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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서구사상의 도덕 정감론
흄(Hume)에 따르면, 측은지심은 모든 사람이 인간으로서 자연적으로 지니는 일차적이고 기초적인 도덕적 느낌이다. 측은지심이 없다면 우리는 인간으로 간주될 수 없을 것이며, 확실히 결코 도덕적이라고 간주될 수 없을 것이다. 측은지심은 당연히 느낌이기에 그 강도는 때마다 사람마다 다양하지만 자극되고 계발되어야 할 우리의 잠재적인 성향이자 역량으로서, 언제나 우리 모두에게 속한다. 우리가 곧 보게 되겠지만, 흄에게는 유교사상의 맹자와 마찬가지로 측은지심은 단순히 인간 본성에 속한다. 인간 본성이라는 사실을 넘어 더 이상의 탐구는 가능하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다. 우리는 단순히 측은지심이 우리에게 자연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롤스는 심지어 흄의 ‘자연에 대한 믿음(fideism of nature)’을 논하기까지 한다. 나는 이러한 입장이 유교의 도덕전통에도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의 자연적 느낌인 측은지심의 원초적 성격을 인정하는 이러한 입장에도 불구하고, 흄의 윤리 이론이 도덕에 대한 회의주의의 결과라는 징후도 다소 있다. “도덕에 대한 어떠한 합리적 견해도 정당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그저 우리가 타고난 본능에 의해 따르도록 내버려두어야만 한다.” 도덕 정의론과 마찬가지로 흄의 정감 이론 역시 현대 서구가 직면하는 윤리 사상의 곤경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흄의 이론에 대하여 주로 느끼는 이론적 문제는, 그 이론이 우리의 도덕 활동의 주요한 측면들 모두를, 특히 인지적이고 의도적인 요소까지도 측은지심의 느낌을 통해 설명하려는 시도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흄의 정감론은 윤리에서 측은지심의 주요성을 단순히 주장하는 것을 상당히 넘어선다. 서구에서 정감론의 다른 주창자들과 마찬가지로 흄은 뚜렷하게 인지적인 활동인 우리의 도덕적 추론과 판단까지도 측은지심의 느낌에서 도출하려는 시도를 한다. 그러나 도덕 판단이 지닌 어느 정도 자율적 성격을 감안할 때 이러한 시도가 실제로 설득력 있게 이루어질 수 있을지 의문이다.
정감적 요소와 인지적 요소는 윤리에서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기는 하지만 별개의 두 요소이다. 예컨대 느낌으로서의 측은지심은 정의나 불의 같은 개념과는 구별되는 현상이다. 나는 이러한 개념들이 기본적으로 인지적이고 합리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측은지심이 그 자체로 정의라는 관념을 산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측은지심이 나중에 우리를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경험하는 고통의 원인으로서 불의에 관심을 가지도록 이끌 수는 있다. 정감적 현상으로서 측은지심은 도덕 판단이라는 인지적 활동과는 명확히 구별된다. 우리는 이미 측은지심이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그 대상에 대한 다소간의 사전 지식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는 ‘지향적’ 현상임을 지적했다. 우리는 또 측은지심이 아무 이유 없이 생기는 법이 없다는 사실에도 주목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측은지심이 일차적으로 정감적인 현상이며 윤리 활동에 수반되는 다른 요소들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우리의 정감론은 측은지심의 감정이 도덕에서 기초적인 요소라는 점을 주장하는 수준 정도에서 그친다. 측은지심은 의지적인, 따라서 정감적인 현상과 구별되어야 하는 도덕적 승인이나 비난에 밀접히 관련될 수는 있다. 우리가 ‘도덕 감각’(moral sense)이라고 부르는 것 또한 대체로 지적이고 직관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측은지심은 어디까지나 느낌이며 도덕적 감정의 범주에 속한다. 윤리적 삶에서 정감적 측면, 의지적 측면, 그리고 인지적 측면 사이의 관계는 종종 예리하게 구분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이 셋은 서로 환원될 수 없고 서로 도출될 수도 없다.
측은지심의 도덕적 주요성은 흄의 친구이자 『국부론(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 1776)』의 저자로 유명한 애덤 스미스(Adam Smith)의 『도덕 정감론(Theory of Moral Sentiments, 1759)』의 도덕론에서도 또 하나의 지지자를 얻는다. 코플스턴(Copleston)은 스미스의 도덕론을 다음과 같은 언급과 함께 소개한다.
애덤 스미스의 도덕론에서 한 가지 현저한 특색은 측은지심에 중심적 위치를 부여한다는 점이다. 측은지심에 윤리적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은 실로 영국의 도덕철학에서 새로운 입장은 아니었다. 허치슨(Hutcheson)이 측은지심에 중요성을 부여하였고 흄도 우리가 보아 왔듯이 측은지심 개념을 크게 활용했다. 그러나 스미스는 자신의 『도덕 정감론』을 측은지심이라는 관념으로 시작하고 따라서 애초부터 자신의 윤리학에 사회적 성격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이 개념에 대한 그의 활용도는 더 뚜렷하다. “우리가 흔히 다른 사람들의 슬픔에서 슬픔을 느끼게 된다는 것은 너무나 뚜렷한 사실이어서, 이것을 입증할 사례를 요구할 필요조차 없다.” 측은지심이라는 정서는 덕스럽고 자애로운 이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측은지심은 어느 정도로는 모든 사람에게서 발견된다.
코플스턴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스미스는 측은지심을 상상력이라는 시각에서 설명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무엇을 느끼는지에 대해 직접적으로 경험하지는 못하지만, 다만 그들이 느끼는 방식과 유사한 상황에서 우리 자신이 무엇을 느끼겠는지를 생각함으로써만 어떤 아이디어를 가질 수 있다.” … 그러나 측은지심의 원인이 무엇이든, 우리는 그것이 인간 본성이 지닌 본래적인 정서라고 말할 수 있다. 측은지심은 흔히 아주 곧바로 직접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그것을 우리의 이기적인 정서 곧 자기애(自己愛)로부터 도출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그리고 우리는 도덕적 승인이나 비난으로 표출되는 [측은지심과 구별되는] ‘도덕 감각’이라는 것을 따로 상정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이러한 관점을 측은지심에 대한 맹자의 관점에도 적용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다만 마지막에 “도덕적 승인이나 비난으로 표출되는 [측은지심과 구별되는] ‘도덕 감각’을 따로 전제할 필요도 없다”는 언급은 제외하고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거듭 시사했듯이, 우리의 도덕 정감론은 ‘도덕 감각’이 인지적 성격을 띤 것으로서 지니고 있는 상대적 독자성을 부정하는 견해를 지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측은지심의 느낌이 우리의 도덕적 판단과 평가 행위를 전제한다거나 그러한 행위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아도, 후자가 별도의 행위와 성찰의 순간을 요구한다는 점은 더 명백하다. 우리의 윤리적 삶에서 인지적이고 합리적인 활동의 상대적 독립성은, 측은지심이 추후에 우리의 도덕 판단에 영향을 미치거나 그러한 판단을 산출할 수 있다는, 혹은 그 역의 경우가 명백한 사실이라는 사실과 마찬가지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반대하는 것은 단지 측은지심 하나를 통해 윤리적 활동의 거의 모든 측면을 설명하려는 포괄적인 윤리 이론을 건립하려는 시도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나는 또 한 명의 스코틀랜드 철학자 두갈드 스튜어트(Dugald Stewart, 1753-1828)에 대하여 보다 공감하는 편이다. 그는 (옳고 그름에 대한) 도덕 지각 내지 감각을 도덕 감정 내지 감수성과 뚜렷이 구분한다. 스튜어트에 따르면 후자와 달리 전자는 우리의 합리적 활동에 속한다. 전자는 확실히 도덕적 감정을 자극할 수 있지만 도덕적 숙고와 판단을 수반하는 합리적 활동으로서 별개의 활동이다. 따라서 스튜어트는 흄이나 애덤 스미스처럼 모든 도덕 활동을 측은지심으로 환원시키려 하지 않았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인지적 활동과 정감적 활동이 우리의 도덕 활동에서 두 개의 서로 다른 범주들이라고, 이 둘이 밀접히 연계되고 서로 보완적이라고 해도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서구 윤리 철학에서 유교의 도덕 정감론에 다른 누구보다도 더 가장 가까이 다가간 사람은 J. J. 루소(J. J. Rousseau)였다. 그는 측은지심의 주요성이 ‘도덕의 충분하고도 결정적인 토대’이자 출발점이라는 입장을 대변했다. 측은지심의 느낌은 천부적이고 직접적이며 보편적인 느낌이며, 어떠한 타산적 마음 없이 모든 사고에 선행한다고 말한다. 루소에게 측은지심은 윤리의 경험적 토대이다. 그는 자연적 인간성을 사회적 인간성으로부터 구별하면서 측은지심을 진정한 인간성 그 자체라고 보았다.
루소는 ‘자연적 상태’를 만인 대 만인의 투쟁 상태로 보는 홉스의 관점에 반대했다. 루소에게 원초적인 자연적 상태에 있는 인간은 선하며, 도덕은 단순히 인간의 자연적인 느낌과 충동에서 발달한 것이다. 인간은 자연적으로 선하고 인간 본성에서 본래적인 타락이나 죄는 없다. 자기 보전을 위한 충동이라는 의미의 자기애(自己愛)는 그 자체로서는 악함이나 폭력을 수반하지 않는다.
그러나 줄리앙(F. Julien)에 따르면, 루소는 그가 『에밀』에서 측은지심에 대해 분석한 부분에서 다소의 모호성을 드러내었다. 그는 애초에 우리가 어떻게 측은지심을 가질 수 있게 되는지 하는 문제를 논하면서 일종의 딜레마에 직면하게 되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상상력 없이는 측은지심을 느낄 수 없고 다른 사람의 마음에 대하여 상상력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려면 일정한 나이에 도달하여야 한다는 것이 참이라면, 루소의 생각에는 아이들은 측은지심을 느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측은지심이 우리의 자연적이고 보편적인 성향이라는 그 자신의 관점과 모순되는 것으로 보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줄리앙에 따르면 측은지심에 대한 루소의 면밀한 분석은 보다 결정적인 측면에서 측은지심의 역설에 봉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설 수 있는 한 우리는 그 사람의 불운이 우리 자신에게도 일어났을 수 있다고 상상하게 되는데, 루소는 이러한 상상적 경험에서 산출되는 느낌을 ‘측은지심의 달콤함’(sweetness of sympathy)’이라고 묘사했다. 이 달콤함은 일종의 ‘가학적인’ 쾌감으로서 결국 이기심이의 한 형태라는 것이다! 줄리앙은 루소가 이러한 딜레마에서 출구를 찾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루소는 결국 측은지심이란 수정된 형태의 자기애라고 결론 짓게 되었다는 것이다. 측은지심은 ‘도덕적’이라고 하면 기이한 형태의 도덕적 느낌이다!
줄리앙에 따르면, 측은지심의 이러한 역설은 주로 루소의 사유가 개인주의적인 틀을 전제로 하는 데서 비롯된다. 루소는 측은지심에서 결국 자신이 찾고 있던 진정한 인간성을 발견하는 데 실패했다. 여기서 줄리앙은 윤리의 새로운 토대를 발견하려는 대안적 접근으로 맹자의 윤리 이론이 갖는 장점에 주목하게 된다. 그는 현대 윤리이론의 전반적인 틀인 개인주의적 틀을 넘어서는 것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특히 그는 새로운 윤리이론의 잠재적 대안이 되는 틀로서 인격을 초개인적으로 보는, 곧 인간을 관계적 관점에서 보는 중국의 전통에 주목한다.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추상적인 합리주의적 접근을 가혹하게 비판하면서 동정심(compassion)이야말로 윤리의 핵심이 되는 직접적인 느낌이라고 주창한 또 한 명의 철학자였다.
동정심은 당연히 계발되고 함양되어야 하지만, 그는 말하기를, "나는 직접 그와 함께 고통을 받는다; 나는 내가 보통 나 자신의 불행을 느끼듯이 '그의' 불행을 느끼며, 마찬가지로 나는 내가 나 자신의 행복을 원하듯이 그의 행복을 원한다. ... 우리는 매순간 '우리 자신'이 아니라 '그'가 고통받는 자임을 분명히 의식하며, 우리가 슬퍼하고 괴로워하면서 고통을 느끼는 것은 정확히 말해서 우리 자신에서가 아니라 '그' 사람 안에서다. 우리는 그와 '함께', 따라서 그 '안에서' 고통을 느끼고, 우리는 그의 고통을 '그'의 것으로 느끼지 우리 것이라고 상상하지 않는다."
줄리앙은 쇼펜하우어의 도덕 정감론이 루소의 이론과 유사한 문제에 봉착하였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루소와 달리 쇼펜하우어는 자아라는 개념 자체를 아예 부정함으로써 개인주의적인 틀의 함정에서 탈출하는 존재론적인 해결책으로 나아갔다고 한다.
우리는 루소와 쇼펜하우어가 보는 ‘딜레마’, 곧 측은지심의 역설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우리의 우선적인 대답은 윤리 이론이 성인(聖人)의 영적 완벽성이 아니라 보통의 도덕적 수준에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질문은 다음과 같다. 루소의 도덕적 거리낌이 실제의 역설인가, 아니면 순수주의적인 강박관념의 징후인가? 우리가 어떻게 보통사람들에게서 예컨대 그리스도나 붓다의 가르침에서 발견하는 것과 같은 도덕적 완전성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동정심으로 노숙자에게 자선을 베풀기는 하지만 예수가 설정한 절대적 기준, 곧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그 자선을 숨겨두어라.”(마태오 6:3-4)는 기준에 못 미치는 사람을 볼 때, 우리는 어떻게 말할 것인가? 마찬가지로, 우리는 처절한 가난에 처한 사람을 동정해서 돈을 주는 관대한 기부자에 대하여, 그가 『금강경』에서 가르치는 “준다는 생각에 머무름이 없이 준다.”(無住相布施)는 숭고한 도덕적 기준에 그가 못 미친다 해서 탓할 것인가?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도덕적 자학에 가까워질 수 있는 도덕적 완벽주의에 사로잡힐 이유는 없는 듯하다. 우리 인간이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측은지심을 느끼기에 필요한 유추적인 상상력을 천부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은 맹자가 생각하듯이 하늘이 우리에게 부여한 ‘자연적 은총’임에 틀림없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우리의 자연적인 이기심을 루소 자신이 자기보존을 위한 우리의 주요한 본능으로 간주했는데, 이 이기심이 정말 잘못된 것인가? 실로 ‘이기적’이라고 불러야 한다 해도, 누가 이러한 자연적 이기심 없이 생존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어떤 불운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안도감을 느끼고 감사하는 우리의 태도가 정말 잘못된 것인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계몽주의 이후 그리고 프로이트 이후의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측은지심은 단순히 사회적 존재인 인간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상호 의존적이라는 징표로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괴로움에 처한 다른 사람과 더불어 우리가 느끼는 이러한 자연적이고 직접적인 유대감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굳이 ‘중국적인’ 사고방식이나 만물의 보편적인 상호의존을 이야기하는 불교의 존재론, 혹은 아예 개인주의를 해체하는 쇼펜하우어의 존재론에 호소할 필요가 없다.
확실히 어린이들은 일정한 나이가 되어야만 자의식을 발전시키고 자신의 마음 상태에 대하여 내적 성찰을 할 수 있다. 적어도 어린아이들이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곤경에 공감하기 위하여서는 자신들이 다른 자아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고, 자기 자신의 경험에 기초하여 상처를 받고 괴로워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능력을 ‘상상을 통한 유추적 사고’(imaginative analogical thinking)라고 부른다. 이러한 능력 자체는 사람들이 타고나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모두 알고 있듯이, 이 능력은 의심의 여지없이 우선적으로는 어머니와 더불어, 그리고 다음에는 놀이친구들과 더불어,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정상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육성되고 학습될 필요가 있다. 어린이들이 일정한 나이에 도달하여 명료한 자의식이 생기게 되면, 어린이들의 상상을 통한 유추적인 사고는 더 나아가서 누구든 삶에서 경험하는 온갖 형태의 예측할 수 없는 비극적 사태를 만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며, 일종의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인식에까지 이를 수도 있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우리의 존재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이러한 즉각적이고 자연적인 역량을 미묘한 형태의 이기주의로 여겨야 하는가? 오늘날은 동물들 가운데서 지능이 뛰어난 동물에게도 이러한 자연적 역량이 있어서 같은 종의 동물뿐 아니라 다른 종에 속하는 동물에게도 감정적 유대감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측은지심이 상상적인 자기 자신의 불운에 기초하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우리가 이러한 역량을 갖고 태어나며 다른 사람의 느낌에 공감할 수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역량은 인간이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는 사회적 존재들이며 고립된 삶을 살게 되어 있지 않다는 징표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유추적인 상상력이 없다면 도덕적 원칙에 관한 칸트의 이론조차도 실행이 가능할지 의심스럽다. 칸트에 따르면 도덕원칙은 보편화될 수 있는지의 테스트를 통과해야만 한다. “네 의지의 준칙이 동시에 보편적 법칙이 되기를 원할 수 있는 준칙에 따라 행위를 하라.” 이러한 입장에서는 우리 자신의 마음에 기초하여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곧 가상적으로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설 수 있는’ (그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역량인 상상력을 통한 유추적 역량이 명백히 요구되는 것이다.
위에서 내가 루소의 측은지심과 그의 입장이 직면한 이른바 ‘딜레마’에 대한 줄리앙의 해석에 대해 보인 유보적 태도는 코플스턴(Copleston)에 의하여서도 강화된다. 그렇지만 그는 상당히 대조적인 해석을 제시한다. 이러한 차이는 그가 주로 자연법사상과 자연신학에 관한 전통적 개념들의 빛 아래서 루소의 도덕사상을 통찰력 있게 읽고 있는 데 기인한다.
코플스턴의 해석에서 또 하나의 특색도 이와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이 특색이란 자기애와 연민(측은지심)이라는 두 가지 자연적 본능을 대립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전자에서 후자로의 이행을 자연적인 발전과정으로 보는 데 있다. 루소는 우리의 자기애적인 열정을 그 자체로 악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근본적인 본능이라고 간주했다. 그는 문명의 꾸밈과 부가물이 제거된 ‘자연적 상태’에서는 인간은 자연적으로 선하다고 믿었다. 불평등과 온갖 악을 초래한 것은 문명이다. 자기애적인 열정 자체는 자기보존의 본능으로서 결코 악이 아니다. 루소에 의하면 그 열망은 이기주의와 혼동하면 안 된다. 코플스턴은 루소의 ‘자연적 상태’라는 가상적 개념이 홉스의 관념과 매우 대조적임을 지적한다: “태초에 개인은 자신의 동료들에 대하여 거의 주목하지 않았다. 주목하게 되었을 때에는 측은지심이 자연적 혹은 내재적 느낌으로서 작동하게 되었다. 측은지심은 모든 성찰에 선행하며, 심지어 야수들도 때때로 측은지심을 보인다.” 루소에게 “원시적인 자연 상태의 사람은 선하다. 엄격하게 도덕적인 의미에서 선하다고 일컬어질 수는 없다 해도, 도덕은 단순히 말해 그러한 인간의 자연적 느낌과 충동이 발전한 것이며 … 인간은 자연적으로 선하고 인간 본성에서 원초적인 죄의 왜곡이란 없다.”
루소에 의하면 이기주의는 오직 사회에서 발생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언제나 다른 사람들보다 자기 자신을 선호하도록 이끄는 느낌이다. 루소의 말에 따르면 “진정한 자연의 상태에서는 이기주의가 존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원시적 인간은 이기주의가 가능하게 되는 데 필수적인 비교라는 것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기애는 그 자체만을 고려하면 “언제나 선하고, 언제나 자연의 질서에 부합한다.” “원시인은 자연적인 동정심이나 측은지심에 의해 움직이는 것으로 묘사되며, 루소는 이러한 감정을 ‘온갖 종류의 성찰에 선행하는, 순수한 자연적 감정’으로 기술한다.” “이러한 느낌은 인간이 자신의 동료에 대하여 주목하였을 때에만 작동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추론을 통해 동정심이 바람직스럽다는 결론에 이르지는 않는다. 인간은 그저 동정심을 느낄 뿐이다. 동정심은 자연적 충동이다.”
루소 자신과 코플스턴의 해석이 인정하듯이, 자기애적인 정열과 측은지심의 관계는 위에서 이야기한 것보다 약간 더 복잡하고 미묘한 면이 있다. “루소는 때때로 동정심이 자기애와 다르고 본래적으로 서로 독립적인 느낌 내지 열정임을 암시하는 듯이 말한다. 그는 그래서 말하기를, 동정심은 ‘각 개인 안에서 자기에 대한 사랑의 폭력성을 완화시킴으로써 전체 종의 보전에 기여하는 자연적 느낌’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측은지심이 가상적 자연 상태에서 법, 도덕, 그리고 덕의 자리를 대신한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자기애와 측은지심을 구별할 수는 있지만, 후자는 실제로는 전자에서 파생한 것이다.
우리의 관점에서 보다 의미 있는 것은 코플스턴이 루소의 도덕 정감론과, 인간의 가슴 속에 새겨진 자연적인 도덕법을 통해서 보편적 의지(general will)라는 그의 유명한 개념을 연결하고 있다는 점이다:
루소는 보편적 의지가 공동 선 내지 이익에 지향되어 있고 ‘최고의 보편적 의지가 언제나 최고로 정의로운 것이라고, 그리고 대중의 목소리가 사실상 신의 목소리’라고 상정한다. … 그리고 또 말하기를, 그대가 보편적 의지를 성취시키려 한다면 모든 개별적 의지들이 그 의지에 부합되도록 하라. … 그러나 덕이라는 것이 이처럼 개별적인 의지들이 보편적 의지와 부합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덕의 통치를 확립한다는 것은 모든 의지로 하여금 보편적 의지에 부합하도록 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한 정치 공동체의 보편적 의지란 선을 향해 보편적으로 정향되어 있는 인간의 의지를 한 특정한 수로로 인도하는 것, 다시 말해서 자연법이라는 전통적 개념을 새롭게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루소는 법들로 하여금 보편적인 의지에 부합하도록 하는 공교육과 입법자의 임무를 강조한다.
여하튼 루소에게 “모든 도덕은 우리의 자연적 감정에 기초한다.”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는 어떻게 자연적인 열정과 자기애와 측은지심의 감정으로부터 ‘저 모든 사회적 덕목들이 흘러나오는지’를 설명한다. 양심이나 정의감 같은 것은 물론이고 관대함, 관용, 혹은 인간성 같은 덕목들도 측은지심으로부터 흘러나오거나 측은지심의 자연적인 연장으로 설명된다. 루소에 의하면 “그리하여 최초의 정의 관념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빚지고 있는 것으로부터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갚아야 할 것으로부터 온다.”
측은지심에 관한 흄과 애덤 스미스의 윤리론의 경우에서처럼 우리는 모든 윤리적 덕목과 개념을 측은지심의 ‘자연적인 연장’으로 설명하는 루소의 시도에 동의할 필요는 없다. 다만 루소의 도덕 정감론이,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의 사회이론의 배후에는 자연적인 도덕법에 대한 암묵적 믿음이 깔려 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코플스턴의 해석은 심오한 통찰력을 보여준다. 우리가 앞으로 보겠지만, 전통적인 자연법 개념의 빛 아래에서 루소의 도덕 정감론을 해석하는 코플스턴의 입장은 기본적으로 타당하며, 유교의 도덕 정감론을 이해하는 데에도 매우 중요하다. 다만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우리는 맹자에서 자연법 개념이나 보편적 의지 같은 개념, 그리고 ‘자연적 상태’와 같이 고도로 추상적이고 가상적인 관념에 ‘비견할 만한 것은 찾을 수 없다.
5. 유교의 도덕 정감론: 공자
인간 본성에 대하여 강하게 비관적인 서구 사상의 흐름과는 현저하게 대조적으로, 유교는 수천 년 동안 인간의 본성이 본질적으로 선하다는 생각에 기초한 도덕적 낙관주의를 굳건히 고수해 왔다. 이러한 도덕적 낙관주의는 공자 자신에게서 기원하며, 맹자에 의해 강화되었고, 신유교의 철학을 통해 형이상학적인 토대를 부여 받았다. 그 정점은 주희(朱熹, 1130-1200)와 왕양명(王陽明, 1472-1529)의 사상이었다.
공자의 사상은 두 개의 핵심개념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선 그는 예(禮) 개념을 과거로부터 이어받았다. 예는 인간 행위의 의례적인 전범으로서, 거기서 확대되면서 사회적 규범 일반을 가리키기는 말이기도 하다. 공자에 따르면 이러한 적절한 행위의 전범은 아무 생각 없이 기계적으로 따라서는 안 되고, 적합한 태도와 관심, 진정성 있는 느낌과 성실함을 가지고 실천해야 한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仁, 자애로움, 인자함)이다. 인은 공자의 가르침에서 이상적인 인간으로 여겨지는 군자(君子)가 반드시 지녀야 하는 주된 덕목이다. 인은 사실상 공자에 있어서 하나의 덕목 이상이다. 인은 군자가 되려는 모든 이들이 따라야 하는 원칙이자 도(道)이다. 한 순간도 도를 포기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군자는 한 끼 식사를 하는 동안이라도 인을 방기해서는 안 된다.”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부와 명예는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지만, 적절한 방식으로 얻을 수 없다면 얻어서는 안 된다. 가난함과 천함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지만, 적절한 방식으로 벗어날 수 없다면 벗어나려 해서는 안 된다. 군자가 인을 저버린다면 어떻게 군자라고 일컬어질 수 있겠는가? 군자는 한 끼 식사를 하는 동안이라도 인을 방기해서는 안 된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그는 인을 버려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인’을 인간다움이라는 의미에서 ‘인간됨’이라고 간단히 해석할 수 있다. 우리가 곧 보겠지만, 맹자는 명시적으로 이 둘을 동일시했다. 그는 ‘인’이 없으면 우리는 인간 이하라는 점을 역설하였다. 모든 사람이 사회적 지위와 무관하게 예를 지켜야 하고, 예는 인에 기초해야 한다고 가르침으로써, 공자는 자신이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형식주의적이고 보수적인 도덕 전통을 넘어섰다. 그는 예를 내면화하면서 보편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공자가 군자의 이상을 모든 사람이 사회적 배경과 무관하게 추구해야 할 목표로 간주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유교에서 인의 윤리가 강하게 가족 중심적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인은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행해야 하지만, “관심의 크기는 가족에서 밖으로 멀어질수록 줄어든다.” 이것이 유교의 ‘차등적 사랑’의 원칙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은 묵자(墨子, 479-438, B.C.)가 주창한 ‘편파적이지 않은 사랑’이라는 이상과 종종 대조된다. “통치가 잘 이루어진 국가에서 사회는 확대된 가족이 된다.”고 아이반호(Ivanhoe)는 기술한다. 보다 긍정적으로 말한다면, 공자는 가족을 인을 함양하는 토대로 보았던 것 같다. 따라서 부모에 대한 효(孝)와 형에 대한 공경인 제(弟)가 ‘인의 뿌리’라고 여긴 것이다.
공자에 따르면, 인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愛人). 인은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의 목숨까지 희생하는(殺身成仁) 수준에까지도 이를 수 있다. 현대 도덕이론의 관점에서, 공자의 도덕론이 지닌 보다 흥미로운 측면은 상호적인 마음 내지 상대방과 같은 마음을 가진다는 뜻의 ‘서(恕)’라는 개념이다. ‘서’는 인을 실천하는 원칙이다. 서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자기 자신의 마음과 같게 생각해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는 유추 능력이다. 공자 자신은 서를 ‘자신의 가르침 전체를 관통하는 단 하나의 원칙’이라고 생각했다. 『논어』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대화를 발견한다.
자공(子貢)이 물었다. “평생 동안 실천이 기반으로 삼을 수 있는 한 단어가 있습니까?”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서가 아니겠는가? 그대 스스로가 바라지 않는 것을 남에게 행하지 말라.”
『논어』의 다른 곳에서 공자는 같은 제자(子貢)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그대는 내가 공부를 많이 해서 배운 사람이라고 간주하는구나. 그렇지 않다. 나는 그 모든 것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원칙]을 갖고 있다.” 또 다른 곳에서 공자는 서의 원리를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그대가 서고 싶으면 다른 사람을 서게 해야 하고, 그대가 성공하고 싶으면 다른 사람도 성공하도록 해야 한다. 가장 가까운 것에서 유추하는 것이 인을 실천하는 방도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공자의 황금률과 예수의 황금률, 그리고 심지어 칸트가 도덕률을 정언명령으로 정식화한 것 사이의 놀라운 유사성에 주목했다.
우선 명백한 차이점은 칸트의 정식화가 형식적이고 합리주의적인 성격을 지닌 것과는 대조적으로 공자의 황금률은 소박하게 우리의 일반적인 경험에 호소하는 심리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차이점은 이 두 도덕의 원칙이 지닌 역사-문화적 배경의 차이에 있다. 칸트의 도덕원칙은 나이, 성별, 사회적 지위, 그리고 여타 우연적 성격을 띤 속성들과 무관하게 모든 사람을 합리적인 도덕의 주체로 보는 평등주의적인 생각을 전제로 한다. 이러한 평등주의를 자명한 진리로 보는 관점 없이는 정언명령과 같은 도덕의 원칙은 보편적 원칙으로 작동할 수 없다. 공자의 가르침이나 근대 이전의 오랜 유교 전통에서 우리가 인간에 대한 이러한 추상적이고 합리주의적인 개념을 발견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다만 유교는 언제나 인간을 자기수양의 도덕적 주체로 보아 왔다. 공자의 인간관은 확실히 도덕적 평등주의로 특징지을 수 있다. 그는 군자 됨을 모든 사람이 도달해야 할 보편적인 목표로 옹호했고, 공자 이후 유교 전통도 모든 사람에게 도덕적 완성이 가능하다는 이상을 굳건히 고수해 왔다. 모든 사람이 성인이 될 수 있고 되어야 한다는 이상이다. 우리는 또 공자가 사회적 지위와 무관하게 모든 인간의 권리는 아니라 하더라도 존엄성을 인정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특히 교육에서 그는 사회적 혹은 경제적 배경과 무관하게 제자들을 받아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세 번째 중요한 차이점도 우리가 주목할 가치가 있다. 사랑을 실천하는 방도로서 공자의 ‘서’와 달리, 칸트의 형식화된 원칙으로서의 황금률은 오직 우리의 실천이성에 기초하며, 그 원칙을 적용하는 사람에게 덕을 전제로 하거나 요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칸트 자신도 인지하고 있었듯이, 이 원칙이 오용될 수 있다는 비판을 초래할 수도 있다. 예컨대 범죄자가 황금률에 기초해서 재판하는 판사에게 관대한 처분을 호소한다면 어쩌겠는가? 공자가 이러한 문제를 의식하고 있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서’의 실천에서 덕이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은 유교 전통에서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사실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논어의 또 다른 곳에서 공자가 ‘서’의 원칙을 설명하면서 ‘충(忠)’이라는 덕목을 함께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그는 자신의 유일한 원칙으로 “충(忠)과 서(恕)”를 함께 논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공자는 인을 실천하는 방도로서 ‘서’라는 유추 원칙에 더하여 “이기적인 욕망을 극복해서 예를 회복”(克己復禮)할 필요도 강조했다. 여하튼 우리가 선행하는 도덕적 요건을 염두에 둔다면, “자기 자신의 마음을 미루어 다른 사람의 마음에 미치는”(追己及人) 유추 능력으로서 ‘서’의 원칙과 황금률은 모두 지구촌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탁월한 도덕 원칙으로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인’이 사람들 사이의 개인적 차원에만 한정되어야 하는 본질적인 이유는 없다. 우리는 ‘서(恕)’에 기초한 측은지심과 남을 이해하는 마음이 적에 대한 오랜 편견조차 걷어내고 그들이 행한 과거의 잘못을 이해하고 용서하도록 함으로써 적과 새로운 관계를 수립할 수 있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공자 자신이 개인과 사회의 구분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현대적 맥락에서 공자의 ‘서’의 원칙이 사회적 차원에서도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공동체적 차원에서 실천되는 측은지심과 ‘서’의 원칙은 수많은 집단적 갈등이 일어나고 있는 현대세계에서 확실히 귀중한 보편적 자산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공동체적인 ‘서’의 유추 능력과 상상력 없이는 적대적 집단 간의 어떠한 대화나 협상도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