학생들이 일련의 오순절적인 가르침들의 최종적인 연결점을 찾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던 바로 그 초기에 나타나고 있다. 그 학생들의 교사인 파암(Charles F. Parham)은 기록하기를:
1900년 12월에 우리는 회개, 회심, 헌신, 성결, 치유, 그리고 주님의 임박한 재림을 주제로 하여 시험을 치루었다. 우리는 연구를 하는 가운데 하나의 문제에 봉착했다. 사도행전 2장은 무엇에 관해 말하는 것인가? ...나는 연구 중에 있는 학생들에게 성령세례의 성서적 증거는 무엇인가를 부지런히 해결하도록 과제를 부여 하였다.16
이 과제는 며칠후 오즈만(Agnes N. Ozman) 학생이 성령을 받아 중국어로 말했을 때 오순절 신학의 출현이라는 당면과제를 불러 일으켰다.17
비슷한 유형이 미국 하나님의 제일 침례 성결교회(the First Baptized Holiness Church of God of the Americas)라 불리는 흑인 교파에 나타난다. 그 교파는 1926년에 통합을 통해 형성된 교파인데 그 뿌리는 1898년까지 추적해 볼 수 있다. 연합의 토대는 그 교파의 공약들(commitments) 속에 다음과 같은 교리적인 테마들, 즉 회개, 중생, 의인(義認), 성화, 오순절 세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으로 말하는 것, 육체의 신유, 그리고 그리스도의 전천년적 재림 등을 포함시킨 것이었다.18 이와 마찬가지로 사도 신앙 선교회(Apostolic Faith Mission)에서도 그러한 유형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선교회는 오순절운동을 세계적인 관심과 악명으로 이끌었던 아주사 거리의 부흥운동에 그 기원을 두고있는, 가장 오래된 오순절파들 중의 하나이다.
이 교회는... 마음과 생활에 기록된 세개의 뚜렷하면서도 각각인 영적체험, 즉 의인, 성화, 성령세례를 소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신유와 예수의 임박한 재림- 전천년의 -과 함께 영적 체험에 관계 된 이 교리들은 교회성립의 확고한 성서적 기초를 제공한다.19
이 유형은 다른 주요한 오순절 분파에서 더 명료하다. 거기에서는 순 복음 (full gospel)을 사중 복음 으로 강조하기 위해서 두번째 테마인 성화의 교리를 빼버린다. 현대 하나님의 성회(Modern Assemblies of God) 신학자인 스탠리 홀톤(Stanley Horton)은 교파 훈련교재인 Into All Truth에서 네가지 근본적인 교리- 구원, 치유, 성령세례, 그리스도의 재림-를 구성하는데 이 네가지가 오늘의 오순절 부흥에서 성령의 특별한 강조와 조명을 받았기 때문이라 는 것이다.20 그러나 이 유형은 국제 사중복음교회(the International Church of the Foursquare Gospel)의 설립자인 논쟁을 좋아하는 맥퍼슨(Ainee Semple McPherson)의 저서에서 더 분명히 표현되고 있다. 그는 자신의 기본적인 메세지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3장 16절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신다. 그는 사도행전 2장 4절에 따라 우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 그는 야고보서 5장 14절과 15절에 따라 우리의 육신을 치료하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데살로니가 전서 4장 16절과 17절에 따라 우리를 그에게로 영접하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이다.21
일반적인 사중 유형
우리는 후자의 사중 유형을 우리의 신학적, 역사적 분석을 위한 근간으로 삼을 것이다. 비록 오중 유형이 역사적으로 선행했던 것이었고 그런 관계로 우리의 주목을 받을 권리가 있지만 사중 유형이 오순절 신학의 논리를 더 명확하고 명료하게 표현하고 있다. 더우기 사중 유형은 더 복잡한 유형인 오중 유형 속에 내포된 것이어서 역사적으로는 선행하지 않지만 적어도 논리상으로는 오중 유형에 선행한다고 할 수 있다. 전적인 성화라는 테마는 결국 성결계통만의 특징인 반면, 이 네개의 테마는 우리가 주장해 왔듯이 오순절운동의 다양한 모든 파들 속에 나타나는 오순절운동 내의 거의 보편적인 것들이다.22 더 간결한 사중 유형을 선택하는 것은 성결계통을 무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더 보편적인 유형을 분석함에 따라 오순절운동의 신학적이고 역사적인 존재 이유가 분명히 밝혀지게 될 것이다.
이 사중 유형의 모든 요소들이 분리되어서 혹은 다양한 조화를 이루면서 다른 기독교 전통들 속에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은 곧바로 인정되어야만 한다. 예를 들어 사중 유형 그 자체도 19세기 기독교 선교사 연맹(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의 창시자이며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원자, 성결케 하시는 이, 치료자, 오실 왕 23으로 말하는 심프슨(A. B. Simpson)의 사중 복음 에서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유형의 출현은 오순절운동의 복잡한 발전과정의 마지막 단계이며 그 정점이다. 그 중요성은 이 글의 후반부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중 유형이 대체로 그 운동의 특성인 오순절주의에 대한 역사적, 신학적인 분석의 토대를 전체적으로 충분하게 제공해 준다고 주장할 수 있다.
다른 분석들도 제공될 가치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의 가치는 (1) 경험적으로, 우리가 지금까지 주장해 왔듯이 사중 유형은 오순절파의 문헌에 매우 폭넓게 나타난다; (2) 신학적으로, 우리가 간단없이 지적하겠지만 사중 유형은 오순절 사상의 논리를 상세히 설명할 수 있게 한다; (3) 역사적으로, 이 연구 전체가 보여 주듯이 이 네가지 테마의 출현은 오순절 신학의 뿌리에 대한 역사를 아마도 최초로 가장 명확하게 밝혀주게 될 것이다.
사중 복음 개개의 요소들에 대한 더 자세한 의미는 각각의 출현에 대한 역사를 추적하므로 더욱 명확해지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는 이러한 개개의 요소들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어 오순절운동의 내적 논리를 나타내 주는 독특한 집성체를 형성하고 있는가를 논증하는 일이 우리의 관심대상이다. 비록 여기 저기에 산재해 있지만 이 네가지 테마들은 서로를 강화해 주는 방식으로 오순절주의 안에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연결성의 특징적 논리는 오순절운동에 대해 처음에 주어졌던 세개의 명칭들- 오순절운동 (Pentecostal Movement), 사도적 신앙 (Apostolic Faith), 늦은 비 운동 (Latter Rain Movement)-을 탐구함으로써 가장 쉽게 관찰될 수 있다. 이러한 세가지 표현 모두는 파암(Charles F. Parham)의 그 새로운 운동에 대한 첫 보고서 제목인 The Latter Rain: The Story of the Origin of the Original Apostolic or Pentecostal Movement"에서 연유 되었다.24
오순절파의 해석학
이러한 타이틀 중 첫번째의 것, 즉 오순절운동 이라는 말을 연구해 보면 사중 복음의 처음 두 요소인 구원/의인과 성령세례가 어떻게 서로 연관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이 유형은 하나의 독특한 해석, 다시말해 성서를 다루는 독특한 오순절파적인 방법에 기초를 두고 있다. 신약성경을 바울의 관점을 통해 해석하는 경향이 있는 권위있는 개신교주의에 반하여, 오순절파는 누가의 눈을 통해, 특히 사도행전에 의해 주어진 렌즈를 끼고 신약의 다른 부분을 해석한다. 홀렌베거(W.J. Hollenweger)는 언급하기를 오순절파들과 그들의 선조들은 그들의 관점을 거의 배타적으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근거를 두고 있다 25 고 한다.
그러나 바울의 텍스트에서 누가의 텍스트로 방향을 돌리는 것은 문학 쟝르를 변형시키는, 다시말해서 교훈집으로부터 이야기체 자료로 전환하는 것이다.26 이야기체 텍스트는 신학적으로 해석하는데 어렵기로 악명이 나 있을 정도이다.27 오순절파들은 사도행전에서 오순절 기사를 읽고 초대교회의 성령을 받은 일반적인 유형이 신자 각자의 삶 속에서 반복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특별히 그 성령체험이 어떤 면에서는 초대교회의 예수에 대한 경험과 시간적으로 떨어져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을 함에 있어서 오순절파는 하나의 오랜 전통인 주관주의적 해석학 의 입장에 서있다. 예를 들어 웰치(Claude Welch)는 인류의 드라마가- 창조, 타락, 그리고 구원에 관계 된- 각자의 삶 속에서 재현되어야 한다 는 주장이 경건주의가 주관적 경험으로 전향하게 된 한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경건주의에서는 그리스도의 진정한 출생은 우리 마음 속에서의 그의 탄생이며, 그의 진정한 죽음은 우리 안에서의 죽음이며, 그의 진정한 부활은 우리 신앙의 승리 속에 있다 .28 고차원의 삶 (higher life)을 주장하는 오순절운동의 19세기의 선조들은 구약의 구속사를 헌신적으로 사용하면서 성서에 대한 비슷한 접근방법을 사용했다. 이집트에서의 탈출, 광야의 방황, 그리고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으로의 이주, 이 모든 것은 회심에서 두번째의 축복 (행복의 땅)29에 이르는 영적 순례의 표준 유형으로써의 각 단계로 비유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회 역사가인 멘지스(William Menzies)는 주장하길 오순절운동은 사도행전 2장에 언급된 오순절에 일어난 사건이 교회 탄생의 신호일 뿐 아니라 모든 시대의 신자들에게 적용되는 체험을 묘사하고 있다는 신념을 특징으로 하는 기독교회 내의 종파 그룹이다. 성령 세례 라고 불려지는, 능력을 받는 체험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에 따라 방언으로 말하는 표적이 동반되는 것에 의해서 증명된다고 믿는다.30
이것은 오순절운동의 핵심을 파악한 것이며 오순절운동이 왜 그러한 명칭을 갖게 되었는지를 알려준다. 오순절파들의 이러한 독특한 성서해석 방법은 오순절운동을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이끈다. 초대교회에서 처럼 현대의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성령세례의 충만함을 받는데, 이 둘은 각각 별개의 사건 또는 체험 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사중 복음의 처음 두 요소들은 독특한 해석학에 의해 서로 관련을 맺고 있다.
그러나 오순절 체험은 모든 세대에 가능한 것인가하는 문제는 신약성서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는 현상들- glossolalia와 같은 은사들(charismata)과 신약성서에 성령의 은사 로 명명되어 있는 보다 난해한 문제인 신유- 의 영원한 유효성 문제를 은연중에 제기한다. 오순절파는 문자 그대로의 치유기적이 예수의 사역에서 불가결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고 확신하며, 치유기적이 사도행전에 기록된 대로 초대교회가 오순절 이후에 경험한 부분이기에 우리 시대에도 경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치유기적은 복음 안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구원과 위안일 뿐만 아니라 신자에게는 재확신의 표지(Sign)이며 불신자에게는 증거가 된다. 파암은 1902년에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그리스도는 그의 믿는 자녀들에게 구별되는 표지를 주어 세상으로 하여금 신자와 불신자를 알아 볼 수 있게 하였다. 그는 또한 다가 올 세상에 관한 모호한 사변적 이론을 설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강한 능력으로 고난당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경감시켜 주기 위해 그의 종들을 보냈다. 즉 배고픈 자들을 먹이고, 헐벗은 자들을 입히고, 병든자를 고치고, 악령을 쫓아내고, 방언을 말하고, 이러한 외적이고 가시적인 표지들에 의해 내적인 축복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수 놓아진-을 확인하게 하기 위해 그의 종들을 보낸 것이다.31
이 인용문에서 핵심적인 단어는 능력 이다. 오순절운동 이전의 고차원적 삶 의 교사 중 한사람인 앤드류 머레이(Andrew Murray)는 주장하기를 성령이 능력으로 역사하는 곳마다 성령은 신유를 행하신다... 만약 오늘날 신유를 목격하기가 어렵다면 그 원인은 바로 성령이 능력으로 역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32
만일 오순절의 능력부여 가 모든 세대에 가능한 것이라면 우리 시대에도 그 성령의 능력이 최소한 오순절 성령세례를 실제로 경험했고 기적의 축복을 고대하는 사람들의 삶 속에 신유의 기적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데 있어서 오순절파들은 회복주의자 (restorationaist)적인 모티브를 드러낸다. 이 카리스마타(Charismata)와 초자연적인 성령의 은사 는 사도시대의 종결과 함께 멈추었다고 주장하는 고전적인 프로테스탄티즘의 경향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다. 워필드(Benjamin B. Warfield)는 신약성서의 초자연적 요소를 그러한 방식으로 다룬다. 그는 19세기의 오순절 치유운동을 논박했던 옛 프린스톤 신학을 옹호한다. 사도 교회는 기적을 행하는 교회였다 는 오순절파들의 주장을 용인하면서도 워필드는 주장하기를 이러한 형편은 사도 교회만의 특색으로 오직 사도시대에만 속한 것이었다...이러한 은사들은... 교회를 설립하는데 있어 하나님의 권위있는 대행자로서의 사도직에 대한 신임장이었다. 그렇기에 은사의 기능은 오직 사도 교회에만 제한되었고, 필연적인 결과로 그 은사들은 사도 교회와 함께 사라졌다.33
그러나 오순절파들은 하나님의 불변성에 근거하여34 사도 교회의 특성은 모든 세대에 걸쳐 규범이 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도시대의 초자연적 요소들을 회복시킬 것을 주장함에 있어 사실상 오순절운동은 사도적 신앙 이 되기를 주장한 것이었다. 사도적 신앙 이란 초기의 지지자들이 자주 사용하면서 초기의 많은 신문, 잡지 기사와 관습법들(institutions)에 적용하였던 명칭이다. 한 옹호자는 The Apostolicc Faith Restored라는 제목의 책에서 그것을 이러한 방식으로 설명한다.
오늘의 종교계에 오순절 혹은 사도적 신앙운동이라고 알려진 주 성령의 놀라운 활동이 있다. 이 운동을 하는 정직한 마음과 생각의 남녀들은 변절(apostasy) 이전에 하나님을 섬겼던 형제들의 믿음과 관행으로 되돌아 가려는 노력을 하였다. 그들은 신약성서를 자신들의 삶의 규율로 삼았다...오순절운동은...사이에 개입된 시기들을 뛰어넘어 오순절로 되돌아 가자 고 외친다...이러한 하나님의 활동은 신약시대의 하나님의 사역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동일한 손길에 의해,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동일한 기초 위에, 동일한 유형으로, 동일한 약속에 따라 세워진...
오순절파들은 주님과 사도들의 원초적인 교회 교훈자료로 거슬러 올라갈 수 없는 교리나 관습은 어떤 것도 권위있는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다.35
이처럼 오순절 체험에 직접적으로 접근하려는 주장은 사도적 신앙 과 신약성서에 있는 모든 초자연적인 요소들을 원상태로 복원시켰다는 주장으로 이끌어 간다.이러한 초자연적 요소들 중에 신유가 있다. 신유는 고통 중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선물이요, 신자에게는 성령의 임재에 대한 표지가 되고, 전도사역에 있어서 불신자에게는 일종의 증거가 된다.
늦은 비 운동
그러나 사도적 신앙을 원상태로 회복시켰다는 이러한 주장은 오순절파들에게 변증적인 난제를 불러 일으킨다. 교회사상(敎會史上) 아주 희귀한 어떤 것을 기독교 신앙과 실천의 불가결한 현시(manifestation)라고 할 수 있겠는가? 오순절파들은 이 질문에 두가지로 답변했다. 어떤 지지자들은- 대개 한도 이상으로 그 증거를 강조하는 이들- 대부분의 교회 역사 속에서 방언과 다른 성령의 은사를 체험한 사람과 운동들을 발굴함으로써 믿음과 실천의 협력(fellowship)을 확증할 수 있다 36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해 최소한 초기 오순절파의 논리에 보다 잘 어울리는 또 하나의 답변이 있다. 이 답변은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에 대한 기대가 오순절 사상 속에서 사중 복음의 다른 요소들과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설명하는 교의인 늦은비 교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오순절파는 초기에 종종 늦은 비 운동 이라는 이름을 취했었다.37 우리는 마이랜드(D. Wesley Myland)의 The Latter Rain Covenant에서 이 교리의 고전적인 표현을 발견한다.38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기사는 마지막 때 에 성령이 모든 사람들에게 부어질 것이라는 요엘서의 예언을 인용하고 있다. 그래서 오순절파들은 요엘서와 이른 비 및 늦은 비 에 대해 힌트를 주고 있는 야고보서 5장 7-8절과 그 외의 성경귀절에 즉시 매료되었다.39
팔레스틴에서는 중요한 두 계절에 비가 내린다. 봄에 씨앗을 뿌릴 때와 가을에 추수를 위해 농작물을 익게 할 때이다. 이러한 문자대로의 강우 패턴은 오순절파들이 사도 교회, 그리고 임박한 시대 종말과 자신들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전형(image)을 제공한다. 신약의 오순절은 이른 비 , 즉 교회 설립 을 위한 성령의 유출(outpouring)이었다. 현대의 오순절운동은 늦은 비 이다. 이는 추수 , 즉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재림을 위해 마지막 때에 은사들을 회복시키시는 성령의 특별한 유출인 것이다. 마이랜드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우리는 이방인의 오순절 속에 살고 있다. 처음 오순절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시작하게 허고, 이 두번째의 오순절은 교회를 주님의 재림과 연결시키고 완전하게 한다.40
마이랜드는 19세기 후반에 비의 양이 증가한 것은 오순절운동의 영적 출현을 예시하며, 오순절운동의 타당성을 화실하게 하고, 종말이 임박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고 팔레스틴의 자연 강우현상과 연관시켜 논증하기에 이르렀다.41
비록 팔레스틴의 강우현상과 특이하게 비교하는 것은 가치를 상실하지만, 광범위한 늦은 비 교리는 오순절파의 논리에 보이지 않는 중요한 전제를 제공해 주었다. 늦은 비 교리는 오순절운동으로 하여금 자신들이 신부 인 교회를 주님과 만나도록 준비하게 하는 하나님의 도구로써 다가오고 있는 역사의 정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인식을 갖게 한다. 오순절파에서 약간은 무시되었던 인물인 우드워쓰-에터 부인(Mrs. Mary B. Woodworth-Etter)은 자신이 환상 중에 받은 이 일을 위한 특별한 소명 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로 기술하였다.
...믿음의 집에 적당한 때에 먹을 것을 주고, 이방 죄인들을 마지막으로 초청하며,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마지막으로 초청하기 위해서, 왜냐하면 그의 신부가 지금 막 결혼관계에 들어가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견고해지고 충성되며 진실해져서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부음을 받아 예수의 재림에 대한 바른 지식으로 인치심을 받게 하기 위함이다.42
그러나 늦은 비 교리는 오순절파가 마지막 때 에 수행해야 할 특별한 임무를 지적할 뿐만 아니라 은사와 기적이 왜 그렇게 오랜 가뭄 후에 재출현했는가에 대해서도 설명하였다. 우드워쓰-에터 부인은 그 문제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예수의 오심 전에 이러한 표적과 기사'가 있을 것이다. 병든자가 고침을 받고, 귀신이 쫓겨나며, 사람들이 방언으로 말할 것이다-예수께서 오시기 바로 직전에 43라고 설명하였다. 이러한 표적과 기사 는 종말론적인 테마들을 사중 복음의 전체적인 종합성과 연결시키고, 늦은 비 교리는 오순절파의 중대한 변증문제를 하나의 주된 변호적 자산으로 화하게 한다.44 사도시대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오랜 가뭄은 각 세대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적 계획의 한 부분으로 간주된다. 오순절운동을 가장 부조리한 것으로 보이게 했던 고전적 기독교 형태와의 불연속성이 오순절운동을 최고로 적법화 하였다.
그러기에 이것은 오순절파의 사중 복음의 요소들을 서로 밀착시키는 어떤 내적 논리인 것이다. 이 논리가 실재하고 그러한 설명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네가지 테마들, 즉 네 형태의 독특한 유형을 강조하는 신학적 분석의 정당성을 어느 정도 확립시켜 준다. 이러한 테마들의 발전과 상호작용을 추적하면 오순절파의 역사적, 신학적인 기원을 이해할 수 있다. 이 작업은 아마도 최소한 세부적인 면에서는 첫 시도일 것이다. 그 복잡한 내용이 이 연구의 나머지 부분을 구성할 것이다.
제 2 장
오순절운동의 감리교 뿌리
오순절주의를 잠정적으로라도 네 개의 근본적인 신학 테마로 분석해 보는 것이 적절하다고 가정한다면, 이 테마들은 오순절파의 신학적인 뿌리를 찾는 실마리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연구가 위험성과 문제점을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헌신적인 오순절파에게는 그 것이 모독적인 맛을 풍길 수도 있다. 오순절운동은 하나님의 섭리적인 사도적 신앙 의 회복이기 때문에 신약성서 그 자체 이외의 더 이상의 근원을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망은 오순절운동으로 하여금 선행 운동들과 불연속성의 관계에 있게하여 오순절운동을 자체의 직접적인 상황에서 추출하게 한다.
그러한 주장을 전적으로 비난할 필요는 없다. 오순절파의 출현은 신약성서의 의미를 이해하여 우리 시대에 활력을 되찾게 하려는 지속적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순절파의 출현은 여타의 교회들에게도 통찰의 가치가 있다- 비록 적어도 카리스마운동이 나타나고 오순절파의 테마들이 신학적으로 재정립되기까지는 이러한 통찰들이 어느 곳에서나 쉽게 수용될 수 있는 방식으로 산출된 일도, 진술된 일도 없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를 들어 슈바이쳐(Albert Schweizer)와 바이쓰(Johannes Weiss) 등은 19세기 성서신학이 그러한 주제들을 무시했듯이 신학의 학문적 차원에서 비슷한 관점을 취하고 있던 시기에 그 운동이 대중적인 차원에서 성서의 묵시문학적이며 종말론적인 요소들을 재긍정했다는 사실은 인상적인 일이다.
게다가 우리는 오순절운동과 이전 것과의 연속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지 말도록 경고 받을지도 모른다. 뒷궁리식(hindsight)의 조망은 많은 것들을 명료하게 한다. 아마도 때로는 지나치게 명료화 하기도 할 것이다. 조상 과 뿌리 에 대한 연구는 새로움(novelty)과 불연속성이 가리우고 있는 것에 대해 평행성과 연속성을 밝혀줄 지도 모른다. 특히 직속 선배들과 대조해 볼 때 오순절운동 속에 새로운 것 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오순절운동의 신학적, 교리적 주장들의 등장에 대해 역사적으로 더 훌륭하게 이해해 보고자 하는 노력을 배제할 필요는 없다.
이러한 연구의 가치성은 인정된다 해도 그 역사에 대한 출발점이 뚜렷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이다. 다양한 오순절파의 테마들에 대한 추적은 점차로 그 특징을 상실하여 그것들이 보다 고전적인 기독교 전통 내의 테마들과 유사한 형태를 취하기 시작하는데까지 미칠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 다양한 출발점들이 제안되었다. 이러한 다른 제안들을 자체 내에 총괄하는 또 하나의 출발점을 택하기 전에 그 다양한 출발점들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
어떤 해석자들은 성령을 받는 것과 불세례를 분리시키는 경향이 있는 로마와 영국 카토릭의 견진성사교리에서 오순절운동의 뿌리를 찾으려 했다. 이러한 입장은 오순절파들의 핵심 본문인 사도행전 8장 14-18절에 논의의 기반을 두고 있다. 최근에 그 입장을 옹호한 돈톤(L.S. Thornton)에게서 오순절파와 유사한 경우를 볼 수 있다.
갈라디아서(4:6)의...오순절을 회상하게 하는 그 귀절은 분명히 시작의 두번째 단계와 관련이 있다.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우리가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과 연합함으로 우리 인간성에 적합한 하나님과의 자녀관계가 재확립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세례 속에서 발생했다...그러나 이러한 새창조의 행위에 의해 우리는 이제 첫번째 시작의 필연적 결과인 재생(renewal)이라는 더 진전된 단계에 적합한 자가 된다. 아들의 영은 우리에게 허락된 이러한 새로운 아들관계를 적합하고 완전하게 한다.2
오순절파들이 회심과 성령세례를 구분하는데 관련이있는 몇몇 인상적인 병행귀절들을 보지 않고 이 귀절과 또한 연관 귀절들을 이해한다는 것은 곤란한 일이다. 오순절 신학에 대한 앵글로, 로만 카토릭적인 뿌리의 경우가 다음과 같은 점에서 강화될 것이다. 이 전통들은 기적적인 것 이 성례전에서 뿐 아니라 치유의 기적에 대한 확신과(종종 성자에 대한 이해와 관련하여) 고대의 축귀의식의 유지, 그리고 환자에 대한 안수에 의해 현재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다른 해석자들은 오순절운동의 뿌리를 청교도운동(Puritanism)에서 찾고 있다. 그들은 청교도의 성령교리가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3고 주장한다.
윌슨(Garth Wilson)은 청교도의 성령론 (Puritan Doctrine of the Holy Spirit)이라는 연구에서 이 주장을 발전시켰다. 그는 십스(Richard Sibbes), 오웬(John Owen), 굳윈( Thomas Goodwin), 백스터(Richard Baxter)와 중생과 성화 외에 성령의 사역 에 대해 가르쳤던 청교도들에게서 오순절파의 교리에 대한 암시를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4 예를 들어 굳윈은 에베소서 1장 13,14절을 근거로 성령의 인침 에 대해 말했다. 그는 그러므로 성령을 위로자로 받아들일 수 있기 전에 그 성령을 성결케 하는 자로 받아들여야 한다 고 주장하면서 또한 신자들이여! 인치시는 자인 성령의 약속을 기다리라...당신은 사도행전 1장 14절에서 사도들이 성령의 약속을 기다렸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당신도 그렇게 하라 5고 강조함으로써 그 성구를 오순절에 연결시켰다.
청교도운동의 그러한 테마들은 종종 종말론과 교회의 늦은 때의 영광 (latter-day glory)에 대한 새로운 강조와 결합되었으며 그 운동 언저리에 있는 여러 형태의 천년왕국론 속에서 과격화의 양상을 띄었다.6 이러한 혼합 속에서 역시 우리는 오순절파의 기본 교리에 대한 암시를 찾아 볼 수 있다.
오순절운동에 대한 약간 무시되긴 했지만 유망하며 생산적인 또 하나의 원천은 경건주의일 것이다. 독일 경건주의는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죄와 세상을 이길 수 있다 는- 우리가 살펴 볼 것이지만 오순절운동의 등장 바로 몇년 전에 보편적이며 중대한 주제였던8- 의인과 동시에 죄인 7(simul justis et peccator)이라는 루터교의 변증법을 깨뜨리는 경향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신유교리 등장의 추적 편(5장: 역자주)에서 경건주의의 중요한 역할을 보게 될 것이다.9 그리고 몰트만(Jurgen Moltmann)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17세기의 정통주의와 절대주의 시대에 묵시문학적이고 천년왕국적인 사상은 개신교 신학에 있어 놀랄만한 문예부흥을 경험했다. 그것은 네덜란드와 영국에서 시작하여 부르템부르크와 삭소니에서 만개했다.10
그는 물론 청교도운동과 경건주의의 등장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감리교와의 관계
그러나 오순절운동에 대한 이러한 보다 고전적인 암시들은 비록 간접적인 영향력은 인정된다 해도 직접적이고 실제적인 원천이기 보다는 대체로 병열회로들(parallels)이다.11 그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여기에서 그 역사를 끄집어 내어 실제적인 역사적 고리와 발전들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오순절운동에서 절정에 도달하게 할 수 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감리교는 바로 논의되었던 세 후보의 교차점에 뛰어난 방식으로 위치해 있다. 맥네일(John T. McNeil)은 요한 웨슬레(John Wesley)는 영국국교주의, 청교도주의, 경건주의와 생동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 12고 논평한다.
하지만 감리교와 오순절운동 모두를 잘아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출발점이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마지막 장에 분리되어 있는 여러 테마들을 후기에 옹호한 자들은 종종 웨슬레를 자신들의 원인(cause)으로 주장하려고 시도하곤 했음이 사실이다. 웨슬레가 전천년설을 가르쳤고13, 신유에 대해 정통주의자였으며 14, 성령세례를 받은자들과 일반 교인을 15 구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고찰할 것이지만 그러한 모든 주장들은 잘못되었거나 최소한 매우 과장된 것이다. 비록 감리교와 광범위한 복음적 부흥운동이 오순절운동 후기에 나타나는 회심 지향적인 경건의 주된 근원이었다 해도 우리는 감리교와 오순절파 회심교리를 쉽사리 붕괴시킬 수는 없다. 웨슬레는 의롭게 하는 은총의 경험 에 대해 주로 말하는 경향이 있었고, 더구나 그의 이해는 성공회의 교회론과 성례전 신학(세례를 통한 중생의 확신이라는 점에서)16에의 의존과 회심을 몇가지 순간들 중의 하나로 보는 아주 복잡한 구원론에 의해서 고도로 제한을 받고 있었다.
반면에 다양한 기독교 주장들이 웨슬레에게서 기원했다는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아마도 기독교 역사상 어떤 인물도 기독교 전통 내의 위치설정에 관해서 웨슬레 만큼 다양한 판단을 야기시킨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이 사실은 종종 거의 의견일치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웨슬레 학(scholarship)이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다. 예를 들어 사회분야에 있어서 웨슬레는 영국 노동자 계급의 혁명적 잠재력을 잘라버렸다고 비난을 받음과 동시에17 18세기 영국 민주혁명'의 동반자로서의 복음부흥운동에 대한 공헌으로 칭송을 받았고 18, 기독교 사회주의에 대한 웨슬레의 뿌리 19라는 옹호를 받기도 했다. 신학적으로 웨슬레는 개신교 전통 내에서 카토릭주의로의 복귀 로 간주되었고20, 칼빈주의와 단지 머리카락 하나 차이의 관계였으며21, 루터 종교개혁의 진정한 계승자로 간주되었고22, 자유주의 신학의 경험적이고 윤리적인 방향의 선조였으며23, 주로 동방 교부들의 신학에 뿌리를 내렸고24, 영국 종교개혁을 통과해 유명론에 이르는 신인협동적(sinergistic) 전통의 형태로 간주되었으며25, 적어도 기독론에서는 원(原) 바르티안 proto-Bartian)26 등등으로 간주되었다. 교회론적으로 웨슬레는 고교회27와 저교회28 입장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러한 견해의 다양성은 부분적으로는 특히 웨슬레 전집의 비조직적 성격과 그의 사상이 도덕주의와 도덕율 폐기론의 진퇴유곡 사이로 감리교의 활동(energy)을 인도하려는 노력 속에서 역사적으로 발전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웨슬레의 근원적(sources) 보편성 때문에 생긴 현상이고, 그가 모순되는 듯한 테마들을 혼합하여 어떤 때는 그의 천재성을 증명하는 것 같고 다른 때는 그의 개성과 확신의 순전한 힘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서로 연결해 놓은 것같은 허약한 형태를 이루어 놓았다는 사실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 결과로 일종의 조직상의 불안정을 낳게 되어 감리교는 이리저리 미끄러지거나 조각으로 쪼개지게 되었는데 각 분파는 웨슬레의 원초적 비젼의 특정한 부분과 테마들만을 유지했다. 이러한 경향은 웨슬레의 사후에 통제력이 상실되자 더욱 확대되어서 감리교를 영국 국교회로부터 분리하게 했다. 위의 경향은 미국적인 배경의 보다 현저한 자유 속에서 특히 중요성을 지닌다.
이 불안정한 유형은 아마도 웨슬레의 교회론에서 가장 뚜렷할 것이다. 영국 국교회의 39개조 를 감리교의 25개 조항 으로 축소하면서 웨슬레는 교회에 관한 조항에 있어 한 항만을 가감없이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다음과 같은 사실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가시적 교회에 필수적인 것. 첫째는 살아있는 신앙이다. 실로 이것이 없이는 가시적이던 불가시적이던 전혀 교회가 존재할 수 없다. 둘째는 설교와 그 결과로 뒤따르게 되는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그것이 없이는 신앙은 생기가 없어 죽게될 것이다. 그리고 셋째는 하나님께서 신앙을 증진시키시는 일반적 수단인 성례전의 정당한 실행이다.29
콜린 윌리암스(Colin Williams)는 감리교 위상의 교회일치적인 잠재력에 대한 관심에서 시사하기를 웨슬레가 이 세가지 점을 강조함으로 자유 교회 전통, 고전적 프로테스탄트, 그리고 카토릭주의를 하나로 묶는 시도를 하였다고 주장했다.30 이와 유사하게 도날드 던보(Donald Durnbaugh)는 전통, 말씀, 성령의 도끼들을 활용하여 교회론을 세울 삼각도형을 발전시킨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중간지대는 본래 불안정한 운동들에 의해 점유된다 .31 그러한 운동들 가운데 첫째가는 것은 감리교이다. 그 이유는 감리교는 좀더 고전적 형태의 교회생활로 되돌아 가려는 경향이있는 동시에 이와 대조적으로 보다 자유 교회적 혹은 성령론적 취향의 교회생활체계 쪽으로 급진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감리교 안에 있는 불안정성의 요소를 어떻게 평가하려 하든지- 섬세한 균형을 유지한 웨슬레의 천재성으로 그것을 칭송하든지 혹은 일관성이 없는 것으로 비난하든지- 간에 이 분석이 웨슬레가 보다 고전적인 기독교 전통들(개신교와 카톨릭 모두)과 보다 급진적인 전통들 사이의 지점에 위치하려고 여러 방면으로 시도했다는 것을 분별하는데 아마도 도움을 줄 것이다. 이 긴장의 양 측면을 긍정하는 감리교의 필연적인 경향 때문에 특별히 오순절운동의 테마들과 관련하여 이 문제가 표면에 떠오르는 세 영역을 재검토해 보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즉 웨슬레에게 있어서 원시 교회적 모티브들과 웨슬레가 성령의 신학자 로 불리는 것의 타당성 문제, 그리고 웨슬레의 성령의 은사 이해이다.
원시 교회적 모티브
웨슬레에게 있는 원시 교회적인 특징은 오순절파의 사도적 신앙 의 회복에 대한 관심과 직접적인 비교를 하게한다. 웨슬레는 분명히 자신을 옛 종교 , 혹은 진정한 원시적 기독교 32를 옹호하는 자로 이해했다. 이러한 주장의 이유를 웨슬레의 죠지아 초기 선교사역으로부터 부흥운동의 전성기를 거쳐 1749년에 번역물과 발췌물을 출판하기까지 그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한 논문에서 살펴 볼 수 있다. 웨슬레는 그가 편집한 크라우드 드 플로리(Claud de Fleury)의 저서인 The Manners of the Ancient Christians에서 다음과 같이 서두를 열었다.
기독교는 사람의 발명품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품이기 때문에 초기에 완전성을 부여 받았다. 사도들이 구원에 필요하며 유용한 어떤 진리를 모르고 있었다고 상상할 수 있겠는가.33
오순절파와 이미 상당한 뉴앙스의 차이가 있다. 사실 웨슬레는 그의 관심을- 초기에 분명히- 그 당시의 고교회적 영국 국교회파와 공유하고 있었다. 그 파의 주된 변증적 추진력은 앵글로-카토리시즘(Anglo-Catholicism)의 관습들을 교회의 처음 4세기에 입각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죠지아에서의 체험을 통해서 웨슬레는 초대교회의 제도와 관습을 엄격하게 회복시키려는 데에 실로 주요한 관심을 기울였다. 웨슬레는 성서시대 보다는 고대 문명인 (the ancient)에게 더 호소하는 것 같다. 그가 호소한 것은 교회의 처음 3세기, 즉 니케아 전의 교부시대와 콘스탄틴 이전의 교회시대였다.34 이러한 의미에서 웨슬레의 원시 기독교 형태는 오순절운동의 사도행전에 대한 성서시대적인 호소보다 어느 정도 역사적인 뉴앙스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웨슬레의 초기 원시 교회성은 1738년의 복음체험과 주변의 사건 및 영향에 의해 상당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 키퍼(Luke Keefer, Jr.)는 웨슬레의 교회론적 원시 교회성 은 구원론적 원시교회성 으로 변형되었다고 주장허다.35 이와 유사하게 스테플러(F. Ernest Stoeffler)는 그 때 이후로 웨슬레의 교회론은 경건주의의 영향에 의한 그의 종교적 갱신의 직접적인 결과인 구원론적 관심으로 채워지게 되었다. 36고 주장했다. 스테플러에 의하면 웨슬레의 교회이해 속에는 여러 면에서 영국 국교도적 성향이 잔존해 있다. 하지만 그것은 회복을 통한 개혁을 주장하는 교회와 관련을 맺고 있는 경건주의의 주장에 자리를 양보하기 위해 수정을 가한 이해이다. 37
이러한 구원론적 원시 교회성으로의 변형은(규범들을 고대 자료들 중에서 비교적 좀더 성서 쪽으로 변형시킨 것이라 할 수 있는) 웨슬레를 오순절주의에 더 가깝게 이끌어 가지만 여전히 아주 중대한 차이점이 있다. 앞으로 바로 고찰하게 될 것이나 웨슬레는 사도 혹은 교부시대 기독교의 성령의 은사를 회복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관습과 행동의 규범들을 회복시키는 일에 더 관심이 있었다. 위에서 인용한 플로리의 발췌물은 계속하여 그러므로 우리는 가장 완전한 삶의 유형은 초대 크리스챤에게서 찾아 보아야 한다 -웨슬레의 원시 교회적 모티브의 본질을 잘 요약하고 있는 문장이다-고 언급하고 있다.
성령의 신학자?
올더스케잎 체험 및 이와 관련된 영향에 의해 웨슬레가 이처럼 구원론적(원시 교회성)으로 전환한 것은 웨슬레를 어느 정도로 성령의 신학자 로 간주해야 하는가하는 중요한 문제를 야기시킨다. 몇몇 해석자들은 웨슬레를 그렇게 호칭하는 것은 적절하며, 그 문제는 웨슬레와 오순절운동과의 관계성을 결정하는데 아주 중요한 것이라고 주장 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퀘이커와 오순절파 같은 좀더 과격하고 성령론 지향적인 운동들과 그리스도와 말씀을 주축으로 하는 보다 고전적인 기독교에 대한 웨슬레의 위치문제를 다른 방법으로 제기하고 있다.
그 문제에 대한 학문적 불일치 상태가 그 문제의 복잡성을 말해주고 있다. 많은 해석자들, 특히 현대의 성결운동과 오순절운동 및 은사운동을 따르는 자들은 웨슬레를 본질상 성령의 신학자 38로 주장했다. 예를 들면 켈레트(Norman Laurence Kellett)는 그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요한 웨슬레와 18세기 영국교회의 성결론의 회복 39이라는 제목으로 감리교의 등장에 대해 고찰하고 있다. 반면에 웨슬레가 그의 구원론을 생동감있는 성령론에 연결시키지 못했음을 아쉬워하는 측들도 있다.40
의견의 불일치는 부분적으로 성령의 신학자 가 뜻하는 바를 둘러싼 용어상의 문제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켈레트의 연구는 사실상 복음적 부흥에서의 경험적, 혹은 실험적 기독교의 부흥에 대한 연구임에 틀림 없다. 웨슬레가 1938년에 구원론으로 전이(轉移)했고 계속해서 체험을 강조한 것은 분명히 성령의 사역에 관계된 테마들에 대해 큰 비중을 부여해 주지만41 그 충동이 웨슬레를 기독론 중심적인 경향이 있는 고전적인 기독교 유형으로부터 떠나게 할 정도로 충분히 강력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웨슬레가 과격한 전통들과 같이 보다 성령론적인 테마들로 나아가게 된
하나의 시점이 있다. 웨슬레를 광신자 로 트집잡게 한 주된 근거는 인지적 영감(靈感) 의 긍정(affirmation)에 뿌리를 둔 그의 확신교리였다.42 웨슬레는 시종일관 성령의 증거라는 것은 신자의 영혼 위에 나타나는 하나의 내적 인상(印象)으로, 이로써 하나님의 영은 신자들의 영혼에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직접적으로 증거하신다 43고 가르쳤다.
웨슬레는 이 가르침이 어느 정도 그를 과격주의자들의 입장에 서게했음을 인식하여 만약 퀘이커교도들이 나와 동일한 인지적 영감을 주장하는 것이라면 나는 기쁘다. 그리고 그들이 그것을 주장한다고 해서 전혀 더 나은 것도 더 나쁜 것도 없다 44고 언급하였다. 그러나 웨슬레는 이러한 체험이 교리를 세울 일은 아니고 단지 성서에 기초한 교리를 확증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45고 주장하면서 재빨리 그 교리를 제한하였다. 웨슬레는 또한 성령의 증거 를 성령의 열매 와 분리하는 것을 거부했고, 성령의 열매와 분리된 어떤 상상적인 성령의 증거를 믿을 생각조차 하지 말라 46고 권면했다. 앞으로 우리가 고찰할 것이지만, 성령의 열매에 대한 이러한 강조가 바로 웨슬레의 특징이며 과격주의자들과 구별되는 점이다.
그러나 경험적인 것에 관한 강조에 의해 생긴 이 확신의 교리, 또는 성령의 내적 증거와 구원론적 위치의 강화와는 별도로 웨슬레는 그의 사상유형에 있어 매우 기독론 중심적이다. 특히 성결운동과 오순절파의 후기 발전을
비교해 볼 때 더욱 그러하다. 구원의 도덕적 이상과 외양 모두가 확고하게 그리스도 안에 기초를 두고 있다. 웨슬레는 완전자 에 대한 묘사에서 종종 마음을 그리스도 안에 두고 그리스도처럼 행하는 자 47를 첫째로 언급하였다. 다른 신학자들이 대부분 바울의 구원론에서 자신의 구원론을 산출해 내는데 반해서 웨슬레는 산상수훈을 그의 구원관에 전적으로 편입시키며,48 마찬가지로 완전이라는 것을 예수께서 요약한 율법의 관점에서 자주 정의한다.
린드스트롬(Harold Lindstrom)은 웨슬레의 성화론이 그리스도 중심적인 배열을 이루고 있다 고 말한다.49 웨슬레를 성령의 신학자 로 언급하는 편인 스케빙톤 우드(A. Skevington Wood)도 결국 이러한 강조는 어느 정도 주의 깊은 통제를 요하는 일임을 지적한다. 우드는 언급하기를,
웨슬레는 성령의 구체적인 임무가 성자를 영화롭게 하며, 그리스도의 구원의 유익을 적용하는 것임을 깨달았다...웨슬레는 성서로부터 이러한 성령의 보조적인 역할을 명확하게 이해했기 때문에 그의 신학은 확고히 그리스도 중심적이다.50
웨슬레와 성령의 은사
보다 고전적인 그리스도 중심적 체계 속에 머무르면서 동시에 보다 과격한 성령론 중심적 입장의 테마들 쪽으로 움직이는 이러한 유형이 오순절운동의 비판적 문제인 성령의 은사에 대한 웨슬레의 이해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어떤 의미에서 웨슬레의 은사교리 취급은 비조직적이고 불완전하다. 그는 일관성 없이 때로는 고전적 기독교의 결론으로 되돌아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자신의 신학적 가정들에 따라 신념들을 발전시키기도 했다. 51
반면에 웨슬레는 기적적이고 비범한 은사들에 관한 교부들의 주장에 회의적인 미들톤(Coneyers Middleton)을 맹렬히 반박했다. 웨슬레는 그러한 은사와 기적은 처음 3세기 동안 계속되었었다고 주장했다.52
웨슬레는 영적인 냉담 이 콘스탄틴 이후에 은사와 기적이 쇠퇴하게 된 원인이라고 확신한 것 같다. 웨슬레는 그 원인이 더이상 은사의 기회가 없어서가 아니라 모든 세계가 크리스챤화 되었기 때문이었다 는 것을 부정하면서 오히려 크리스챤의 사랑이 차가워 졌다 , 즉 다시 이교도가 되었고 단지 죽은 형태만 남았었다 53고 주장했다.
반면 원시 기독교의 회복과 그가 인정했던 첫 3세기 동안의 특별한 규범성에 대한 관심에도 불구하고 웨슬레는 실제로 영적인 은사문제에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감리교도들은 사도들이 과거에 소유했던 거의 모든 사도적 은사들을 완전하고 풍부하게 소유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54는 비난을 종종 받았다. 웨슬레는 하나님은 통상적인 자연의 진행과정을 뛰어넘어 지금도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신다 55는 의미에서 기적의 계속성에 대한 여지를 남겨 놓았지만 동시에 감리교도들의 그러한 주장은 부인했다. 웨슬레의 관심은 근본적으로 다른 데 있었다.
성령의 이러한 은사가 모든 시대의 교회에 남아있도록 지정되었는가와
성령의 은사는 모든 것의 회복 이 가까워 올 때에 소생되는가 그렇지 않은가는 결정할 필요가 없는 문제이다.56
위에 암시된 바와 같이 웨슬레의 실제 관심은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였다. 그는 양자를 완전히 구별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실로 내가 뜻하는 바는 그리스도인들이 현재 기적을 행하기 위해 성령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의심할 바 없이 이 복된 성령의 열매로 충만해지기 위해 지금 성령을 받으며 충만하게 되는 것이다. 57
웨슬레는 비범한 성령의 은사들은 단지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주어진다고 생각했다. 그의 관심은 개인의 성화와 구원을 위해 성령이 모든 신자들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 것인가 58하는 것이었다.
웨슬레의 구원관
결국 우리는 웨슬레 사상의 기본 주제라 할 수 있는 그의 구원론에 이르게 되었다. 여기에서는 은혜의 단계적인 작용을 통한 하나님 형상의 회복이 강조된다. 웨슬레에 의해 확장된 다음의 귀절은 이러한 과정을 요약해 준다.
구원은 대개(그리고 아주 적합하게) 명명된 선행적 은총으로 출발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길 원하는 소망과 그의 의지에 대한 첫번째 빛의 여명 그리고 하나님께 죄를 범했다는 첫번째의 미세한 일시적 확신을 내포한다. 이 모든 것들은 삶을 향한 어떤 경향성, 즉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에 대해 맹목적이고 냉혹하며 둔감한 마음상태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는 것을 뜻한다. 구원은 깨우치는 은혜, 즉 성서에서 보통 회개라고 명하는 것에 의해 계속된다. 깨우치는 은혜는 더 광대한 분량의 지식을 가져오며 돌같은 마음으로부터 온전한 구원을 가져온다. 그 후에 우리는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크리스챤 본연의 구원을 체험한다. 이 구원은 의인과 성화라는 두개의 큰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의인에 의해 우리는 죄책에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리로 회복된다. 성화에 의해 우리는 죄의 세력과 뿌리에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된다. 성서뿐만 아니라 모든 경험을 통해 우리는 이 구원이 순간적이며 점진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구원은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거룩하고, 겸손하며, 온화하고, 참을성있는 사랑 속에서 우리가 의롭게 되는 그 순간에 시작된다. 그것은 그 순간부터 처음에는 모든 씨중 가장 작지만 후에는 큰 가지를 이루어 큰 나무가 되는 겨자씨처럼 차츰 성장한다. 다음 순간에 마음이 모든 죄에서 깨끗해지고 하나님과 사람을 향해 순수한 사랑이 충만해 지는 데까지 이르른다. 하지만 그 사랑도 우리가 모든 면에서 장성하여 우리의 머리이신 분에게 이르게 되고 , 그리스도의 완전한 분량에 이르는 데까지 성장한다.59
이 진술중 몇가지는 약간의 부차적인 언급이 필요하다. 첫째로, 우리는 웨슬레의 구원론이 의인과 같은 법적 테마를 넘어 강력한 성화론을 강조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그 방식을 주목해야 한다. 웨슬레 사상의 특징적인 점은 여기에 구원의 큰 두 가지 (branch), 즉 의인과 성화 로 표현한 2중의 강조에 있다. 아우틀러(Albert Outler)는 웨슬레가 성공회에 내재되어 있는 치료적 모티브를 발전시켰다고 주장한다. 성공회에서는 은혜를 주로 법정적 용서로 보지 않고 치유 혹은 회복시키는 60 힘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웨슬레가 위에서 주장한 것처럼 우리는 성화를 통해...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된다 고 본다.
웨슬레의 전적 성화론 혹은 그리스도인의 완전론 은 난해하며 다양한 각도의 연구가 시도되었다. 하나의 훌륭한 관점은 그것을 본성에 대한 비관주의 를 넘어서 은총의 낙관주의 를 나타내고 있는62 일종의 실현된 종말론 으로61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웨슬레에게 있어서 구원은 타락한 인간실존을 이 생에서 재정립하는 것이다. 웨슬레 자신이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기독자 완전이 그밖의 어떤 것을 의미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현재의 구원이다. 그것은 정말로 이 땅에서 얻을 수 있고 실제로 획득된 어떤 것이다. 63 다시 말해 구원은 죽음 저편에 놓여있는 축복이 아니다...그것은 멀리 떨어져 있는 그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의 일이며 하나님의 자유로운 자비를 통해서 당신이 현재 소유하고 있는 축복이다.64
이것이 감리교의 논쟁 대상이 되고있는 기독자 완전론 배후의 시각이다. 웨슬레는 근본적으로 완전 을 기대되어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것은 무지와 실수와 유혹으로부터의 탈피 65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합명칭상 소위 죄(즉 알려진 법에 대한 의도적인 위반) 66를 극복한 성장을 뜻한다. 웨슬레는 죄없는 완전 이라는 표현을 피하려고 노력했다. 그 표현이 죄에 대한 불가능(inability)의 뜻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웨슬레는 그 표현보다는 더 적극적인 그리스도의 마음 ,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 하나님과 이웃 사랑이라는 말을 더 좋아했다.
어떤 관점에서 그것은 의도의 순수성이요, 삶 전체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우리의 온 마음을 드리는 것이요, 우리의 온 성정을 억제하고자 하는 의도이며 계획이다. 그것은 일부분이 아니라 우리의 전 혼과 몸과 물질을 하나님께 바치는 헌신이다. 다른 관점에서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담겨있던 모든 마음으로써 우리를 그리스도의 행적에 따라 행할 수 있게 한다. 그것은 온갖 더러움과 내외적 불결을 탈피하는 마음의 할례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온전한 형상으로의 마음의 재생이며, 창조자를 온전하게 닮는 것이다. 또다른 관점에서 그것은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들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을 택하도록 하라(거기에는 아무런 실질적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67
이러한 주장들은 또한 기독자 완전의 목적론적 성격에 의해, 즉 기독자의 삶에 대한 이러한 시각이 훨씬 후대의 웨슬레 계통"의 사고방법인 출발점으로 보다는 계속해서 지향해야 할 목표로 취급되는 정도에 의해 웨슬레 안에서 제한을 받고 있다. 웨슬레는 기독자 완전에 대한 평이한 설명 (Plain Account of Christian Perfection)의 몇몇 귀절들에서 다른 기독교 전통들이 전적인 성화를 죽음 후의 일로 기대한다는 점을 인정한다.68 웨슬레는 이러한 상태가 초기에 성취될 수 있는가를 곰곰히 생각하다가 1767년에 Plain Account"에 부록으로 첨부한 개요에서 표현허던 것처럼 점차 확신에 이르게 되었다.
나는 이러한 순간이 일반적으로 죽음의 순간, 즉 영혼이 육체를 떠나는 그 순간임을 믿는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10년, 20년, 혹은 40년 전이 될 수도 있음을 믿는다. 나는 그것이 대개 의인 후 수년이 지나야 됨을 믿는다. 그러나 그것이 의인 후 5년 혹은 5개월 내에 있을 수 있음도 믿는다. 나는 결코 이에 반대되는 결정적인 논증을 알지 못한다.69
이 인용문은 웨슬레가 완전 을 인생의 정점인 목표로 보는 견해와 투쟁하기 시작한 정도(extent)를 보여준다. 후기의 웨슬레 사고 는 이 체험을 기독자 삶의 시작의 위치로 쉽사리 이동시켜 그것을 기독자 체험의 시작과 긴밀하게 연결시켰다.
성화에 대해서도 또한 점진적인 측면과 순간적인 측면이 강조되어야 하는가하는 유사한 모호성이 있었다. 웨슬레는 성화의 과정 속에 전적인 성화의 순간 이 있다고 주장했다.
만약 죽기 전에 죄가 없어진다면 일의 본질상 순간적인 변화가 있음에 틀림없다. 다시 말해 죄가 존재하는 마지막 순간과 죄가 존재하지 않는 처음 순간이 틀림없이 있다.70
그러나 웨슬레는 오랫동안 순간 (crisis)과 과정 (process) 중 어느 것에 우선권을 부여할 것인가에 대해 상당히 모호한 상태에 있었다. 월터스(Orville Walters)는 이 문제를 연구하여 웨슬레가 1772년에 이 모호성을 극복했다고 주장했다. 이때로부터 웨슬레는 비록 순간성에 과정과 점진적 성화가 뒤따르는 것이기는 하나 두번째 축복의 순간적 특징을 강조하였다는 것이다.71
두번째 순간의 의미
이때 오순절 운동이 감리교와 어떠한 관련이 있는가를 이해하고자 하는 중요한 문제가 대두되었다. 이 문제는 웨슬레 전통의 부분들을 한세기가 넘도록 괴롭히곤 하였던 문제이다. 웨슬레 사상이 전적 성화의 이러한 순간성 을 강조하고자 함이 분명하다면 이 체험을 신약성서의 오순절 사건에서 유래한 상(像)으로 이해되는 성령세례로 평하는 것이 타당한가의 문제였다.
웨슬레 자신은 그것이 그의 추종자들 중에서, 특히 그가 지정한 후계자로서 마델리의 덕망있는 목사인 플레처(John Fletcher)와 그의 총서 편집을 맡았던 벤슨(Joseph Benson)에게서 표면화 되었을 때 이러한 진전을 반대했던 것 같다.
이 논의는 단지 책 속에 있는 몇개의 힌트에 의해 재건될 수 밖에 없다. 주요 자료들은 입수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72 그것은 1770년대 초의 칼빈주의적 논쟁인 선택과 완전이라는 더 열렬한 문제 속에서 표면에 나타났던 것 같다. 그 논쟁은 결국 휫필드(George Whitefield)를 중심한 감리교의 칼빈주의 측과 웨슬레와 그의 동역자들 주변의 알미니안 측과의 연합을 깨뜨렸다. 이러한 투쟁은 웨일즈의 트레베카 대학에서 발생했는데 그 대학은 휫필드의 후원자인 헌팅돈(Huntingdon) 백작이 지원하고 있는 기관이었다. 교장인 벤슨(Joseph Benson)은 그의 알미니안적 견해 때문에 백작 부인에 의해 해고되었고, 이로 인해 학장인 플레처는 사임을 하였다.
벤슨에게 쓴 한 편지에서 플레처는 셜리(Walter Shirley) 목사가 그 대학을 방문해서 거기있는 동안에 당신이 성령세례'에 대해서 쓴 것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라고 기록했다. 벤슨은 이때까지 분명히 각자가 오순절 성령세례 속에서 완전 을 체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셜리가 요엘의 예언(행 2장)이 오순절 날 성취되었다 는 입장을 반대했기 때문이다.73
웨슬레는 이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는 확신을 공유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웨슬레는 두주 전에 벤슨에게 만인구원과 플레처의 후기 주장에 대해 말하는 것을 삼가도록 격려했기 때문이다.74 벤슨이 궁극적 만인 구원설 에 유혹을 받은 것은 분명하지만 후기의 관계는 모호하다. 웨슬레 편지의 편집자인 텔포드(John Telford)는 그것은 플레처의 성령 받음 교리 탓이라고 주장한다.75 웨슬레는 수개월 전에 전적 성화의 사건에 대해 말하는 플레처의 방식을 반대했다. 웨슬레는 내가 주장하는 모든 것, 즉 죄로부터의 전적인 구원, 하나님 형상의 온전한 회복, 우리의 마음과 영혼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을 플레처가 용인한다는 점은 수긍하지만 성령을 받는다 는 경구(警句)는 반대했다. 웨슬레는 모두가 의롭다 함을 받을 때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러한 면에서 그 경구는 비성서적이고 적합하지 못하다 76라고 주장하였다.
몇년 후에 플레처와 웨슬레는 그들의 차이점을 정리한 것같다. 그래서 서로 의견이 다르다는데 분명하게 동의하였다. 웨슬레가 주장하듯이,
완전에 대한 우리들의 견해가 반대되지는 않지만 약간 다른 것같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어린 아이들은 성령을 받았음이 분명하며 성령은 그 어린 아이의 영과 더불어 그 아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한다. 그러나 그 아이가 기독자 완전에 도달한 것은 아니다.77
플레처도 웨슬레와의 차이점에 대해서 더욱더 세심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감리교 설교가이며 후에 그의 아내가 된 보산퀴트(Mary Bosanquet) 양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나는 기독자 완전론을 무죄함(absence of sin)에 의거하지 않는다. 그러한 것은 비둘기나 양의 완전이다. 나는 또한 온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도 의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완전한 이방인들과 유대인들도 그렇게 했기 때문이다. 나는 기독자 완전을 보다 뛰어나고, 고상하며, 따뜻하고, 보다 강력한 사랑의 충만함에 의거한다. 그런데 그 사랑은 사도들이 성령의 사랑 혹은 성령에 의해 유출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부른 것이며 기독교 신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신자들은 오순절 날부터 그리스도 천계법 시대(Christian dispensation)의 완전을 향하여 계속해서 나아간다.78
비록 위의 편지 글귀가 웨슬레의 관점에 대해 명백한 반대를 나타낸 것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플레처는 그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표시한다.
당신은 웨슬레 씨의 기독자 완전과 성서적 기독교라는 설교에서 이 문제에 관한 나의 견해를 발견할 것이다. 거기에는 차이점이 있는데 나는 오순절 성력의 능력으로 세례를 받은 신자들과 주님께서 승천하신 후의 사도들 같이 그 능력으로 아직 충만치 못한 신자들을 보다 확실하게 구별하려 한다는 것이다.79
웨슬레와 프레처는 많은 공통점이 있었지만, 어의적이며 용어적인 것 이상의 차이점이 있었다. 이러한 갈등의 시사(示唆)는 그들의 동질성 밑에 깔려있는 근본적인 차이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다른 시대와 다른 상황하에서
이러한 미묘한 차이는 더 많은 주의를 끌게 되었고 감리교의 고전시대로부터 전해 내려온 근본적인 모호성을 보다 명료하게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미국 상황에서의 갈등을 포착하기 전에 이러한 미묘한 뉴앙스의 더 완전한 의미를 구별하기 위해 노력하여야 한다.
결정적 분리
플레처는 자신의 사상을 이해하는 열쇠는 웨슬레와 중요한 차이가 있는 그의 세대론에서 발견될 수 있음을 감지하였다. 웨슬레의 입장이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웨슬레는 역사를 그리스도에 의해, 보다 정확히 말해 그의 죽음으로 활력을 발휘하게 된 속죄에 의해서 근본적으로 두시대로 구분할 수 있다고 보는 보다 고전적인 개신교적 입장을 반영한 듯하다. 그래서 웨슬레는 행위의 언약 과 은혜의 언약 을 각각 유대인 세대 와 기독교인의 세대 로 언급할 수도 있다. 물론 성령은 오순절에서처럼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대행자와 그의 보조자로써이다. 이것은 비록 웨슬레가 은혜의 체험적 전유(專有)에 중요성을 둠에도 불구하고 기독론 중심적 체계 속에서 그렇게 한다는, 앞에서 언급한 관점을 반복하는 것이다.
그러나 플레처는 역사를 세 세대로 나누어진 것으로 보았다. 각 세대는 삼위일체의 각 위격과 동일시 되었으며, 각 세대는 하나님의 거대한 약속 80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세 세대중 첫번째는 성부 시대 인데 성자의 외적인 출현 을 고대한다. 성자 세대 는 세례 요한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성부의 약속 혹은 오순절에서의 성령의 부어주심을 고대한다. 세번째 세대, 성령 세대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한다.81 이러한 세대들은 구속사 운동, 혹은 인간 역사 안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단계에 대한 묘사일 뿐만아니라 또한- 아마도 본래는- 각 신자가 통과해야 하는 영적인 성장과 발전의 단계에 대한 묘사이기도 하다.82
이 세대론은 웨슬레의 특징과는 다른 방법으로 역사의 목적론적 움직임을 강조한다. 웨슬레가 마지막 심판과 같은 역사의 정점을 언급하긴 했지만 그의 종말론은 보다 더 각 개인의 죽음과 운명에 관한 문제 지향적인 것이었다.83 많은 사람이 기대하듯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에 대한 기대라는 의미에서의 종말론은 웨슬레에게 있어서 중요하지 않다. 이미 우리가 살펴 보았듯이 웨슬레는 우선적으로 구원론 지향적이다. 즉 그의 초점은 이 세상에서의 은혜의 전유에 있으며 또한 죽음과 영생에 필요한 준비로서 하나님의 형상 회복에 있다. 반면 플레처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약속에 더 관심을 기울이며 종종 다른 논의의 상황에서 그러한 것을 언급한다.84
플레처의 섭리론적 유형은 성령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며 또한 현 시대가 어떤 의미에서 특히 성령의 활동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시대라는 주장을 강조하는 것이다. 지금은 성령의 세대가 유효하기 때문에 이 세대를 설교하는 교역자를 열광주의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 85 플레처의 이러한 세대주의적인 추진력은 감리교를 그리스도 중심적 사고유형 쪽으로 이끌어 간다. 이와 비슷하게 세대적 체계를 개인의 영적 발전을 해석하는데 활용하게 되면 성령을 받는 것과 회심을 구분하는 경향이 있게 된다. 그러한 방식이 웨슬레를 괴롭게 하였다. 플레처는 초기 단계에서 성령을 배제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문제들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성령세례에 의해 시작되는 세번째 단계에서의 성령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었다. 덜 예민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이 체계를 사용했을 때 분리의 경향은 더욱 가속화 되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된 부분은 주석적 기초의 변화이다. 웨슬레가 초대교회의 삶을 회복 하는데 전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사도행전을 매우 드물게 참조하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이러한 것은 기독자 완전과 전적 성화론 논의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이 점에 대한 웨슬레 사상의 주석학적 기초에 대한 연구에서 생스터(W.E. Sangster)는 30개의 기본 텍스트를 발견하였다. 즉 에스겔에서 한 구절, 마태복음에서 세 구절, 바울 서신에서 열 구절, 요한일서에서 열 구절이다.86 사도행전은 오순절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는 것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플레처의 체계는 사도행전을 새롭게 탁월한 책으로 부각시킨다. 사실 그의 총서 성서색인을 보면 어떤 자료 보다도 사도행전이 많이 인용되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웨슬레와 플레처 사이의 중요한 주석학적 기초의 변화를 찾아낼 수 있다. 그것은 아마도 근본적으로 바울 혹은 요한의 방향에서 누가의 방향으로의 변화일 것이다. 이러한 차이점을 지나치게 부각시키기 쉬우나 이 관점은 보다 깊은 단계의 논의를 위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
세대론 자체도 분명히 누가 신학에 기초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편집사 연구는 결론을 도출하지 못한 폭풍우적인 논의점을 지니고 있는 쎈터이다. 그러나 콘첼만(Hans Conzelmann)이 성 누가의 신학에서 역사를 유사하게 세 기간, 즉 이스라엘 시대, 예수시대, 교회와 성령의 시대로 나누고 있음을 발견한 것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87 물론 콘첼만은 이것을 파루시아의 지연 에 대응한 구속사적 탈 종말론화 로 간주한다. 반면에 플레처는 이 누가의 자료를 근거로 하여 종말론적 지향성을 강화한다. 그러나 콘첼만의 편집사 연구는 매우 논란이 되고있는 것이며,88 혹자는 플레처가 은연중에 텍스트들에 부여하고 있는89 해석에 보다 더 일치하는 유형들을 누가문서에서 발견하려 하기도 한다.
다른 재미있는 문제들이 또한 발생한다. 피슨(J.E. Fison)은 사도행전에서의 성령은 아주 현저하게 엑스타시한 것이며 성 바울의 위대한 공헌은 성령의 활동의 초자연적이며 종말론적인 성격을 한치도 경감시키지 않으면서 윤리적인 특성에 우선권을 부여한다는 것 90이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논란이 되어왔다.91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주장은 플레처에게서 나타나고 있는 웨슬레와 상반된 미묘한 차이점은 각자가 중요성을 부여한 일련의 텍스트에 근거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해 준다. 이것은 위에 인용되었던 짧은 발췌에서 조차 플레처가 능력 을 강조한 것과 같은 몇가지 점에서 분명한 사실이다. 슈바이처(Edward Schweizer)는 키텔 사전(Kittel's Worterbuch)에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성령에 초점을 맞추며, (능력)와 (성령)를 거의 동의어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고 주장한다. 그리고 (예언하다)은 누가에게 있어서 성령의 사역으로써 가장 중심적인 것이다...성령을 일반적으로 개인 혹은 공동체에 계속해서 내주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문구는 단지 변두리에서만 보게된다.92
물론 우리는 플레처가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웨슬레의 사상에 의해 통제를 받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특색있는 테마들이 그의 사상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특히 보다 웨슬레적인 유형의 영향력이 여러가지 이유로 약화될 수 밖에 없었을 때 플레처의 영향을 받고 있던 자들은 다른 상황하에서 이러한 테마들을 뽑아내어 강화시킬 수 있었다.
그러한 역사적 발전에 관한 연구가 이 분석의 주요 주제이다. 그리고 오순절 신학의 역사적 뿌리는 이러한 변화들 속에서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이 그 과제의 주요 결과이다. 이러한 발전은 초기 감리교에서는 발생하지 않았다. 부분적으로는 웨슬레의 반대와 그러한 상황에서 자신의 모티브에 대한 그의 지배력 때문이었다. 미국은 이러한 변화를 위한 장(context)을 제공해 주었다. 이제 우리는 그 내용(story)에로 방향을 돌려야 한다.
제 3 장
기독자 완전의 미국적 부흥
감리교는 진정한 존재 운명을 미국에서 발견하였다. 필립 샤프(Philip Schaff)는 이미 19세기 중반에 (감리교 운동은) 모든 교회종파 중에서 아마도 청교도주의 다음으로 미국의 일반 종교생활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 1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놀라운 일이다. 왜냐하면 미국혁명 시기까지 미국의 감리교는 조직화되지 못하고 새세계에 겨우 발판만을 마련한 변두리의 소종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1820년에 이르러 감리교는 빠른 신장세의 침례교와 회원수에서 어깨를 견주게 되었고, 19세기 미국 개신교 내의 가장 큰 교파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1840년 경이 되자 감리교는 10:6의 비율로 침례교를 앞질렀다. 또한 식민지 미국의 가장 큰 교파들인 장로교회, 회중교회, 감독교회, 루터교회, 개혁교회의 총 인원수와도 비슷한 비율로2 앞서게 되었다.
감리교의 이러한 놀라운 성장의 원인은 여러가지이다. 웨슬레 운동은 미국의 활력이 정점에 달했을 때 미국을 강타했다. 웨슬레 계통의 부흥사들과 순회 목사들은 평신도와 새신자들의 동참으로 그들의 힘이 증대 되면서 미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고, 서부의 정착에 따라 팽창하는 개척지에 특히 적합한 자들임을 입증하였다. 그리고 감리교의 알미니안적이고 완전주의자적인 모티브는 명시적, 암시적으로 공히 그 시대의 낙천적 팽창주의를 표현하고 부추기기에 적합한 배경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19세기의 미국에 대한 해석자들이 그 시대를 미국의 감리교 시대 3로 표현할 정도로 감리교의 영향력이 커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당시 감리교도들 사이에서 발생했던 것은 우리가 때때로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폭넓은 문화적인 중요성을 내포한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감리교 시대는 특정한 한 교파가 미국에서 가장 큰 교파로 성장한 것 그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감리교가 많은 타 그룹들을 위해 중대한 기류를 조성했음을 의미한다. 감리교 이념과 관습은 많은 타 교파들, 특히 개혁주의 진영에 스며들었다. 18세기의 대각성운동은 청교도적 칼빈주의를 퇴조시켰고, 소위 미국 신학의 알미니안화 4에 공헌을 했다. 부흥운동의 등장에서 정점에 도달한 이 추진력은 성장세의 감리교와 연합하여 남북전쟁 전의 미국을 지배했던 복음적인 종교와 문화의 합성적 토대를 놓았다. 그러기에 스미스(Timothy L. Smith)는 남북전쟁 전야에 미국을 지배하던 종교의 힘을 부흥주의적 칼빈주의 와 복음적 알미니안주의 의 연합- 기독자 완전론을 포함하여 감리교 사상이 지배하는 연합- 이라고 평한다.5
그 시대에 칼빈주의적인 부흥운동가 중에서 가장 유력했던 인물은 새로운 스타일인 새로운 방식 (New Measures)의 부흥운동을 주창한, 논쟁을 좋아하는 챨스 피니(Charles Grandison Finney)였다. 리챠드 카워딘(Richard Carwardine)은 이러한 유형의 부흥운동은 감리교 사상과 관습이 장로교와 회중교회 단체들에 침투하여 나타나게 된 것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것들 중에는 열심석 (anxious bench)의 활용과 남녀 혼합모임 에서 여자들이 말하고 기도하는 것에 대한 격려, 보다 감정 지향적인 즉흥 설교, 그리고 알미니안 신학에 대한 분발 등이 있다. 이 모두는 감리교적인 모티브와 관례가 지배하는 문화를 여과한 것들이다.6 피니가 웨슬레에 근접한 성화론을 채택한 것과 뒤따라 등장한 1830년대의 오벌린 완전주의 의 발전에서 그러한 과정의 정점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진정한 관심은 웨슬레의 기독자 완전론이 미국 무대에서 변천되었다는 점에 있다. 감리교는 전장(前章)에서 묘사한 신학적 발전의 와중에 대서양을 건너가 곧바로는 아니었지만 그 독특한 교리를 배양하는데 더 적합한 토양을 찾아냈다.
그 문제는 논란이 되고있다.7 아마도 초기에는 기독자 완전이 존중되기는 했으나 (감리교) 설교의 지배적인 특징을 이루지는 않았다 8고 말하는 편이 공정할 것이다. 피터스(John Peters)는 개척자적인 상황이 감리교인들에게 구원 설교를 더 많이 하도록 고무시켰다고 주장했다. 문헌연구가 이러한 결론을 확증해준다. 두번째 축복에 대한 설교는 항상 감리교 초기부터
관심의 문제이기는 했지만 특히 제 2세대 기독교인의 영적 상태에 적합했다는 느낌이 든다.
성결 부흥운동의 등장
기독자 완전에 대한 강조는 비록 간과되었지만 19세기 미국 신앙생활의 중요한 특색이었던 성결운동 (the Holiness crusade)을 초래하게 했다. 그러나 그러한 조류가 특히 1830년 대에 등장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해서는 안된다.9 다가올 것의 초기 전조는 1825년 감리교 감독교회에 의해 출판된 The Christian's Manual; a Treatise on Christian Perfection, with Directions for Obtaining That State라는 제목의 소책자였다.10 저자는 뉴 잉글랜드의 뛰어난 목사로 그 당시에 보스톤에 머물고 있었다. 기독자 완전론은 그가 좋아하는 주제였고 그는 그것의 살아있는 본보기였다. 11 이러한 관심은 1839년에 그로 하여금 Guide to Christian Perfection의 기초를 마련하게 했다. Guide to Christian Perfection은 특히 감리교 내에 등장했을 때 후의 편집자들에 의해 성결부흥운동의 지배적인 기관지가 될 운명의 것이 되었다.
반면 뉴욕에서는 의사 부인인 포에브 팔머(Phoebe Palmer)와 그녀의 자매인 랑크포드(Sarah Lankford)가 성화를 체험하게 되었다. 포에브는 이 체험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회심할 때에 깨달아 알게되는 확신(assurance)을 얻었고, 성결부흥운동의 주요 인물이 되게 되었다. 첫째로는 팔머의 가정에서 거의 60년간 회합을 가졌던 성결 향상을 위한 수요 모임 의 제 일의 지도자로, 다음에는 메리트(Meritt)가 창립한 잡지(Guide to Holiness로 재 명명 됨)의 편집인으로, 마지막으로 북 아메리카 대륙과 구세계(the Old World) 양쪽 모두를 두루 여행하는 순회 전도자로써였다. 우리 시대 은사운동의 가정 모임과 비슷한 팔머 가정의 거실 모임은 널리 확대되어 19세기 말에는 방대한 성결 모임 조직을 형성하게 했다. 팔머의 가정 모임은 1835년에 시작되어 1839년에 남자들에게도 개방되었으며, 감리교 감독들과 지도자들을 감화시켰고 교파의 범주를 넘어 폭넓은 영향을 미친 웨슬레의 기독자 완전론을 재해석하는 쎈터가 되었다.
동시에 개혁파의 부흥운동도 같은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고, 성결 이라는 테마가 그 시대의 문서 속에 스며들었다. 테일러(Nathaniel Taylor)의 예일대학 New Divinity" 신념들은 자연히 성결과 성화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다.12 비처(Edward Beecher)는 그의 부친과 형제 자매들이 더 널리 알려져 있는 인물인데, "전교회에 두드러진 성결의 본성, 중요성, 수단"에 관한 여섯 편의 설교를 American National Preacher에 게재했다.13 더 유명한 챨스 피니는 그 축복 을 개인적으로 체험하기 전에 그 주제를 포착하였다. 피니는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친 그의 Lectures to Professing Christians에서 그 체험을 얻는 실마리를 위해 웨슬레의 전통으로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다.14 그의 Lectures to Professing Christians는 처음에는 New York Evangelist에 게재되었으나 1837년에 책 형태로 편집된 것이다.
이 문제는 전년에 오벌린 대학의 한 모임에서 어느 학생이 마한(Asa Mahan) 학장에게 우리가 그리스도께 성화를 기대할 때 어떤 정도의 성화를 그로부터 기대할 수 있읍니까? 우리는 전적인 성화를 기대할 수 있읍니까 15라고 질문함으로써 제기되었다. 이 질문은 마한과 오벌린 대학의 신학 교수였던 피니로 하여금 전적 성화에 대한 연구를 추진케 했다. 그 연구는 그 축복 의 발견과 오벌린 대학의 완전주의(Oberlin perfectionism)가 등장하게 된데서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오벌린 완전주의는 Oberlin Evangelist와 마한의 영향력 있는 주석서인 The Scripture Doctrine of Chrstian Perfection에서 다양하게 전개되었던 하나의 가르침(teaching)이다.16
오벌린의 완전주의는 성격상 웨슬레적이었다. 비록 주변 상황에 의해(명시적 또는 암시적으로) 도덕법 (마한의 도덕철학과 칸트주의적 경향을 반영하는)과 자유의지 (완전에의 부름은 그것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을 암시한다고 주장하는 피니에게 있어 특히)에 더 비중을 두는 칼빈주의적 신신학(New Divinity)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말이다. Methodist Quaterly Review의 편집자이며 몇년 후에 비슷한 연구서인 Scripture Doctrine of Christian Perfection17의 저자가 된 펙(George Peck)은 마한의 책에 대한 서평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그가 이 위대한 교리의 모든 면에 대해 감리교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는 없겠지만 기독자 완전이 뜻하는 바가 그 책에 충실하게 설
명되어 있어 만족스럽다.18
마한의 책은 데젠(H.V. Degen)에 의해 출판되었다. 데젠은 감리교 뿌리를 지닌 Guide to Chritian Perfectian의 두번째 편집자였다. 그 다음 10년 동안 오벌린과 팔머 가족 간의 다정한 교섭과 상호작용은 양자가 구조상의 유사성을 느꼈다는 것을 입증한다. the Guide 주변의 원(圓)들 속에 웨슬레도, 플레처도, 마한도, 업함(Upham)도 아니고 오직 거룩한 성서만이 처음과 마지막이며 항상 중앙에 위치한다 19고 종종 되풀되는 진술은 어느 정도 부정적이기는 해도 성결부흥운동 대가들의 성좌를 나타내준다.
기독자 완전의 교리와 체험을 게재한 책과 정기 간행물이 전 미국 프로테스탄트 세계에 폭발적으로 증가하도록 문화가 무르익었다. 1857-1858년의 부흥은 특히 성결과 완전주의 운동의 이상을 널리 유포하였으며 20, 19세기 후반에 가지각색의 다양한 표현으로 나누어지기 전에 성결과 완전주의 운동이 문화적으로 폭넓게 미친 효과의 정점을 보여 주었다.
1840년 대에 부쉬넬(Horace Bushnell)은 이러한 조류의 영향을 받았는데 특히 회중교회파인 업함(Thomas Upham)의 저서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부쉬넬의 후기 작품은 암암리에 내포된 영향력을 나타내고 있다.21 동시에 장로교인인 보드맨(W.E.Boardman)도 이 방향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그의 Higher Christian Life22는 1858년에 있었던 부흥의 절정기에 출판되었다. 이 책은 모든 교파들 가운데 널리 확산되어 있던 이 주제에 대해 최초로 대중적인 취급 을 가능케 한 새로운 용어를 제공하였다.23 영국 감리교도인 피어스(Mark Guy Pearse)는 보드맨의 저서를 통해 초기 감리교의 경멸받던 교리가 모든 교파의 영광스러운 유산이 되었다. 24고 논평했다. 침례교인인 얼(A.B. Earle)과 다른 사람들은 1859년에 성화를 체험하고 그 체험을 침례교에 전수하였다.25 다음 장에서 다루게 될 의사인 컬리스(Charles Cullis)는 비슷한 테마들을 감독교회에 전달했다.26
신학의 새로운 방향
비록 이러한 후기의 조류는 다양한 표현과 용어가 증가했음을 나타내지만 남북전쟁 전의 기독자 완전과 전적 성화에 대한 표현은 기본적으로 웨슬레적인 특징을 유지했다. 그러나 미국의 상황은 곧 감리교의 사상을 새 방향으로 형태를 취하게 하였다. 보다 넓은 신학의 테마들에 미친 일반적인 영향에 대한 분석이 수차례나 시도되었다. 차일스(Robert Chiles)는 계시에서 이성으로 , 죄인에서 자연인으로 , 자유로운 은총에서 자유의지로 27라는 미묘한 전이의 관점에서 감리교 신학의 미국화에 수반된 변화의 뉴앙스를 추적 하였다. 도덕적 행위와 자유의지 에 대한 점증하는 강조는 부흥운동들과 오벌린의 완전주의를 통해 중재된 신신학(New Divinity)과 상호작용을 일으키면서 이 시기에 어느 정도 강화되었다.
전적 성화론 또한 새로운 뉴앙스를 지니게 되었다. 은혜의 두번째의 뚜렷한 역사인 두번째 축복의 순간적인 특성을 강조함으로 웨슬레의 순간과 과정 사이의 긴장을 해소시키려는 경향이 가장 눈에 띄었다. 이러한 발전은 어느 정도 이미 영국에서 후기 웨슬레와 특히 아담 클라크(Adam Clarke)의 작품에서 있었던 것이다.28 클라크의 영향력 있는 성경주석이 1811년과 1825년 사이에 미국에서 최초로 출판되었고, 그의 작품들이 1835년에 Christian Theology란 명칭으로 출판되었다. 그 책 속에서 클라크는 다음과 같이 항의했다.
성서의 그 어느 부분에서도 우리는 점진적인 성결을 찾을 수 없다. 우리는 순간적인 용서와 마찬가지로 모든 죄로부터 순간적이며 완전한 정결을 위해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성서에는 순차적인 용서도, 점진적인 정결도 실재하지 않는다. 영혼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지식에서 잘 자랄 수 있는 것은 영혼이 모든 죄로부터 정결케 될 때이다.29
이러한 강조는 순간을 지지하는 쪽으로 웨슬레 사상 속에 있는 긴장을 해결 할 뿐 아니라 웨슬레 사상의 목적론적인 성격을 잘라버려 전적 성화를 신자의 초기 단계의 체험으로 옮겨 놓는다. 전적 성화는 정상적인 신자의 생활양식의 목표라기 보다는 전제(前提)가 된다. 더닝(H.Ray Dunning)은 클라크의 이러한 변화는 사랑에 있어서의 완전이라기 보다는 죄로부터의 구원'이라는 용어로 성화의 의미를 규정하는 30 경향에 의해 수반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비슷한 경향이 팔머(Phoebe Palmer)의 사상에 나타나는데, 그녀는 두번째 축복의 즉각적인 체험 가능성을 강조한 제단 신학 (altar theology)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녀는 자신의 영적 투쟁 속에서 성결은 그녀가 도달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주님의 구속을 받은 모든 자가 거주해야 하는 은혜의 상태 31인 것을 알게 되었다. 제단이...그 은사를 성화시킨다 는 본문에 호소하여 그녀는 일단 성별 이 되면 신자는 믿음을 행사해야 만 하고 또한 확신을 가져오는 감정이 동반되지 않을 지라도 전적 성화를 단언해야 한다 32고 주장했다. 이러한 가르침은 보다 18세기 감리교의 특색인 영적 투쟁을 증발시켜 버리는 경향이 있었으며 그 체험의 직접적 전유(appropriation)를 고무시켰다. 결국 당신이 그것을 획득했다면 그것은 이미 당신의 것이다. 만약 당신이 그것을 현재 받지 못했다면 그 지연의 책임은 하나님 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당신 자신에게 있다. 33
이러한 주장은 클라크의 운동을 기독자 완전의 목적론적 특성을 강조하지 않고 크리스챤의 회심과 입회(initiation)에 더 밀접하게 연관된 체험으로 단정하는 쪽으로 촉진시켰다.
오벌린의 가르침은 이 점에 있어 더욱 복잡했다. 비록 그것이 알미니안주의화 하는 신신학(New Divinity)의 와중에서 등장했지만 초기 오벌린 신학은 완전을 성취하게 하는 확실한 방편들 보다는 완전의 가능성을 더 강조했다.34 그러나 대부분의 오벌린 대학 교수들은 어떤 종류의 두번째 체험을 주장했다. 상반되는 두 도덕상태인 죄와 성결의 공존은 불가능하기에 선한 도덕행위는 본래 완전한 것이라는 도덕행위의 단순성 교리는 그 문제를 더욱 더 복잡하게 했다.35 이러한 발전과 다른 발전들은 오벌린 학파를 조각내는 경향이 있었다. 마한은 더욱 더 감리교 쪽으로 향해 나아가면서 성결신학의 발전에 계속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반면 피니는 점점 더 웨슬레 계통의 설명으로부터 물러났다.
그러나 피니의 부흥주의적 스타일은 팔머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 속에 나타난 성화의 미국적 발전에 도움을 주게한 보다 심오한 차원이 있다. 이것은 피니의 직접성과 실용주의에 대한 감각과 18세기 각성운동의 테마들을 비교해 보면 보다 쉽게 알 수 있다. 피니는 현재적 구원의 유용성을 강조하고 부흥을 일으키는데 있어서 인간행위의 역할을 높이 평가한다. 이러한 피니의 입장은 부흥을 하나님의 역사 로, 회심을 하나님 자신의 시각에서 허용되는 기적으로 진술하는 죠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와 그의 추종자들의 관심사를 잘라버린다.36 피니는 스위트(William Warren Sweet)와의 담화에서 회심을 종교체험의 마지막으로 여긴 옛 부흥운동과는 대조적으로 구원을 종교체험의 시작이라고 했다. 37 이것이 바로 웨슬레와 팔머 간의 차이점이다. 그리고 이것은 웨슬레 사상이 미국의 부흥운동 내에서 토착화된 데서 결과된 성화에 대한 새로운 뉴앙스의 정도(程度)를 나타내 준다.
이러한 발전은 뒤따라 일어날 일에 대한 필요한 전조였다. 순간 이 과정 을 압도하여 성화는 주로 분명한 시점에서 발생하는 사건이 된다. 즉 성화가 주로 전적 성화에 흡수되고, 기독자 완전의 목적론적인 추진력이 보통 회심 즉시 뒤따르는 초기의 체험으로 전도된다. 전적 성화에 대한 오순절 계통의 기술이 재등장할 무대가 마련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에 대한 암시는 좀더 일찍부터 나타났었지만 이러한 것의 등장은 19세기 중엽에 아주 뚜렷하였다.
이러한 변화가 좀더 일찍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전적 성화의 미국적 부흥이 일부는 미국문화에 뿌리내린 폭넓은 완전주의자의 영향 하에 수행되었다는 사실에 의해 아마 가장 잘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초기 저작들은 다른 가능한 표현보다 완전이라는 개념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Guide to Perfection과 마한(Asa Mahan)의 Scripture Doctrine of Christian Perfection이라는 제목들과 메리트(Timothy Meritt) 저작인 The Christian's Manual의 부제(副題)에서 이미 보았다. 우리는 또한 Methodist Quarterly Review의 편집자인 펙(George Peck)이 쓴 The Scripture Doctrine of Christian Stated and Defended라는 책에 대해서도 언급했다.38 펙의 형제인 제시(Jesse)도 그의 책 The Central Idea of Christianity39에서 기독자 완전을 주장했다. 비록 1856년에 이르러 책 제목을 Guide to Holiness로 바꾼데서 나타나는 것처럼 성결이라는 용어를 점차로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팔머도 물론 1850년대 후반기까지는 그녀의 책 대부분에서 후자(後者)의 형태를 반영하고 있다.
오순절 상(像)의 등장
의심할 바 없이 오벌린의 완전주의는 역시 플레처의 사상 유형이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을 둔화시켰고, 19세기 후반기의 특징인 오순절 성화로 전환하는 것을 지연시켰다. 그러나 거듭된 조회에서 분명히 드러나듯이 부흥운동과 심지어는 완전주의까지도 그 원천은 웨슬레와 플레처이다. 플레처와 벤슨의 저작품들이 미국에서 발간되었고, The Christian's Manual 같은 개요서들은 웨슬레와 함께 플레처를 인용하였다.
아마도 완전론의 대중적인 발전을 위해 더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널리 유포된 로저스(Hester Ann Rogers)의 영적 자서전 등의 항목이었을 것이다.
그는 플레처에 아주 근접했고 성화를 묘사하기 위해 때때로 오순절 상(imagery)을 사용했다.40 우리는 미국의 초기 감리교 문헌 속에서도 성화의 체험에 대해 특별한 언급이 없는 보다 일반적인 방법으로 이기는 하지만, 가끔씩 오순절 언어를 사용한 경우를 발견할 수 있다.41 Oberlin Evangelist와 Guide to Holiness 모두에서 그 어휘는 보다 일반적인 각성 혹은 부흥 -그 중대한 원형을 오순절로 간주할 수 있는- 혹은 크리스챤이나 교역자의 특별한 기름부음 을 지칭하는데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전적 성화의 발견에 따라 오벌린에는 오순절 언어의 특별한 폭발이 있었다. 스미스(Timothy Smith)는 피니가 1839년과 1840년에 Oberlin Evangelist에 발표한 일련의 강의에서 이러한 방향으로 움직였음을 지적하였다.42 그러나 좀더 형식적(formal)이며 널리 배포된 View of Sanctification43과 수년 후에 출판된 그의 조직신학 책에서는 오순절 상을 사용하지 않았다. 나사렛 교회의 첫번째 조직신학서를 쓰고자 했던 회중교도이며 피니의 학생인 힐스(A.M. Hills)는 비록 피니가 때때로 거의 그 진리에 도달하기는 했지만 성화의 획득을 성령세례와 연관시키는데 실패한 점을 후에 애석해 했다.44 훨씬 뒤인 1871년에 피니는 오벌린의 회중주의 위원회(Oberlin Council of Congregationalism)에서 성령세례 에 관해 연설하길 원했지만 그 때는 이미 그 교리가 널리 퍼졌고 초기의 특징적인 성결이 사라진 후였다.45
오벌린 대학의 다른 교수들은 성화에 있어서 성령을 보다 분명히 강조했고 성화의 체험을 오순절과 연관시키려는 경향이 있었다. 카울스(Henry Cowels)는 1840년에 Oberlin Evangelist에 게재하기 위해 성령세례 에 관한 두 편의 짧은 설교를 준비했다. 두번째 설교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결론 지었다.
구원의 계획상 숙고해야 할 최고의 목표는 교회의 성화이며, 구원의 계획을 성취하는 유효하고 중대한 능력은 성령세례이다.46
카울스의 후기 저서 중에 On Being Filled With the Holy Ghost47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그러나 아마도 몰간(John Morgan)의 저작들이 더 흥미로울 것이다. 몰간은 그 문제에 관해서 Oberlin Quaterly Review의 제 1권(1845)에 두 편의 논문을 게재했다. 첫 논문은 The Holiness Acceptable unto God"인데 피니가 그 논문을 그의 조직신학 제 1판(1847)48에 끼워넣을 정도로 피니를 매료시켰다. 그러나 두번째 논문인 The Gift of the Holy Spirit"에서는 오순절의 충만한 성령세례는 원시교회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모든 신자 공동의 특권 49이라고 주장했다. 몰간은 또한 성령세례는 성도들의 색다른 특권이며 죄인을 회심시키는 하나님의 영의 영향 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50
이 두 논문은 성결과 완전이라는 테마를 계속하여 오순절의 기사(記事) 속에 통합시키고자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또한 숙고하고 있다. 첫 논문은 성령의 사역에 대한 특별한 강조 없이 성결론을 펼친다. 성령에 관한 두번째 논문에서 완전론은 위로부터 능력을 부여 받음 에 대한 강조로 바뀐다.
그러나 남북전쟁 이후에는 오벌린의 저서에 되돌아 가는 경향이 있긴 했지만 그 당시에는 오벌린의 논문은 별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스미스는 아마도 오벌린의 논문에서 기원된 듯한 1840년대의 감리교도들 가운데 절연되어 있는 몇몇 병렬회로들(isolated parallels)에 주의를 돌리게 되었다.51 그 당시에 출현하고 있던 성결운동에 대한 오벌린의 영향력이 쇠퇴하고 팔머가 등장함에 따라 비록 감리교의 문헌과 Guide to Holiness에 가끔씩 오순절파의 상(像)과 심지어는 오순절과 전적 성화의 동일시가 나타나기는 하나 이러한 것들은 뒷전으로 사라졌다. 오순절파의 성화론은 대체로 1857-1858년의 부흥 시에 주로 폭넓게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볼 수 있다.
오순절 수사학에로의 전환
이러한 변화를 위한 길이 잘 예비되어 있었다. 부흥이라는 개념 속에 내포되어 있는 회복운동에 기초하여 원시 교회의 생명력을 회복하기 위한 관심이 자라고 있었다. 이러한 실예가 침례교도인 피쉬(Henry C. Fish)가 쓴, 많이 논의되었던 특별논문 이다. 그 논문은 Primitive Piety Revived라는 제목으로 보스톤에 있는 회중교회 출판사에 의해 출판되었다. 이 논문은 무엇보다도 먼저 목적의 단순성-하나님께 성별-성서적 신앙-그리스도를 위한 자기 부정-열심-개인주의(즉 개인의 책임성) 52 같은 테마들을 불러일으킴으로서 1858년의 각성운동을 가능케 했고 저자에게 로체스터 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수여받게 했다.53 그 논문에서 피쉬는 왜 우리는 오순절의 계절이 다시 오는 것을 기대하지 않는가? 현재 크리스챤들은 왜 원시시대의 크리스챤들처럼 성령충만'할 수 없는가? 라고 질문하면서 사도시대 상황으로 되돌아 가는 것, 특히 영원히 기억될 수 있는 오순절 시대로 되돌아 가는 것 54을 추구하였다.
피쉬는 물론 웨슬레 사상체계나 웨슬레 사상의 새롭게 해석된 성결운동
체계를 염두에 두지는 않았지만, 그의 책은 오순절과 부흥운동의 회복주의적 돌진에 의해 자연적으로 결과된 오순절 특징의 테마들에 대해 관심이 폭넓게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상(像)과 그 방향에 있어서 훨씬 더 분명하게 오순절적인 또 하나의 인기있는 그의 책이 그 다음 해(1856)에 출판되었다. 그 책은 다음 3년 동안 18판을 돌파하였다. 또한 영국 감리교도인 아더(William Arthur)가 저술했고 후에 하기 야외강습회의 교재로 채택되었던 The Tongue of Fire도 그 시대에 오순절을 회복시킬 전반적인 부흥을 기대했다. The Tongue of Fire는 뒤따라 올 많은 것들보다도 더욱 민감하게 새로운 오순절 이 교회에 미치는 효력에 대해 주로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 책은 웨슬레적인 배경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은연중에 오순절적인 성화의 개념을 전달했다. 그 책은 다음과 같은 기도로 결론을 맺는다.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시고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성령이시여, 이제 온 교회에 임하셔서 이 시대에 오순절을 회복시키시고 당신의 백성 모두에게 세례를 베풀어 주소서- 오, 그들을 이제 다시 불의 혀로 세례를 주소서! 이 18세기를 지난 세기의 부흥보다도, 1세기의 부흥보다도,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허용되었던 그 어떤 성령의 나타남 보다도 더 위대한 순결하고 더렵혀지지 않은 종교 의 부흥으로 관을 씌워 주소서!55
1857-1858년의 부흥은 그러한 간절한 기도의 응답으로 보일 수 밖에 없었다. 수년 후에 그 사건을 회고해 보면서 Guide to Holiness는 그 부흥운동의 재미있는 하나의 결과는 그 부흥이 시작된 이래로 모든 제(諸)교파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결이라는 테마에 대해 더 깊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는 것 56이라고 논평했다. 이러한 발전은 부흥의 영향을 묘사하는데 있어서 오순절 상을 과다하게 사용한 데서 발생했다. 한 신문(journal)은 부흥운동이 오순절 날에 있었던 것처럼 접하는 모든 것들을 휩쓸면서 지금 우리나라 전역을 뒤덮고 있다. 목사들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것처럼 보이며 새로운 능력과 열정으로 설교한다 57고 보도했다. 또 하나의 동시대 보고서는 표제를 Pentecost 혹은 the Work of God in Philadelphia, A.D. 185858로 달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발전 중에 있던 성결운동의 기류들이 그들의 독특한 메시지를 선포하기 위해 점점 오순절의 테마들 쪽으로 선회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그러한 운동이 계속 감리교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19세기 후반의 부흥운동 기운 중 많은 부분을 채움에 따라 오순절 테마로의 선회가 19세기 후반부의 지배적인 양상을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원인은 복합적이다. 플레처의 오순절 성향의 체계가 성결 사상을 압도한 것은 틀림없이 문화적이며 신학적인 많은 요인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59 그리고 우리는 점증하는 이러한 변화 상황의 복잡성에 주목해야 한다.
1858년의 부흥은 결정적인 노선으로 문화를 형성하려는 하나의 기독교 미국 을 위한 최후의 대 각성 이었을 것이다. 남북전쟁 시기는 전쟁 이전의 복음주의적 일치가 붕괴되는 출발점이다. 노예제도에 대한 싸움은 주요 교파들을 갈라지게 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분열을 유발시키기도 했다(예를 들어 감리교 내에서 반(反)노예 웨슬레 감리교 단체와 자유 감리교회 등이 있었다. 이들은 후에 성장하고 있던 성결운동에 대부분 흡수되었다). 지질학의 새로운 연대추정과 다윈의 진화론적 주장 등의 새로운 과학 지식과 이론들은 새로운 긴장을 돌출시켜 결국 다음 세기 초에 근본주의와 현대주의 논쟁이라는 신랄한 분열을 낳게 하였다. 이민, 특히 카토릭과 후의 유대교인들의 이민은 기독교 미국(물론 개신교적인) 에 대한 꿈의 터전을 뒤흔들어 놓았고 복수(複數)주의라는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 냈다.
세속화의 힘은 추진력을 얻어서 많은 사람들, 특히 전전(戰前)의 복음주의적인 스타일을 고수하려고 하는 자들을 방어적이고 반동적인 입장에 서도록 강압했다. 산업화와 도시화는 사회상황을 복잡하게 만들었고, 평등주의를 지향하는 잭슨파(Jacksonian)와 복음주의파의 추력을 거의 무력화시킬 정도로 사회 내에 계급차를 가속화 시켰다.
교회는 각 계급에 따라 분열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19세기 중반 감리교의 사회적 상향화 모빌리티(mobility)는 대중과 더 많은 접촉을 유지하려 하는 성결운동을 포함한 많은 분파들을 촉진시킨 분명한 요인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가운데 19세기 유형의 소종파 형태가 보다 강렬했다.
이러한 모든 요소들과 보다 신학적이며 주석적인 요소들은 전통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노력하던 웨슬레 사상을 변형시키는데 일조하였다.
첫째로, 폭넓은 문화적 낙관주의와 웨슬레 사상에 대한 관심을 일깨워 주었던 완전주의의 분발은 남북전쟁 전에 이미 수그러들었다. 삶은 예상했던 것 보다 복잡하고 악은 기대했던 것 보다 더욱 침범해 들어오는 것같아 보였다. Guide to Christian Perfection의 편집자인 메리트 또는 데전(Henry Degen) 같은 기독자 완전 의 초기 주창자들과, 반노예 웨슬레 감리교 단체의 창립자들, 그리고 오벌린 대학의 초기 지도자들 및 신학자들은 모두 부흥운동 스타일, 기독자 완전, 노예제도 폐지론, 반전론(反戰論), 여성 해방운동, 그리고 가끔은 이러한 완전주의적인 충동의 절정으로서의 임박한 천년 왕국 등에 대한 헌신을 포함한 일단의 가치들을 지지했다.
연방회의와 주의회가 증오의 대상인 노예제도를 옹호하는 듯한 탈주 노예법(fugitive slave laws)을 채택한 반면, 1840년 대에 이미 시민 불복종의 타당성 등의 문제들에 대해 비분한 투쟁을 강요하는 남북전쟁의 절박한 기운들이 감돌고 있었다. 점증하는 폭력의 망령은 노예제도 폐지론과 평화주의의 중의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했다. 기독자 완전론에 대한 문화적인 지지의 와해는 그처럼 중요했던 그 교리와 체험을 새로운 방법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도마련에 대한 자극제가 되었다.
둘째, 스코트(Donald Scott)는 공적인 책임감에서 개인적인 경건으로 혹은 개혁에서 피난처 로 돌아섰던 1830년 대와 1840년 대의 경건적 변혁 을 추적했다. 1850년 대까지 교회는 경건의 섬을 방어 하다가 철수했다 60고 그는 주장한다. 분명히 성결사상의 변화는 이러한 폭넓은 변화를 반영한다. 1840년대 초에 Guide to Christian Perfection에서 Guide to Holiness로 책 제목이 바뀐 것은 어느 정도 이러한 폭넓은 조류를 반영한 우선권과 뉴앙스에 대한 재정비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팔머의 거실의 영향력이 증가한 것은 어느 정도 이러한 조류에 편승한 것이다. 팔머는 노예제도 등의 사회문제에 대한 신랄한 논쟁과 분쟁에 끼어드는 것을 피했다(비록 그녀의 책은 좀더 박애주의적 스타일의 사회참여를 촉진시키긴 했지만).61
그런데 거기에는 어떤 느낌(sense)이 있다. 즉 보다 체험적이고 영적인 성결무드로의 전환은 보다 오순절 스타일의 길을 마련했고, 오순절 스타일은 초기 변화의 확장이며 급진화로 보아 마땅한데 그러한 것은 아마도 남북전쟁의 묵시론적 경험에 의해 강화되었을 것이라는 인식이다.
계층구조의 중요성과 그것이 성결운동의 발전에 미친 영향에 관해 고찰하고 싶은 유혹이 있지만 이는 충분히 탐구된 문제는 아니다. 성결 주창자들의 사회.경제적 지위의 그래프를 보면 보스톤과 뉴욕 시(의사 부인인 팔머가 가사를 돕는 직원을 둔 그녀 가정의 화요 모임에서 교수들과 감독들을 접대했던 곳)에서의 전전(戰前) 초기 시절과 20세기의 나사롓 교회와 같은 교파 구성원들의 사회적인 상향화 모빌리티 사이에서 볼 때 남북전쟁 후에 그래프가 급강하한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러한 양상들을 엄격하게 보편화할 수는 없지만 1860년에 창립된 자유 감리교회로부터 19세기의 전환점에 설립된 나사렛 교회에 이르기까지의 성결파 교회들은 특히 가난한 하류 계층 속에서 목회를 했으며 점차 중심 도시로 옮겨 갔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62
성결 향상을 위한 미국 야외집회 협회(National Camp Meeting for the Promotion of Holiness)의 열네번의 캠프집회(1867-1872)에 관한 첫 보고서에는 휴즈(George Hughes)가 이러한 새로운 운동을 필요로 했던 1867년의 교회 상태 를 스케치한 한 장(chapter)이 실려있다. 그 장(章)은 형식주의와 성화에 대한 설교, 그리고 다른 여러 테마들에 대해 내분이 증가해 가는 것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가난한 계층 혹은 상층 지향의 교회들 간의 계급적이고 문화적인 차이들과 예배 및 제도유형의 차이 등등을 보여 준다.
성결운동은 배타적인 성향이 없지는 않았지만 점점 전적 성화론의 경험적 측면에 충실하는 경향을 띄게 되었다. 남북전쟁 전의 기독자 완전론 주창자들, 특히 오벌린 대학 사람들과 전후의 오순절적 성화의 주장자들 간의 분위기상 가장 현저한 차이들 중의 하나는 전자의 가능성 (ability) 감각과 후자의 능력 (power)에 대한 음미이다. 19세기 후반에는 점증하는 사회의 복잡성에 잘 대처하기 위해 노력하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신뢰가 최소한 몇몇 그룹들에서 퇴보했고, 대처를 위해서이거나 아니면 더 나은 시대로 헤쳐나가는 힘을 유지하기 위해서이건 간에 능력 에 대한 추구가 계속 증가하였다. 오순절파의 전적 성화론은 그것을 주창한 자들이 추구했던 좀더 분명한 영적 능력을 뛰어넘어 무능력한 자 에게 능력을 부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19세기 후반의 성결파 회심자들의 사회적 하향 모빌리티와 관련하여 이 테마들의 급진화를 추적해 보는 것은 아마도 가능한 일일 것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성결 추구에 의해 진척되긴 했지만 보다 급진적인 완전 개념과 타고난 죄 63의 근절이라는 개념을 채택하기를 꺼리는 그 운동들이 성결운동의 테마들을 조정하여 온건화시켰다는 것을 설명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적어도 그 정경을 목격한 몇몇 사람들은 사회계급과 성결개념의 급진화 사이의 상호 연관성을 인지했다.
그러나 그러한 문화적, 역사적 요소들이 중요한 신학적 논점들을 취소케 하지는 않는다. 후에 신학자들, 특히 오순절파의 성화론을 따르는 자들은 정체성(identification) 보다는 왜 성화론이 그렇게 시간을 소요했는가 하는 것 때문에 곤란에 처했었다. 웨슬레가 성령세례'라는 용어를 성화와 연관시켜 사용하는 것을 명백히 꺼려했다는 문제 64와 왜 이러한 입장이 19세기 중반까지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느냐하는 문제가 있다. 성결파 중의 하나인 하나님의 교회(Church of God)의 20세기 주요 신학자인 브라운(Charles Brown)은 주장하기를, 초기 웨슬레 신학자들은 전문적인 신학자들에 의해 길을 잘못들어 성령세례에 대해 온당한 강조를 하지 못했다 65고 한다. 최근에 스미스는 자유의지와 인간활동에 대한 강조로 특히 오벌린 대학애서 위협을 받고 있던 신과 인간활동의 적절한 균형이 오순절 성화론의 등장으로 회복된 것을 인식하였다.66 이 신학자들에게는 이러한 동일시가 웨슬레 전통이 1770년대 이래로 지향해 왔던 바의 해답이었다.
문헌상으로 그 변화에 관한 최소한 두개의 다른 신학적인 요소가 나타나고 있다. 19세기 후반에 다른 상황들- 예를 들어 강신론(spirituality)의 등장, 기독교 과학주의(Christian Science)의 출현과 그것의 물질적인 것에 관한 경시, 미국의 철학적 관념론의 등장 등등- 속에서 다른 양상을 취했던 성령과 영적인 것 에 관한 테마들 쪽으로 급격하게 선회하는 것을 식별할 수 있다. 이러한 발전으로 보다 정통적인 신학 단체들은 성령의 교리를 점점 더 강조하는 양상을 취하게 되었다. 스코필드 성경(Scofield Bible)의 세대주의적인 편집으로 유명한 스코필드(C.I. Scofield)는 19세기 말에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우리는 성령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관심의 현저한 부흥 한복판에 있다. 그 주제에 관한 책과 소책자 및 논문들이 인쇄술의 발명이래 어느 시대보다도 지난 80년 동안에 더 많이 발행되었다. 실로 지난 20년 동안에 그 이전의 1800년까지 보다도 더 많은 글과 설교가 집중되었다.67
이러한 관점에서 웨슬레 사상의 오순절파 성화론으로의 변화는 19세기 말의 성결사상이라는 아주 좁은 영역 내에서 이러한 점증하는 성령에 대한 관심이 취했던 특수한 형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변증적인 이점이 이러한 새로운 입장을 취하는 것을 가속화하는데 도움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완전이라는 개념 자체가 늘 논쟁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감리교가 기독자 완전에 대해 행한 수많은 설교를 보면 웨슬레가 그의 청중들 앞에서 주장하곤 했던 목표에 대해 적극적으로 서술하기 전에 어떤 의미에서 크리스챤은 완전하지 않은가 하는 것을 주의 깊게 식별하기 위해 웨슬레가 세워 놓은 하나의 패턴을 추종했다.68
이러한 변증적 문제는 전적 성화의 체험이 감리교를 넘어 다른 신학적인 상황들, 특히 1857-1858년의 부흥에서처럼 개혁교회로 확산되었을 때 활력이 증가되었다. 이러한 상황들 속에서 오순절 어휘가 완전의 테마들을 어떤 것은 보다 으뜸가는 성서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주장과 같은 방식에 종속시켰다. 그래서 스틸(Daniel Steel)은 목사직으로 돌아가기 위해 시라쿠스 대학(Syracuse University)의 학장직을 내놓기 2년 전인 1874년에 Guide to Holiness에서 그 자신의 온전한 성화를 성령세례로 묘사하면서 모든 크리스챤들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한다.
전적 성화 혹은 기독자 완전에서 생겨나는 미묘하고 끝이 없는 문제들에 관해서 논의하는 것을 중단하고 모두가 성령의 세례를 위해 하나님께 부르짖으라. 이것은 분명히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신자에게 약속된 것이다. 모든 교역자와 평신도들은 예루살렘의 다락방으로 향한 길을 조회할 것이며, 불의 혀가 그들의 머리로부터 불꽃으로 활활 타오를 때까지 거기에 머물라.69
그러나 그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이러한 변화가 분명히 일어났으며, 그 변화가 고차원적인 기독자의 삶을 계속 가르쳐 왔던 여러 캠프에 속한 대부분의 사람들을 휩쓸고 지나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플레처의 오순절 계통적인 설명이 승리한 이야기가 다음 장을 구성할 것이다.
제 4 장
오순절 성령세례론의 승리
남북전쟁 후 부흥주의자들의 전통은 점점 더 미국 문화 안에서 가장자리로 밀려났다. 19세기 말에는 또한 소종파가 거대하게 형성되었는데, 많은 소종파들은 성결노선을 따라 더 큰 감리교 원류로부터 탈퇴 혹은 제명에 의해 형성되었다. 그러나 그 유사한 전통들 속에는 또한 비슷한 패턴들이 나타났다. 우리의 목적상 주목해야 할 것은 오순절 성령세례론의 이러저러한 변동이 이 시기에 어느 정도로 이러한 부흥운동 조류들을 지배했는가 하는 점이다. 물론 이 때에는 아직 glossolalia(방언)의 관행은 없었다.
지금까지 남북전쟁 이전에 있었던 부흥운동의 완전주의파에 촛점을 맞추어 오순절적인 모습이 등장하는 것을 추적하였다. 이제부터는 성령세례론에대한 독특한 설명들을 추적해 보고, 성령세례론이 19세기 후반의 부흥운동을 뒤덮었을 때의 차이들(variations)을 가려내 보기로 하겠다. 완전하고 자의식적인 오순절 성화론을 발전시킨 최초의 책들은 1857-1858년의 부흥에 뒤이어 나타난 것이 분명하다. 감리교 내에 성결의 부흥이 싹트도록 자극을 준 배후의 동력(motivating force)인 팔머(Phoebe Palmer)는 그 부흥이 발발하기 바로 전에 이러한 방향으로 움직였던 듯하다. 그것은 아마도 미국을 여행하면서 1855년에 『불의 혀』(The Tongue of Fire)의 교정본을 수정하고 있던 아더(William Arthur)의 영향에 의해서였을 것이다.1 그녀가 1856년 가을에 서부 뉴욕에서 작성한 보고서들은 이러한 발전을 보여준다.2 그녀가 1859-1863년까지 4년동안 영국에서 전도하면서 Guide to Holiness에 대해 쓴 보고서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1859년 말경에 뉴캐슬에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우리의 오후 모임에서는, 당연히 주님께 성결 또는 다른 말로하면 오순절에 120명의 제자들이 받았던 것과 같은 충만한 성령세례는 각국 모든 신자들이 절대적으로 소유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었다. 여러 종파와 원근 각지로부터 수 백명이 이 모임에 몰려왔다. 그리고 팔머박사가 이 은혜를 지금 받고자 믿음으로 결심한 사람들은 앞으로 나오라고 초청했을 때 약 6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성찬제단 앞 난간은 대체로 꽉 둘러 싸였다.3
1859년에 팔머는 The Promise of the Father:Neglected Speciality of Last Days를 발간했다. 이 책에서 그녀는 늦은 비 운동을 개진하면서 여성의 사역을 변호했다. 이 책은 예언 의 노선을 따라 설교 를 이해함으로써 그녀가 표제지에 기록했듯이 사도행전 2장에 인용되어 있는 요엘의 예언, 즉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라는 말씀에 호소하여 여성의 사역(명백히 그녀 자신의 사역)을 지지한다. 이 책은 전체적으로 오순절에 관한 테마들을 반복하면서, 현 삶에서 체험되고 만끽되어야 할 은혜인 충만한 성령세례에 대한 인식은 감리교의 특징적인 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