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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론 - 류가미 의 환상여행
< 동양과 서양, 고전과 현대, '보편사'속의 신화 와 의식>
(14회) 기독교 ① - 세계종교로의 첫걸음 /
댓글을 보니, 인도로 가라는 쪽보다는 유럽에 남으라는 쪽이 더 많네요. 나야 말 잘 듣는 착한 어른이니까, 시키는 대로 유럽에 남아 기독교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로마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듯, 기독교도 어느날 뜬끔 없이 나타난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라는 세계 종교는 유대교라는 민족종교가 헬레니즘이라는 토양에서 세계 종교로 발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유대교의 역사는 바로 유대의 역사 자체이기도 합니다.
▶ 팔레스티나 지도 from www.utexas.edu
자 그럼,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는 유대의 역사를 살펴볼까요? 유대의 역사는 기원전 11세기경 유대인들이 가나안 땅을 점령함으로써 시작됩니다. 지금은 팔레스티나(혹은 팔레스타인)라고 불리는 가나안 땅은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 속하는 곳입니다. 이곳은 서쪽으로는 아프리카의 이집트와 닿아있고 동쪽으로는 메소포타미아의 요르단과 연결되었습니다. 북쪽으로는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터키와 그리스를 마주보고 있고 남쪽으로는 시나이반도와 아라비아 사막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팔레스티나는 아프리카와 유럽 그리고 레반트를 연결하는 지리적 요충지입니다.
모든 건국 신화들이 그런 것처럼, 성서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형성과정 또한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모호합니다. 다행히도 이 지역의 고고학적 발굴과 연구 성과에 의해 신화 속에서 역사적 사실을 분리해내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만약 이 부분에 대해 관심이 있는 분들은 대한기독교서회에서 나온 ‘구약성서개론-한국인을 위한 최신 연구’를 읽어보세요.)
아마르나 문서(이집트의 고문서)에 따르면, 기원전 3000년 무렵 아라비아 사막에 살던 셈족이 가나안땅으로 이주해옵니다. 그리고 기원전 2200년에서 기원전 2000년 사이에 가나안땅은 이집트의 지배하로 들어갑니다. 다시 말해 가나안은 이집트가 임명한 영주가 다스리는 곳이 됩니다. 그러나 기원전 15세기 이후, 이집트의 가나안 지배는 차츰 약해지게 됩니다. 이 때를 틈타 이집트에서 탈출한 유대인들과 가나안에서 착취당하고 있던 토착농민들이 합세하여 가나안을 무너뜨립니다.
▶ 가나안을 정복한 여호수아 from www. cartage. org.lb
이때까지만 해도, 유대교는 아직 시작단계였습니다. 왜냐하면 이집트를 탈출한 유대인과 가나안의 토착민의 종교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유대인은 민족신 야훼를 섬겼습니다. 그러나 토착민은 셈족의 주신인 엘과, 풍요신 바알, 엘의 아내인 아세라와 지모신인 아스타르테 등을 섬겼습니다. 가나안을 점령한 유대인들은 온전한 지배를 위해서 토착민들의 종교를 탄압할 필요가 있었지요.
전에도 말했던 것처럼, 셈족의 사회에서는 종교와 정치가 일치합니다. 그것은 셈족의 한 갈래인 유대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시기 이스라엘을 다스린 것은 그들의 민족신 야훼에서 모시는 판관(Judge)들이었습니다. 판관들은 신으로부터 부여 받은 권위를 바탕으로 민중을 지배했습니다.
그러나 각 부족들 사이에 갈등이 심해지자 판관들만으로는 통치가 불가능해집니다. 이제 민중은 새로운 정치체제와 질서를 요구합니다. 이리하여 사울이 초대 왕으로 추대되지요. 그로써 부족 연맹체였던 이스라엘은 왕국으로 성장합니다.
◀ 사울왕에게 골리앗의 머리를 바치는 다윗 렘브란트 作. from www.abcgallery.com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은 사울(BC 1012~ BC 1004)이었지만 가장 유명한 왕은 다윗(BC1004~BC 965)과 솔로몬(BC 965~BC 926)일겁니다. 다윗은 블레셋을 쳐부수고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까지 이스라엘의 세력을 확장합니다. 또한 그는 예루살렘에 살던 에브스인을 쫓아내고 예루살렘을 왕국의 수도로 삼습니다.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은 수도 예루살렘에 야훼의 성전을 짓습니다. 다윗과 솔로몬의 통치 시절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번영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왕국의 번영은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다윗과 솔로몬이 이끌었던 80년 남짓한 전성기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야기하기도 부끄러울 지경입니다. 솔로몬 왕이 죽은 후, 얼마 못 가서 왕국은 사마리아를 수도로 하는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과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는 남쪽의 유대 왕국으로 분열됩니다.
▲ 솔로몬의 꿈 지오다노 作. from www.wga.hu
북쪽 이스라엘 왕국은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의 사르곤 2세에 의해 멸망합니다. 남쪽의 유대왕국은 그 후 250년 동안 더 유지되다, 기원전 586년 신바빌로니아의 네부가드네자르에 의해서 멸망합니다.
▼ 바빌로니아의 포로생활. from faculty.maxwell.syr.edu
네부가드네자르는 유대왕국의 귀족들과 주민들을 바빌로니아로 끌고 갑니다. 그 후 유대인들은 바빌로니아에서 포로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유대교가 민족종교로 완성된 것은 바로 나라를 잃고 타지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던 바로 이 시기 동안이었습니다. 꽤나 역설적인 일이지요?
바빌로니아 포로 시절, 유대인들은 전해 내려오는 여러 문서들과 바빌로니아의 신화를 엮어 자신들의 민족 종교를 완성시킵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것이 바로 모세 5경과 여호수아입니다. 나라를 잃은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민족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종교를 확고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언제 돌아갈지 몰랐던 바빌로니아의 포로 생활은 기원전 538년에 끝이 납니다. 신바빌로니아는 새로 부상한 레반트의 패자 페르시아에 의해 무너지고 유대인들은 52년 동안의 포로 생활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 다윗의 도시 예루살렘. from www.bibleplaces.com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왕은 (다리우스 대왕은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으로도 유명하죠) 바빌로니아에 끌려왔던 유대인 포로들을 풀어줍니다. 팔레스티나로 되돌아간 유대인들은 다시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을 복원합니다.
신바빌로니아의 포로시절에 유대교가 바빌로니아 신화에 영향을 받았듯, 페르시아의 지배 하에서 유대교는 페르시아 신화에 영향을 받습니다. 페르시아 신화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선과 악의 투쟁과 종말론입니다. 지금은 선과 악이 서로 싸우지만 세상의 끝날 메시아가 와서 악한 사람을 벌주고 선한 사람을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특징은 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는 천사입니다. 페르시아 시대 전의 유대교에서는 인간에게 신의 뜻을 전하는 천사의 존재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기원전 33년 동방원정에 나섰던 알렉산더 대왕은 팔레스티나를 점령합니다. (그 후 3년 뒤 페르시아 제국이 멸망하죠.)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 팔레스티나는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이때부터 유대교는 또 다른 문명인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헬레니즘 시대에, 많은 유대인들은 팔레스티나를 떠나 그리스와 이집트와 로마에 흩어져 살게 됩니다. 외지에서 흩어져 살면서도 유대교의 관습을 지켰던 유대인(과 그들이 사는 지역)을 디아스포라라고 불렀습니다. 디아스포라는 그리스어에서 온 말로 ‘분산(分散) ·이산’을 뜻합니다. 바로 이 디아스포라에 의해서 구약이 그리스어로 번역됩니다.
또 이 시기에 스토아 철학에 영향을 미친 필론(BC 15~AD 45)같은 유대인 신학자가 나타납니다. 그들은 유대교의 유일신을 그리스의 로고스 개념과 연결시킵니다. 그러나 모든 유대인들이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아들인 것은 아닙니다. 유대교가 헬레니즘에 영향을 받는 것을 반대하는 민족주의자들도 있었습니다.
기원전 167년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4세는 유대인을 헬레니즘에 동화시키겠다는 생각으로 예루살렘 신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예배를 강요했습니다. 그러자 제사장이었던 마타티아스 (마카베오가의 시조)는 동지들을 규합해 안티오코스 4세에 대항합니다. 시리아와 유대인 사이에 일어났던 이 전쟁은 유대인들을 이끌었던 마카베오 가문의 이름을 따서 마카베오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사실 이 전쟁은 유대인의 독립전쟁의 성격을 띱니다. 결국 기원전 142년 유대인들은 시리아로 부터 종교적, 정치적 독립을 성취합니다. 이로써 남쪽 유대 왕국의 멸망으로 끝났던 유대인 왕국이 다시 건설됩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왕조의 왕과 대제사장 자리를 계승했던 것은 다윗의 자손이 아닌 바로 마타티아스의 자손들, 다시말해서 마카베오 가문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새로운 왕조를 하스몬 왕조(BC 142~BC 63)라고 부릅니다.
유대의 하스몬 왕조는 쇠퇴하는 시리아와 아직 지중해의 패자로 부상하기 전인 로마 사이에서 약 200년 동안 번영합니다. 이 시기 하스몬 왕조는 솔로몬 왕 때 옛 영토를 거의 회복합니다.
그러나 왕위 계승권을 놓고 형제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고 로마가 점점 세력을 확장함에 따라 하스몬 왕조는 급속하게 몰락하게 됩니다. 그러다 결국 로마에 지원을 받은 에돔인 안티파테르와 그의 아들, 헤로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말지요. 그로부터 유대인들은 로마의 식민통치를 받게 됩니다.
▶ 헤로데가 세운 예루살렘 성전. from www.unf.edu
헤로데 왕조는 기원전 63년부터 기원후 70년 까지 계속됩니다. 약 백년동안 계속된 헤로데 왕조를 끝으로 유대인 왕국은 영영 지구상에서 사리지게 됩니다. 그 후 이 천년 뒤, 이스라엘 공화국이 건설되기까지는 말이죠.
헤로데 왕 시절, 아이를 임신한 마리아와 그녀의 약혼자인 요셉이 로마의 호구조사에 응하기 위해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 옵니다. 쉴 곳을 찾던 그들 부부는 한 허름한 마구간에서 아이를 낳게 됩니다. 그 아이가 바로 기독교를 창시한 예수지요. 그것은 기원전 7년의 일입니다.
이스라엘의 제사장이자 역사가인 요세푸세 (Josephus, Flavius, 37?~100?)는 기독교가 형성되는 기원전1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까지 유대에는 4개의 종교적 파벌이 있었다고 전합니다. 이 4개의 파벌이 바로 사두가이파, 바리사이파, 젤로트파, 에세네파 입니다.
사두가이파는 수적으로는 적었으나 수많은 제사장들을 배출하는 분파였습니다. 그들은 4개의 파벌 중 가장 귀족적이고 부유한 계급이었습니다. 사두가이파는 모세 5경에 기록된 율법만을 받아들이고 바리사이파처럼 구비전승된 기록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두가이파는 페르시아에 영향을 받은 종말론이나 천사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반면 사두가이파를 제외한 나머지 파벌들은 종말론과 천사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있었지요.
사두가이파가 종말론과 천사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은 그들이 4개의 파벌 중 가장 헬레니즘의 영향을 많이 받은 분파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대부분 그리스어를 사용할 줄 알았고 헬레니즘 문화에 익숙했습니다. 헬레니즘 문화에 젖은 그들에게 페르시아의 신화적 개념들은 무척 낯설게 느껴졌을 겁니다. 그래서 사두가이파는 유대 사회의 평화와 복지를 위해 적극적으로 로마의 통치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사두가이파는 민족주의 성향을 강한 바리사이파와 젤로트파와 대비되지요.
바리사이파는 안식일을 엄격하게 지키고 십일조를 꼬박꼬박 바치는 철저한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유대교의 정통성을 지키고 있다고 자신했고 이런 점에서 사두가이파와 경쟁관계였습니다. 그러나 사회적 지도층이었던 사두가이파와 바리사이파는 모두 민중을 선동한다는 이유로 예수를 처형하는데 앞장섰고 그의 제자들의 선교 활동을 박해했습니다. 많은 부분에서 충돌했던 사두가이파와 바리사이파지만 이런 점에서 서로 일치했다고 할까요?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예수가 죽은 후, 로마에 기독교를 전파한 사도 바울은 바로 예수와 그의 제자를 박해하던 바리사이파였습니다.
젤로트파는 젤로트당(黨)이라고도 합니다. 젤로트파의 어원인 젤로테스는 그리스어(語)로 열심인 사람을 뜻합니다. 그래서 한국어판 성서에는 젤로트파는 열심당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젤로트파는 유대인이 신이 선택한 백성임을 강조하면서 로마 제국의 팔레스티나 지배에 항거합니다. 그들은 바리사이파나 에세네파처럼 세상 마지막 날 메시아가 와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심판할 것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젤로트파에게 있어서 세상의 끝날 올 메시아는 모세와 같은 민족 지도자였습니다. 그들은 이 메시아가 로마에게서 유대인을 해방시키고 다윗과 솔로몬 때처럼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시켜주리라고 믿었습니다. 젤로트파는 독립을 위해서 무력이나 폭력마저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사실 제1차 로마반란(66∼70)을 선동한 것도 바로 이들 젤로트파였습니다.
예수의 12제자 가운데 시몬 유다가 바로 젤로트파 사람입니다. 사실 유다가 예수를 판 것은 예수가 젤로트파가 기다리는 메시아와는 전혀 다른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로마에게서 유대인을 해방시키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로마의 황제 시저의 것은 시저에게 돌리고 야훼의 것은 야훼에게 돌리라고 말했습니다. 젤로트파였던 유다는 이러한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할 수 없었을 겁니다.
젤로트파와 달리 에세네파는 로마로부터의 독립 같은 현세적인 문제에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젤로트파가 극단적으로 외향적인 성향을 가졌다면 에세네파는 극단적으로 내향적인 성향을 가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영광보다 개인의 구원 쪽에 더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야훼와 일치된 삶을 살기 위해 사해(死海) 주변에서 공동체 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은 재산을 공유했으며 예배와 독서와 공동식사를 중요한 일과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결혼하지 않은 채, 금욕적인 생활을 했습니다.
1945년 한 양치기 소년에 의해서 에세네파들이 살던 쿰란 동굴에서 ‘사해문서’라는 양피지들이 발견됩니다. 그 양피지들은 대부분 구약의 경전들이었습니다.
◀ 사해문서가 발견된 쿰란 동굴. from www.bibleplaces.com
그런데 그 중에 재미있는 기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가 태어나기 150년 전에 살았던 에세네파의 창시자에 대한 기록이었습니다. 그 기록에서 에세네파의 창시자는 이스라엘의 구세주, 정의의 교사, 이사야의 고뇌에 찬 종, 하느님의 아들로 불려졌습니다. 그는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괴로운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부활해 메시아로서 최후의 심판을 기다립니다.
훗날 학자들은 사해문서에 적힌 에세네파의 창시자와 예수의 유사성을 지적합니다. 또한 에세네파의 공동체 생활과 초기 기독교 공동체 생활의 유사성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도대체 에네세파와 기독교는 어떤 연관이 있는 걸까요?
오늘은 기독교가 형성될 즈음의 시대적 배경을 설명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끝내야 할 것 같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기독교가 어떻게 형성되고 로마의 국교로 확립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덧붙임
낙화유수님
수메르는 이번 연재에 나오는 에세네파처럼 역사의 수수께끼입니다. 지금 자료 가지고는 뭐라고 딱 집어 말하기 힘든 뜨거운 감자라고 할까요? 저도 대체 이들의 정체가 뭔지 궁금합니다.
류가미 ⓒ
원문 출처: 연재 시리즈 - 데일리 서프라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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