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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클럽 *준회원 댓글허용 신(神)은 어디에 숨어있나?[길희성]
아프로만 추천 0 조회 535 12.04.13 22:46 댓글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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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2.04.13 23:43

    첫댓글 '길희성' 님의 글을 자주 퍼오는 이유는 이분의 글은 단순한 '종교론' 이 아닙니다. '사회학' 과 융합되있어요.

    "저는 유신론자 입니다" 했더니, 일전에 유희님이 저를 일반적인 '종교인'으로 상정하셨던 적이 있는데,

    저는 '신' 을 <집단>이라고 생각해요. 인간은 <개인> 이라고 보구요. 그래서 저의 종교관 즉, <인간과 신> 이란 다름아닌 <개인과 집단> 인 겁니다.

    '길희성' 님의 글은 바로 제가 생각하는 <개인과 집단> 간의 암호전달 수수께끼의 단서를 아주 풍부하게 제시합니다

    그래서 이분글을 자주 퍼 옵니다.

  • 12.04.14 08:40

    맞습니다. 교회는 공동체(를 지향하는 조직)거든요. 그래서 신 = 집단이라고 보시는 아프로만님의 견해에 동감을 표합니다. 우리가 신을 이해한다는 건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것과 같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동체(혹은 집단)이 필요한 것이죠. 체험을 공유함으로써 완전을 지향하고 나아간달까요

  • 작성자 12.04.13 23:52

    삼성이라는 <신의 집단> 을 창설한 이병철회장이 정작 본인은 신은 있는가? 질문 하였다니 아이러니 하군요.
    '신' 은 바로 '삼성' 인데 말입니다.

    집단을 보면서 항상 드는 의문은, 삼성이 이건희를 필요로 하는가 이건희가 삼성을 필요로 하는가 ? 입니다.

    실력 쟁쟁한 회장단 엄연히 있는데, 사실 경영만 놓고보면 이건희 없어도 삼성 굴러가는 데 아무 지장 없어요. 그렇다면 이것은 삼성이 이건희 회장을 뭔가 필요가 있기에 구심점으로 삼는다는 얘기 입니다.

    북쪽에 김씨 왕조도 뭔가 필요 있는 '구심점' 이기에 3대세습을 한다는 얘기가 됩니다. 참 수수께끼 죠

    집단의 구심점 = 즉 상징 - 이게 '신' 이죠.

  • 12.04.14 08:45

    그리고 차동엽 신부의 견해는 가톨릭 보수파의 견해입니다.
    (보수파 = 출세지향파? ㅋㅋ)

    보수파들 = 정통이라는 시각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차동엽 신부의 신앙관에 동의하지 않는 가톨릭 신자들도 많답니다.
    (대표적으로 제가 그렇죠. ^^;)

    얼핏 머리에 스치고 지나가는 것입니다만. 집단을 대표하는 이병철은
    철저히 '개인'으로 '고립'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고립된 개인이 신의 존재를 궁금하게 여긴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죠.

  • 작성자 12.04.16 22:31

    본문에 보면 또하나 흥미있는 '단서' 가 있습니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 = 히피 출신 이거든요

    평소 궁금했던게, - '박애주의' 표상인 미국의 '히피' 들이 어찌하여 살벌한 '신자유주의' 로 아무런 거부감 없이 변신 하였나 - 입니다.

    죽기전에 남긴말 을 보면 잡스는 전형적인 '힌두교' 입니다

    미국의 히피 원류가 바로 인도의 힌두교, 티벳의 밀교 입니다. 요즘 미국 배우 '리차드 기어' 는 '라마교' 달라이 라마와 친하죠.

    라마교' 하면, 징기스칸의 몽골제국이 라마교 입니다.

  • 12.04.14 11:12

    제가 힌두교에 과문하여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시바'신이 힌두교의 여신이던가요? 그 시바 여신은 철저히 극단적인
    이중성을 갖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자신을 믿는 자들에게는 한없이 관대하지만
    자신을 거부하는 이교도들에는 한없이 잔인하고 잔학한 여신으로 설정
    되어 있더군요.

    제 기억이 맞다면 자신을 거부한 자들의 팔을 잘라서 스커트로 입고
    다닌다던가요? 그들의 목을 베어 목걸이를 하고 다닌다던가요? -_-;;;

    이런 극단적 이중성이 그 열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봅니다.

  • 12.04.26 13:49

    댓글 정정합니다. 시바 신의 배우자가 '칼리' 이고 칼리의 모습이
    윗 댓글에서 묘사된 모습이었던 거군요.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습니다. ^^;;;

  • 작성자 12.04.16 22:32

    그런데 본문에 '힌두교' 의 신정론이 설명되 있습니다.

    [ 예를 들어 신정론(theodicay)의 문제, 즉 전능하신 사랑의 하느님이 왜 선한 사람이 당하는 억울한 고통을 외면만 하는가라는 문제가 신관에 따라서는 별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가령 같은 인격신관이라도 신이 인간 역사에 전혀 관심이 없고 관여도 하지 않는다고 믿는 신관에서는 - 이신론(理神論, deism)이 그렇고 힌두교의 신관이 주로 이런 부류에 속하지만 - 악에 대해 신의 책임을 물을 수 없고 물을 필요도 없으며 묻는다 해도 그리 심각한 문제가 안 된다.]

  • 12.04.14 11:12

    가톨릭 신자이면서도 제 신앙의 가장 큰 축을 세워 준 책은
    어이없게도(?) 퇴마록이었습니다.

    이제서야 다시금 퇴마록의 내용을 찬찬히 복기해봅니다.

    신과 인간, 세상과 나 자신, 선과 악..
    다시.. 퇴마록을 읽어야겠습니다.

    덧말..
    갑자기 떠오르는 노래가 하나 있네요.

    N.EX.T '불멸에 관하여' (The Ocean)

  • 12.04.14 12:20

    "죽음이 ‘오래된 것’을 치우고 ‘새로운 것’을 위한 길을 열어주지요.”

    자연계 생태계의 순환의 원리를 설명해주고 있는 부분이랄까요.
    죽지 않으면, 새로운 것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순환이 되지 않으니까요.

    암세포라는 게 바로 죽기를 거부하는 세포들이 끝까지 이상번식을
    일으켜 살아있는 생명체 모두를 잡아먹는 매커니즘이듯 말입니다.

    또 한가지 파괴와 죽음이라는 것이 과연 허무로 귀착되는
    것이기만 할 것인가?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것을 잉태하고 나아가기 위한 순환의 과정이라고 저는 봅니다.

    바텐더라는 만화에서도 나오는 대사입니다만
    "늙은이가 죽어주지 않으면 곤란해"

  • 12.04.14 08:39

    내 존재가 허무로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내가 죽더라도 내 유전자는 내 자식을 통해
    후대로 전달되기 때문이죠.

    유전자 뿐이겠습니까? 내가 말한 글과 기록들 생각이 남아서
    후대의 누군가가 다시 살피게 된다면 저라는 사람의 생각은
    결코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이 아닐테지요.

    그래서 그런지 일본의 로봇 애니메이션
    "가오가이가 FINAL"이라는 작품에서는

    주인공 곧 정의 편의 메카가 '파괴신'이라는 축으로
    등장합니다. 일반적인 관념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충격적인 설정이었죠.

    생각나는대로 그냥 주절거려 봤습니다 ^^;;

  • 12.04.29 08:44

    죽음과 파괴가 허무로 귀착되는 것이 아니라면
    남는 질문은 하나겠지요. 그렇다면 '종말은 무엇인가?'

    성경에 보면 예수께서 종말이란 '아버지께서 다시 오실 때'라고
    규정한 바 있습니다. 묵시록(개신교 표현으로는 계시록)에서도
    그렇게 묘사하고 있지요~

    그런데 야훼의 재림이 어떻게 종말로 연결되는 걸까요?
    구약과 신약을 막론하고 성경에서는 야훼께서 '심판'을
    하기 위해서 재림하신다 라고 언급했습니다만 저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생각하고 싶습니다.

  • 12.04.29 08:47

    왜냐? 길희성 교수님의 글에서도 언급이 되었지만
    신은 우리에게 '암호'일 수 밖에 없다라는 사실이
    예수의 행적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철저히 비유로 말했습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만
    알아들으라"라고 했지요. '손에 쥐어주는 식으로' 가르침을
    주는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곧 예수의 언급 역시도 직접적인 해답이 아니라
    비유로 '암호'로 알아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는 것이죠.

    그럼 '비유'와 종말이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문자 그대로 직접 해석하는 것이
    자칫 엉뚱한 결과를 낳을 지도 모른다는 관점이
    의미를 갖게 된다는 말이죠.

  • 12.04.29 08:47

    어쨌든 비유에 대한 생각은 나중에 다른 기회가 있을 때
    좀 더 풀어놓기로 하고 그렇다면 야훼의 재림이 어째서
    종말로 귀착되느냐?에 대한 이야기를 매듭지어야겠지요.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1984년, 이퀄리브리엄의 빅 브라더가 통치하는 시대
    절대자의 의지가 일방통행으로 전파되고 복종해야 하는 시대
    인간이 인간다움을 잃어버리고 구성원들 개개인의 의지가
    상실된 채 한낱 소모품, 부품으로 전락하는 시대..

    이것이 바로 인류의 '종말'이 아닐까요?

    어쩌면 인류의 종말은 '야훼가 재림하지 않은' 지금 이순간에도
    점점 현실이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작성자 12.04.16 22:32

    댓글이 확실히 더 재미있다 ㅋ흐~

  • 12.04.14 19:45

    아직 생각이 완전히 정리되지 않았고 깨달음으로 이르지 못해서
    함부로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신은 어째서 인간의 고통에 침묵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단서는 (그리스도교 입장에서 보자면)
    몇가지가 이미 제시되어 있다고 봅니다.

    첫번째 단서는 예수가 어째서 야훼처럼 인간의 위에서 말씀으로 군림하지 않았을까 하는 겁니다.

    예수는 철저히 인간으로 와서 인간과 같이 먹고, 자고, 마시고, 울고, 화내다가 고통받고
    죽었습니다. 예수와 야훼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이 열쇠가 되겠죠.

    실제로 예수가 화를 내는 대목과 우는 대목은 아주 중요한 시사점을 가지지 않을까 합니다.

  • 12.04.14 19:40

    '내 아버지의 집에서 도대체 무슨 짓거리냐?'라며 격하게 화를 냈던 대목
    그리고 나자로의 죽음으로 슬퍼하던 마리아와 마르타 자매를 위로하시다
    우셨다는 대목은 도대체 예수가 왜? 라는 질문을 던져볼만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것 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는 자신이 로마 병사들에게 잡혀 고초를 당하기 직전에
    게쎄마니에서 피땀을 흘리며 야훼에게 기도했다는 대목도 눈여겨 봐야 할 것입니다.

    예수라면 3일만에 죽었다 자신이 부활할 거라는 것을 정녕 몰랐을까요?
    그럼에도 어째서 그리도 두려움과 번뇌에 사로 잡혔을까요?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 전에 어째서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라고 부르짖었을까요?

  • 12.04.14 19:40

    예수가 인간으로 태어나서 인간으로 살다 죽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는지를 깊이 따져볼 수 있어야 신과 인간, 인간의 고통에 대해 과연 신은
    어떤 자세를 취하는가에 대해 답을 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두번째 단서는 구약에서 등장하는 '빠스카'라는 개념입니다.
    자신의 죄를 대신하는 '속죄양'을 통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죠.

    바로 이 지점에서 예수가 야훼의 아들이라고 인정받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우리를 대신해서 속죄양으로서 '제물'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구약의 원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라는 것이 교회의 시각이니까요.

  • 12.04.14 19:38

    바로 이 지점에서 '대속'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는데 대속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짚어 보는 것도 의문을 풀기 위한 중요한 단서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이 대속에 대한 개념을 꽤나 깊이 있고 재미있게 풀어낸 만화가 있습니다.
    바로 '나루토'라는 작품이죠.

    도대체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보는 '닌자물' 나루토에 무슨
    대속의 메시지가 숨어 있다고 하느냐? 라고 물어보실 분들을
    위해서 나루토의 대사 하나를 소개 합니다.

    "너는 친구니까, 그래서 너의 증오를 함께 짊어지고 함께 죽어주기로 했다"

    이 대사 외에도 몇개 더 있었던 것 같은데 생각이 안나네요. ^^;;

  • 12.04.14 19:42

    어쨌든 평범한 어린이, 청소년들이 즐겨보는 '소년만화' 나루토에
    저렇게 어마어마한 메시지가 숨어있다는 걸 눈치채는 사람들이
    의외로 적지 않습니다. 그런 부분들 때문에 일본 만화나 애니메이션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

    여튼 이런 주제는 저도 평생을 두고 고민해왔고 앞으로도 고민해야 할
    문제기 때문에 생각 나는 김에 좀 더 주절거려 봤습니다. ^^;;

  • 12.04.14 19:54

    참고로 제 삶에서 큰 의미와 깨우침을 준 만화 몇 편을 소개합니다.

    '출동 119구조대', '나루토', '바텐더', '검사 마루쵸', '미스터 초밥왕'
    '강철의 연금술사' 등이 있습니다. 그 외의 작품은 생각나는 대로 보충해둘게요. ^^;

  • 13.04.23 10:34

    문득 스쳐지나가는 생각! 인간이 있이 없는 자의 운명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있음과 없음이라는 경계 위에 서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 아닐까? 자아란 육체의 내부와 외부의 상호관계를 통해 형성되듯 말이다. 어쩌면 육체는 개체의 독립 혹은 구별단위일 뿐만 아니라 경계의 존재임을 증거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경계 위에 서있는 존재는 상호배타적(이거나 혹은 그렇게 일반적으로 인지하고 있는) 관계에 놓인 두가지의 개념을 모두 포괄하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렇게 두 개념이 포괄 혹은 혼재되는 정도의 차이 내지는 비율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이 어쩌면 기질과 성향, 성격의 차이로 드러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 13.04.23 10:37

    따라서 이성과 감성, 육체와 정신, 있음과 없음이 공존하는 존재가 인간이므로 제한과 속박의 경계이자 기준인 육체를 초월하고자 하는 생각을 품는 것은 어쩌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상상력의 산물이 신화로, 영웅전설로, 혹은 요즘 시대로 말하면 히어로 물로 변용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러한 인식의 지평이 넓어질수록 우리가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한계 내지는 범위의 폭도 점점 크게, 넓게 변화하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진보란 말의 또다른 의미는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초월의 질문, 초월에 대한 질문을 그저 침묵 속에 가둬둘 필요는 없지 않을까?

  • 13.04.23 10:35

    새삼 피콜로님의 말씀마따나 관이 형성되지 못한 사람은 그저 반복의 과정 만을 답습하는 기술자의 운명을 넘지 못한다.

    전승의 과정 만이 되풀이 되는 상황에서 집적이 새로운 도약의 동력이 되지 못하는 이상 (이것이 자연과학, 공학과 인문학의 핵심적인 차이일 터다.) 인문학이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은 매우 당연한 결과일런지도 모른다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동력은 아마도 자연과학의 탐구방식을 '차용'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될 것이다. 인문학과 더불어 자연과학을 함께 공부한 사람이 결국 인문학을 바른 길로 이끌게 될 것이라고 나는 전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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