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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론 - 류가미 의 환상여행
< 동양과 서양, 고전과 현대, '보편사'속의 신화 와 의식>
(30회) 동북아 ⑦ - 두 사람의 노자 /
오늘은 지난 시간에 약속했던 대로 도가에 대해서 다루어 볼 까 합니다.
도가의 시조는 ‘도덕경’을 지었다는 노자입니다. 그런데 노자는 역사상 수수께끼 같은 인물입니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노자가 과연 실존인물이었는지 의심했을 지경이니까요.
▼ 법가 사상으로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 무덤에서 발굴된 토용 ⓒ http:// www. ctpoland.com
노자에 대한 미스터리를 낳은 것은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 때문입니다.
진시황은 중국을 통일한 뒤, 그 때까지 각 나라마다 달랐던 문자와 도량형을 통일합니다. 또한 이념의 통일을 위해서 자신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법가 사상의 제외한 학자들을 죽이고 책들을 불태웠습니다. 이 사건을 분서갱유(焚書坑儒)라고 하지요.
다른 책들이나 기록과 마찬가지로, 노자의 책(다시 말해 도덕경)이나 기록들도 진나라 시대를 거치면서 많이 사라진 듯이 보입니다. 그래서 최근까지 가장 오래된 도덕경의 판본은 3세기경 위진 남북조 시절 왕삐(王弼)가 역주를 단 통행본이었습니다. 통행본이라는 것은 ‘세상에서 유통되고 있는 판본’ 이라는 뜻 입니다.
노자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바로 기원전 1세기경, 한나라 시절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 나타납니다.
▼ 사기를 쓴 사마천 ⓒ http:// www. international.ucla.edu
사마천은 사기의 열전 중, 노장신한열전(老莊申韓列傳)에서 노자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노장신한열전(老莊申韓列傳)은 노자와 장자와 신불해와 한비자의 일대기를 다룬 것입니다. 설명할 것이 없이 노자와 장자는 도가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리고 한비자는 법가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런데 나머지 사람들에 비해 신불해(申不害)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사람입니다. 사기에 따르면 신불해는 황로사상(黃老思想)에 근거를 두고 형명(刑名)을 주장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황로사상은 무엇이고 형명은 또 무엇일까요?
황로사상은 황제와 노자를 시조로 하는 진나라 말기에서 한나라 초기에 유행했던 도교 사상을 말합니다. 형명은 전국시대 한비자가 주장한 학설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신불해의 사상은 도가와 법가의 중간 지점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무위자연을 주장하며 은둔적인 성향이 강한 도가와 엄한 형벌주의를 주장하며 천하 통일에 앞장섰던 법가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도 없을 것 같습니다.
왜 사마천은 도가의 사상가인 노자와 장자와 법가의 사상가인 신불해와 한비자를 한데 묶어 열전을 만들었을까요? 대체 도가와 법가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이것이 도가와 관련된 첫 번째 수수께끼입니다.
자 이제 사마천이 기록한 노자의 이야기를 들어볼까 합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노자라는 인물이 정확히 누구인지 밝히지 않습니다. 대신 사마천은 노자라고 짐작되는 역사적 인물 세 사람을 꼽아 놓습니다. 다시 말해 노자에 대한 세 가지 가설을 언급한 셈입니다.
그 첫 번째 가설은 노자가 공자와 같은 시기 초나라에 살았던 노담(老聃)이라는 것입니다. 노담은 초(楚)나라 고현(苦縣) 려향(려鄕) 곡인리(曲仁里)사람입니다. 성은 이(李)씨 이름은 이(耳)고 자는 백양(伯陽)이라고 합니다. 그는 주(周)나라 왕실 문서보관소의 관리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나라로 유학을 왔던 공자는 그 당시 최고의 사상가인 노담을 찾아 예(禮)를 묻습니다. 그러자 노담은 공자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대가 말하는 옛 성인들도 그 몸과 뼈는 이미 썩어 없어지고 단지 그 말만 남아 있을 뿐이다. 군자는 때를 잘 만나면 높은 벼슬에 나가게 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그저 하찮은 일상에 묻혀 살 뿐이다. 내가 듣기로 뛰어난 장사치는 가진 것을 깊이 감추어 두어 겉으로 보기에는 마치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듯이 행동하고, 덕이 가득한 군자 또한 그의 겉모습은 늘 어리석고 모자란 듯하다고 한다. 그런데 그대의 모습에는 교만함과 욕심, 훌륭함을 가정하는 태도가 가득하다.”]
사실 노담은 엄청나게 공자의 위선을 꾸짖은 셈입니다. 그러나 공자는 그렇게 심한 소리를 듣고도 자신의 제자들에게 노자를 이렇게 평합니다.
[“새가 날고 물고기가 헤엄치고 짐승이 달린다는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 달리는 것은 그물을 쳐서
잡고 헤엄치는 것은 낚싯대로 잡고 나는 것은 화살로 잡으면 된다. 그러나 용은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에 오른다고 하니 나도 그 실체를 알 수가 없다. 내가 오늘 노담을 만났는데 정말 용과 같은 사람이었다.”]
노담(老聃)은 도덕을 닦으면서 재능을 숨기고 이름을 드러내지 않기를 힘썼다고 합니다. 오랫동안 주나라에 살았던 노담은 주나라가 쇠퇴해지는 것을 보고 마침내 주나라를 떠나기로 합니다. 주나라의 서쪽 관문인 함곡관에 이르자 관문지기인 윤희가 가르침을 남겨 줄 것을 요청합니다. 그래서 노담은 도와 덕의 뜻을 밝힌 상, 하권 오천자를 남깁니다. 그 후 노담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합니다.
▶ 제자 윤희에게 가르침을 전하는 노자 ⓒ http:// daolao.narod.ru
사마천이 주장하는 두 번째 가설은, 노자가 노래자(老萊子)라는 것입니다. 노래자는 공자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초나라 사람으로 도가의 속뜻을 밝히는 책을 15권이나 지었다고 합니다. 노래자는 160세를 살았다고도 하고 또 200여세를 살았다고도 합니다. 아마도 도덕을 닦으며 수명을 연장했기 때문입니다.
사마천이 주장하는 세 번째 가설은, 노자는 주나라의 태사(太史) 담(儋)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태사담은 공자가 죽은 129년 후의 사람입니다. 그는 진(秦)나라 헌공을 만나, 이렇게 예언을 했다고 합니다.
[“처음에 진나라는 주나라와 합했다가, 합한 지 500년 만에 주나라와 갈라집니다. 주나라와 갈라진 지 70년 후에 진나라에서 한명의 패왕(覇王)이 나타날 것입니다.”]
이러한 태사담의 예언은 그 후 그대로 실현됩니다. 진나라에서 패왕이 나타나 중국을 통일하게 되니까요. 그 패왕이 바로 진시황입니다.
그렇다면, 사마천이 주장한 세 가설 중 어느 것이 맞을까요? 다시 말해서 노자는 공자가 예를 물었던 주나라의 왕실 문서보관실의 사서 노담일까요 아니면 초나라사람 노래자일까요? 아니면 주나라의 태사담일까요?
3 세기경 판본인 통행본 노자(도덕경)에는 유가(儒家)에 대한 강한 비판이 담겨져있습니다. 통행본 노자가 유가의 사상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다는 것은 노자가 적어도 유가의 사상이 형성된 뒤에 나온 책이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런데 공자 자신은 아무런 책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공자의 사상을 정리하고 이론화한 것은 바로 그의 제자들입니다. 사실 유가의 이론적 체계가 잡힌 것은 맹자 이후의 일입니다. 그러니 유가를 비판한 노자 역시 맹자 이후의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비자가 노자를 언급한 것으로 보아 노자는 한비자 이전의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법가의 사상가 한비자 ⓒ http:// www. hist.pku.edu.cn
맹자는 기원전 372년에 태어나 기원전 289년에 죽었습니다. 한비자는 기원전 280년경에 태어나 기원전 233년에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공자와 동일 시대 사람인 노담과 노래자는 도덕경의 저자 노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오로지 공자가 죽은 뒤 129년 뒤에 태어났다는 태사담만이 이에 해당됩니다. 그렇다면 태사담이 바로 도덕경의 저자 노자였을까요? 이것이 도가와 관련된 두 번째 수수께끼입니다.
그런데 도가와 관련된 두 가지 수수께끼는 1973년 마왕뚜이의 유적에서 ‘백서 노자’가 발견되고 1993년 궈뎬의 유적에서 ‘죽간 노자’가 발굴되면서 자연스럽게 풀립니다. 사실 백서 노자와 죽간 노자의 발견은 이제껏 통행본 위주로 연구되어 오던 철학계에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 마왕뚜이에서 발견된 백서 노자
ⓒ http: // faculty. vassar. edu
1973년 중국 후난(湖南)성 창사(長沙) 마왕두이(馬王堆)에서 무덤이 발굴됩니다. 이 무덤의 주인공은 한나라 초기, 기원전 194년 장사국의 대후로 봉해진 이창(利蒼)의 아내였습니다. 그 무덤의 부장품 중에는 비단에 적힌 노자가 발견됩니다. 비단에 적힌 노자라는 뜻에서 마왕두이에서 발견된 노자를 백서(帛書) 노자라고 합니다.
사실 이 백서 노자는 기원후 3세기경으로 추정되는 통행본 노자 보다 무려 400년이나 앞선 것이었습니다. 통행본 노자는 상권의 시작이 도(道)자로 시작되고 하권의 시작이 덕(德)자로 시작되어 도덕경이라고 불립니다. 그런데 이 백서 노자는 상권이 덕(德)자로 시작되고 하권이 도(道)자로 시작됩니다. 다시 말해 백서 노자는 도덕경(道德經)이 아니라 덕도경(德道經)인 셈이지요.
백서 노자에서는 만물을 생성하고 운행하는 원리인 도(道)보다 군주가 이러한 도를 현실에서 실천하는 덕(德)이 더 강조됩니다. 한마디로 백서 노자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처럼 군주의 치세술을 논한 책입니다. 그러나 그 두 가지 점만 제외한다면 백서 노자는 통행본 노자와 거의 비슷합니다. 순서와 글자의 차이는 있을망정 백서 노자와 통행본 노자는 내용적으로 일치하며 5천 여 자 내외로 분량 면에서도 거의 같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20년 뒤, 1993년 후베이(湖北)성 징원(荊文)시 궈뎬(郭店)에 있는 초나라의 귀족 무덤이 발견됩니다. 기원전 3세기경으로 보이는 이 무덤에서 대나무 조각에 적혀진 노자가 발견됩니다. 궈뎬에서 발견된 노자를 대나무에 적힌 노자라고 해서 죽간(竹簡) 노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죽간 노자의 글자 수는 겨우 2046자에 불과합니다. 다시 말해 5천여 자로 되어 있는 백서 노자와 통행본 노자의 5분의 2에 해당되는 셈입니다. 이러한 적은 분량 때문에, 발굴단은 처음에는 죽간 노자가 도굴로 인해 손상을 입어 책의 일부가 떨어져 나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학자들의 연구 결과 죽간 노자는 파손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완전하다는 평가를 받게 됩니다.
마왕두이 유적과 궈뎬 유적의 발굴들이 말해주는 것은 노자는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죽간 노자를 쓴 노자이고 또 한 사람은 백서 노자를 쓴 노자입니다. 죽간 노자를 쓴 사람은 춘추시대 말기 공자가 예를 물었다는 노담이었고, 백서 노자를 쓴 사람은 바로 전국시대 중엽 사람인 태사담이었던 것입니다. 반면 노래자는 실존인물이었지만 노자의 저자는 아니었습니다. 이로써 노자가 누구일까, 라는 도가의 두 번째 수수께끼가 풀립니다.
기원전 6세기경 공자와 동일한 시대의 노담이라는 인물이 살았습니다. 노담은 2046 자로 된 죽간 노자를 남깁니다. 이 죽간 노자는 태사담이 쓴 백서 노자나 왕삐가 주를 단 통행본 노자에 비해 대단히 소박하고 단순합니다.
l 첫째, 죽간 노자에는 형이상학적인 용어가 없습니다. 사실 죽간 노자에는 통행본 노자의 그 유명한 구절인 ‘도는 도라고 하면 도가 아니다(道可道非常道)’ 와 ‘곡신은 죽지 않는다. 이를 현빈이라고 한다 (谷神不死 是謂玄牝)’ 라는 문장이 없습니다.
l 둘째, 법가의 영향을 받은 권모술수에 대한 이야기가 없습니다.
l 세째, 유가 사상의 형성되기 전이라서 그런지 죽간 노자에는 유가에 대한 비판 이 보이지 않습니다.
죽간 노자를 쓴 노담은 인위적인 제도와 문명의 이기가 사람의 성품을 타락시키고 사회를 어지럽게 한다고 봅니다. 그는 인위적인 제도가 아니라 자연의 질서에 따르고 문명의 이기가 없는 소박한 원시 농경 사회로 돌아갈 것을 주장합니다.
이러한 노담의 사상은 두 명의 제자에게로 계승됩니다. 하나는 양주이고 또 하나는 함곡관에서 노담을 붙잡고 가르침을 남겨달라고 졸랐던 윤희입니다.
그런데 양주는 그의 스승 노담과 많은 점에서 다릅니다. 양주 또한 노담처럼 국가제도와 문명의 이기를 반자연적이고 인위적인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그는 천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고대의 성인들과 성인 정치가 사라졌음을 한탄하고 수양산에 숨은 백이와 숙제를 조롱합니다. 양주는 자신의 수명을 지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 인데 고대 성인들과 백이와 숙제는 명성을 얻기 위해 목숨을 가볍게 여겼다는 것이지요.
자아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양주의 이러한 개인주의를 위아설(爲我說)이라고 합니다. 양주는 나를 위해서면 몰라도 천하를 위해서라면 내 몸에 털 하나 뽑지 않겠다고 주장합니다.
윤희는 노담의 사상을 자기 식으로 변형시킨 양주와 달리 노담의 사상을 그대로 계승합니다. 사기에 나온 이야기로 보아, 아마도 윤희는 노담의 도덕경을 간직하고 있었던 듯 싶습니다. 노담에서 윤희로 이어지는 학통은 다시 태사담과 열자(列子)로 이어집니다. 아시다시피, 태사담은 백서 노자의 저자입니다. 춘추시대 사람이었던 노담과 달리 태사담은 전국시대 사람입니다. 태사담이 법가의 부국강병책을 쓰고 있던 진나라에 헌공을 만나 미래를 예언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앞에서 다루었습니다. 태사담은 전국 시대 분위기에 맞추어 노담의 도덕경을 개작합니다.
태사담은 단순하고 질박한 훈계였던 노담의 가르침을 철학적인 개념으로 바꾸어놓습니다. 또한 인위적인 것을 버리고 자연적인 질서에 순응하라는 노담의 가르침을 인위적인 법제도를 버리고 백성들이 스스로 따르도록 이끌라는 치세술로 해석합니다.
사실 태사담은 법가적인 해석학적 틀에서 노담의 노자를 재해석합니다. 태사담이 개작한 노자에는 법가적인 권모술수가 들어가고 법가의 경쟁자였던 유가에 대한 비판이 나타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태사담은 노담의 도가 사상만큼 법가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로써 우리가 앞에서 물었던 도가와 법가 사이에는 어떤 연관이 있느냐는 두 번째 수수께끼도 풀리는 셈입니다.
태사담 이후에 시중에 유통되는 노자는 노담이 쓴 노자가 아니라 태사담이 쓴 노자였을 겁니다. 당연히 기원전 1세기경 사람인 사마천은 태사담이 쓴 노자만 알 뿐, 노담이 쓴 노자가 있었다는 것을 몰랐을 겁니다. 그래서 사마천은 태사담이 쓴 노자가 신불해와 한비자의 법가사상과 가깝다고 보고 노자와 장자와 신불해와 한비자를 한데 묶어 노장신한열전(老莊申韓列傳)을 만들었던 거지요.
한편 노담에서 윤희로 이어지는 학통은 한쪽으로 태사담에게 계승되고 또 한쪽으로는 열자(烈子)에게 전해집니다. 열자가 가지고 있는 우화적이고 비유적인 산문체와 태사담의 형이상학적인 사상이 결합하여 장자(壯者)의 시적이고 관념적인 문학이 싹틉니다.
▶ 장자의 나비의 꿈 Gruzdev 作 ⓒ http:// www. gruzdev.com
그러나 장자에 오면서 소박했던 원시 농경사회를 복원하자는 노담의 주장과 이러한 노담의 주장을 어떻게 해서든 전국시대라는 혼란스러운 시대에 실현해 보려는 태사담의 노력은 사라지고 맙니다. 장자에게 무위(無爲)는 얽매임이 없이 자연스럽게 다스려지는 정치가 아니라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은 개인의 정신적 자유를 뜻했기 때문입니다.
도가와 법가 양쪽의 영향을 받은 황로사상은 진(秦)나라를 거쳐 한(漢)나라 초기까지 내려옵니다.
진나라를 무너뜨린 유방은 복잡하고 무거웠던 진나라의 법을 폐지하고 약법삼장(略法三章)을 선포합니다. 이 약법삼장의 내용은 살인하고 상해를 입히고 도둑질한 사람을 처벌하겠다는 겁니다. 유방은 이 약식 법으로 진시황의 강력한 통치에 시달린 백성들의 인심을 얻게 됩니다.
이러한 약법삼장 에는 백성을 간섭하지 않고 법령을 최소로 하며 군주의 통치력을 최대한 자재하려는 황로사상(黃老思想)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무제 때 동중서의 국가 유교주의가 수립되자 도가 사상에 있던 정치성은 완전히 박탈되어 버립니다. 이제 도가는 정치 이념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수련해 신선이 되려는 양생법이나 속세에서 물러나와 자연과 예술을 즐기는 청담 사상으로 변질됩니다.
도가 사상은 현실에서 벗어나 점점 더 은둔적이고 개인적인 것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왕삐(王弼)가 활동했던 위진남북조 시대는 이러한 도가의 양생술과 청담사상이 유행했던 시절입니다. 왕삐가 통행본 노자에 관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주석을 단 것도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때문이지요.
이제 도가 사상은 이쯤에서 정리하고 다음 시간에는 도가의 영향을 받아 중국식 불교인 선종 (禪宗)이 태어난 과정과, 불교 형이상학의 영향을 받아 신유교, 다시 말해 주자학이 태어난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류가미 ⓒ
원문 출처: 연재 시리즈 - 데일리 서프라이즈
이미지 복원: 노하우업 (Knowhow U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