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의 무게, 진중함을 생각하며 사는 게 어떨까 이승과 작별하는 순간에도 우리에게 삶이라는 인연을 어떻게 가꾸며 살아왔는지 자기성찰·인연 중요성 강조
이승과 작별하는 마지막 순간에도 인연의 중요성을 강조한 원오극근(1063~1135)선사.
➲ 발밑을 살펴보라 사찰 법당에 들어갈 때면 신발을 벗어놓는 섬돌 위에 조고각하(照顧脚下)라고 쓰인 글귀를 종종 만나게 된다. 이 말은 글자 그대로 자신의 발밑을 잘 살펴보라는 뜻이다. 여기에는 법당에 들어갈 때 신발을 잘 벗어 가지런히 놓으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신발 하나 정리하는 것이 뭐 그리 큰일이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겠지만, 결코 그렇지만은 않다. 신발 벗어놓은 걸 보면 그 사람이 평소 어떻게 살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발이 곧 마음이었던 것이다. 눈뜬 선지식들이 신발을 똑바로 벗어놓는 것을 마음공부라 강조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리고 이 말에는 우리의 실존과 관련해서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발밑은 현재 내가 처해있는 상황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현재 내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늘 성찰하라는 것이다. ‘위로는 진리를 구하고(上求菩提)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한다(下化衆生)’는 서원(誓願)을 세우고 출가한 수행자들에게는 평생의 지침으로 삼아야 할 경구다. 특히 ‘뭣이 중헌디?’를 모른 채 자본과 권력, 물질에 취해 자신을 잃고 살아가는 오늘의 우리에게 의미 있는 가르침으로 다가온다. ‘조고각하’라는 말은 이번 주제인 원오극근(圓悟克勤, 1063~1135)선사와 인연이 깊다. 원오는 입적 후 남송의 고종(高宗)에게 받은 법호이며, 그가 활동하던 당시 북송의 휘종(徽宗)은 불과(佛果)라는 호를 내려주었다. 그래서 불과극근이라 불리기도 한다. 송나라 때 고승으로 알려진 오조법연(五祖法演, 1024~1104)선사에게는 불과를 비롯하여 불감혜근(佛鑑慧懃)과 불안청원(佛眼淸遠)이라는 뛰어난 제자가 있었다. 이 셋을 가리켜 흔히 법연삼걸(法演三傑), 혹은 삼불(三佛), 삼철(三哲)이라 부른다. 어느 날 오조법연이 이 세 명의 제자와 함께 외출했다가 시간이 늦어 밤길을 걷게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와 손에 들고 있던 초롱불이 꺼져서 앞을 볼 수 없었다. 스승은 제자들의 공부가 얼마나 익었는지 시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고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나는 대로 말해보라고 하였다. 지금까지 공부한 밑천이 모두 드러나는 순간이다. 이때 원오는 스승에게 이렇게 말한다. “발밑을 살펴보아야 합니다(看脚下).” 단순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대답이다. 여기에는 수행자로서 늘 자신을 성찰하면서 살겠다는 삶의 태도가 담겨있다. 참으로 진솔하면서도 무게감이 느껴진다. 스승은 얼마나 기분이 좋았던지 원오에게 ‘종문(宗門)을 망칠 놈’이라는 극찬을 한다. 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그러면 선(禪) 언어의 맥락과 의미를 놓칠 수 있다. 이는 어느새 불쑥 성장한 제자를 보고 그 기쁨을 어떻게 표현할지 몰라서 내뱉는 스승의 최대 찬사다. 스승은 이 대답을 듣고 원오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겠다고 마음을 굳힌다. 원오는 팽주(彭州) 숭녕(崇寧), 즉 지금의 쓰촨성(四川省) 청두(成都) 출신으로 자는 무착(無着)이다. 그는 독실한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하루에 천 개의 단어를 암기할 정도로 수재였다고 전한다. 어린 시절 우연히 절에 갔다가 인연이 되어 출가한 이후 <능가경>을 비롯하여 여러 경전을 공부하였으나 마음에 계합하는 바가 없었다. 이때부터 그는 진리의 길은 언어문자에 있지 않다는 것을 자각하고 여러 스승을 찾아 운수행각에 나선다. 그러다 앞서 언급한 오조법연을 만나 마음의 문이 열리게 된다. 원오는 간화선을 창시한 대혜종고의 스승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특히 선(禪)의 길을 걷는 이들에게 나침반 역할을 하는 <벽암록(碧巖錄)>의 저자이기도 하다. 이 책은 설두중현(雪竇重顯 980~1052)이 1700개의 공안(公案) 가운데 중요하다고 생각한 100칙(則)을 골라 편집한 <설두송고(雪竇頌古)>의 주석서다. 원오는 <설두송고>를 교재로 삼아 선불교의 공안에 대해 강의를 했는데, 제자들이 그 내용을 모아서 책으로 낸 것이다. <벽암록>은 ‘종문(宗門) 제일서(第一書)’라 불릴 만큼 선불교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선원(禪院)에서도 많이 익혀지고 있는 책이다. 원오의 임종이 다가오자 제자들은 당시의 관례에 따라 게송을 남겨 달라 청한다. 하지만 그는 생명력을 잃고 형식화된 열반송을 남기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 마음이 유훈에서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아무 것도 해 놓은 것 없는데, 게송을 남길 이유가 있겠는가. 오직 인연에 따를 뿐이니, 진중하고 진중하도다(已徹無功 不必留頌 聊爾應緣 珍重珍重).” 대혜종고 편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는 열반송도 집착이라고 하면서 ‘게송이 없으면 죽지도 못하느냐!’고 일갈했던 인물이다. 그 스승에 그 제자다. ➲ 진중한 인연 원오극근은 차(茶)와도 관련이 깊은 인물이다. 차 마시는 행위를 수행의 차원으로 인식한 이른바 다선일미(茶禪一味)를 주창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차와 관련된 선사들이 있었다. 특히 조주종심은 끽다거(喫茶去)로 유명한 선사다. 사람들이 그를 찾아와서 불교의 대의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차나 한잔 마시고 가게’라고 대답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원오는 차를 눈으로 보고 향기를 맡으며 마시는 등의 모든 행동이 곧 선(禪)이라고 보았다. 이를 조고각하와 연결시키면 중요한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차를 달이고 마시는 나 자신을 살피라는 뜻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차 마시는 자리는 발밑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살아있는 수행 현장이 되는 셈이다. 그러니 차를 마시면서 폼을 잡을 것이 아니라 폼 잡는 나 자신을 살피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 할 것이다. 폼은 조고각하를 실천했을 때 나오는 자연스런 삶의 몸짓이다. 원오는 이승과 작별하는 마지막 순간에도 인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게송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연에 따를 뿐이므로 삶에 대해 진중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참을 곱씹어보았다. 그는 우리에게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자기성찰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 같았다. 문득 불교에서 많이 회자되고 있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람이 죽을 때 다른 것은 하나도 가져가지 못하지만, 자신이 지은 업(業)만은 가져간다는 얘기다.살면서 아무리 많은 재산을 모았다 하더라도 오직 그 돈으로 행한 업(業)만 갖고 간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자신이 번 돈으로 많은 선행을 베풀었다면 선업을 가져가고 사회적 약자에게 갑질을 일삼았다면 악업을 가져갈 것이다. 죽음이란 살면서 행했던 모든 업을 결산하는 순간이다. 원오는 열반의 순간 우리에게 삶이라는 인연을 어떻게 가꾸면서 살아왔는지 묻고 있는 것이다. 그의 지적대로 진중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몇 해 전 가까운 벗에게서 들은 얘기다. 평생 열심히 살아왔던 장인이 어느 날 췌장암 판정을 받고 오래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는데, 그때 병원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야, 이게 뭐냐!” 친구에게 들은 이 말이 한동안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짧은 이 말에서 평생을 열심히 살았지만 자신의 삶을 돌아보지 못한 어느 노인의 회한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발밑을 보지 못하고 살아온 삶에 대한 아쉬움이 아닐까 싶었다. 우리라고 별반 다를 것이 있겠는가. 죽음이 눈앞의 현실이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것이 중생들의 업이니까 말이다. 우리가 죽음을 철학하는 이유도 나의 발밑을 살피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원오의 열반송을 통해 우리는 다시 한번 삶이라는 인연의 무게를 생각하게 된다. 불교에 처음 입문한 이들이 듣게 되는 인도의 우화가 있다. 어느 날 토끼가 도토리나무 아래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데, 도토리 열매 하나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깜짝 놀란 토끼는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른 동물들도 정말 큰 일이 일어난 줄 알고 덩달아 빨리 달렸다. 이 장면을 지켜본 사자는 걱정이 앞섰다. 그렇게 빨리 달리다가 낭떠러지라도 만나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달리는 동물들 앞을 가로막고 이렇게 물었다. “너희들, 어디를 향해 달려가고 있느냐?” 대답하는 동물이 아무도 없었다. 그러자 사자가 재차 물었다. “그러면 왜 그렇게 열심히 뛰어가고 있느냐?” 이때도 역시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어디를 향해, 왜 그렇게 열심히 뛰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옆에서 달리니까 그냥 달린 것뿐이다. 어쩐지 아무런 목적의식 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오늘의 우리 모습을 닮은 것 같아 씁쓸할 뿐이다. 원오는 이 우화에서 사자와 같은 역할을 하는 선지식이다. 그는 우리에게 묻고 있다. 왜 발밑을 보지 않느냐고 말이다. 내가 지금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성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의 가르침대로 삶이라는 인연의 무게, 진중함을 생각하면서 사는 것이 어떨까. 생각하면 삶(生)이 깨어나는(覺) 법이다. 진중하고 진중하게 생각(生覺)할 일이다. [불교신문3681호/2021년8월31일자]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