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그 有無의 흔적.
우리는 표현한다. 티없이 맑은 하늘,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라고...
하늘, 아무것도 묻은 것 없이 맑고 깨끗한 하늘은 표현하는데 이렇게 '티' 혹은 '구름 한 점'은 왜 필요한 것일까? 이 맑은 하늘 그無의 상태를 有의 존재(티, 구름, 수정같은, 바다같은)를 빌리지 않고는 그 無(깨끗함), 그 순수를 표현할 수 없을까?
아, 없다!
불행히 언어의 노예인 인간들로써는 그렇 수 없다고 말한다.
'있음'의 흔적(trace)없이는 완전한 없음의 그 없음(無)을 언어로써는 기술할 수 없다고 한다.
아무 것도 없는 하늘의 그 無의 상태는 '구름 한 점'이라는 이 있음(有)의 흔적을 통해서만이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로보아 명백해졌다. 無(없음)는 有(흔적)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응용하면, 남자라는 말은 남자라는 말이 생겨 날 때 여자를 전제하지 않고는 의미화 될 수 없다! 사람 안에 남자와는 다른 다른 여자가 없다면 남자라는 말이 처음부터 생겨 날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즉, 둘이 동시에 존재함으로, 구별짓기 위해서 남자도 여자도 존재 할 것 아닌가? 남자의 정체성은 처음부터 여자에 기대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남자 혹은 여자의 의미는 처음부터 여자, 남자에게 의존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즉, 불교적으로 보면 그 각각은 自性이 없다는 뜻이다. 연(緣)이 있을 뿐이다.
누가 그걸 모르겠는가?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다.
서로 대비되는 것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유의 의의를 서구에서는 20세기에 들어서 반성하기 시작했다.
서양권 내의 철학적인 문제는 잠깐 접고....
그럼 중국에서는 그리고 우리는 어떤가?
老子를 들어다 보면 그릇을 들어 유와 무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는 대목이 나온다.
여기 물그릇이 있다고 하자. 그릇은 가운데 옴팍하게 파져 있다. 그리고 물이 담겨진다.
만약 그릇에 이 옴팍한 부분이 없다면 그것은 이미 그릇이 아니다.
물을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릇의 공능(기능, 역활)은 사실 이 텅빈 공간. 그 무(없음)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옴팍한 텅빈 허(虛), 그 없음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다. 즉 '무언가'인 것이다
간을 한자로 쓰면 '間'이라고 한다. 즉 사이, 틈이라는 뜻이다.
음식에 '간이 맞다'는 말은 짜지도 싱겁지도 않고 중간 정도, 어정쩡한 상태이다.
그래서 짠맛도 싱거운 맛도 다 있다는 뜻이 되고, 또 둘 다 모두 없다는 뜻도 된다.
이런 어정쩡한 상태를 의미하는 어휘는 우리 일상 생활의 언어 속에 대단히 발달되어 있다.
이원법적인 논리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사유이다.
우리는 이런 정감적 언어와 사유에 익숙해져 있는 것이다.
그것은 현대의 '자연과학적 사유'와는 확실히 구별되는 것이기도 하다.
만약 이 '어정쩡한 사유'와 '자연과학적 사유'가 둘이 사이좋게 공존할 수 있다면 좋을텐데, 불가능하다. 한자로 들어 온 단어가 일본을 거쳐서 들어 오면서 많은 변형을 일으켰고 서양권에서 발명되어진 '자연과학 언어'는 한자로 제대로 된 뜻과 의미를 전달 할 수 없다. 하물면 한자도 아닌 한글로 어찌 그 의미 전달이 되겠는가?
그런데 위의 예에서 본 것처럼, 등급없이 거의 동시적으로, 사실 상반되는 둘은 언제나 서로가 서로를 머금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내가 남자라고 하는 순간, 나는 이미 그 순간 여자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뜻이고, 그래야만 나의 정체성은 형성되는 것이다. 또 앞에서 본 것처럼 無 (그 없음)의 상태는 근원적으로 有(있음)라는 흔적으로써 자신을 나타낼 수 있는 한계를 지닌다.
사회 속에서 人間이라는 본질적인 질문에서, 타자와의 관계에서 존재 할 수 있으나, 타자 없이 스스로일 수 없다는 존재, 그 자체로 고독한 존재이다.
가능한 시나리오는 누군가 먼저이든지 아니면 더 우월하던지 해야 한다.
둘이 모이는 순간, 누가 원조이고 기원인가를 따지는 권력 문제가 발생하고 의미를 규정짓기 마련이다.
위의 논의에서 본, '내가 먼저다''내가 우월하다'라는 주장이 받아 들여지기 시작하면 매우 협소하고 위험한 중심론이라는 것을 가르쳐주면 우리의 미래를 규정해 주고 있다.
그 사유에는 이미 자기중심적인 정치론이 들어 있다는 것을 읽어야 한다.
중심론은 언제나 배타적인 국가와 민족, 인종 이데올로기를 내세우게 되기 마련이다.
선험적인 차이를 등급적 권력관계로 바꾸는 것은 그 근본에는 이러한 이분법적 등급질서를 만드는 사유라는 걸 깨닫자는 것이다.
정치는 태생적으로 일원론적이고 중심론적이다.
오늘을 살고 있는 대부분의 인간들은 신자유주의라는 세계적인 경제질서에서 벗어 날 수 없는 숙명에서 각자의 삶을 이끌어 나간다.
게시판에 올라 오는 글을 보면 정치적 구호가 심심찮게 눈에 띈다.
정치적 구호가 강할 수록 배타적이고 억압적 성향이 나타 날 수 있다.
국가니 애국이니 하는 거대 담론보다는 인간 개개인의 자유와 권리, 약자에 대한 배려등 인간 삶에 대한 기본적인 문제들이 사회적 화두가 되었음 하는 바램이 있다.
개개인의 행복 지수가 높아 질 수록 국가의 위상은 자연스럽게 올라 선다고 본다.
개인이 본(根本)이고 국가는 말(末) 이다.
http://cafe.daum.net/knowhowup/Dnry/109
첫댓글 빨간돼지님/
한국의 언어, 즉 한글이나 한자의 뜻, 의미, 글자양식(형태)등에서 한국분들이 고심을 하고 있는 이유는
문자의 쓰임이 일반화(신문 매체)되기 시작했던 100여년 전, 즉 조선이 망하기 직전까지
한자를 중국본토에서 받아 들이지 못하고 일본을 통해서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일본에서 쓰고 있는 똑같은 한자의 '뜻과 의미'가 중국에서 쓰이는 한자와 쓰임이 다르고 해석도 달리하는 단어들이
수두룩합니다.
즉, 반도국가, 섬나라나 다르지 않는 그런 지정학적 요소와 지난 역사의 폐해이지만
지난 20여년 부터 활발하고 철저하게 중국역사나 기록물을 재해석하고 있는 학자들이 많다고 알고 있습니다.
제가 알고 싶은 점은
조선땅의 사기인 '삼국사기'나 '삼국유사'가 지난 20여년 사이에 제대로 한글로 해석이 된 버젼이 나왔는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