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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은지심은 도덕의 기초: 유교적 도덕 정감론(1)
아래 글은 길희성 원장이 지난 8월 북경에서 개최된 제24차 세계철학대회에서 강연한 다산기념강좌 강연문(영문)입니다. 류제동 씨가 우리말로 옮긴 것을 3회로 나누어 실습니다.
목차
1. 도덕과 무관한 세계에서 살아야 하는 도덕적 삶
2. 칸트의 도덕 이론과 그 문화적 한계
3. 도덕 정감론에 관한 몇 가지 이론적 문제들
4. 서양철학의 도덕 정감론
5. 유교의 도덕 정감론: 공자
6. 유교의 도덕 정감론: 맹자
7. 유교의 도덕 정감론: 다산
1. 도덕과 무관한 세계에서 살아야 하는 도덕적 삶
오늘날 도덕 상대주의가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널리 확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사람들은 여전히 도덕 실재론자들이다. 사람들은 도덕적 덕목들이 객관적 타당성을 지닌다고 믿는다. 이 덕목들은 초월적인 하느님의 도덕적 의지에 기초하고 있다고 간주하기도 하고, 유교적 동아시아 문화에서는 하늘(天)이나 도(道)라고 불리는 궁극적 실재의 본성 자체에 뿌리박고 있다고 여기기도 하며, 힌두교나 불교문화에서와 같이 업의 법칙에 대한 믿음에 뿌리박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어느 경우든 사람들은 도덕 법칙이 자연 법칙과 마찬가지로 타당하다고 믿는다. 윤리적 견해는 무척 다양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여전히 기본적인 윤리적 견해에 대해 일치를 보인다. 예컨대 거짓말과 도둑질은 보편적으로 금지되고 있으며, 죄 없는 사람이나 무력한 사람, 또는 힘없는 어린이나 노인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나 동물들에게 이유 없이 폭력을 가하는 짓은 세계 어디서나 비판받는다.
더욱 심각한 수준에서 말한다면, 대다수 사람들은 ‘자연법’(natural law)이라는 개념에 대한 모종의 믿음 속에서 삶을 살아 왔고 지금도 일상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자연법’ 사상에 따르면 우리의 기본적인 도덕 원칙들은 자명할 뿐 아니라, 세계의 본성 그 자체에 뿌리박고 있으며 인간의 양심 또한 하늘이 인간성에 부여한 도덕성이다. 폭넓게 말해, 바로 이러한 자연법에 대한 믿음이 – 유신론적 형태이든 스토아철학의 방식이든 혹은 천(天)과 도(道에) 대한 유교적 믿음, 혹은 업의 법칙에 대한 힌두교와 불교의 믿음에서든 – 현대의 과학적 세계관에 의해 의문시되게 되었다. 과학적 세계관에 따르면 도덕은 세계의 성격 자체와 무관하다. 도덕 판단은 따라서 ‘사실’에 근거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더 나아가서 다양한 형태의 생물학적 인간관이 점점 더 대중화되면서 마치 그것이 현대인을 위한 해방적 ‘복음’인 양 찬양받고 있다. 생물학적 인간관에서는 인간이란 합리적 존재이지만 생존과 자기 보존을 위해 투쟁하는 이기적 존재로 간주된다. 토마스 홉스(또는 프로이드)가 오래 전에 표현했듯이, ‘자연 상태’(the state of nature)에 있는 인간은 서로 늑대와 같다(homo homini lupus)는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런 생물학적 인간론을 주창하는 자들도 종종 자신들을 인간 해방에 헌신하는 휴머니스트로 자처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은 인간의 이기성과 적자생존을 강조하는 생물학적 인간관에 대한 자기들의 옹호가 이런 자신들의 윤리적 헌신과 어떻게 일치하는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아니 하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현대인은 도덕이 사실과 유리된 세계, 즉 도덕이 세계 자체와 무관하다고 여겨지는 세계에서 도덕적 삶을 살아야 한다. 세계나 자연이 그 자체로 우리에게 아무런 도덕적 메시지를 전해주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나 자연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우리가 삶에서 어떤 가치를 추구해야 하는지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 세계 자체에 근거를 두지 못한 윤리적 가치들은 이제 개인적 선택이나 호불호의 문제로 간주될 뿐이다. 사실과 가치가 철저히 유리되고 가치판단은 사실적 근거를 결여한 것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윤리적 곤경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이 ‘정의주의(情意主義, emotivism)’라고 불리는 현대 윤리이론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도덕적 가치들은 단순히 우리의 주관적인 선호만을 표현할 뿐이다. 도덕적 가치들은 그저 음식이나 취미가 우리의 개인적 선호의 대상인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여기서 극단적 형태의 주관주의적인 윤리론과 도덕 상대주의가 도출되는 것은 당연하다. 현대 윤리이론들은 이러한 위기를 해결하려는 일련의 시도라고 할 수 있다. 현대 세계가 노출하고 있는 도덕적 ‘진공상태’를 메꾸려는 일련의 시도들이다. 자연법과 신의 도덕적 의지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현대적 상황을 반영하는 시도들이다. 이제 인간은 자신의 삶을 이끌어갈 도덕의 원칙을 발견하기 위해서 자기들 자신의 ‘세속화된’ 이성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도덕 판단의 근거가 상실될 것도 문제지만, 이보다 더 심각하고 근원적인 문제는 도대체 우리가 왜 도덕적으로 살아야 하는지 설득력 있는 대답을 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세계 자체가 담지하고 있던 도덕적 의미나 메시지가 사라지고 인간의 도덕적 본성도 의문시되기 때문이다. 도덕은 이제 외부 세계의 성격과 무관할 뿐 아니라 인간학적인 토대도 없다. 주된 위협은 인간 본성에 대한 생물학적이고 물리주의적인 관점에서 온다. 현대인들 사이에 점점 더 상식으로 통용되고 있는 이러한 생물학적 인간관에 따르면 도덕이란 근본적으로 인간 본성에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에 자의적이고 억압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왜 윤리적이어야 하는지, 우리가 왜 자신의 이익을 희생하면서 도덕 원칙들을 따라야 하는지에 대해 몇 가지 이론들이 제시되기는 했지만, 아마도 칸트주의적인 접근을 제외하면 어느 이론도 회의주의자들을 설득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나는 윤리에 대한 칸트의 의무론적인(deontological) 접근을 매우 존중하지만, 그것이 지닌 문화적 한계 내지 제약성은 서구 사회와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자명하다. 우리가 이 논문을 통해 측은지심이 도덕의 기초임을 강조하는 동서양의 도덕 정감론(道德 情感論, emotive moral theory)을 다시 검토함으로써 도덕의 새로운 토대를 모색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도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현대 윤리론에 널리 퍼져 있는, 도덕의 근본을 정초하려는(foundational) 접근들이 오늘날 완전히 실패했다고 보는 판단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나는 오히려 이전보다도 더 설득력 있는 이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도덕의 근본을 정초한다”는 말은 단순히 우리의 행위에서 옳고 그름이나 선악을 판단하는 보편적 기준을 확보하려는 도덕이론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프랑스와 줄리앙(Francois Julien)이 인간 본성에 대한 탁월한 비교연구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도덕에 타당성의 근거를 부여할” 수 있는 보다 근본적인 이론을 가리킨다. 니체와 프로이드 이래 관건이 되는 문제는 우리가 참으로 도덕적일 수 있는지 여부다. 도덕이란 그 자체가 보상이라는 것, 도덕이 인간의 본성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우리가 믿지 못하는 한, 이 근본적 이슈에 접근하는 데에는 주로 네 가지 길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대응은 가장 전통적이고 대중적인 대응으로서, 유일신신앙의 종교적 배경을 갖고 있는 문화에서 신의 의지와 상벌에 호소하거나, 힌두교와 불교 문화권에서처럼 업보에 호소하는 길이다. 이런 도덕론들의 주된 문제는 보이지 않는 실재 내지 세계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한다는 점이다. 현대 세계에서 이미 근거와 설득력을 상실해가고 있는 믿음에 의지하는 길이라는 점이다.
두 번째 대응은 ‘합리적 이기주의’라고 부르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도덕적 행위가 궁극적으로는 자신에게도 ‘이로운’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론이다. 그러나 바로 이 ‘궁극적으로는’ 혹은 ‘장기적 안목으로’라는 단서가 문제다. 왜냐하면 대다수 사람들은 도덕을 무시할 때 자신들이 얻게 될 즉각적인 혜택의 유혹을 물리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도덕이 자신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 이상의 희생을 치르도록 요구할 경우, 합리적 이기주의의 논리는 힘없이 무너진다.
세 번째 이론은 현대 세계에 유행하고 있는 매우 대중적 이론으로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에 호소하는 공리주의(功利主義, utilitarianism) 윤리론이다. 여기서 행복은 대체로 유물론적인 함의를 갖는 쾌락과 동일시된다. 이 이론의 가장 명백한 결점은 행복이나 쾌락에 대한 관념이 사람마다 다르고 문화마다 다르다는 사실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공리주의는 우리가 앞에서 언급한 근본적인 문제에 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즉 도대체 우리가 왜 다른 사람들의 행복, 곧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언급한 세 이론들과는 현저하게 대조되는 이론이 하나 있다. 앞의 세 이론들이 모두 모종의 개인적 이익이나 행복에 호소하는 반면, 칸트의 의무론적인 윤리론은 순수한 윤리론을 제시한다. ‘순수하다’는 말은 도덕 법칙은 우리의 행위가 초래할 결과에 관계없이 단지 우리가 지켜야 하는 의무이기 때문에 지켜야 한다는 이론이기 때문이다. 도덕 법칙은 우리의 실천이성이 명하는 정언명령(定言命令, categorical imperative)으로서, 우리의 행복이나 불행, 유리나 불리에 관계없이 모두가 지켜야 하는 이성의 명령이라는 것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나는 개인적으로 이 이론을 높이 평가하지만, 내가 가장 주저하는 바는 이 이론 자체가 지니고 있는 이론적 문제 때문보다는 그것이 지닌 지나치게 순수주의적인 성격 내지 그 엄격성에서 오는 문화적 한계 때문이다. 칸트 식 의무의 윤리는 주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 특히 합리주의적인 철학적 문화와 그리스도교라는 종교적 배경 속에서 성장한 사람들에게 국한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도덕의 기초로서 측은지심에 호소하는 도덕 정감론은 의무의 윤리와 마찬가지로 ‘순수주의적’이기는 매한가지이지만 훨씬 덜 엄격하고 덜 청교도적이다. 정감에 호소하는 윤리론은 무엇보다도 도덕적 행위를 유발하는 동기의 차원에서도 보다 직접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 이론에서는 우리가 도덕적으로 행동하기 위해 측은지심 외에 별다른 이유가 더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이론은 문화적 경계를 넘어 보다 더 대중적이고 보편적인 도덕의 기반을 제공할 수 있다. 본 논문의 목적은 ‘신의 명령’이나 ‘이 명령의 사회적 유용성’과는 다른 길을 통해 ‘윤리를 정당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는 데 있다. 이 다른 길이란 바로 ‘측은지심을 지닌 존재인 인간’(homo sympathicus)이라는 인간학적 기초 위에서 측은지심의 주요성(primacy, 主要性, 首位性)을 주장하는 도덕 정감론이다.
이 도덕 정감론을 다루기 전에 칸트의 윤리론이 지니는 문화적 한계에 대하여 좀 더 상세히 논할 필요가 있다.
2. 칸트의 윤리이론과 그 문화적 한계
칸트는 애초에 인간 본성이 본질적으로 선하다고 하는 루소의 윤리관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그는 측은지심(pity, compassion)의 정감을 그의 도덕론의 기초로 간주했다. 그러나 그는 궁극적으로는 이러한 생각을 포기했다. 측은지심의 느낌에 대한 분석에서 그는 이 느낌이 도덕의 확고한 보편적 기초가 되기에는 지나치게 가변적이고 신뢰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칸트는 인간의 실천이성에 초점을 두면서 이에 기초해서 보다 신뢰할 만한 도덕의 원칙을 확립하고자 했다.
칸트 윤리학은 인간이 고립되고 독립적이며 자율적인 도덕적 주체라는 관점을 전제로 한다. 이러한 관점은 대다수 사람들이 각종 인연으로 얽힌 공동체적인(communitarian) 사회에서 살아 왔고 오늘날에도 그러하다는 현실과 거리가 크다. 우리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칸트의 도덕론이 호소력이 있다고 느끼는 고둥 교양을 갖춘 개인들을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친척, 이웃, 친구, 그리고 영향력 있는 지역 명사 등으로 이루어지는 사회적 관계의 ‘두터운(thick)’ 그물망 속에서 두터운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간다. 일본이나 한국과 같이 고도로 산업화된 아시아 사회들에서도 우리가 일상적 삶에서 마주하는 전형적인 사람들은 아주 ‘옅은(thin)’ 최소한의 정체성만으로 살아가는 냉정하고 합리적인 개인들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버지니아 헬드(Virginia Held)가 ‘돌봄의 윤리학’에서 현대 서구 윤리론 전반의 기초가 되는 인간관에 대하여 지적하는 말은 본질적으로 옳다.
지배적인 [윤리] 이론들은 그 윤리 이론에 우선해서 자유주의 정치경제 이론을 위해 개발된 인간 개념을 도입하여 인간을 합리적이고 자율적인 행위자 내지는 이기적 관심이 있는 개인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사회는, 브라이언 배리(Brian Barry)의 표현대로, “협력의 조건이 쌍방의 목적 모두에 부응할 때에만 협력하는,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단위들”로 구성된다. 즉 그들이 칸트주의자들이라면 그들은 모두, 전적으로 합리적이고 자율적인 개별 행위자들이 합의할 수 있는 보편적 법칙에 부합한다고 생각되지 않는 일체의 행위를 삼가한다.
칸트의 의무론적 윤리의 ‘옅은’ 추상적 성격은 현대 서구의 사회문화적 상황을 뚜렷이 반영한다. 그 이론이 지닌 강력한 합리주의적이고 형식주의적인 특성이 실제로 ‘두터운’ 관계적 정체성을 가지고 일상생활을 살아가는 세계 인구의 대다수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도덕적 지침이 될 수 있을지 매우 의문스럽다. 롤스(Rawls)는 칸트의 윤리론이 지니는 추상적 특성을 다음과 같이 뚜렷하게 지적한다.
... 칸트는 우리에게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보여주려는 의도가 없다 (그는 그렇게 하는 것이 주제넘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다만 도덕법칙이 우리의 자유로운 이성에 뿌리박고 있음을 자각하게 하려 할 뿐이다. 그는 이에 대한 온전한 자각이 … 그 법칙에 따라 행동하려는 강력한 욕구를 일깨운다고 믿는다. 이 욕구는 우리의 자유로운 이론이성과 실천이성 양자 모두에 따라 스스로를 자율적 존재로 인식하는 가운데 자신의 이상을 표현하고 실천할 수 있는 이성적 인격체로서 우리 자신에게 속하는 욕구이다. 칸트는 도덕철학에서 자기에 대한 앎을 추구한다. 이 앎은 옳고 그름에 대한 –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 앎이 아니라, 자유로운 이론이성과 실천이성의 힘을 갖추고 있는 인격체로서 우리가 무엇을 욕구하는지에 대한 앎이다.
아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 나라들에 사는 사람들 대다수에게 도덕법칙이 우리의 자유로운 이성에 뿌리박고 있다는 자각이 실제로 ‘그 법칙에 따라 행동하려는 강력한 욕구를 일깨울’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계몽시대 이후를 살고 있는 지식인들에게도 이것은 마찬가지로 의문스럽다. 이 지식인들에게도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우리의 합리적 사고라기보다는 우리의 ‘무의식적인’ 충동이나 동기들을 형성하고 있는 우리의 비합리적인 욕구와 느낌이기 때문이다.
칸트 윤리론에서 또 하나의 문제점은 방금 지적한 한계보다 덜 명확하지만 결코 덜 중요하지는 않다. 즉 그 이론의 암묵적인 그리스도교적 배경이다. 첫 번째 한계와 달리 이 측면은 보다 더 긴 논의를 요한다. 여기서 우선 주목할 점은 칸트의 정언명령이라는 개념이 유일신신앙의 종교들의 윤리를 특징 짓는 신의 명령(divine imperative)이라는 관념과 친연성이 깊다는 점이다. 칸트가 당연시하는 도덕명령의 엄숙한 권위는 그의 생애 초기에 그의 성장 배경이 되었던 것으로 알려진 경건주의(pietism) 그리스도교의 배경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롤스는 칸트의 윤리론이 지니는 이런 간과할 수 없는 종교적 – 당연히 그리스도교적 – 성격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것은 칸트의 경건주의 배경을 고려할 때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다. 롤스는 다음과 같이 적시한다.
첨언하건대, 이러한 맥락에서 칸트는 자신의 경건주의 배경의 일부로서 우리들 자신의 동기의 순수성을 점검하는 데 이성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윤리적 성찰의 한 형태를 모색할 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알지만, 우리는 종종 우리가 자각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방식으로 그릇된 근거들의 유혹을 받는다. 칸트가 정언명령에서 보았을 수 있는 한 가지 용도는, 우리의 행동규범이 실천이성에 의해 허용되기에 정당한지 여부를 점검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경계를 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합리적 형태의 성찰을 표현하는 데 있다. 내가 합리적 형태의 성찰이라고 말하는 것은, 칸트가 자신이 프리데리치아눔(Fridericianum)에서 접한 경건주의에 대해 탐탁하지 않게 느꼈던 것 가운데 하나가 동기의 순수성에 대한 집착과 이러한 집착이 야기할 수 있는 강박적인 자기검열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정언명령은 우리들이 자신이 가진 동기들에 대한 검토를 합리적 방식으로 질서를 지우고 조율할 수 있는 성찰태도를 구현할 수 있도록 한다.
더욱이 실천이성의 주요성은 칸트가 전제하는 것 만큼 명료하거나 보편적이지 않다. “윤리 법칙이 우리의 자연적인 온갖 성향들, 심지어 삶 자체에 대한 사랑마저도 압도할 정도로 강력하게 우리를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참일까? “의무에 대한 순수한 사유, 그리고 일반적으로 도덕법칙이 이성의 힘만으로 … 인간의 마음에 경험의 영역에서 환기될 수 있는 다른 모든 추가적인 유인(誘因)들보다 훨씬 더 강력한 영향을 미쳐서, 그 도덕법칙 자체의 존엄성에 대한 의식에서 이성이 이러한 유인들을 멸시하고 점차적으로 그러한 유인들을 극복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은 합리주의적 편견이 아닐까?
우리가 칸트의 윤리론을 떻게 평가하든, 그 이론의 엄격하고 엄밀한 본질은 오해할 여지 없이 명백하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그 이론의 ‘강박적이고’ 억압적인 본질 역시 간과될 수 없다. 심층심리학이 우리에게 보여주듯이, 한 사람이 어린 나이에 경험한‘상흔’은 – 칸트는 8세 어린이로서 경건주의 학교인 프리데리치아눔에 입학했고, 그 학교를 증오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그 상흔이 무의식적으로 칸트의 윤리적 자율성이라는 엄격한 이상에 수정된 형태로 소생했다는 의심이 든다. 각 인격체는 이상적으로 하느님처럼 ‘도덕의 입법자’가 되어야 한다. 하느님이 ‘무로부터 창조’(creatio ex nihilo)하는 것처럼 각 인격체도 그 자체의 ‘목적의 왕국’을 창조하는 자유로운 ‘지고의 입법자’가 되어야 한다. 사실상 하느님의 모든 ‘선한’ 속성들이 칸트에 의해 지고한 도덕의 입법자인 각 개인에 내재적인 속성으로 내면화되고 있다고까지 우리는 말할 수 있다. 롤스는 칸트의 윤리이론에 대한 자신의 논의를 다음과 같이 결론 짓는다.
나는 칸트가 도덕 법칙과 그 법칙에 따른 우리의 실천에 부여하는 중요성은 뚜렷이 종교적인 측면이 있으며, 칸트의 본문은 이따금 신앙적 특성이 있는 말로 글을 맺으려 한다. 그의 두 번째 비판에 두 개의 뚜렷한 사례가 있다. 하나는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하는 단락이다. “의무여! 그대의 숭고하고 위엄 있는 이름이여 … 어떠한 기원이 그대에게 합당한가?” 다른 하나는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하는 단락이다. “두 가지가 마음을 … 외경과 경이로 채우니 … 내 위에 있는 별이 총총한 하늘과 내 안에 있는 도덕 법칙이다.”
3. 도덕 정감론에 관한 몇 가지 이론적 문제들
도덕에서 측은지심의 주요성을 천명하는 우리의 도덕 정감론을 논의하기에 앞서 이에 관한 몇 가지 이론적 문제들과 우리의 입장을 명확히 해 둘 필요가 있다. 첫째로, 우리는 ‘측은지심(sympathy)’이라는 말을 다소 포괄적 의미로 사용한다. 이 개념을 공감(empathy), 동정(compassion), 연민(pity), 불쌍히 여김(commiseration) 등과 같은 다른 유관 단어들과 날카롭게 구분하지 않고 사용할 것이다. 우리는 측은지심이라는 말을 우선적으로 맹자가 이해하는 대로 다른 사람의 고통을 차마 두고 보지 못하는 마음(不忍人之心)이라는 뜻으로 사용할 것이다. 본 논문이 지지하는 측은지심의 주요성은 다음과 같은 논지로 요약된다. 측은지심은 모든 인간이 자연적으로 소유하는 감정으로서, 맹자에 따르면 이런 마음이 없는 사람은 인간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다. 측은지심은 도덕의 인간학적 ‘기초’로서 도덕의 단순하고 보편적인 기반이다.
측은지심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이든 – 이 문제에 관해 만장일치가 이루어질 수 있을지 의문스럽지만 – 이 마음은 인간이 괴로움이나 고통 속에 있는 동료 인간에 대해, 특히 아무런 자신의 잘못 없이 괴로움을 겪고 있는 인간, 곧 무고한 고통을 받는 자에 대해 품는 따스하고 이타적인 느낌을 가리킨다. 측은지심은 우리와 같이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동물들에까지도 미칠 수 있다. 측은지심은 명시적으로는 인간에게만 있는 독특한 마음이다. 측은지심에서 인간은 자신의 일상적인 자기 몰입과 이기적 추구를 초월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우리는 측은지심 없이는 우리 안에 어떠한 윤리적 관심이나 동기도 존재할 수 없다고 본다. 예컨대 우리가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겪는 불의에 관심을 가질 때, 우리는 일반적으로 우선 그 희생자들에게 측은지심을 느낀다. 우리의 분개심이 우리로 하여금 그 불의에 대항해서 어떤 행동을 취하게 만든다 해도 그러하다. 측은지심은 우리로 하여금 도덕적 행동을 취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직접적인 힘이며 도덕의 필수요소(sine qua non)이고 원초적이고 보편적인 토대다.
둘째로, 측은지심은 모든 사람의 천부적이고 자연적인 도덕적 마음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도덕은 우리 외부에서 우리에게 부과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성 자체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도덕을 다른 생물학적 본성에서 오는 자연적 욕구들과 마찬가지로 늘 ‘현실화되는’(manifest) 것으로 본다는 말은 아니다. 측은지심을 낼 수 있는 역량은 우리에게 잠재태로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성숙되도록 기르고 발전시켜야 한다. 이 모든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사회적 관계와 문화적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측은지심은 음악이나 수학에 대한 우리의 재능과 마찬가지로 학습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그 역량 자체는 타고 난다.
셋째로, 우리가 옹호하는 도덕 정감론은 이른바 도덕 정의주의(情誼主義, emotivism)와는 무관하다. 도덕 정의주의는 현대 도덕이론 일반이 지닌 빈곤과 곤경의 징후다. 현대 도덕 이론들이 직면하는 기본적인 문제는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합리적 논의를 통해 ‘우연적’ 요소들로 간주되는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인 배경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도덕판단의 보편적 기준을 마련할 것인가이다. 매킨타이어(MacIntyre)에 의하면, 윤리의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토대를 확립하려는 이러한 ‘계몽주의의 기획’은 실패했다. 그는 이러한 실패가 인간 본성에 관한 고전적인 본질주의 철학에 기초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인 목적론적 사고의 붕괴에 기인한다고 본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인 목적론적 사고의 붕괴 배후에는 기계론적인 인과율에 대한 관심만으로 작업하는 현대의 과학적 사고방식이 있다. 그 결과 현대인들은 이제 도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세계(amoral world)에서 도덕적 삶을 영위해야만 하게 된 것이다.
나는 현대 윤리이론 일반에 대한 매킨타이어의 포괄적인 부정적 견해를 대체로 공유하는 편이지만, 거기에 칸트의 의무론적인 윤리론을 포함시키지는 않는다. 우리가 앞에서 언급했듯이 칸트의 윤리론 역시 인간을 합리적인 도덕적 주체로 보는 인간관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세계에 대한 전통적인 윤리관을 지지해 온 형이상학적이고 신학적인 기초가 돌이킬 수 없이 붕괴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참으로 의미 있는 도덕이론을 위해서는 적어도 인간 본성에 관한 도덕적 인간론이 필수불가결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칸트 윤리론을 긍정적으로 본다. 비록 칸트 자신이 도덕법칙은 “인간 본성(주관성)에서나 세계의 상황(객관성)에서 추구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해도 그러하다.
여하튼 나에게는 도덕이론이 인간 본성에 관한 설득력 있는 긍정적 사고에 기초하고 있지 않다면 그 이론은 몇 가지 결정적인 이유로 불만족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 거의 자명하다. 첫째로, 존재와 당위 사이의 악명 높은 분리, 곧 우리의 실제 정체성과 당위적 정체성 사이의 질적 심연을 극복할 길이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도덕은 우리에게 외부적 권위에 의해 부과되거나 강요된 것일 수밖에 없고, 도덕적 삶은 본질적으로 진정성이 없을 뿐 아니라 불행한 삶이 되고 만다. 리프킨(Rifkin)은 이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법과 사회 정책에 반영되어 있는 도덕규범은 학습 지침과 표준으로서는 도움을 준다. 그러나 관건은 사람은 임박한 처벌의 위협이나 보상으로 선하게 되도록 강요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공감하려는 본성 때문에 진정성 있게 선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명령이나 약속에 의해 도덕적으로 적절한 품행을 내면화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곤경에 일체감을 느끼는 것에 의해 그러한 품행을 내면화한다. 참으로 인간답게 된다는 것은 보편적으로 공감적이 된다는 것이며, 따라서 자신의 체화된 경험에서 도덕적으로 적합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이기적 관심이나 본능의 주도성을 강조하는 생물학적인 관점 외에 인간 본성에 관해 달리 설득력 있는 관점을 가지지 못할 때 문제는 더욱 악화된다. 실로 우리가 홉스주의자나 프로이드주의자들이 “인간은 인간에 대하여 늑대”라는 표현이 말하듯이 본질적으로 이기적 존재라면, 도덕은 사회적 필요의 산물로서 인간 본성에 거스르는 것, 즉 우리에게 어떤 외부적인 것이기 때문에 인간 본성에 폭력을 가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사실, 인간이 지닌 자유의 본성이 오늘날과 같이 무제약적인 것으로 간주된다면, 우리가 이 글에서 주장하듯이 인간본성에 관한 설득력 있는 윤리관을 발견할 수 있다 해도 ‘존재와 당위’ 사이의 괴리라는 악명 높은 문제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여전히 자신의 도덕적 본성을 거슬러 살 자유가 우리에게 있다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유가 인간 본성 자체를 거역할 수 있을 정도로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것으로 간주될 때, 자유가 인간의 지고한 본성으로 찬양될 때, 다시 말해서 자유를 합리적으로 제한할 길이 전혀 없을 정도로 절대화될 때, 인간이 도덕을 본성으로 가지고 있다는 말도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무시될 수 있다. 아마도 이러한 절대적 자유의 위험성이 도스토에프스키가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허용되지 않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했을 때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즉 절대적 자유와 거기에 수반하는 도덕 허무주의(moral nihilism)가 그를 괴롭혔을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내가 이해하기로는 그가 이 말로써 의도한 것은 하느님을 믿지 않으면 선과 악을 알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선과 악을 안다 해도 도덕이 그 ‘당위’적 힘과 권위와 구속력을 상실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일종의 불안감을 경고한 말이라고 나는 이해한다.
여하튼, 현대인에게 윤리 이론들이 도덕적 권위와 동기 부여의 힘을 담지하려면 도덕적 존재론이나 형이상학까지는 아니라 해도 적어도 모종의 도덕적 인간관(moral anthropology)이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은 명백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비록 도덕적 인간론이 근대 서구 윤리사상을 괴롭혀 온 존재(is)와 당위(ought) 사이의 유리라는 악명 높은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완화시키는 데 최소한의 조건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도덕의 새로운 토대로서 측은지심의 주요성을 강조하는 동서양의 도덕 정감론들을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제레미 리프킨(Jeremy Rifkin)이 제대로 지적하고 있듯이, 공감적인 양심은 “기술적인(descriptive) 동시에 처방적(prescriptive)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존재와 당위를 분리시키는 경계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둘이 … 동일하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분투에 대해 자기 자신의 분투인 듯 일치감을 느끼고 다른 사람들의 추구를 위로하고 지지함으로써 그들의 삶을 축하할 때 우리의 자아는 확장되고 확대되어 더 넓고 더 포괄적인 연민에 근거한 참여 공동체로 흘러넘치게 된다.” 우리의 도덕 정감론이 우리로 하여금 존재와 당위의 간극이라는 문제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게 할 수는 없겠지만, 측은지심을 인간성의 일부로 간주하는 도덕 정감론에서 적어도 상당히 축소될 수 있다. 특히 유교적 전통에서 그럴 가능성이 가장 현저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측은지심의 본성에 데해 네 번째로 주목할 사항은 우리의 의식 일반과 마찬가지로 측은지심 역시 현상학적 용어를 빌린다면 ‘지향적’(intentional) 현상이라는 점이다. 측은지심은 단지 감정일 뿐 아니라 암묵적이든 명시적이든 어떤 개인 내지 집단의 상황에 대한 모종의 사실적 정보 내지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오해와 정반대로, 감정은 우리의 인지 활동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을 뿐 아니라 거의 언제나 우리의 인지 활동을 전제로 한다. 예컨대 두려움, 분노 혹은 질투와 같은 감정들은 이러한 감정들이 지향하고 있는, 그리고 이러한 감정들을 불러일으키는 사람들에 대한 모종의 지식과 정보에 기초하고 있다. 측은지심의 인지적 측면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어른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무고한 아이들의 고통에 대해서만큼, 또는 힘이 있고 특권을 지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약자나 장애자에 대해서만큼 측은지심을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에서도 뚜렷이 드러난다. 이러한 사실은 측은지심이 일반적으로 그 대상이 되는 사람의 상황, 그들이 어떤 사람이며 왜 고통을 받는지 등에 대한 이해가 선행하거나 심지어 그러한 이해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측은지심도 분노와 슬픔과 같은 다른 감정들과 마찬가지로 정보에 의존한다. 그래서 애초에 측은지심을 불러일으켰던 사실적 판단이 나중에 근거 없는 것으로 드러날 경우, 우리는 전에 가졌던 측은지심 역시 변하거나 전적으로 사라지게 되는 것을 경험하기도 한다.
이 문제를 더 강하게 표현하자면, 측은지심은 이유 없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측은지심은 후에 모종의 결과를 산출하지 않기 마련이다. 또 특정한 상황에 대한 판단 내지 이해가 선행하지 않고서 측은지심의 반응이 생기는 법도 없다. 우리는 이러한 측면들을 합쳐서 측은지심의 ‘인과적’ 측면이라고 부를 수 있다. 측은지심의 지향적 성격은 주로 그것을 유발하는 원인적 상황과 연계되어 있는 반면, 그 결과적 측면은 종종 우리가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울려면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합리적 숙고 과정에 관계된다.
리프킨은 측은지심의 복합적 성격을 잘 지적하고 있다. “공감은 감각, 느낌, 감정, 그리고 이성을 구조적인 방식으로 불러 모아 수많은 타자들과 친교하려는 목표로 나아가게 하여 … 우리의 물리적 정체성을 확대시킨다. 많은 학자들이 측은지심을 단지 느낌과 감정과 연계시키는 잘못을 저지른다. 만약 그것이 전부라면 공감적 의식은 불가능할 것이다.” “공감은 정서적이고 인지적인 체험 양자 모두이다.”
우리가 측은지심의 복합적 성격을 강조하는 것은 우리의 도덕 정감론이 주장하는 측은지심의 주요성을 축소시키거나 약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 스스로에게 우리의 논지가 지니는 제한적 성격을 상기시키기 위함이다. 우리가 주장하는 도덕 정감론은 도덕 활동 내지 현상의 모든 측면을 단지 측은지심(sympathy) 하나로 설명하려는 대다수 서구 도덕 정감론자들보다 덜 야심적이고 포괄적이다. 측은지심이 아무리 도덕의 기초라 해도 측은지심 하나로 도덕 현상에 개입되는 다양한 측면들을 다 설명하려는 것은 무리다. 측은지심 그 자체는 어디까지나 감정적 현상이고, 우리의 도덕적 활동에는 인지적 요소와 의지적 요소, 그리고 무의식적 요소들이 개입된다는 사실은 확실하며, 이런 요소들은 결코 측은지심에서 도출될 수 있거나 그것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본 논문은 본다.
이 문제를 약간 다른 시각에서 표현하면, 우리의 도덕 정감론과 칸트적 유형의 합리주의적 도덕 이론을 상호 배타적이라고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도덕이 구체적 결과를 산출하려면 우리의 머리뿐 아니라 우리의 가슴도 움직일 필요가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측은지심이 보다 즉각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고 직접적인 동기 부여의 힘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그리고 이러한 기초 위에 건립된 도덕 정감론이야말로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지닌 세계 사람들에게 더 넓고 강하고 보편적인 호소력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이 본 논문이 전제하고 지향하는 점이다.
마지막 다섯 번째로 측은지심에 관해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는 점이 또 하나 있다. 사랑이나 측은지심과 같이 긍정적인 감정이라 하더라도 항상 무조건적으로 선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과도하게 되면 그 감정들이 향하고 있는 사람에게 해가 될 수 있고, 또 과도한 측은지심은 그것을 느끼는 사람에게도 해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증오나 분노와 같은 부정적인 느낌들도 언제나 파괴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이러한 감정들도 때로는 잘못된 사회를 변혁하고 정의를 세우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하는 긍정적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거룩한 분노(진노)’같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은 도덕이 우리의 가슴과 머리를 모두 필요로 한다는 것을 입증한다. 합리적인 판단과 사려 깊은 지혜, ‘신중함’이라는 덕목에 의해 적절히 절제되지 않으면, 아무리 긍정적인 감정이라 하더라도 정반대의 효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긍정적인 감정과 부정적인 감정을 구분하는 일 자체가 부당하다거나 불필요하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긍정적인 감정도 종종 긍정적 결과를 산출하지 않는 경우가 있으며, 그 반대도 사실이라는 것이다. 다양한 감정들 사이의 명료한 구분, 그리고 도덕적 활동에 개입되는 감정적 요소, 인지적/합리적 요소, 의지적 요소 등에 대한 명료한 구분과 논의는 여전히 유효하고 필요하다.
앞으로 우리가 검토할 도덕 정감론은 주로 유교의 도덕전통을 다룰 것이지만, 서구 사상에서 제시되어 온 도덕 정감론 - 가령 데이비드 흄, 애덤 스미스, 그리고 특히 J. J. 루소 등이 제시한 이론들 – 도 비교적인 안목에서 검토할 것이다. 유교의 윤리사상에 대해서는 나는 주로 공자, 맹자, 정약용(다산, 1782-1836)의 윤리사상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먼저 서구에서 제시된 도덕 정감론을 간략히 살펴본 다음 유교 윤리사상을 논한다.
첫댓글 사소할 수도 있습니다만 위에 번역 관련해서 "유제동"은 "류제동"으로 바로잡습니다.ㅎㅎ
선생님의 분투하신 글 감사히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