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당구인의쉼터
카페 가입하기
 
 
 
카페 게시글
현대사 바로알기 스크랩 박정희 동상 VS 안중근 동상_아고라 논객_Beck님글 가져옴
마당쇠 추천 0 조회 341 13.05.01 20:04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2010년 03월 26일 (금) 10:32  시사IN

 

안중근 유족을 가난과 탄압에 가둔 ‘친일파’ 대한민국 

안중근 의사 집안은 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날 명문가다.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 40명이 넘고, 독립유공자 훈장을 탄 사람도 10명이 넘는다. 안 의사의 업적과 가문이 빛난 만큼 가족의 어려움은 컸다. 그림자도 짙었다. 

안중근 의사(1879~1910)의 유언을 받았던 동생인 정근(1885~1949)과 공근(1889~1940)도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정근은 청산리 전투에 참가했고, 상하이 임시정부 시절 내무차장을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광복된 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1949년 중국에서 숨을 거두었다. 정근의 차녀 미생은 백범 김구 주석의 큰아들 인과 결혼했다. 인은 광복 5개월 전 폐병으로 사망했다. 미생은 1947년 미국으로 건너갔고, 이후 집안과 연락이 끊겼다. 
광복 후에도 안 의사 집안은 가난과 탄압에서 해방되지 못했다. 정부는 어디에도 없었다. 김구 선생 계열에서 활동하던 안 의사 집안은 친일파가 득세하면서 철저히 소외되고 박해받았다. 안 의사의 사촌 동생 경근씨는 '민주구국동지회'에서 활동하다 박정희 정권에서 7년간 투옥됐다. 안 의사의 조카 민생씨는 통일운동을 하다 박정희 정권에 의해 10년 동안 징역살이를 했다. 민생씨는 중국 옌지에 있는 사촌 동생 경옥씨에게 보낸 편지에서 "과거 우리는 안중근 집안이라는 이유로 왜놈에게 죽어야 했는데, 광복 뒤에는 왜놈의 앞잡이 노릇을 한 주구들이 권력을 잡게 됨으로써 애국자의 피해는 여전하다"라고 한탄했다. 
1950년 귀국한 준생은 1952년 피란 도중 부산에서 폐결핵으로 숨졌다. 부인 정옥녀씨와 1남2녀는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아들 웅호씨는 미국에서 심장병 권위자가 됐다.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사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안 의사의 둘째아들 준생, 동생 정근, 정근의 아들 원생, 안 의사의 딸 현생, 동생 공근의 아들 우생. 


장녀 현생(1902~1959)의 삶도 순탄치 않았다. 1909년 어머니가 두 아들만 데리고 망명하자, 현생은 프랑스 신부의 보호 아래 서울 명동의 수녀원에서 지냈다. 1914년 13세가 돼서야 현생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가족과 합류했다. 19세가 되던 1919년 안 의사 가족은 중국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로 이사했고, 여기서 현생은 불문학을 공부한다. 1941년 3월26일 현생은 남편 황일청과 박문사를 참배하고 아버지의 죄를 사죄했다. 현생 부부도 일본의 특별 관리를 받았다. 
1946년 현생은 서울로 돌아왔고, 한국전쟁 당시 대구 효성여대에서 프랑스어 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전쟁 이후 서울에서 궁핍하게 생활하다 1959년 서울 북아현동 집에서 고혈압으로 숨졌다.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윤원일 사무총장은 "안 의사 유족은 광복된 후에도 미국·파나마·독일·북한 등지로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했다. 불우했던 안중근 의사의 가족사는 독립운동 역사의 한 단면이었다"라고 말했다.   

 

2009년 09월 03일 (목) 18:52  국민일보

 
안중근 동상 고국 와서도 ‘찬밥’

설치장소 못정해 나무상자에 넣어 방치 

"어디에 있나요?" 

"그게 저 …. 참, 

답답하고 면목이 없어서 말이죠. 그냥 서울 모처에 잠시 보관 중이라고 해주시면 안 될까요." 

최근 중국 하얼빈에서 서울로 옮겨 온 안중근 의사 동상(본보 8월12일자 보도)의 행방을 묻자 안중근평화재단 청년아카데미 정광일(49) 대표는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청년아카데미는 동상을 효창공원에 있는 안 의사 가묘 옆 사당에 49일간 보관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용산구가 허가하지 않아 공원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3일 오전 10시30분쯤 공원에서 승용차로 15분쯤 걸리는 흑석동 원음방송국 현관 앞. 길이 3.3m, 폭·높이 각 1.2m 크기의 나무 상자가 바람에 실려 오는 흙먼지를 그대로 뒤집어쓰고 있었다. 처마 아래에서 간신히 햇볕을 피한 상자는 무궁화가 새겨진 천으로 덮여 있을 뿐이었다. 생뚱맞기도, 쓸쓸해보이기도 했다. 

방송국 주차관리인은 "2일 아침에 출근하니까 저 상자가 떡 하니 들어와 있더라. 안 의사 동상이 들어 있는 상자라는데 찾아오는 사람은 없었다"고 했다. 청년아카데미는 안 의사가 천주교 신자였던 점을 고려, 인근 성당에 두는 방안도 생각했지만 마땅한 곳을 찾지 못했다. 동상은 언제 어디로 또 옮겨질지 모른다. 

2006년 하얼빈에서 설치된 지 11일 만에 철거되는 수모를 겪은 안 의사 동상이 고국에서도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나무 상자에 갇혀 빛을 보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앞으로 햇볕을 제대로 볼지도 알 수 없다. 어디에 세워질지는 불투명하다. 동상을 국내로 옮긴 청년아카데미는 안 의사 의거 100주년 기념일인 다음달 26일 공공장소에 설치하고 제막식을 열 계획이었다. 

국가보훈처를 비롯한 정부 기관은 동상을 서울시내에 세우는 데 신중한 입장이다. 오경준 보훈처 국립묘지정책과장은 "기본적으로 바람직한 일이지만 공공장소에 설치하려면 관련 단체나 유족과 사전 협의를 거쳐야 한다. 안 그러면 나중에 불필요한 논란이나 갈등이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동상 설치 문제를 함께 논의할 단체는 함세웅 신부가 이사장으로 있는 안중근기념사업회와 안중근의사기념관을 운영하는 안중근숭모회다. 두 단체의 입장은 엇갈린다. 기념사업회는 청년아카데미 측에 적극 협조하겠다는 뜻을 밝힌 반면 숭모회는 해당 동상의 예술적 가치가 빈약하다며 등을 돌렸다. 

강창욱 기자 kcw@kmib.co.kr    

 

 


              반 면                               

 

 그 출세의 가장 빠른 경로로 일본육군사관학교를 택하지 못했던 것은 오직 그가 ‘조센징’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이미 사관학교는 물론 군관학교 입학을 위한 나이를 넘긴 뒤였다. 이 난관을 돌파하기 위해 박정희는 혈서를 써서 만주군관학교에 보낸다. ‘盡忠報國 滅私奉公(진충보국 멸사봉공, 충성을 다해 나라에 보답하고 나를 희생해 국가를 떠받든다는 뜻)’ 누구에게 충성을 맹서했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적어도 역사적 기록에 남이있는 것으로는 일제에 혈서까지 써바치며 충성을 맹세한 인물은 박정희가 유일하다. 그의 친일은 ‘문서화’된 것이다. 덕분에 이 일은 만주지역 언론에 보도될 정도로 유명해졌고, 그도 ‘늦은 나이에’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 박정희를 포함한 만주군관학교 졸업생 사진. 동그라미가 박정희. 문화방송 제공


입학과 동시에 스스로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라고 이름을 바꾼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다. 졸업생 대표로 답사까지 했다. “대동아 공영권을 이룩하기 위한 성전에서 나는 목숨을 바쳐 사쿠라와 같이 휼륭하게 죽겠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일제 군국주의가 그 최후의 기승을 부리던 시절이었고, 만주는 그 ‘광기’의 최전선이었으며, 만주군관학교는 그 돌격대였다. 그 선봉에 선 박정희는 수석 졸업의 위광을 등에 업고 42년 일본육군사관학교 3학년에 편입한다. 일본 육사까지도 3등으로 졸업한 그는 1944년 7월 만주군 소위로 임관했다.   오카모토 미노루   이 과정에서 박정희는 한국 이름에서 따온 ‘다카키 마사오’라는 이름을 완전한 일본식 이름인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로 다시 한번 바꿨다. 그 시기는 분명치 않은데, 만주군관학교에 이어 일본육사까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가 당당한 ‘황국신민’으로 재탄생한 사실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고, 이를 영원히 유지하고자 했던 열정이 강력했음은 엿볼 수 있다. 그가 근무했던 곳은 화북지방에 주둔한 만주군 예하 보병 8군단이었다. 그가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다는 주장은 보다 논란의 대상이다. 만주군의 역할 자체가 일제에 저항하는 (조선과 중국의) 무장세력을 색출하는 데 있었고, 무조건 3등 안에 졸업해야 직성이 풀리는 ’야심만만한 출세주의자’ 박정희가 그 일에 누구보다 발벗고 나섰음은 너무나도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그가 근무했던 1944년 후반기에 만주를 무대로 한 독립군 부대가 없었다”고 반박하기도 한다. 반면 당시 화북지방이 독립군과 공산유격대의 주요 활동 근거지였고, 유독 조선인 독립군 부대를 토벌하는 작전을 펼 때마다 박정희가 “요오시(좋아)”라고 말했다는 증언도 전해진다. 박정희 소속 부대가 110여회나 독립군 부대 토벌에 나선 자료가 있고, 그가 부대 배치 뒤 1년만에 중위로 진급한 것도 ‘남다른 토벌 성과’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 박정희가 1942년 만주군관학교 졸업식에서 우등상을 받고 있다. 

박정희가 조선인 독립군 토벌의 ‘임무’를 띄고 있었던 것은 분명한데, 구체적으로 어떤 부대를 어떻게 토벌했는지는 각종 문헌과 증언을 통한 ‘검증’이 필요한 셈이다. 이런 일을 분명히 밝혀, ‘억울한 누명’은 그것대로 풀고, 분명치 않은 친일행위는 구체적으로 규명해내는 것이 친일진상규명위원회의 몫이다. 그러나 황국의 장교로 출세가도를 달리려는 찰나, 해방이 왔다. 당시 박정희는 국제정세에 대단히 어두웠거나, 진정으로 일본제국의 불멸을 ‘신봉’했던 것 같다. 1944년 말이면 이미 일제의 패망기운이 짙어지고 있었는데, 박정희는 그 마지막 ?은 동아줄을 잡고도 자신의 내일을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다.   

 

기회주의자  

 

 이후 4년여간의 그의 행적은 ‘친일’이라기 보다는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의 길이었다. 해방 소식을 뒤늦게 접한 뒤 만주군을 탈영한 그는 1945년 9월 베이징에 들어가 광복군에 가담한다. 당시 임시정부와 광복군은 고국에 돌아갈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기왕의 광복군 규모를 대폭 늘렸다. 혼란스런 해방정국에서 안정적인 ‘세력’을 확보하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 와중에 박정희도 또다른 동아줄을 거머쥔 것이다. 그러나 미군정의 냉대로 광복군의 고국행이 미뤄지자, 박정희는 이마저 포기하고 혼자서 배를 타고 부산항으로 들어온다. ‘진짜 광복군’이 고국으로 돌아온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귀국 이후에도 임정이나 광복군 등과 ‘인연’을 끊은 박정희는 대신 1946년 9월 막 창설된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입학했다. 광복군이 해방 이후 정국의 ‘실세’로 거듭 나는 데 실패할 것이란 걸, ‘동물적 감각’으로 간파했는지도 모른다. 이후 있었던 그의 좌익 행적까지도 ’기회주의’로 축약된다
 

징용자 목숨값 담보 정치자금 챙겨 굴욕적 회담 막후엔 만주인맥 포진

오마이뉴스 | 기사입력 2004-08-29 14:08 | 최종수정 2004-08-29 14:08 [오마이뉴스 정운현 기자]

 


▲ 1965년 '한일협정'에 서명하는 박정희 대통령. 왼쪽부터 정일권 총리, 박 대통령, 이동원 외무장관, 김동조 주일대사. 


내년은 한일관계사에서 한 획을 긋는 해가 될 것이다.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압적으로 박탈한, 이른바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지 100년이 된다. 또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지 60년, 그리고 1965년 그들과 국교정상화 조약(한일협정)을 맺은 지 40년이 되는 해다. 

-----------------------------------------
정부 한일협정 문서 공개 '주목'

과거사 진상규명 문제를 놓고 정치권이 논란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정부가 한일협정 체결 당시 일본에 대한 청구권과 경제협력 등을 규정한 협정 문서 5건의 공개를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주목되고 있다. 서울행정법원이 지난 2월 일제시대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들이 외교부를 상대로 낸 소송에 대해 “한일협정 문서 57건 중 5개의 문건을 공개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정부가 공개를 검토중인 문서 가운데는 한국측 협상 당시 한국측에서 일본 정부와 기업들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지 못하도록 한 발언록 등이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본 정부는 그동안 한국인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들이 손해배상을 요구할 때마다 65년 맺은 한일협정에 따라 개인청구권은 소멸됐다고 주장해왔다. 따라서 이들이 한일협정 무효소송을 내거나 한국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낼 경우 적잖은 논란이 예상된다. 특히 일본 정부가 북-일 수교협상에 지장을 줄 수 있다며 비공개를 요청한 문서도 일부 포함된 것으로 알려져 이 문서가 공개될 경우 한일간에 외교적 파장도 예상된다. / 

-----------------------


지난 12일 민족문제연구소(소장 임헌영)는 1965년 한일협정 체결과정의 뒷거래와 관련된 일련의 문건을 발굴, 언론에 공개했다. 이 문건들 가운데서 가장 주목을 끈 것은 '한일관계의 미래' 라는 제목의 1966년 3월 18일자 미 중앙정보국(CIA) 특별보고서였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박정희 정권은 군사쿠데타를 한 1961부터 한일협정을 체결한 65년 사이 5년간에 걸쳐 6개의 일본기업들로부터 집권여당인 민주공화당 총예산의 2/3에 해당하는 6600만 달러를 제공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한국정부는 일본을 상대로 조선인 징용, 징병, 위안부, 학도병 등 일제하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보상명목으로 청구권 자금 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일본 기업들이 공화당에 정치자금을 제공한 것은 이 와중에 발생한 것으로, 결국 박 정권은 앞에선 청구권자금 협상을 하면서 뒤로는 이를 빌미로 비밀 정치자금을 받아 챙긴 셈이다. 공화당은 이밖에도 1967년 제6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재일 한국기업을 상대로 거액의 정치자금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보고서는 "알려진 바에 의하면 정부방출미 6만톤을 일본에 수출하는 과정에 개입한 8개의 한국 회사가 민주공화당에 11만5000달러를 지불했다"고 적었다. 이들이 돈을 건넨 창구는 당시 권력 제2인자 김종필 전 중앙정보부장이었다. 한일협정 체결과정의 검은 '뒷거래' 한일 국교정상화를 위한 한일회담의 큰 의제 가운데 하나는 35년간 일제의 강압지배에 대한 대일 청구권 문제였다. 이에 대해 이승만, 장면 정권에서는 이렇다할 진전을 보지 못하다가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에 와서 급진전을 보았다. 여기엔 박정희의 일제하 경험(대구사범학교, 만주 군관학교, 일본 육사 등)과 일본측 '만주 인맥'의 도움이 컸다. 이들은 막후에서 한일회담 성사를 도왔으며, 또 박정권 하에서 한일간 밀월외교의 연결고리 노릇을 하였다. 



▲ 박정희가 만주 신경군관학교 재교시절 교장으로 있던 나구모 중장(당시 계급) 

ⓒ2004 동덕대

군사쿠데타 6개월 뒤인 1961년 11월. 박정희 당시 최고회의 의장은 첫 외국방문지로 일본을 찾았다. 박 의장 일행이 일본에 도착한 11월 11일 저녁 도쿄 시내 일본 수상관저에서는 그를 환영하는 만찬회가 열렸다. 양국 정상과 참모들이 마주 앉아 있는 긴 테이블 끝에 한 노인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는 박 의장이 초청한 '특별손님'이었다. 공식 축배가 끝 난 후 박 의장은 술병을 들고 테이블 끝머리에 앉은 이 노인에게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는 국가원수의 체면도 차리지 않고 이 노인에게 머리를 조아리고는 술을 한 잔 올렸다. 그리고는 유창한 일본어로 "교장 선생님, 건강하십니까?"라고 인사를 건넸다. 이 노인은 박정희가 2기생으로 졸업한 만주 신경군관학교에서 교장을 지낸 나구모(南雲親一郞)였다. 이날 만찬장 주빈이었던 이케다(池田) 수상은 "사은(師恩)의 미덕을 안다는 것은 우리 동양의 미덕으로, 박정희 선생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라고 박 의장에게 극도의 찬사를 바쳤다. 박 의장의 이같은 태도는 신의를 중시하는 사무라이 후손을 자처하는 일본측 인사들로부터 커다란 호의를 이끌어 냈다. 

 

  박정희 "명치유신의 지사를 본받아..." 

 

박 의장의 이같은 '낮춤 자세'는 다음날 있은 일본 집권 자민당 간부들과의 모임에서도 이어졌다. 도쿄 시내 중심가 아카사카의 한 요정에서 열린 일본 정계의 막후 실세들과의 모임에서 그는 일본식 예법을 갖췄다. 그리고는 통치철학을 묻는 한 일본측 인사의 질문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 아무 경험조차 없는 우리는 다만 맨주먹으로 황폐한 조국을 건설하려는 의욕만 왕성합니다. 마치 일본 메이지(明治)유신을 성공시킨 젊은 지사들과 같은 의욕과 사명감을 가지고 그 분들을 본받아 우리 나라를 가난에서 벗어나 부강한 나라로 만들어 가려고 합니다."   그의 입에서 돌연 '명치유신의 지사'가 튀어나온 것이었다. 참가한 일본측 인사들도 당황해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집권 기간 중 일본을 배우거나 따라잡자는 얘기를 자주 했었다.   




▲ 박정희는 청와대 시절 일본 군가를 부르는 등 자주 '일본 향수' 에 빠졌었다고 한다. 사진은 박정희가 60년 후반 청와대에서 말을 타는 모습. 

ⓒ2004 김종신씨 제공


박정희 대통령 탄신 92주년 탄신제

11월 14일 오전10시 30분, 구미시 상모동 소재 박정희 대통령 생가에서 열린 




박정희 대통령 탄신 92주년 탄신제

박근혜 전대표 생일선물은
" 아버지가 꿈꾸셨던 대한민국 만드는데 정성 다 하는 것” 

14일 오전11시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가 선친인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92회 생일을 맞아 구미시 상모동에 소재한 생가를 방문, 유족 대표로 나와 “아버지가 꿈꾸셨던 대한민국을 만드는데 정성을 다 하는 것이 아버지께 드리는 생일 선물이며, 남들은 기적이라고 말했지만 아버지는 국민들의 피와 땀 그리고 눈물이 만들어낸 결과라고 말씀하시곤 하셨다.”며 서두를 꺼냈다. 


11월 14일 오전10시 30분, 구미시 상모동 소재 박정희 대통령 생가에서 열린 『박정희 대통령 92회 탄신제』에는 유족 대표로 참석한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와 허태열 최고위원, 김성조 정책위 의장, 김태환 경북도당위원장, 이규택 친박연대 공동대표, 정희수, 이인기, 이정현, 정해걸, 박종근, 이해봉, 이한성 국회의원 등 중앙정치인이 대거 참석한데 이어 김관용 경상북도지사와 김범일 대구광역시장, 남유진 구미시장, 황경환 구미시의장과 시의원, 경북도의원에 이어 군위시의회 의장 등을 비롯해 전국에서 숭모제에 참석하러 온 수많은 인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탄신제에 참석한 김범일 대구시장은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는 분이, 아버지와 박정희 대통령이었다.”고 했고, 이어 남유진 구미시장은 구미오페라단 ‘새마을과 눈물많은 초인’을 인용 “우리모두 하루 한 번은 나라를 생각하자, 우리 모두 하루에 한 번은 조국, 민족, 통일, 내일을 생각하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늘 하루는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생각하자.”고 해 참석자들은 공감대를 가지고 큰 박수를 보냈다.


 
경북/최현영(gbinews@hanmail.net)
        


▲ 대구.경북을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을 환영하는 대구.경북시도민....


 

 
다음검색
댓글
  • 작성자 13.05.01 21:51

    첫댓글 차렸!~ 중근이 형님께 경례! 충성~~~또다시 쪽빠리가 침략하면 일왕의 마눌과 며눌 손녀까지 죄다 강간하고 사지를 짤라 죽일것을 형님앞에 맹세합니다! 비록나이는있지만 아직은 충분이 할수있습니다~~~^^
    이런게 진짜 극우이자 민족주의이지...빙신들...

  • 13.12.09 21:38

    우리나라 애국보수란 쪽바리에게 나라 팔아먹는 족속들 특히 어벙이 연합 가스통할배 일베충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