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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에서 모던아트까지]
(6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 2007-01-06
안녕하세요. 류가미입니다. 오늘은 플라톤의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시학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시학은 역사상 가장 오래된 문예이론서입니다. 플라톤은 자신의 저서 ‘국가’에서 [모방이론]과 [시인추방론]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플라톤이 ‘국가’를 쓴 목적은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 국가를 드러내기 위해서였지, 문예 이론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아니었습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말 그대로 시(비극)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평론을 담은 책입니다. 그야말로 본격적인 문예이론서인 셈이지요.
플라톤의 관심은 인간이 어떻게 이성(logos)을 통해 이데아를 파악하고 그것을 자신이 사는 공동체에 반영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플라톤의 주요관심사가 철학과 정치학이었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다룬 영역은 너무 많아 한마디로 요약할 수가 없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다루고 있는 분야는 물리학, 화학, 생물학, 동물학, 심리학, 정치학, 윤리학, 논리학, 형이상학. 역사, 문예이론, 수사학 등 매우 다양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달리 백과사전적인 지식을 자랑하고 있는 셈이지요. 그러나 이 모든 학문을 한 사람이 정통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사람들은 영웅과 천재를 좋아합니다.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인간의 경지를 뛰어넘는 전능한 힘과 전능한 지혜를 가졌을 것이라고 생각하길 좋아합니다. 그리고 전능한 힘과 지혜를 가진 그 사람을 추종함으로써 그의 힘과 지혜를 공유할 수 있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전능한 힘과 지혜를 가진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어처구니없는 환상 속에서 바로 영웅주의와 권위주의가 싹틉니다.
지구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지구의 중력에 영향을 받듯이, 인간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제약을 받습니다. 물론 사람들 중에는 남들보다 힘과 지혜를 더 가진 사람도 있고 덜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류라는 종의 차원에서 볼 때, 그 차이는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인간이 이룬 일은 다른 사람도 따라 할 수 있는 것이고 누군가의 독창적인 생각도 다른 사람에게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로지 특정한 누군가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의 업적은 다음 세대로 계승될 수 없고 특정한 누군가만 할 수 있는 생각이라면 그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전지전능해서 그 모든 종류의 학문에 정통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가 그러한 백과사전적인 지식을 보일 수 있는 것은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는 새로운 철학을 창시하거나 새로운 과학적 발견을 이룬 사람이 아니라 기존의 철학과 과학적 지식을 분류하고 종합했던 훌륭한 편집자 혹은 주석가였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정치학과 시학은 플라톤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윤리학과 논리학은 제논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또한 그의 자연과학은 알렉산더 대왕이 동방 원정 기간 동안 그에게 보내주었던 수많은 문헌과 표본에 바탕을 둔 것이었습니다.
영어에는 아리스토크래트(aristocrat)라는 형용사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단어의 뜻입니다. 아리스토크래트는 귀족주의자, 귀족티를 내는 사람을 뜻합니다. 이 단어를 보면 알겠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한 마디로 귀족주의자였습니다.
◀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손가락을 하늘로 가리키는 왼쪽이 플라톤이고 손바닥을 오른쪽이 내리는 쪽이 아리스토텔레스이다 : 아테네 학당(부분) 라파엘로 作
소크라테스가 가난한 시민이었고 플라톤은 몰락한 귀족 정치가 집안 출신이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당대의 최고 권력자들의 친구이자 스승이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 대왕의 할아버지였던 아민타스 3세의 시의(侍醫)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려서부터 마케도니아 궁전과 인연을 갖게 됩니다.
기원전 367년 17살 되던 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로 와서 플라톤이 세운 아카데메이아에 들어갑니다. 아카데메이아가 바로 우리가 학문의 전당이라고 부르는 아카데미입니다. 17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54세가 된 대철학자 플라톤과 만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관계는 기원전 348년 플라톤이 죽을 때까지20년 동안 계속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신세계는 플라톤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그러나 그 둘 사이에 알력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젊은 나이였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버지로부터 상당한 재산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리고 워낙 책벌레였던 그는 책을 모으는데 돈을 아낌없이 썼습니다. 그런데 플라톤은 자기보다 부유하고 더 많은 책을 소유했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부러움과 함께 시기심을 느꼈나 봅니다. 플라톤은 책에 의존하면 기억력이 떨어진다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장서 수집을 비판했고 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늙은 염소처럼 지혜가 빠져나갔다고 빈정댔다고 합니다.
스승에 대한 이런 경쟁심 때문이었는지 훗날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에 스승이 세운 아카데메이아에 맞서는 학교를 세웁니다. 그것이 바로 리케이온입니다. 이 리케이온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모은 장서들을 보관했는데 그 장서가 얼마나 많았던지 실제적으로 리케이온은 아테네의 공공 도서관 구실을 합니다.
플라톤이 죽은 후,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소스에 아카데메이아 분교를 세우기 위해 떠납니다. 그 후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소스의 왕 아타르네오스와 절친한 친구가 됩니다. 아소스의 왕 아르타네오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자신의 조카딸과 결혼시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왕가와의 인연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기원전 343년 말(또는 기원전 342초) 42세가 된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에게 13세 된 그의 아들을 가르쳐달라는 초청을 받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의 수도 펠라로가, 3년 동안 필리포스 2세의 아들을 가르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가르쳤던 그 아이가 훗날 마케도니아, 그리스, 페르시아,이집트, 북인도에 걸쳐 대제국을 세운 알렉산더 대왕입니다.
▲ 헬레니즘 제국의 건설자이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였던 알렉산더 대왕
알렉산더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원했던 그런 학생은 아니었지만, 스승의 학술 연구에는 대폭적으로 지원을 해주었습니다. 알렉산더는 자신의 동방 원정에 군인뿐만 아니라 예술가, 시인, 철학자, 역사가, 측량기사, 기술자, 지리학자, 수로학자(水路學者), 지질학자, 식물학자들도 원정에 데리고 갔습니다. 알렉산더는 자신과 함께 동방원정에 참여한 문인들과 학자들이 수집한 각국의 문헌과 자료들은 스승인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보냈습니다. 덕분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당시 모든 문헌과 자료의 최종 집결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사실 그리스 고전 철학(다시 말해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알렉산더 대왕이 세운 헬레니즘 제국 안에 퍼질 수 있었던 것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더 대왕과 맺고 있던 인연 때문이었습니다.
50세가 넘어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에 돌아와, 스승이 세운 아카데메이아와 견줄만한 학교를 세웁니다. 그것이 바로 리케이온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리케이온에 지붕 덮인 산책로를 거닐면서 학생들을 가쳤습니다. 그리스어로 이런 산책로를 페리파토스(peripatos)라고 하는데, 이 말에 따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들은 페러퍼테틱(peripatetic)이라고 합니다. 우리말로는 소요학파(逍遙學派)라고 하지요.
▲ 아리스토텔레스 학파: 스판젠베르그 作
알렉산더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관계는 알렉산더의 후계자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 사이에도 이어집니다. 알렉산더가 죽은 후, 그의 제국은 그의 부하들에 의해서 마케도니아, 시리아, 이집트 세 개의 나라로 분열되어 통치됩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부하들의 그의 제국을 나누어 통치한다고 해도 달라질 것을 별로 없었습니다.
마케도니아, 시리아, 이집트의 왕이 되어버린 그들은 통치에 필요한 지식들을 관리해주고 자신의 후계자를 지도해줄 학자들을 필요로 했습니다. 물론 그들이 이러한 목적을 위해 초청했던 것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 소요학파였습니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들은 마케도니아, 시리아, 이집트의 학교와 도서관에서 활동하며 헬레니즘 문화를 유지하고 지탱하는 역할을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받아 출발하였고, 독자적인 체계를 구축한 뒤에도 그의 철학은 플라톤의 철학적 범주 안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학문을 체계화하고 보급한다는 면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보다 낫지만 독창성면에서 그는 스승 보다 훨씬 떨어집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또한 그의 미학 역시 플라톤의 모방 이론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플라톤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상 세계를 이데아의 모방물로 보았습니다. 플라톤은 비극이 이데아의 모방물에 불과한 현상 세계를 모방한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이 현상 세계에서 ‘전에도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일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 세계에서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모방한다고 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전에 일어났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역사(Historia)에 대비해 미토스(Mythos)라고 부릅니다.
일반적으로 미토스는 신화라고 번역됩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번역하는 사람들은 미토스를 이야기 혹은 허구라는 단어로 번역합니다. 그러나 미토스에는 신화, 이야기, 허구라는 뜻보다 더 보다 많은 뉘앙스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토스는 시간과 공간 속에 한정된 특수한 사건이 아니라 시공간을 초월한 보편적인 개연성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예술이 표현하려는 미토스, 다시말해 시공간을 초월한 보편적 개연성은 무엇일까요? 미토스는 일상적인 경험과 자아의 한계를 넘어서는 초월적인 어떤 것을 말합니다. 칸트나 료타료는 그것을 숭고(sublime) 개념으로 표현합니다. 정신분석학자들은 그것을 무의식이라는 이름으로 부릅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미토스는 결코 모방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실제로 경험할 수 없는 시공간을 초월한 보편적인 개연성을 모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예술이 실재의 모방일 뿐만 아니라 미토스의 모방일 수 있다고 한 것은 예술이 존재하는 사실을 재현해 줄 뿐만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허구를 표현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입니다.
플라톤이 예술이 이미 존재하는 것을 모방한다는 모방 이론(혹은 재현이론)의 시초였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표현한다는 표현 이론의 시초였던 셈입니다.
예술을 실재의 모방으로 보았던 플라톤이 예술의 중심에 미술을 놓았다면 예술이 실재 일어나지 않은 일을 표현하고 있다고 보았던 아리스토텔레스 예술의 중심에 음악을 놓았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재현 예술의 제일 앞에는 미술이 있었고 표현 예술의 제일 앞에는 음악이 있었습니다.
플라톤이 예술이 집단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두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플라톤은 비극이 민중을 교화시키는 데 문제가 있다고 비판하고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이 개인의 마음을 정화시키는 데 탁월한 효능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의 6장에서 한 아래의 말은 문예이론사 중에서 가장 유명한 발언 중 하나입니다.
“비극은 연민과 공포를 환기시키는 사건을 통하여 감정을 카타르시스(catharsis)시킨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에서 주인공은 신, 혹은 운명이라고 불리는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 고통당합니다. 비극을 보면서 관객들은 개인의 의지로는 어쩔 수 없는 이 절대적인 힘에 연민과 공포를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연민과 공포를 통해 스스로의 감정을 정화(catharsis)하게 됩니다. 이러한 정화야말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예술에서 발견한 가치였습니다.
카타르시스라는 말은 원래 도덕적 의미로서의 순화(purificatio)라는 뜻과, 종교적 의미로서의 정화(iustratio),또는 속죄 (expiatio)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의학적 의미로서는 배설(purgatio)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카타르시스라는 말 속에는 도덕적인 순화와 종교적인 속죄 그리고 의학적으로는 쌓였던 긴장의 배설이라는 뜻이 모두 들어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이 인간의 격정을 자극하지만 인간의 격정을 광기로 몰아가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완화시키고 조절하고 해소시킨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이러한 정화 과정을 통해서 천박한 자신의 감정을 고상하게 만듭니다.
플라톤은 문학과 예술을 존재하는 사실의 재현으로 보았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거기에 덧붙여 문학과 예술을 존재하지 않는 것의 표현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문학과 예술에 대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대립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모습을 바꾸어 계속 반복되었습니다.
사실 플라톤의 모방이론은 고전주의와 사실주의 그리고 인상주의의 계보를 타고 내려오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 이론은 낭만주의와 표현주의에 이론적 바탕이 되었습니다.
16세기 고전주의자들은 미의 이데아를 가정하고 그것을 모방하려고 애썼습니다. 반면 18세기 낭만주의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예술이 공포와 연민을 일으키는 숭고한 어떤 것을 표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19세기 사실주의자들은 낭만주의자들의 감상을 퇴폐로 규정지으면서 객관적이고 냉정한 눈으로 사회현실을 모방하려고 했습니다. 20세기 표현주의자들은 18세기 낭만주의자들처럼 경험을 초월한 숭고한 것을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같은 20세기에도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숭배하는 동구 쪽에서는 표현주의를 서구의 타락한 예술이라고 비판합니다.
21세기가 되어도 사정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한쪽에서 예술이 사회의 풍기를 해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플라톤 같은 사람들도 있고 예술이 인간의 감정을 정화한다고 주장하며 표현의 자유를 부르짖는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술은 어떤 것일까요? 예술은 존재하는 실재의 모방일까요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표현일까요? 예술은 집단적인 것일까요 아니면 개인적인 것일까요? 정치적인 것일까요 아니면 지독하게 사적인 것일까요?그러나 예술은 그 모두이거나 그 모두를 뛰어넘는 어떤 것일 겁니다.
류가미 ⓒ / 연재 시리즈 - 데일리 서프라이즈
이미지 복원: 노하우업 (Knowhow Up)
병파 2007년1월6일 17시30분
화이트헤드가 서양철학은 플라톤의 각주라고 말한 것이 다 이유가 있었군요. 그래도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상보다 현실을 중요시했다고 하는데 플라톤의 틀에 갇혀 있다니 이해가 잘 안 되네요.
가미 2007년1월6일 17시44분
서양철학의 기본 개념은 소크라테스-플라톤의 작품입니다.
소마(몸)과 프쉬케(영혼)을 구별하고 프쉬케를 소마 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전통도
인간의 미덕을 로고스(이성)로 보는 전통도 이데아라는 개념으로 관념론을 만든 것도 소크라테스-플라톤에 의해서였지요.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만든 개념들을 계승했을 뿐, 자신이 스스로 특별한 철학적 개념을 만들어놓지 못했어요.
아리스토텔레스가 관념론에 치중했던 플라톤의 철학에 현실주의 성향을 불어놓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부정한 것은 아니닙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플라톤의 틀에 갇혔다고 한 것입니다.
까치밥 2007년1월7일 05시30분
평소에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헌데 류가미님 글에서 사용하시는 '실재'라는 개념이 애매하여 한 말씀 올리려고 합니다. 실재는 'reality'를 번역한 것인데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만 그 의미에는 변화가 있습니다. 즉 실재->사실->현실 이란 의미의 변화가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 변화 때문에 번역을 달리합니다. 즉 플라톤에 있어서 '실재'는 감각을 넘어선 추상적 실체이고 오늘날 말하는 '현실'은 감각적 구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영어로는 한 단어입니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실재(reality)'는 이데아에 속한 것입니다. 최고의 실재는 곧 신이라고 할 수 있죠. 따라서 플라톤에게 있어서 예술이란 그 실재를 눈에 보이는 또는 감각할 수 있는 무엇으로 구현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 실재는 원형이고 예술은 그 원형의 모방이 되는 것이겠죠.
그런데 그 이데아, 원형 개념 안에는 운동 개념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원형을 모방하게 되면 결국 운동이 제외된 미술로 재현하기 쉬울 겁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는 다릅니다. 그는 세계를 형상과 질료라는 것으로 분류합니다. 그는 세계란 질료가 형상이란 옷을 입고 세계에 드러나는 것이라고 봅니다(일단 작용인과 목적인을 제외하고 말합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예술이란 규정할 수 없는 질료에 형식을 부여해서 표현(expression!) 즉 밖으로 나타나게 한 것이라고 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는 달리 운동 개념을 끌어들여 세계를 설명합니다.당연히 이 운동 개념은 미술보다 음악으로 표현하기가 훨씬 쉽겠죠.
가미 2007년1월7일 15시26분
까치밥/
실재라는 말은 현실이라는 말과 동일합니다.
단지 실재는 가상적인 현실이 아니라 참된 현실을 말합니다. 플라톤은 우리가 감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이 세상을 참된 현실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가 말한 동굴의 비유를 보면 알 수 있듯이,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상은 동굴에 비추어진 그림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은 플라톤에게는 실재가 아니라 허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에게 실재는 감각으로 지각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파악되는 관념적인 것입니다.
그는 이것을 이데아라고 했지요.
사실 플라톤의 이데아에는 운동의 개념 다시 말해 변화의 개념이 없습니다.
이데아는 사실 영구불멸하고 시간의 변화를 초월한 것이지요.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도 플라톤의 그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를 시간의 변화를 초월한 자기 원인적인 존재라는 뜻에서 본질(essentia)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자기 원인에 따라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에 의해 생겨나고 시간에 따라 생겨났다 사라지는 존재들을 우연한 존재라는 뜻에서 우유( accidentia)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존재의 본질적인 측면을 형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형상이라는 개념은 플라톤의 이데아의 개념과 비슷합니다. 이것이 참된 현실 실재죠.
그런데 참된 현실, 실재가 아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어떨까요?
이 세상은 시간의 변화를 초월한 이데아와 본질의 세계와는 다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질료라는 말은 참된 실재를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현상적인 세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끌어들인 개념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가 사는 현상적인 세상은 플라톤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는 실재가 아니라 허구의 세계입니다.
이 허구의 세상은 물질적인 질료를 가지고 관념적인 이데아 혹은 본질의 형상을 모방한 것이지요.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처럼 이 세상을 이데아의 모방품으로 보았습니다. 또한 예술도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적 세상의 모방품으로 보았지요. 단지 그는 비극이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적 세계의 모방품일 뿐만 아니라 시공을 초월한 개연성(미토스)의 모방일 수도 있다고 덧붙입니다.
그의 시학은 훗날 표현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사상의 씨앗을 품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는 표현주의를 주장한 문예 이론가는 아닙니다.
진정한 의미의 표현주의 이론이 시작된 것은 칸트의 숭고(sulime)의 개념이 나온 후부터입니다.
칸트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실재를 이데아, 본질이라는 개념대신 물자체라는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이 물자체는 이성을 통해서도 인식될 수 없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인식불가능하고 정의할 수 없는 물자체는 더 이상 모방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단지 그것의 표현의 대상이 될 수 있을 뿐이지요.
아무래도, 까치밥님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너무 표현주의쪽으로 몰아가는 것 같습니다.
까치밥 2007년1월7일 21시07분
가미/
님께서 쓰신 내용은 결국 뭐 제 얘기를 다시 좀 더 길게 반복한 것이라고 보구요. 일단 짧은 글의 한계를 먼저 전제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제 글에서 일단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차이점에 강조을 두고자 했습니다. 그 차이란 세계를 설명하는 그 방향성이 반대라는 점입니다.(물론 오늘날 입장에서 보면 결국 같은 방향입니다.)
그 둘의 공통점도 물론 있습니다. 거칠게 말하면 결과적으로 둘 다 오늘날 '형상철학'이라는 테두리 안에 있다는 것이죠. 오늘날 그 '형상'이란 개념은 다시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다는 것은 잘 아실 겁니다.
사실 제가 '표현'이란 단어를 쓴 것은 현대 철학적 관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특징을 설명하고자 함이었지 표현주의쪽으로 몰아간 것은 아닙니다. 단지 '표현'이란 용어를 사용한 걸 가지고 님이 저를 너무 표현주의 쪽으로 몰아부친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사용한 '표현'이란 용어에 대해선 님이 말씀하신 그 '씨앗' 정도로 이해하셔도 됩니다.
본 글 제목이 <존재하는 실재의 모방?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표현?> 입니다.
그런데 "존재하는 실재의 모방"이란 말은 맞는 거 같은데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표현"이란 말이 적절한지 궁금합니다.
'존재하지 않는 허구'란 무엇일까요? 감각할 수 없는 어떤 무엇일까요? 그렇다면 감각할 수 없는 그 무엇을 어떻게 밖으로 나타낼 수 있을까요?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어떻게 감각할 수 있을까요?
제 생각에 아마도 "존재하지 않는 허구'란 시간의 흐름을 따라 끊임없이 운동하며 변화하는 무엇을 뜻하는 거 같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예술이라는 그릇에 담아낼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인 거 같습니다. 시간과 변화에 관한 문제죠.
그런데 영화 메트릭스는 실재의 모방인가요?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 허구일까요?
가미 2007년1월8일 17시53분
까치밥/
까치밥님은 제 글을 반대로 이해하셨습니다. 에고...
아마도 그것은 까치밥님이 존재의 두차원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존재라는 것은 본질과 실존을 아우르는 말입니다.
문맥 속에서 존재라는 말이 나올 때는 그것이 본질을 가르키는 말인지, 아니면 실존을 가리키는 말인지를 구별해야 합니다.
사실 철학의 가장 큰 오해는 본질과 실존을 구별하지 못 하는데서 비롯됩니다.
본질은 이데아처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영원불멸한 존재입니다.
반면 실존은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존재를 말합니다.
제 글에서, '존재하는 실재의 모방'이라는 말은 실존하는 대상에 대한 모방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시간 안에서 변화하는 대상에 대한 모방이라는 뜻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표현'이라는 말에서
존재는 실존을 가리키는 말이고 허구는 미토스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저는 제 글에서 미토스가 시학에서는 허구라는 말로 번역된다고 언급했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허구'는 실존하지 않는 (다시 말해 우리가 시공간안에서 경험할 수 없는) 미토스를 말합니다.
제가 미토스에 대해서 모방이라는 말 대신 표현이라는 말을 쓴 것은 우리는 우리가 시공간안에서 경험할 수 없는 것은 모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미토스라는 시공을 초월한 보편적 개연성을 묘사하는 방법은 그것에 대한 우리의 느낌을 표현하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까치밥님이 끝에 어이없는 예를 드셨는데, 영화에 나오는 매트릭스는 시공간을 초월한 고정불변의 본질도 아니고, 그렇다고 시공간 안에 존재하는 실존도 아닙니다.
또한 매트릭스는 시공을 초월한 보편적인 가능태라고 할 수 있는 미토스도 아닙니다.
그럼 매트릭스는 무엇일까요? 매트릭스는 말 그대로 가상 현실입니다.
그것은 실존이나 본질처럼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존재한다고 믿었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