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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론 - 류가미 의 문예기행
[원시에서 모던아트까지]
(8부) 두개의 원형, 프로메테우스와 욥 / 2007-01-11
안녕하세요. 류가미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프로메테우스와 욥이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을 대표하는 원형이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중세 기사 문학에 대해서 다루기 전에, 이번 시간에는 두 원형에 대해서 보다 자세히 살펴볼까 합니다.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 성배의 기사 파르치발, 트리스탄과 이졸데 같은 중세 기사 문학은 이 두 원형의 갈등 안에서 파생되어 나온 드라마이기 때문입니다.
프로메테우스와 욥이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을 대표하는 원형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잠시 원형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볼까 합니다. 원형(archetype)은 융(Jung)이 만든 개념입니다. 융은 인간의 마음을 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누었습니다. 의식이 내가 알고 있는 나의 마음이라면 무의식은 내가 모르고 있는 나의 마음입니다. 융은 다시 무의식을 개인 무의식과 집단 무의식으로 구별했지요.
개인 무의식은 한 개인이 어려서부터 쌓아온 경험들이 무의식 속에 억압된 것이라면 집단 무의식은 인류가 과거로부터 축적해왔던 경험을 저장한 인류의 기억창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집단 무의식은 본능과 원형이라는 두 가지 차원으로 나누어질 수 있습니다. 본능은 인류로 하여금 특정한 행동을 하게 하는 충동이라고 할 수 있고 원형은 인류로 하여금 특정한 방식으로 사물을 인식하게 만드는 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행동이 본능에 지배를 받는다면 우리의 인식은 원형에 지배를 받게 됩니다.
사실 우리에게 사물을 인식하는 특정한 틀이 있다는 것은 신화와 민담을 보면 분명해집니다. 서로 문화 교류가 없었던 지역의 신화나 전설이 이상할 정도로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세계의 모든 곳에서는 위대한 어머니 대지의 여신과 천공의 신인 아버지 신화가 나타납니다. 유럽에서는 그들을 헤라와 제우스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레반트에서는 야훼와 바빌론의 창녀라고 부르고 인도에서는 시바와 삭티라고 부르고 동북아에서는 음양으로 부르는 차이는 있지만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프로메테우스와 욥이 유럽과 레반트를 대표하는 원형이란 말은 그것이 유럽 혹은 레반트 사람들만이 가진 심리적 이미지라는 뜻은 아닙니다. 프로메테우스와 욥이라는 원형은 이름만 달리해서 세계 도처에서 나타납니다. 다만 유럽에서는 프로메테우스의 원형이 좀 더 강하고 레반트에서는 욥이라는 원형이 좀 더 강하다는 의미지요.
우선 프로메테우스의 원형을 알기 위해 그의 신화를 살펴봅시다.
프로메테우스는 신이 아니라 거인족인 티탄에 속하는 인물로서 그의 이름은 미리 보는 자 또는 신중한 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반면 그의 동생인 에피메테우스는 사건을 통해서만 배우는 자 또는 부주의한 자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프로메테우스는 선견지명이 있었기 때문에 제우스가 아버지 크로노스를 쓰러뜨릴 것을 미리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티탄인 크로노스 편에 서지 않고 제우스 편에 서서 싸웠습니다. 또 그는 제우스를 도와 그의 머리에서 아테나 여신이 태어나도록 도왔습니다.
아테나 여신은 프로메테우스에게 건축술, 천문학, 수학, 항해술, 의학, 야금술 등등 여러 가지 것을 가르쳐주었고 프로메테우스는 아테나에게서 배운 그 지식을 인간들에게 다시 가르쳐주었습니다. 프로메테우스 신화들 중 가장 오래된 것은 그가 여러 신들의 모습을 본 떠서 점토와 물을 반죽하여 인간을 만들고 아테나가 거기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진흙으로 인간을 빚고 신이 호흡을 불어넣었다는 유대의 창조 신화와 많이 비슷합니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와 제우스는 새로 태어난 생명체인 인간에 대한 의견이 서로 달랐습니다. 제우스는 이 새로운 생명체를 달가워하지 않았고 반면 프로메테우스는 어떻게든 이 새로운 생명체를 지키려고 했습니다.한번은 프로메테우스가 제물로 바쳐진 황소의 몸통 중에서 신들이 먹을 부분과 인간이 먹을 부분을 나누는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는 황소의 가죽을 벗겨 토막을 내고 그것의 가죽을 꿰매어 두 개의 자루를 만든 뒤 자루 하나에 맛있는 살코기를 담아 별로 먹음직스럽지 못한 부분으로 덮고 다른 하나에는 순 뼈다귀를 담아 기름진 지방분을 두텁게 덮었습니다. 그리고는 제우스로 하여금 둘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했습니다.
제우스는 당연히 지방과 뼈다귀가 든 자루를 선택했고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선물로 주기로 한 불을 주지 않는 것으로 프로메테우스를 응징합니다. 인간들에게 날고기를 먹게 해, 라고 제우스는 소리칩니다.
그러자 프로메테우스는 아테나 여신에게 올림포스 산으로 올라 갈 방법을 묻습니다. 여신은 그가 몰래 올림포스로 들어가게 돕습니다. 프로메테우스는 태양마차에서 불씨를 훔쳐내 회향나무 줄기 속에 감춘 채, 다시 지상으로 내려옵니다. 그리고 그 신성한 불씨를 인간에게 전해줍니다.
◀ 불을 훔쳐 내려오는 프로메테우스
그러자 분노한 제우스는 복수를 시도합니다. 제우스는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를 시켜 점토로 여자를 만들게 합니다. 그리고 네 방향의 바람을 불어넣어 그 여자에게 생명을 줍니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판도라에게 아름다움과 함께 교태와 거부할 수 없는 욕망을 주었고 아테나는 방직 기술을 주었으며 헤르메스는 재치와 마음을 숨기는 법, 설득력 있는 말솜씨 등을 선물했습니다.
이로써 ‘모든 선물을 받은 여인’이라는 뜻의 판도라가 태어나게 된 것이죠. 제우스는 판도라에게 상자를 하나 주면서 절대로 열어 보지 말라고 경고한 뒤에 프로메테우스의 아우인 에피메테우스에게 보냈습니다. 프로메테우스는 동생 에피메테우스에게 제우스가 주는 선물을 받지 말라고 경고했기 때문에 처음에 에피메테우스는 판도라를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를 벌거벗겨 코카서스 꼭대기의 암벽에다 묶고 독수리가 그의 간을 쪼아 먹게 했습니다. 형이l 벌을 받은 것을 보고 놀란 에피메테우스는 판도라와 결혼합니다.
판도라는 에피메테우스와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다가 제우스가 준 상자를 생각해냅니다. 그녀는 열어보지 말라는 제우스의 경고가 떠올렸지만 호기심을 참을 수 없어 상자를 열고 맙니다. 그 순간 상자 속에서 인류를 파멸시킬 슬픔과 질병, 가난과 전쟁, 증오와 시기 등 온갖 악(惡)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것들을 수증기처럼 피어올라 하늘로 날아갔고 그 후부터 인간은 괴로움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가 상자 속에 함께 담아 두었던 ‘믿을 수 없는 희망’이 인류의 파멸을 막습니다.
한편 코카서스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던 프로메테우스의 고통도 그 종말을 맞습니다. 영웅 헤라클레스가 프로메테우스가 있는 절벽에 오게 되고 그를 쇠사슬에서 해방시킵니다. 그 후 프로메테우스는 헤라클레스의 독화살에 맞은 후 계속 고통당하고 있던 케이론과 영원한 생명을 교환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가졌던 케이론은 죽어 안식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프로메테우스는 이제 영원한 신의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그러나 다른 판본에서는 프로메테우스를 형벌에서 벗어난 것은 헤라클레스가 아니라고 합니다. 프로메테우스를 형벌에서 풀어준 것은 제우스 자신이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궁금했던 그는 스스로 한 발 물러나 프로메테우스에게 자유를 준 것이지요.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가 궁금해 하는 그의 미래를 알고 있었고 제우스는 자신의 미래를 알기 위해서 그의 지식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정말 그렇게 앙숙이었던 프로메테우스와 제우스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진 것일까요? 그건 저로서도 알 수가 없습니다. 사실 프로메테우스는 ‘금기를 위반하면서까지 지식을 추구하는 자’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원형은 르네상스 시대에 교회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인체에 대한 지식을 알기 위해 해부에 몰두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이미지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원형은 괴테의 파우스트에서도 변주되어 나옵니다. 파우스트는 전지전능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 금기를 위반합니다. 그는 악마에게 자신의 영혼을 팔고 맙니다.
현대에서 이러한 프로메테우스의 원형은 주로 미친 과학자의 이미지로 나타납니다. 프랑케슈타인 박사는 죽은 자를 되살려서는 안된다는 금기를 어기고 시체들을 조합해 새로운 생명을 창조합니다. 그러나 그가 만든 것은 자신의 창조주를 위협하는 흉측한 괴물이었습니다. 원자폭탄이라는 인류 전체의 멸망을 가져올 수 있는 금지된 지식을 연구했던 오펜하이머나 생명윤리의 논란을 일으키면서도 인간의 배아 줄기 세포를 연구했던
▲ 우리가 만든 괴물, 원자폭탄
프로메테우스의 신화는 결국 프로메테우스와 제우스가 화해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이 신화가 말해주는 것은 금기를 위반하면서까지 지식을 추구하는 이 미친 과학자가 결국에는 용서받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괴테의 파우스트에서도 반복되는 주제입니다. 천사는 악마에게 영혼을 판 파우스트의 영혼을 지옥이 아니라 천국으로 이끌고 갑니다. 그를 데려가는 천사들은 이렇게 합창을 합니다.
"영의 세계의 귀하신 분이 악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습니다. 항상 노력하며 애쓰는 자를 우리는 구원할 수 있습니다."
◀ 지식을 얻기 위해 영혼을 판 파우스트
제우스가 결국 자신을 속인 프로메테우스와 화해를 하듯이 신도 악마에게 영혼을 판 파우스트를 용서하고 맙니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을 계발시키기 위해 불을 훔쳤고 파우스트는 자기 향상을 위해서 영혼을 팔았습니다. 프로메테우스와 파우스트는 더 나은 인간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상승 욕구를 상징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욕구는 금지된 지식을 통해 인간 이상의 것이 되려는 오만(Hubris)이라는 죄를 짓게 하지만 그러나 그 죄는 달콤한 죄(felix culpa)이기도 합니다. 그 죄를 통해서 인간은 자신을 진화시키고 다시 신과 화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프로메테우스의 원형과 달리, 욥은 ‘고난당하는 의인(義人)’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욥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그가 프로메테우스처럼 신을 속이는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의인이기 때문입니다. 신은 욥이 의인이라는 것을 알고 그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서 그를 사탄의 손에 붙입니다.
▲ 종기로 욥을 시험하는 사탄, 블레이크 作
http://www.artgraphica.net/images/art-tutorial-cds/blake-satan-job.jpg
사탄은 욥에게서 재산을 빼앗고 잇달아 그의 자녀들마저 죽입니다. 거기다가 모자라 욥의 건강마저 빼앗습니다. 그러나 그는 부당한 박해에 맞서지도 않고 그렇다고 자신을 자책하지도 않고 모든 고난을 우아하게 견뎌냅니다. 고난당하는 욥의 여성용 버전이 바로 신데렐라입니다. 신데렐라는 그녀의 선함 때문에 계모와 자매들에게 박해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고통의 원인인 계모와 자매를 증오하지도 않고 재투성이인 채 허드렛일을 하는 자신의 신세를 부끄러워하지도 않습니다. 욥과 신데렐라 모두는 자신의 무죄함을 알고 언젠가는 선이 회복될 것을 믿습니다. 결국 욥은 다시 신의 축복을 얻었고 신데렐라는 아시다시피 왕자님과 결혼을 합니다.
사실 욥의 원형은 현대에도 생생히 살아 있습니다. 욥의 원형은 인도의 독립을 위해 무저항 운동을 펼치는 간디의 모습에서도 찾아 볼 수 있고 티베트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는 달라이 라마에게서도 나타납니다. 또한 그것은 미얀마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하는 아웅산 수지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는 대신 선이 회복될 것이라는 것을 믿으면서 인내합니다.
사실 욥이 보여주는 태도 속에서는 예수의 산상 수훈이 녹아 있습니다. 예수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또 슬퍼하는 이와 온유한 사람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는 욥처럼 선이 회복되기를 기다리며 가슴 아파하며 고통을 견디는 사람이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선언했던 것입니다.
19세기 니체는 이러한 욥의 인고와 기독교의 도덕을 노예의 도덕이라고 비판합니다. 그것은 도덕이 아니라 현실적 무기력함을 도덕적 우월감으로 포장하려는 위선과 기만이라고 말입니다. 니체가 주장하는 새로운 도덕은 주인의 도덕이었습니다. 그가 주장하는 주인의 도덕은 한마디로 자신을 상승시키고자 하는 권력에의 의지였습니다. 사실 그것은 인류를 향상시키기 위해 금기된 지식에 도전하는 프로메테우스의 기질을 말합니다.
프로메테우스와 욥의 원형은 우리에게 모두 빛과 그림자를 보여줍니다. 프로메테우스의 자신을 상승시키려는 욕구 밑에는 그 욕구를 막으려는 어떤 장애나 금기도 무시하겠다는 오만이 깔려 있습니다. 또 선의 회복을 기다리며 고난을 견디는 욥의 인고 속에서는 적극적으로 문제해결에 나서는 주체성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원형이라는 것은 인류의 축적된 경험의 산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프로메테우스와 욥은 우리의 본성의 일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프로메테우스와 욥이라는 양극 사이에 존재합니다. 하나의 극쪽에는 오만으로 치달을 수 있는 자기 향상의 욕구가 있고 다른 극쪽에는 자신의 책임을 포기하는 것일 수도 있는 전능한 신과 융합이 있습니다. 이 두 개의 극들 사이의 창조적인 긴장이 바로 유럽 문화의 바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욥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한 뒤 본격적으로 중세문학에 대해서 다루어보도록 하겠습니다.새해에도 모두 평안하고 행복하시길......
류가미 ⓒ / 연재 시리즈 - 데일리 서프라이즈
이미지 복원: 노하우업 (Knowhow U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