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평가원에서는 고등학교 교사들 대상으로 수능에 대한 의견을 묻는 설문을 실시했습니다. 설문 조항은 여러 가지였는데, 그중 하나가 ‘수능 출제근거를 밝히는 것이 현장에 도움이 되는가?’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출제근거를 밝히면 당연히 도움이 된다는 걸 몰라서 이런 설문을 하나, 바보야 뭐야’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당연히 도움이 된다’는 항목에 체크를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설문 문장의 뉘앙스가 ‘수능 출제근거를 밝혔다’는 것이어서, ‘이상한데? 언제 출제근거를 밝혔다는 거지?’ 하는 게 있었어요.
이런 내용을 일부 담은 글을 ‘도덕윤리 교육 연구모임’ 카페에 올렸더니, 어떤 분이 아마도 출제근거라는 것이 이것을 말하는 것 같다, 라면서 평가원에서 만든 폴더를 올려주더군요. 폴더 제목은 ‘2019학년도 수능 교육과정 근거’였고, 파일 소제목에는 ‘교육과정 근거(성취기준 등)’로 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윤리 교사니까, 그 파일에서 밝힌 윤리와 사상 교육과정 근거라는 걸 하나 써보겠습니다.
<고대 서양 사상가인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실주의적 세계관과 행복주의 및 덕 윤리의 특징을
이해한다.>
평가원장 님!
이런 게 ‘출제근거’라면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입니다. 국민을 기만하고, 교사들과 학생들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원하는 출제근거는 ‘교과서 근거’를 밝혀 달라는 것입니다. 수능 출제 경험이 다수 있어서 제가 그 상황을 아주 잘 알아요. 문항마다 교과서 근거, 그러니까 어떤 교과서의 몇 페이지에 관련 내용이 나온다는 걸 기재하는 문서를 작성합니다. 윤리와 사상의 경우 5종 교과서인데, 5종 교과서 전부 출제근거가 나오는 페이지를 기재합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5종 교과서에 모두 서술되어 있는 내용만을 출제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내부적으로 5종 중 3개 교과서에 나와 있거나 2개 교과서에 나와 있는데 그 내용이 연계교재에도 실려 있는 경우 출제하곤 했습니다. 물론 예컨대 3개 교과서에만 나와 있는 내용의 경우, 나머지 2개 교과서도 출제근거 페이지를 기재했지만, 그건 그야말로 ‘에둘러서 보면’ 관련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는 정도의 근거일 뿐입니다.
그런데 최소한 5종 중 3개 교과서에만 나와 있는 것을 출제해주면 현장은 아무 불만이 없어요. 대체로 그런 내용은 연계교재에도 나와 있기 때문에 다 대비가 됩니다. 그래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와 관련된 불만이 제기되질 않았습니다.
최근에는 그렇지 않아서 문제입니다. 5종 교과서 중 1개 교과서에, 그것도 참고사항으로 나와 있는 내용을 출제하는 일이 많고, 심지어 5종 교과서의 그 어디에도 없는 내용도 냅니다(그래서 제가 3년 전부터 지속적으로 생활과 윤리, 윤리와 사상 공히 ‘교육과정 이탈’을 지적해 오고 있는 겁니다.). 교육과정에 없는 내용을 내는 이유 중 하나는 고난도 문항을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 충실하게 한 학생이라도 교과서에 없는 내용을 내는 순간 무력해지는 거예요. 이런 학생들이 그 문항을 틀렸을 때, 과연 승복할까요?
출제근거를 댈 수 없으니, 평가원은 매번 ‘오류’나 ‘교육과정 이탈’ 선지에 대해 답변을 제대로 내놓지 않고(특히, 제가 제기한 글에 대해서는 절대로 답변을 내놓지 않고 있죠.), 무조건 ‘이상 없음’이라는 답변만 앵무새처럼 읊조리고 있습니다.
왜 특히 저의 이의제기 글에 대해서는 아무 답변도 내놓지 못할까요? 내놓는 순간, ‘빼박’이 되기 때문입니다. ‘빼박’이 된다는 것을 평가원 관리자, 출제자들이 다 알고 있는 거예요(그런 것조차 모를 정도로 그 사람들 지능이 떨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제 글을 읽어 본 후 제 말이 맞는다는 걸 사후적으로 알게 된 거고, 그러니 제 지적이 옳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기는 곤란한 상황에서는 그냥 묵살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제가 지적한 선지들에 대해서는 그다음에 다시 출제하는 일이 없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제가 아무리 밉거나 저를 엿 먹이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일어나도, 오류인 줄 빤히 알면서 또 출제할 수 있는 강심장은 없죠.
다만 교육과정 이탈은, 처음부터 교육과정 이탈인 줄 알면서 내는 일이 ‘대부분’이기 때문에(선지 만들기 어려우니 그런 짓을 하는 겁니다. 참고로, 저는 절대로 이런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단언하건데, 그동안 수없이 선지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교육과정 내에서 새로운 선지를 만들지 못하는 것은, 실력 부족 탓입니다. 공부들이 안 되어 있는 거예요.), 그다음에 또 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평가원은, 제가 지적한 오류뿐만이 아니라 제가 지적한 교육과정 이탈 선지도, 그다음부터는 안 내더군요. 이것은 한편으로는 기특하다는 생각도 들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들 나름대로 저를 존중해주기 위한 방식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공개적으로 말은 못하지만, 그리고 제가 공개적으로 오류나 교육과정 이탈을 지적하는 것이 못마땅하지만, 그럼에도 저라는 사람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존중’을 표하고 싶다는 것이 아닐까, 뭐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평가원장 님!
위에서도 말했듯이, 수능 후 평가원이 공개한다는 ‘교육과정 근거’는 국민 상대로 사기를 치는 겁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국민은 평가원이 출제근거까지 밝힐 정도로 공명정대한 줄 알 거예요. 그리고 또 아무것도 모르는 기자들은, 평가원이 제시한 보도자료를 그대로 보도할 겁니다. 이런 짓을 하지 말아주세요.
간단한 겁니다. 모의평가든 본수능이든, 출제 후 출제위원들이 만드는 ‘출제근거’ 문서를 그대로 공개하든지, 아니면 최소한 ‘교과서의 해당 쪽수’를 공개하면 됩니다. 이거 사전에 다 작성해두잖아요? 그럼 그 쪽수를 보고 평가원이 교육과정에 근거해서 출제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를 명확하게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이 쪽수만 공개하더라도, 교육과정 이탈 여부뿐만이 아니라 오류 여부까지도 명확하게 가려질 가능성이 아주 커집니다. 만일 평가원이 해당 교과서 쪽수를 공개하지 못한다면, 교육과정 이탈이라는 지적뿐만이 아니라, 오류 증거가 명백해질까봐 그러는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그게 두려우면, 공개 못하는 것이죠. 특히 윤리 교과(생활과 윤리, 윤리와 사상)는 더욱 그렇습니다.
나는 평가원장 님이 어쩌면 실정을 잘 모르고, 저런 택(턱)도 없는 것을 ‘교육과정 근거’라고들 말하니까 정말 그런 줄 믿고 자신만만하게 저런 파일을 공개했는지도 모른다고 보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출제근거’를 공개해주세요. 최소한 교과서의 쪽수만이라도 공개해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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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뭔가 정말 투명해졌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수능이라는 시험은 많은 학생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기에... 참 애석합니다. 왜 내가 학생들을 가르칠 때 이건 평가원이 오류를 범했지만 시험에 나오면 이대로 풀어야만 한다고 말해야하는지 말이죠... 교육과정 역시 마찬가지이구요... 왜 교사들을 무능력하게 하고 거짓말장이로 만들고 방치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제 평소 느낌인데, 이런 '지식을 다루는 분야'에서는 의외로 원칙성과 투명성에 대해 의식조차 없는 사람들이 많더군요. 잘못을 의식하면서 일부러 감행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그게 정상인 줄 알고 행한다는 겁니다. 이게 우리 같은 사람들 눈에는 이해가 안 되는 거죠.
그런 이들은 학술적 정확성이 가장 최우선의 기초 중 기초라는 발상 자체가 안 되는 거지요. 학자라는 사람들조차 이게 안 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 사람 만나면 대화할 때 환장합니다.
힉스님은 '실력부족'을 지적하시는데, 저는 거기에 더해서 '인식부족'도 한몫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요즘 합니다. 인식부족도 크게 보면 실력부족에 속한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아까 낮에 평가원의 답이 궁금해서 평가원 게시판 들어갔다가 그때까지 답 안 달린 걸 보고 '내부에 비상이 걸렸나?' 하는 추측을 했는데, 지금 다시 확인해보니 그새 답이 달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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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대학수학능력시험에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건의주신 내용을 검토하도록 하겠습니다.
더욱 발전하는 수능 시험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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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랄까,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맥빠지는 느낌의 답입니다만.. 어쨌든 평가원장에게 전달은 되었으리라고 믿어봅니다.
별로 기대는 안 합니다. 교과서 쪽수 공개 못하는 것은 자신이 없어서인데...다만 여론화되면 또 모르죠. 언론에서 이걸 다루어주면 가능성이 생길 텐데...그래서 의도적으로 기자 얘기도 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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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9.07.21 06: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