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 그 축복과 저주
황정현
망각과 기억 중 어느 것이 더 축복이며 저주인지 한마디로 말할 수 없다. 기억능력이 출중한 사람은 세속적 출세와 성공가도에서 남보다 빠르게 능력을 인정받는다. 부와 명예와 복록도 마음껏 누리며 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억의 산술적 능력이 우수하여 출세와 개인의 영달에만 그 능력이 발휘된다면, 그것은 우수한 기억 기계 같은 삶에 불과할 것이다. 또한 아무리 뛰어난 기억이라해도 세세한 저장은 컴퓨터나 책을 넘어설 수 없다. 기억은 기록을 이기지 못한다. 그러므로 탁월한 기억 능력은 인간적 삶을 향상시키는 지혜로 유용하게 선용되어야 할 것이다.
기억의 이기적 능력과 편의성이 삶의 질을 위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은혜를 입은 사실과 사랑을 하며 계획과 연구를 위해 기억에 의존하는 모든 윤리적 도덕적 행동 질서는 삶을 바르게 이끄는 명료한 기본이다. 평화와 번영의 길목에 던져진 인간의 메시지를 알아채고 실행하는 능력의 저변에 기억이 기여하는 바탕은 절대적이라 할만하다. 이런 차안의 세상에서 삶의 평화로운 여정에 망각이 끼어들면, 모든 성장과 약속된 미래의 수레바퀴는 멈춰야 한다. 그럼에도 망각이 필요한 경우가 있어야 한다면, 이 세계의 삶에 잊어야 할 무언가가 있음을 우리는 깨달을 수밖에 없다.
망각의 진행은 시간과 관련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누구나 나이가 늙어 기억능력이 떨어지고 망각하는 대상이 자연스럽게 늘어난다. 생활에서 얻는 일상적 정보의 홍수를 지속적으로 받다보면, 어떤 것은 선택적으로 기억되며, 어떤 것은 잊히기도 한다. 기억 속에 간직되어 있는 향수와 그리움은 아련한 생각의 발판에서 삶의 정서적 목마름을 채워주며, 메마른 일상에 미소와 감동을 안겨준다. 그러나 그 대상이 낙관적이며 평화롭고 행복한 추억으로 다가설 때만 즐겁고 아름답다.
인생이 기억하는 한 면이 따뜻한 햇볕이 비추는 평화로운 양지가 있다면, 다른 한 면은 울분과 고통 그리고 슬픔이 깃들어 있는 음지도 있다. 시간의 흐름에 의탁하는 망각의 축복과 위안이 필요한 부분은 음지의 고통스런 기억을 망각함에 있다. 어떤 원한이나 분노, 슬픔, 공포가 있다면, 망각을 통해서 한 개인이나 사회 그리고 나라의 아픔을 잊을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망각은 일종의 축복이 될 수 있다.
그런데 망각이 축복이 아니고 저주이며 비극인 경우가 있다. 작게는 건망증 같은 기억능력의 쇠퇴가 그렇고 크게는 뇌경색이나 치매로의 망각을 들 수 있다. 그리스 신화에 사람이 죽으면 삶의 경계와 죽음의 경계에 놓여있는 레테 강을 건너는데, 강을 건너며 강물을 마시도록 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강물을 마심으로써 생전의 기억을 모두 지워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치매에 걸린다는 것은 산목숨으로 레테 강의 물을 미리 마신다는 의미도 되는 것이다. 죽음에 이르기 전에 망각을 미리 앞당긴 치매로 살아있는 목석같은 삶을 지탱하는 사람은 존엄성이 사라진 물건과도 같을 것이다. 기억과 망각사이에 놓인 작은 틈 사이에 무수한 사연과 인간적 고뇌가 노니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목불인견의 정경이다. 학대와 멸시와 무시의 은근한 눈초리가 깊어지는 사람에게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나음에도 차마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아무도, 아무것도 못 알아보는 치매의 저주가 치매 걸린 이의 슬픔만은 아니다. 치매환자는 이 망각의 강에 들지 않기 위해 얼마나 발버둥을 쳤겠는가. 그렇다할지라도 아름다운 세상의 일출과 일몰을 모르고, 기도를 잊었으며 사랑하는 피붙이들을 몰라보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어찌하란 말인가. 이제 남은 것은 이 풍진 세상에 배고픈 본능만으로, 생명이 멎을 때까지 먹을 것만 찾으며 마냥 허우적거리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뿐이다. 동정과 연민이 점차 떠나가는 허위와 허상의 존재로 우두커니 서게 된다. 기억의 표상으로 남아 무연한 낯빛만 보일 것이다. 이런 경우의 망각은 가장 측은한 저주이며 재앙이다.
치매는 가까운 기억부터 사라지고 먼 기억이 잠시 숨어 있다가 차츰 소멸해가며 마침내 모든 자각적 앎의 천지가 까맣게 되는 병이다. 울 줄 모르는 꽃으로 남거나, 웃을 줄 모르는 백치 아기가 된다. 그 어린 날 칭얼거리고 보채며 줄곧 걸쳤던 기저귀 신세를 늙고 늙어 지게 된다. 원하는 바가 아니었으되, 그리 된 슬픔과 치욕으로 보면 스스로 자진할 법도 하건만, 그런 마음의 단호한 경지도 떠나버렸다. 대부분 악화일로를 걷다 숨을 거두며, 때로는 길고 질긴 삶의 보기 흉한 자취와 증오심을 심어주고 가는 사람도 있다.
그럼에도 어느 인간이 그 치매의 세계가 그립다고 가고 싶어 하겠는가. 더구나 살만한 세상이 지루해서 심심파적으로 흘러 들어간 천국은 더욱 아닐 것이다. 우리나라의 현대 시성詩聖 서정주도 그 세계에 점 하나라도 찍기 싫어 숫자를 거꾸로 세고, 강 이름과 세계의 수도 명을 외워대며 허우적거릴 만큼, 다가서길 꺼려하는 산지옥이 아닌가. 불가항력으로 끌려 들어간 망각의 늪에서 다만 숨을 쉬는 육체를 바탕으로 마지막 살아있음의 연극을 하는 몽매의 세계를 어쩌란 말인가. 간절한 울음도 잊고 기억의 언저리에서 활개 쳤던 웃음이 사라진 과거의 숭고한 가족이며 사회인의 경력은 다만 전설이 되었다.
치매 있으되 따뜻한 연민과 눈길만 있으면, 살아있음의 진실이 숨 쉴 수 있다. 치매 걸리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의 논리에 맞춰, 치매 걸린 이들을 단죄하는 식의 대접이나 이치는 합당하지 않다. 치매는 누구나 원하지 않는 천형이다. 천형의 불운한 벼락을 맞고 멍한 어린애 되어 친지들의 눈이 쏠리는 전신에 마주하는 백치미가 어찌 슬프지 않을 수 있는가. 백치의 울타리 안에서 지난날의 신산스런 기억과 고뇌를 망각하는 시련 속에 빠졌는데, 치매환자의 연분과 과거의 화려한 능력만 생각하고, 정상적인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춘 물음에 모두 정상적인 대답이 있어야만 하겠는가. 다만 숨쉬고, 다만 멍한 표정의 사람일지라도, 썩어 문드러진 해골보다 얼마나 나은 피붙이인가. 그를 살펴라. 그를 느껴라. 소통의 맥이 끊겼음을 탓하지 말고, 치매 걸린 이의 울고 있는 영혼이 지켜보고 있음을 마음으로 느끼도록 해야 한다. 감정의 올곧은 일방통행의 눈물서린 교류라 해도, 영원한 이별을 향한 치매환자의 죽음의 시간은 곧 다가온다.
의학적으로 치매는 초기 일 때 치료대상으로 간주된다. 절망적인 우울과 외로움에 의하여 중증으로 진행되도록 방관하지 않는다면, 나을 수 있고 점차 개선될 수 있는 단계로 갈 수 있다고 한다. 삶의 질로 본다면 암이나 여타 질병보다 더 비참한 병이기에 누구나 필사적인 기피의 대상임에도 노망으로 가는 길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긴다. 나이 젊은 사람도 가끔 생기는 질병이며 대부분은 늙은 몸의 퇴락한 느린 동작의 결과와 맞닿는다. 정신의 쇠퇴로 혼미한 판단 미숙을 초래하고 삶의 퇴장을 눈앞에 둔 비극적 모습이다. 머지않은 미래에 치매 병을 근본적으로 치료하거나 획기적인 뇌 회복의 약물이 나올 것이라는 희망적인 메시지가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치매 병자의 삶의 질은 간병의 질과 동일하다. 치매 없는 이들의 살가운 보살핌의 정도에 따라 여생의 숨통이 열린다. 똥과 오줌 냄새의 구역질을 견디는 눈물과 역겨움을 딛고 아기 된 어른의 용태를 살피는 노릇을 아무나 할 수 있겠는가. 그 마지막이 지겹고 역겨워 애틋한 그리움의 조각이 들어설 틈이 없으리라. 살아있음의 온전한 온기와 살가움이 아무런 위엄도 없는 치매병자에게 향할 수 없겠으나, 잊힐 듯 잊히지 않는 화원에서 짧은 시간의 각인을 위해 잠깐씩 스치는 기억회로마저 흩어진 미망을 살피고 이해하자. 당신들을 못 알아보는 불행한 피붙이가 허위허위 떠나가며 의식 없는 애달픈 연극을 한다고 여기자. 지난날의 웃음과 애정어린 말투들, 성취의 순간마다 기쁨을 같이한 핏줄기의 함성과 웃음소리, 고통스런 시련이 있을 때 마다 눈물을 나누고 따뜻한 밥 한기를 들며 그 모습에 흐뭇했던 정경들, 이제 사라져가는 앙상한 나목으로 허우적거리는 무지몽매를 우수마발 취급하는 무례를 얼마만큼 저지르고 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위엄과 기품을 마음속에 새기고, 처음에는 매일 드나들던 정성이 시간과 시일이 갈수록 뜸해지고 약해진다. 하루가 일주일이 되고 일주일이 한 달로 넘어가면 살아있는 피붙이는 남남이 되어간다. 6개월이나 1년으로 찾는 간격이 벌어지면 기억조차 아련한 그림자로 전락한다. 그런 비정한 인지상정 안에 들어앉는 변명이 죽음의 재촉을 기대하는 마음에 닿는다. 그 처음 깃들었던 정성이 야속하게 녹이 슬거나 지겨운 맘이 들기 시작하여 저지른 무관심의 죄과는 갖가지 사유로 포장되어 얼굴을 내민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피붙이가 죽는다 한들 결코 맘이 편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시간의 채찍이 못난 행위와 태만을 꾸중하고 탓하며 다음 차례를 재촉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 차례가 너와 나에게 다가와 예기치 못할 굴레가 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게 전개되는 양상은 세상 삶에서 낯선 풍경이 아님을 지나간 역사가 증명한다. 시간은 가는 것이 아니고 머물러 있으므로 누구에게나 차례와 시간을 많이 기다릴 필요도 없을 만큼 빨리 닥친다.
에디슨이 말했던가. ‘변명 중에서 가장 어리석고 못난 변명은 “시간이 없어서.......”라는 변명이다’.라고 했는데, 애증과 함께 깊은 정의 그리움이 내 혼의 얼굴이 된 세상의 둘도 없는 피붙이를 찾아가는데 “시간이 없어서...”라는 변명을 하지 말자. 어차피 시간은 화석으로 향하는 생명의 잔영을 자꾸 거두어 가고 있음을 알자. 감각의 진실한 촉진을 아직 느끼는 어르신의 손을 어루만져 주자. 칸트는 ‘손은 눈에 보이는 뇌의 일부’라고 지적했다. 아직 따뜻한 심장의 피가 도는 손의 맥박을 통해 잊을 수 없는 사랑의 신호를 보내자. 죽은 시체의 체온보다 그래도 산목숨의 따뜻한 피붙이 손을 어루만지는 시간을 갖는 것이 어떤가. 망각의 잔인한 저주와 함께 영원한 이별에 들기 전에 우리는 치매환자에게 지극한 정성으로 다가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