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붓다를 정신적 아버지로 태어난 ‘리틀 붓다’ 우리는 탐진치 삼독에 취해 작은 불씨로 있는 붓다DNA 즉 ‘불성’을 못 보고 있지만 불씨가 완전히 꺼진 건 아냐 꿈에서 깨어나 눈을 크게 뜨면 붓다 닮은 자신 발견할 수 있어 앙산은 그 작은 불씨를 살려내 자신만 아니라 꽁꽁 얼어붙은 대중의 몸과 마음 녹인 소석가
붓다와 같이 지혜롭고 위대한 삶을 살아 ‘리틀 붓다(Little Buddha)’ ‘소석가(小釋迦)’로 불린 앙산혜적(仰山慧寂, 803~887)선사. ➲ 리틀 붓다(Little Buddha) 1993년에 제작된 ‘리틀 붓다(Little Buddha)’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다. 불교의 환생이라는 주제를 매개로 붓다의 일생을 그리고 있는 영화다.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키아누 리브스(Keanu Reeves)가 주연을 맡아 어린 붓다, 즉 싯다르타의 역할을 잘 소화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금도 부처님오신날이 돌아오면 나도 모르게 이 영화가 떠오르곤 한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앙산혜적(仰山慧寂, 803~887) 또한 리틀 붓다라 불렸기 때문이다. 한자로는 소석가(小釋迦)라고 한다. 붓다와 같이 지혜롭고 위대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살다갔기에 작은 부처라 불리게 되었을까? 앙산은 광동성 소주(韶州) 출신으로 속성은 섭(葉)씨다. 그는 선불교를 대표하는 다섯 종파(五家) 가운데 위앙종(潙仰宗)을 창시한 인물이다. 위앙종은 스승인 위산영우(潙山靈祐, 771~853)의 ‘위’자와 앙산의 ‘앙’자를 합해서 부르는 이름이다. 그는 열다섯 살 때 출가를 결심했으나 부모가 허락을 하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한다. 하지만 앙산은 출가의 뜻을 굽히지 않고 2년 후에 다시 자신의 결심을 부모에게 전한다. 그런데 이때는 말로만 한 것이 아니라, 부모 앞에서 손가락 두 개를 자르는 결기를 보이기도 하였다. 마치 달마의 제자가 되기 위해 자신의 팔을 자른 혜가단비(慧可斷臂)의 일화가 연상된다. 아들의 이런 모습을 지켜본 부모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는 아파하는 두 분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밝힌다. “바른 법(正法)을 구하여 반드시 부모님의 노고에 보답하겠습니다.” 이처럼 간절한 서원을 세우고 출가를 했으니, 진리를 향한 구도행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는 출가 후 구족계(具足戒)를 받기 전까지 진리의 스승을 찾아 여러 곳으로 행각을 떠났다. 그러다가 위산을 만나 마음의 문을 활짝 열게 된다. 앙산이 위산을 찾아오자 스승은 이렇게 물었다. “그대는 주인이 있는 사미인가, 아니면 주인이 없는 사미인가?” 진리를 향한 앙산의 마음이 얼마나 주체적이고 당당한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삶의 주인공인지, 아니면 대상에 이끌려 살아가는 엑스트라인지 성찰하는 일은 선(禪)의 생명이라 할 만큼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스승은 지금 이를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앙산은 자신 있는 표정으로 주인이 있다고 대답한다. 그러자 스승은 그 주인이 어디에 있냐며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제자는 대답 대신 서쪽에서 동쪽으로 걸어오더니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스승은 이 물건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직감하고 차분하면서도 친절하게 마음의 길을 보여주었다. 위산은 이때 제자에게 영염(靈焰), 즉 신령스런 불꽃이 얼마나 무궁한지(靈焰之無窮) 돌이켜보라는 가르침을 주었다. 그러면 참다운 부처가 여여(如如)한 모습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앙산은 깨침에 이르게 된다. 그렇다면 위산이 말한 신령스런 불꽃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불교에서 수없이 강조하고 있는 불성(佛性)을 의미한다. 이 깨달음의 불꽃은 본래부터 무궁무진(無窮無盡)한데, 우리들의 시선이 밖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시선을 안으로 돌이키면 내 안의 참 부처가 있는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 견성(見性)은 이때 찾아오는 종교적 체험이다. 앙산은 위산의 가르침을 통해 이러한 진리의 샘물을 맛본 것이다. 그런데 위산이 앙산에게 불꽃 이야기를 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위산 역시 스승인 백장회해(百丈懷海, 749∼814)로부터 이와 같은 가르침을 받고 깨침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어느 날 백장이 손가락으로 화로를 가리키면서 불이 있느냐고 물었다. 위산이 이미 꺼졌다고 대답을 하자 백장은 화로 안을 뒤적이다가 작은 불씨 하나를 찾아내 보여주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이것은 불이 아니고 무엇이더냐!” 위산의 마음속에 잠자고 있던 깨달음의 불씨가 살아나는 순간이다. 이런 체험이 있었기 때문에 위산은 제자에게 네 안의 신령스러운 불꽃을 피워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스승의 가르침으로 깨침에 이른 제자 역시 앙산(仰山)의 관음원(觀音院)에 머물면서 대중들의 마음 속 불씨를 살려내기 위해 온 정성을 기울였다. 그에게 불교 공부는 곧 마음의 불씨를 찾아 밝히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그는 여느 선사들과는 달리 입적에 이르기 몇 년 전에 열반송을 지었다고 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이 일흔일곱을 채웠지만 지금도 늙어가고 있다네. 성품에 맡겨 스스로 부침을 하나니, 양손으로 무릎을 붙잡고 굽히네(年滿七十七 老去是今日 任性自浮沈 兩手攀屈膝).” ➲ 불성의 불씨 앙산의 열반송을 처음 접했을 때 두 손으로 무릎을 붙잡고 굽힌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지금이라고 해서 어찌 선사의 깊은 뜻을 알 수 있겠는가. 하지만 자신의 시선에서 이를 헤아리고 의미를 찾는 일을 중단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 것이 중생의 업(業) 아니겠는가. 앙산은 두 손으로 무릎을 껴안고 열반에 들었다. 가부좌한 채 입적에 든 일화는 많이 접했어도 이는 흔히 볼 수 없는 모습이다. 그의 마지막 모습에 담긴 의미를 “성품에 맡겨 스스로 부침을 한다(任性自浮沈)”는 구절을 통해 가늠해보고자 한다. 앙산은 스승의 가르침을 통해 불성의 빛을 밝힌 인물이다. 그가 살아낸 77년의 여정은 저 하늘에 떠있는 구름과도 같았다. 그 77년의 삶이 불성이라는 구름과 만나 떠있었던(浮) 것이다. 이제 그 인연이 다해서 죽음이 다가왔으니 가라앉는(沈) 일만 남았다. ‘삶이란 한 조각 뜬 구름이 일어나는 것(生也一片浮雲起)이요 죽음이란 한 조각 뜬 구름이 사라지는 것이다(死也一片浮雲滅)’는 말이 있는데, 비슷한 맥락과 의미를 지닌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삶이란 무릎을 펴는 일이요, 죽음이란 무릎을 오므리는 일이 아니겠는가. 스스로 발견한 불성을 잘 쓰면서 중생들을 위해 살았으니, 갈 때는 조용히 거두어들이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런 의미로 앙산은 두 손으로 무릎을 껴안고 열반에 든 것이 아니었을까. 세상에 나와 무릎 펴고 잘 살았으므로 무릎 오므리고 잘 간(善逝) 셈이다.
<중용>에 “은밀한 것보다 눈에 잘 보이는 것이 없고(莫見乎隱), 미세한 일보다 분명하게 드러나는 일은 없다(莫顯乎微)”는 구절이 나온다. 여기에서 은밀(隱)하고 미세한(微)한 것은 인간이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양심을 의미한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작은데도 불구하고 잘 보이고 잘 드러난다고 했을까? 그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 행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자신만은 속일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욕심이 양심을 가리고 있어서 보지 못할 뿐이다. 어쩌면 애써 안 보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유가(儒家)에서 신독(愼獨), 즉 홀로 있을 때 스스로를 삼가는 것을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위산과 앙산이 모두 강조한 불성의 불씨 역시 마찬가지다. 너무 작고 약해서 마치 꺼진 것 같지만, 눈을 크게 뜬다면 모두가 볼 수 있는 일이다. 다만 삼독(三毒)의 꿈에 취해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이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바로 꿈에서 깨어나게 해주는 한 바가지의 시원한 물이다. 이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한다. 어느 날 스승인 위산이 낮잠을 자고 있는데, 앙산이 다가가 어디가 불편하시냐고 물었다. 위산은 문득 제자의 공부가 얼마나 익었는지 시험하고 싶어졌다. 스승은 아직 꿈에서 깨어나지 않아서 그렇다고 하면서 무슨 꿈인지 궁금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제자는 아무런 말없이 밖으로 나가더니 차가운 물이 담긴 세숫대야를 들고 들어왔다. 그리고 위산을 향해 말했다. “스님, 세수나 하시지요.” 스승만큼 제자의 성장을 기뻐하는 이도 없다. 위산은 불쑥 커버린 제자를 보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세수를 하였다. 스승은 제자에게 자기가 꾸고 있는 꿈이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만약 제자가 궁금해 하면서 꿈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말했다면 어땠을까? 아마 이야기를 해줄 테니 가까이 오라고 하면서 꿀밤을 먹이지 않았을까 싶다. ‘꿈은 꿈일 뿐인데, 그것이 뭐 그렇게 중요하단 말이냐. 아직도 꿈에서 깨어나지 못했구나!’ 이렇게 말하면서 호통을 쳤을 것 같다. 하지만 제자는 스승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함정에 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스승을 향해 꿈 이야기 그만 하시고 세수나 하라면서 물을 떠다주었다. 웃음이 나면서도 마음과 마음으로 나누는 스승과 제자의 대화가 정겹게 느껴진다. 우리는 모두 석가모니 붓다를 정신적 아버지로 두고 태어난 리틀 붓다다. 그런데 삼독의 꿈에 취해 작은 불씨로 숨어있는 붓다의 DNA, 즉 불성(佛性)을 못 보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불씨가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니다. 꿈에서 깨어나 눈을 크게 뜨면 붓다를 닮은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앙산은 그 작은 불씨를 살려내 자신뿐만 아니라 꽁꽁 얼어붙은 대중들의 몸과 마음을 녹인 소석가였다. 우리가 그를 공부하는 이유다. [불교신문3680호/2021년8월2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