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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론 - 류가미 의 환상여행
< 동양과 서양, 고전과 현대, '보편사'속의 신화 와 의식>
(12회) 헬레니즘 - 동과 서의 결혼 ⓛ /
연재를 시작한 후부터 일주일이 빨리 지나갑니다. 사실 연재를 올릴 금요일이 다가오는 것이 무섭습니다. 공포의 금요일! 그러나 한편으로는 학교 다닐 때도 꼬박꼬박 숙제 한적이 없던 인간이 연재 빼먹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는데 무한한 자부심을 느낍니다. (스스로를 머리 쓰다듬어주자.)
오늘은 약속대로 헬레니즘에 대해서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게 이번 연재에서 헬레니즘을 비중 있게 다루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수많은 문화적 교류가 있었지만 헬레니즘만큼 두 문화권이 (유럽과 레반트가) 오랜 시간(거의 600년 동안)에 걸쳐 문화적 통합을 이룬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헬레니즘을 동양과 서양의 결혼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동양은 인도나 동북아가 아니라 레반트를 지칭합니다.
▶ 헬레니즘을 세운 알렉산더 대왕. from 1stmuse.com
그러나 제가 헬레니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더 큰 이유는 다른 데 있습니다. 헬레니즘은 수많은 나라들이 자기 문화의 독자성을 유지한 채 국가를 초월한 보편성을 추구하는 시도였습니다. 바로 이점이 지금 우리의 입장을 정리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난 세기에 일본 제국주의를 경험했습니다. 다들 너무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기에 이 자리에서 제국주의가 어떤 것인지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제국주의는 식민지에서 자원과 노동력, 시장뿐이 아니라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문화적 자존심마저 빼앗아 간다는 것입니다.
일본 제국주의에서 벗어난 지 50년이 지난 지금, 아무도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군사적, 경제적으로 수탈당하는 식민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화적으로 우리는 아직도 식민지 시대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신적 상처는 보이지 않지만 그 때문에 물리적 상처보다 더 오래 갑니다.
제국주의의 가장 무서운 점은 식민화된 나라의 정신을 왜곡시킨다는 것입니다. 강대국은 약소국을 식민화하면서 그 나라의 말과 종교와 신화와 사상은 억압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 자기 문화를 강요하지요. 강대국은 자기의 문화를 세계적인 것, 보편적인 것, 우월한 것으로 주장합니다. 그리고 약소국의 문화는 상대적인 것, 특수한 것, 열등한 것으로 취급하지요.
결국 약소국이 보편적인 것, 세계적인 것을 추구한다는 것은 자기 나라 문화를 버리는 강대국의 문화를 따르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반면 자기 나라 문화를 지킨다는 것은 보편적인 것, 세계적인 것을 부정하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결국 약소국은 세계주의를 표방하는 문화적 사대주의와 자기 문화 우월주의에 빠진 폐쇄주의라는 두 가지 덫에 걸리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사정도 이와 별로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아직도 많은 지식인들이 미국과 일본 문화를 세계적인 것, 보편적인 것으로 간주하면서 그들의 틀로써 우리 사회를 설명하려고 애씁니다. 그런 맥락에서 일제가 우리나라를 근대화시켰다,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자는 말도 나오고 있습니다.
반면 문화적 사대주의자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극단적으로 자기 문화의 우월성이나 순수성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일본과의 문화적 교류를 왜색이라고 혐오하는 사람들도 있고 충분히 검토되지 않은 자료를 가지고 고대에 우리민족이 유라시아 대륙을 통괄하는 대제국을 세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건강한 인간이라는 것은 분명한 자아 정체감을 갖고 동시에 주위 사람들과 따뜻한 유대를 형성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자신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지배나 타인에게 종속된 의존 관계가 아니라 자기 존엄성을 지키면서 동등한 입장에서 타인과 교류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저는 건강한 국가도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문화의 정체성을 잊지 않고 자기 문화의 긍지를 가지면서 타 문화와 동등한 입장에서 교류할 수 있는 나라가 건강한 나라겠죠. 우리는 우리의 역사와 문화적 특수성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동시에 다른 나라들과 교류함으로써 지구를 하나의 공동체로 묶을 수 있는 보편적 가치를 발견해 내야 합니다.
그것이 통신과 운송 기술의 발달로 점점 하나의 생활권으로 좁혀지고 있는 21세기의 지구가 우리에게 던지는 과제입니다. 그리고 전 헬레니즘이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본격적으로 헬레니즘을 이야기하기 전에 헬레니즘이 탄생하게된 역사적 맥락을 설명해야 할 것 같습니다. 헬레니즘이라는 유럽과 레반트의 결합이 있기 전에 있었던 유럽과 레반트의 길고긴 갈등에 대해서 말이죠.
자, 기원전 5세기 경, 유럽을 대표하는 그리스와 레반트의 지배자 페르시아의 사정을 살펴봅시다. 기원전 525년 페르시아는 레반트 전역을 통일합니다. 그러자 그 동안 자치권을 유지해오던 이오니아 지방에 있는 그리스 식민도시들이 페르시아에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때 그리스는 이오니아에 있는 식민도시들을 돕습니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왕은 이들 식민도시의 반란을 진압합니다. (이오니아의 반란, BC 500-494)
◀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from www.e-grammes.gr
그리고 기원전 492년, 식민도시들의 반란을 도운 그리스를 치기 위해 그리스 북쪽에 있는 트라키아 지방에 함대를 보냅니다. 이것이 제 1차 그리스-페르시아의 전쟁입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이 함대는 아토즈 곶에서 난파하고 맙니다.
그러나 포기를 모르는 다리우스 대왕은 기원전 490년 그리스에 2차 원정군을 보냅니다. 에레트리아시(市)를 함락한 페르시아군은 여세를 몰아 아테네 북동쪽에 있는 마라톤 평야까지 치고 올라옵니다. 이 마라톤 평야에서 페르시아군은 수적으로 훨씬 적은 아테네의 군과 전투를 치릅니다. 그런데 예상을 뒤엎고 이긴 것은 아테네군이었습니다. 한 병사가 아테네에 승전소식을 전하기 위해 마라톤 평야를 달려갑니다. 긴 시간을 뛰어 온 이 병사는 아네테에 승전 소식을 전하자마자 쓰러져 죽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그 병사를 기념하기 위해 장거리 질주 종목을 만듭니다. 그것이 바로 마라톤이지요. (올림픽 홍보 영화에 나오는 그 유명한 이야기!)
▶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왕. from home.att.ne
2차 그리스원정에서 실패한 다리우스 대왕이 죽자, 그의 아들인 크세르크세스가 뒤를 물려받습니다. 기원전 480년 크세르크세스는 바다와 육지 양쪽으로 그리스를 쳐들어옵니다. 페르시아군은 테르모필레에서 스파르타군을 무찌르고 아테네로 진군해 들어옵니다. 그러나 이미 페르시아군이 올 것을 안 아테네 시민들이 다 피난을 간 후였습니다. 페르시아군은 살라미스 섬 앞 바다에서 아테네 함대와 만납니다. 그리고 또다시 아테네군에게 참패를 당하고 말지요.
그후 크세르크세스의 아들 마르도니우스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그리스에 원정군을 보내지만 또다시 그리스 연합군에게 패배합니다. 이로써 이오니아 지방에 있는 그리스 식민도시들은 페르시아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같은 도시국가들은 황금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후세 사람들은 이 시기를 그리스의 고전기라고 부릅니다. 이 시기에 그리스는 문화적으로, 정치적으로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두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소크라테스와 페리클레스일겁니다. 소크라테스는 그리스 고전철학의 아버지이고 페리클레스는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완성시킨 사람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의 주제를 자연이 아니라 자기 자신, 바로 인간으로 돌려놓았습니다. 이제 신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인간이 철학의 주제가 됩니다. 그것은 인간이 철학의 주제가 될 만큼 중요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페리클레스는 그리스 도시 국가들 (델로스 연맹)의 맹주로서 페르시아와 화약을 맺고 그 평화 속에서 그리스 참여 민주주의의 꽃을 피웁니다.
◀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꽃피운 페리클레스.
from www.phil.uni-erlangen.de
사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은 두 국가간의 전쟁이었지만 또한 그리스와 페르시아로 대표되는 두 가치관의 싸움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집단보다 개인이 중요하다고 믿었던 사회와 개인보다는 집단이 중요하다고 믿었던 사회의 싸움이었습니다. 또한 그것은 평범한 다수의 사람들에 의한 통치가 낫다고 믿었던 사회와 신적인 권능을 부여 받은 위대한 한 사람에 의한 통치가 낫다고 믿었던 사회의 싸움이기도 했습니다.
그리스 고전기의 철학은 인간에게 관심을 보입니다. 그리스의 관심은 다른 것이 아닌 지금 이곳에 살고 있는 인간이었습니다. 반면 페르시아에는 철학 대신 종교가 있었습니다. 페르시아의 국가 종교였던 조르아스터교는 인간 자체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단지 인간에게 선한 신을 따를 것인가 악한 신을 따를 것인가 하는 결단을 강요할 뿐이지요.
정치적인 면에서도 그리스와 페르시아는 많이 달랐습니다. 그리스가 종교와 정치가 분리된 사회라면 페르시아는 종교와 정치가 일치하는 사회였습니다. 그리스에서는 원로원 의원이건 참주이건 그 사람은 그저 세속적인 인간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시민들은 통치자에 찬성할 수도 있고 반대할 수도 있습니다.
▲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아고라 유적. from www.nathanwolfson.com ▲ 다리우스 대왕이 세운 도시 페르세폴리스. from www.historyforkids.org
그러나 페르시아에서 왕은 곧 살아있는 신입니다. 따라서 왕을 반대한다는 것은 신을 반대하는 것이 됩니다. 페르시아에서 정치가 신의 뜻을 행사하는 것이라면 그리스에서 정치는 인간들의 뜻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페르시아의 정치란 신에 의한 신을 위한 신의 정치라면 그리스에게 정치란 인간들에 의한 인간들 위한 인간의 정치인 셈이죠.
그리스 고전기는 한마디로 바로 개인이 탄생하는 시절입니다. (여자와 노예를 제외하기 했지만) ‘한 인간은 개인으로서 고유의 가치를 지니며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앞날을 결정할 만큼 이성적이다’는 믿음 없이는 철학도 민주주의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페르시아에서는 개인이 강조된 적이 없습니다. 레반트의 전통 속에서 인간의 가치는 그가 신이 준 율법을 얼마만큼 충실히 지키느냐에 달려있습니다. 그런데 이 율법은 자신의 이성으로 찾아낸 것이 아니라 바로 신의 예언자에 의해 계시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가 추구하는 가치와 페르시아가 추구하는 가치 중 어느 쪽이 옳을까요?
제 대답은 둘 다 옳거나 둘 다 틀리다 는 것입니다.
어느 한쪽의 가치만으로는 그 복잡한 인간의 삶이 충족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라는 것은 굉장히 양면적인 존재라서 개인으로 독립하고 싶어하는 만큼 집단 속에서 소속감을 느끼고 싶어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성을 바탕으로 진리를 탐색하고 싶어 하는 동시에 절대자인 신에게 자신을 헌신하고 싶어 합니다. 또한 인간은 평범한 민중의 자치(민주주의)에 열광하는 만큼 위대한 영웅의 통치(전제 군주제)에 환호합니다.
사실 개인이냐 집단이냐, 과학이냐 종교냐, 민주주의냐 엘리트주의냐 하는 갈등은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이 끝난 지 250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가치들 중 어느 한쪽이 아니라 양쪽을 포괄하는 새로운 가치가 있었으면 좋겠지만 아직은 새로운 가치가 태어나지 못한 상태입니다.
아무튼 서로 다른 두 가치관의 싸움이었던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은 그리스의 승리로 끝납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혹은 그리스적인 가치)의 완전한 승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이 끝나고 얼마 못 가서 그리스는 내분으로 붕괴하고 맙니다. 개인적인 성향이 짙었던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하나의 그리스로 단결하지 못하고 도시국가들의 이해에 따라 서로 대립합니다.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델로스 연맹과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 펠로폰네소스 연맹으로 분열됩니다. 델로스 연맹과 펠로폰네소스 연맹은 그리스의 패권을 놓고 전쟁을 치릅니다.
▶ 무장한 스파르타 전사들 from xenohistorian.faithweb.com
이 전쟁에서 이긴 것은 스파르타였습니다. 그러나 이 승리는 그리스의 멸망을 가져옵니다. 얼마 후, 새롭게 부상한 마케도니아가 내란으로 약해진 그리스를 점령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를 정복한 마케도니아의 왕, 필립포스 2세는 이제 눈을 페르시아로 돌립니다. 그러나 그는 페르시아 원정을 앞두고 암살을 당합니다. 그를 이어 왕위에 오른 것이 바로 알렉산더 대왕입니다. 그가 바로 헬레니즘이라는 새로운 시대를 연 장본인이죠. 왕위에 오른 알렉산더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 페르시아의 원정에 나갑니다. 그리고 그의 정복은 아프카니스탄, 중앙아시아, 인도대륙의 북서부에 이르기까지 계속됩니다. 왕위에 즉위한 기원전 336년에서 그가 죽은 기원전 323년까지, 12년 동안에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 제국을 능가하는 대제국을 건설합니다.
▼ 알렉산더 대왕의 제국. from middle.edupia.com
그러나 알렉산더의 대 제국은 30년도 지탱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33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자, 그의 제국은 마케도니아, 이집트, 시리아로 분열됩니다. 삼 백년 후, 이 세 나라는 로마라는 새로운 제국에 의해서 통일됩니다. 그러나 겨우 30년 동안 지속되었던, 알렉산더 대왕의 제국은 그 어떤 제국보다 후세에 강력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의 제국의 영향력은 정치력이 아니라 바로 문화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그가 정복한 다양한 국가들을 통치하기 위해서, 서로 다른 두 가지 정책을 펼쳤습니다. 하나는 정복한 국가들의 전통을 인정하고 그들의 자치를 허락한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제국을 묶어주는 보편적인 문화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 보편적인 문화의 바탕이 되었던 것은 그리스의 문화였지요. 알렉산더는 이 정책을 통해서 정치적으로 통일된 세계가 아니라 문화적으로 통일된 세계를 창조했습니다. 훗날 사람들은 알렉산더가 건설한 문화제국을 헬레니즘이라고 부릅니다.
다음 시간에는 알렉산더가 건설한 문화제국에 대해서 보다 상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류가미 ⓒ
원문 출처: 연재 시리즈 - 데일리 서프라이즈
이미지 복원: 노하우업 (Knowhow U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