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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6평 생윤 문제들은 윤사 문제와 함께 너무나 쉬웠다, 정답들이 깃발을 들고 서 있었다(내가 정답이요, 하면서 깃발을 들고 있었다)는 점이 특징인데, 이는 코로나 사태로 인해 고3 학생들의 학습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여 모든 과목에 걸쳐 이루어진 조치로 보이긴 합니다. 하지만 원칙을 벗어난 출제가 허용된다는 뜻은 아니죠. 이번 생윤은 특히 교육과정 이탈이 넘 심하다는 게 특징인데, 보통 교육과정 이탈은 고난도 문항을 내기 위한 편법으로 지금까지 평가원에 의해 저질러져 왔음에 비해, 이번 생윤 교육과정 이탈 문제들은 고난도 문항도 아닌데 마구 저질러졌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출제 경험이 다수인 저는, 교육과정 안에서 ‘새롭고’ ‘쌈박한’ 선지들(때로는 제시문들)을 제시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잘 압니다. 바로 여기에서 출제자의 실력이 판가름나죠. 실력이 안 되면 죽었다 깨어나도 그런 쌈박한 문제들을 낼 수 없습니다. 이때 저급한 출제자들이 유혹을 받는 게 바로 교육과정을 이탈해서 선지를 만드는 것입니다. 대체적으로 이런 교육과정 이탈은 같은 출제자들끼리의 논의에서 1차적으로 걸러지기 마련인데, 도저히 선지가 안 나오면 모르는 척하고 검토에 넘깁니다(출제기간 내내 1문제도 못 내는 인간 많습니다). 이 검토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윤리의 다른 과목 출제자들(예컨대, 생윤 문제라면 윤사 출제진도 함께 검토합니다), 그리고 평가원 관계자들입니다(도합 20명 정도 됩니다). 그럼 대체로 교육과정 이탈 선지들은 다 걸러지기 마련인데, 얘네들이 다 동원돼도 선지가 안 나오면 교육과정 이탈이 저질러지는 겁니다. 이렇게 의도적인 경우가 대부분이고(특히 고난도 문항을 내야 하는 경우에, 이런 고난도 문항이 안 나오면 의도적으로 교육과정 이탈을 범합니다), 의도하지 않은 채 저질러지는 경우도 있기는 있습니다.
이번 생윤의 교육과정 이탈 선지들은, 정답들이 다 깃발을 들고 서 있는 상태에서 저질러졌는데, 그렇다면 고난도 문항으로 하기 위해 그런 짓을 한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교육과정 안에서 선지를 만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고난도 문항을 만들기 위해서 고육지책으로 교육과정 이탈을 범한 게 아니라면, 이번 생윤 출제진에는 과거보다도 더더욱 형편없는 인간들이 들어갔을 가능성이 큽니다(보통 교육과정을 이탈하면 평가원 관리자가 태클을 걸기 마련인데, 선지가 안 나오면 관리자도 어쩔 수 없으니 그냥 넘어갑니다. 단, 교육과정을 이탈해서 학생들이 틀리게 되면 이의제기가 빗발치니까, 이때에는 정답이 깃발 들고 서 있도록 5개 선지를 구성하죠. 학생들은 자신들이 일단 쉽게 맞히면, 그게 교육과정 이탈인지 아닌지, 오류인지 아닌지, 관심을 안 갖습니다. 사실 학생들 수준에서는 교육과정 이탈 여부, 오류 여부를 판단하는 것도 쉽지 않죠. 일부 고학력 학생을 제외하면 말입니다.) 이게 출제 요령이라면 요령입니다. 지난 4-5년간, 윤사, 생윤에 걸쳐 평가원이 매우 저급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출제 인력풀 자체가 그렇게 돼먹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는 거예요. 실력은 하루아침에 늘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장담하건대, 윤리 출제 인력 수준은 앞으로도 절대 향상되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이번 6평 생윤은 그보다도 더 못합니다. 갈수록 출제 인력 수준이 더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제부터 교육과정 이탈 선지들을 검토할 텐데, 유의해야 할 것은, 제시문에서 도출되기만 한다면 설령 그것이 교육과정 이탈이라도 허용된다는 것입니다. 교과서에도 없는데 제시문에서도 도출되지 않을 때 그것을 교육과정 이탈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하나 더 짚고 넘어갈 것은, 이렇게 제시문에서 도출된 선지라고 하더라도, 다음 모의고사나 본수능에서 ‘기출 선지’라는 이유로 또 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 내려고 한다면 그때에도 제시문에서 도출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육과정 준수 여부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교과서’이지, 연계교재도 평가원 기출(제시문, 선지)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제 검토해보겠습니다.
갑은 정약용, 을은 플라톤입니다. ⑤번 선지에서 사유재산에 대한 갑, 을의 입장을 묻고 있는데, 플라톤의 입장은 제시문에서 도출되지만, 정약용의 입장은 도출되지 않습니다. 우리 교육과정에서도 사유재산에 대해 정약용이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 다루지 않고 있습니다. 교육과정 이탈입니다.
④번 선지의 경우, 이 내용은 제시문에서 도출되지 않습니다. 수특을 보니 자료 해설에서 비슷한 내용이 있기는 합니다. 교과서는 지금 확인할 수 없는데, 교과서에는 없지만 연계교재에만 있는 내용이라면, 역시 교육과정 이탈입니다. 이 점은 평가원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연계교재에만 있으면 교육과정 이탈이 아닌 줄 압니다. 그렇지 않아도 선지 만드는 걸 정말 힘들어하는 평가원 입장에서(이것도 결국 실력이 안 되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죠), 교과서에는 없지만 연계교재에 있는 내용을 출제했는데도 인강강사나 교사들이 그게 교육과정 이탈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그래서 항의도 하지 않아 준다면, 내심 ‘이게 웬 떡이냐’ 하면서 계속 그런 짓을 저지르고 싶은 유혹을 느낄 겁니다.
볼노브(볼노우)입니다. 볼노브가 한 얘기는, 5종 교과서 중 이를 소개한 교과서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교과서가 훨씬 많습니다. 물론 교과서에 없어도, 제시문에서 도출되는 선지를 제시하는 한, 출제 가능합니다. 그런데 ④번 선지의 ‘편안함을 얻는다’는 내용은 제시문에서 도출되나요? 아무리 봐도 제시문에는 이와 관련된 내용이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너무 빤한 내용이라고 해서 넘어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①번 선지에서 ‘산업화된 대중문화는 독창적 예술로 발전하기 어렵다’라고 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독창적 예술’이 지칭하는 바가 뭘까요? ‘예술’이 아니라는 뜻일까요? 아니면 예술은 예술이되 독창성이 없다는 뜻일까요? 더욱이 독창적 예술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도 아니고, 독창적 예술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인지 아닌지’를 묻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내용(독창적 예술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인지 아닌지를 묻는 내용)이 제시문에서 도출되나요? 교육과정에서 이것을 다루고 있을까요?
아도르노는 대중문화가 ‘예술적 자율성을 상실’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을 뿐이지, 이것이 예술인지 아닌지, 나아가 독창적 예술로 발전할 수 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설령 어디선가 언급했다고 하더라도(최소한 “계몽의 변증법”에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을 우리 교육과정에서 다루거나, 최소한 제시문에서 도출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게 문제입니다. 정답이 깃발 들고 있다고 해서 이런 허술한 선지가 용납되는 것은 아니죠.
①번 선지가 문제됩니다. 우선, (가) 사상은 ‘이상주의’ 사례로 제시한 듯한데(우리 교육과정에서는 ‘이상주의, 현실주의, 구성주의’를 다루고 있죠), 내용을 잘 보면 칸트의 “영구평화론”에서 가져왔다는 느낌이 강합니다(세력균형, 동맹, 비밀외교의 영원한 제거). 그런데 이것을 ‘칸트’로 고정화하는 경우(그렇다면 ‘갑 사상가’라고 했을 겁니다) ①번 선지가 문제되므로(왜냐하면 칸트는 국가 아닌 기구가 국제관계의 행위자가 된다는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얼버무리기 위해서 ‘(가) 사상’이라고 했을 겁니다.
그렇다면 ‘이상주의’는 모두 非국가 행위자를 인정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컨대 대표적인 이상주의자인 우드로 윌슨은 국가 아닌 국제 행위자를 일절 인정하지 않습니다(칸트는 국제정치학에서는 이상주의로 평가되지도 않습니다. 칸트는 ‘자유주의’이고, 이것은 이상주의와 다른 사상으로 다루어집니다.). 非국가 행위자를 인정하는 사상적 조류를 국제정치학에서는 ‘다원주의’라고 말합니다. 이 다원주의의 주장을 우리 교육과정에서는 이상주의에 포함해서 다루는 까닭에, ①번 선지는 교육과정상 오류는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학문적으로 매우 허술하죠. 국가시험을 출제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모든 상황을 다 감안해서 선지를 만들 수 있어야 하는데, 윤리 출제자들한테는 도무지 이런 것을 기대할 수 없으니, 참 답답하네요.
정리하면, ‘이상주의’ 학자들은 국가만을 행위자로 다루는 일도 있고, 非국가 기구도 행위자로 다루는 일도 있는데, ①번 선지는 ‘국가가 유일한 행위자로 간주된다’고 했기 때문에 오답이라고는 할 수 없되, 선지가 허술하다는 뜻입니다.
맹자(갑)와 아리스토텔레스(을)를 비교하는 문제입니다. 둘을 비교하려면 ‘직업윤리’ 측면에서만 가능합니다(일단 우리 교육과정상 그렇습니다). 둘 다 덕윤리이므로 덕 개념을 비교할 수도 있겠으나 이것은 생윤 교육과정을 넘습니다. 그리고 사상가들을 비교하려면 ‘공통점과 차이점’을 얘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선지를 제시할 능력이 안 되는데도 억지로 두 사상가를 비교하는 문제를 만든다면, 그냥 따로따로 묻는 것을 기계적으로 붙여 놓은 것밖에는 안 되는 거예요.
선지들을 봅시다. ㄱ, ㄴ, ㄷ은 맹자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서 각각 묻고 있습니다. 오직 ㄹ에서만 맹자와 아리스토텔레스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ㄹ 내용은 양자 모두에게 해당되지 않는 내용입니다. 양자의 공통점도, 차이점도 선지에는 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ㄹ을 양자의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양자의 누구도 주장하지 않은 내용을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만일 이런 것을 공통점이라고 하려면, ㄹ 내용을 주장하는 사상가가 제시되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갑, 을, 병의 세 사상가를 비교하면서 갑, 을 두 사상가의 공통점으로 ㄹ을 제시했다면, 그나마 ‘비교’하는 문제로 인정해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또 하나 지적할 것은, 갑(맹자)에 대해서는 직업윤리 또는 덕윤리 내용을 묻고 있는데, 을(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서는 ‘국가의 목적’에 대해서 묻고 있습니다. 주제가 서로 다릅니다. 4개 선지 중 일부는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최소한 1-2개 선지는 ‘같은 주제’를 가지고 비교해야죠.
이게 무슨 문제인가요? 학교 내신 문제도 이 정도는 아닐 겁니다. 이런 게 평가원에서 나오는 문제 수준이라는 걸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을까요?
평가원 여러분! 그냥 윤리 과목을 수능에서 제외합시다. 너무 안쓰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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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과거 연계교재에도 같은 내용이 있다고 하셨는데, 평가원 얘기는 일절 하지 마시고 EBS 쪽에 이의제기를 해보셨으면 합니다. 당연히 싱어의 답변 및 두 사람의 교수 답변도 첨부하시고요.
아마 EBS 측의 답변이 1개월 이상 걸릴 것으로 예상합니다. 질질 끌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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