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장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히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6-8)
1-5절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반드시 구원의 큰 확신을 누린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 어떤 환난도 그것을 요동케 못한다.
6-11절의 전체 의도는 더욱 큰 구원의 확신을 우리에게 주고자 하고 있다. 5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언급하고 6절 서두를 ‘for’로 시작한다. 하나님의 사랑보다 우리 구원의 확실성과 최종성에 대해 더 큰 확신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논증한다. 6~8절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적극적인 진술을 하고 해설을 붙인다. 9~10절에서 그 진술로부터 나오는 필연적인 추론을 끌어낸다.
6절은 요 3:16에 대한 바울의 주석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니라”. 6절은 정말 모든 것을 말하고 실로 완벽한 진술이다. 7-8절은 그것을 정교화 시킨 것이다. 이것은 3:24의 되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훌륭한 교수법의 진수는 반복이다. 우리가 너무 잘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인 칭의의 방법을 또다시 말하고 있는 것이다.
- 가장 위대한 성도들의 큰 특징은 언제나 자기들을 향하신 그분의 사랑을 깨달았던 것이었다. 그를 향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를 향하신 그분의 사랑이다.
제1원리는 우리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과 그의 사랑에 속한다는 것이다.
때때로 복음적인 사람들까지도 속죄와 구원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버지를 감동시켜 해놓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그 일이 성자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은 강조해야 하지만 그 일을 하도록 성자를 보내신 분은 성부라는 것을 결코 망각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와 아들의 우리를 향한 구원은 분리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죄에 대한 진노와 죄인을 향한 사랑 사이에는 갈등이나 상반된 것이 없다. 두 가지가 함께 있다. 죄에 대해 진노를 부으시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기까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
“기약한 대로”는 ‘약속된 때에’ 또는 ‘마땅한 때에’를 의미한다. 그것은 만물과 사람이 창조되기 이전에 하나님은 이 권위 있고 영광스러운 구원의 길을 상세하게 계획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원이란 궁리 끝에 나온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결국을 처음부터 아시며 모든 일을 아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의 차원 안에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구원을 계획하시고 의도하심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영광스러운 표증이다.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셨고 우리에게 관심을 두시고 우리의 이름이 그의 생명책에 들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우리를 택하셨다는 사실보다 더 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증거가 없다.
‘기약대로’의 또 다른 의미는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라는 것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구원은 특별히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결과라는 것이다. 이 ‘때가 찬’ 때는 정확히 어느 때인가? 사람이 자신을 구원할 가망이 없다는 것이 명약관화하게 입증될 즈음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이 온전히 작용해 볼 기회를 충분히 누려봤던 바로 그 시점이다. 이 율법을 그들은 1400년 동안 소유해 왔다.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할 육체가 하나도 없음’이 입증되도록 이 기나긴 시간이 사용된 것이다. 헬라철학도 율법과 똑같은 기회를 충분히 누려봤던 시점이었다. 로마 문명과 법률, 문화도 그들 나름대로의 기회를 가졌었다. 이집트의 거대한 문명도 역시 전성기를 이루고 있었다. 앗수르나 바벨론과 중국문명도 그러했다. 세상은 자신을 구할 모든 충분한 기회와 시간을 가졌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사람은 실패했다. 그러므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인 것이 틀림없다. 우리는 아직도 충분히 시간을 갖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
제2원리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생각하시고 계획하셨다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거대한 증표이다. “우리가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 이분은 누구인가? 교회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은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누가 보내졌는가? 그리스도! 어떻게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가?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가능하다. 그는 누구인가? 하나님의 독생자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가? 그렇다면 뒤로 돌아가 “바로 이 기약한 때에” 무엇이 일어났는가를 깊이 생각해 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요일4:19). 하나님의 아들이 영원함과 영광에서 죄와 굴욕과 비극과 슬픔의 세계에 오신 것을 자세히 읽어보라. 하나님이 얼마나 자기의 사랑을 우리에게 나타내시려고 하시는가를 보여준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곳은 바로 그곳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도다” 이는 가장 중요하다. 그분의 생애도, 가르침도, 기적도 아니고, 사도가 이것을 강조하는 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하고 보여주기 위함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그의 사랑을 나타내는 방식이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리스도는 우리 대신 죽으셨다. 그가 오신 것은 “죽음의 고난을 받으심을 인하여”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3:9). 만일 그리스도께서 죽지 않으셨다면 어떤 사람도 구원하시지 못하셨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경건치 않은 자를 구원한다는 것이다. 사도가 제일 입증하고 싶어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최상의 증거요, 발현에 대해서 알려주고 싶어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심은 하나님의 사랑의 위대한 체현이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죽음이란 마지막 행동이요 최종적인 것이다. 죽음의 모양도 특이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십자가형은 수치스럽고 모욕적이고 불명예스러운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를 참으로 아는 데는 여기이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않겠느냐?”((8:32). 하나님은 우리 모든 자를 위하여 그를 넘겨준 것이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상의 죽음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최상의 확증이다. 여러분은 무엇을 느끼면서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를 바라보는가? 십자가로 나아가서 그것을 쳐다보며 곰곰이 생각해 보고 그것이 함축하고 있는 모든 것을 생각해 보라. 조명과 이해를 주는 성령을 구하라.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이해할 수 있는 길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그것을 작정하셨다.
제3원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측량해 보는 또 다른 방식은 주님께서 그 일을 해준 사람들의 비참한 상태가 얼마나 깊은가를 재보는 것이다. ‘연약함’, ‘경건치 않은’, ‘죄인들’. ‘연약함’은 ‘전적 무능력’을 의미하며 우리가 전적으로 어떤 영적 능력도 전혀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영적 진리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육에 속한 사람은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저에게 미련하게 보임이요 알 수도 없음이라”(고전2:14). 그 무능력에 대한 설명은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별한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마땅히 알아야 할 때도 알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이에 대해 명확해야 한다. 우리는 영적으로 죽어 있다. ‘죄와 허물’로 죽어 있다. ‘연약하다’의 다른 국면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 그대로는 하나님을 전혀 기쁘게 할 수 없다. 사람의 의란 ‘더러운 넝마’와 같다. 바울이 자랑하던 바리새인의 의는 배설물이요 해로운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하나님께 복종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그의 앞에 의롭다 할 육체가 없으니 이는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사람은 자기 구원에 관한 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절대로 아무것도 못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은 우리의 무능과 무력을 깨닫는 정도에 달려 있다. 사도에 따르면 그것을 깨닫는 길은 “우리가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해서 죽으셨다”고 하는 말씀을 인식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랑할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의 자랑은 오로지 주님 안에서 이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가 연약하다는 것을 안 결과요 우리가 영적인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을 전혀 기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안 결과이다. 원래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그러나 ‘연약하게’ 되었다. 전적으로 무능하고 전적으로 무력한 상태에 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을 뿐 아니라 갈보리 언덕에서 우리를 위해 죽게까지 하셨던 것이다. 사랑, 그 놀랍고 거룩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