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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측은지심은 도덕의 기초: 맹자
맹자(孟子, c370-c290 BC)는 공자의 가르침을 따르는 가장 뛰어난 계승자로서 공자 이후 약 1세기 뒤에 활약하였으며 공자의 ‘인(仁)’ 개념을 인간의 마음 그 자체의 본성과 동일시함으로써 그 개념을 더욱 내면화하였다. ‘인’은 우리의 본성에 뿌리박고 있다는 점에서 ‘사람의 편안한 집(人之安宅)’이라고 부르며, 간단히 우리의 인간됨 그 자체(仁也 人也)라고 한다. ‘인’ 없이는 어떤 사람도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고까지 맹자는 말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맹자에게 인간이란 실로 ‘측은지심을 지닌 인간(homo sympathicus)’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정당하다. ‘인’은 그 최초의 징표 내지 싹에 드러나듯이 다른 사람의 괴로움에 연민을 느끼는 마음으로서, 인간의 본성적 성향이다. 이는 마치 물이 아래로 흐르는 본성이 있는 것과 같다고 한다. 맹자는 말하기를, “인(仁)은 사람의 마음이고, 의(義)는 사람의 길이다. 길을 소홀히 하고 따르지 않고, 이 마음을 잃고 어떻게 다시 찾을지 모르는 일은 얼마나 통탄스러운가?”
유교 도덕사상에 대한 맹자의 주된 기여는 유교의 역사에서, 그리고 실로 중국과 동아시아 사상 전반에 걸쳐서 인간 본성의 문제를 전면으로 부각시켰다는 데 있다. 맹자는 인간 본성의 본질적인 선함에 대한 자신의 교설을 강화하기 위해 몇 가지 실증적 성격의 심리학적 통찰을 제시했다. 인간 본성이 본질적으로 선한지 악한지 아니면 중립적인지에 관한 문제는 맹자가 활약하였던 기원전 4세기에서 3세기 동안 중국 사상가들 사이에서 뜨겁게 논의된 주제로 등장했다. 맹자는 인간 본성이 본질적으로 선하다고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견해의 가장 탁월한 주창자였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다양한 입장들에 대해 자세히 논하지는 않겠지만, 여기서는 다만 인간의 본성은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거나 양자 모두가 가능하다는 고자(告子)의 주장과 이에 대한 맹자의 반박을 인용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고자가 말했다. “[인간의] 본성은 여울의 물과 같다. 우리가 동쪽으로 물길을 내면 물은 동쪽으로 흐르고, 서쪽으로 물길을 내면 물은 서쪽으로 흐른다. 인간의 본성 그 자체가 선이나 악으로 구별할 수 없는 것은 물 그 자체가 동쪽이나 서쪽으로 전혀 구별되지 않는 것과 같다.” 맹자는 반박하였다. “확실히 물이 동쪽이나 서쪽으로는 전혀 구별되지 않지만, 물에 위와 아래의 구별은 있지 않은가? 인간 본성의 선함은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과 같다. 아래로 흐르지 않는 물이 없듯이 선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다만 물에 충격을 가해서 위로 튀어 오르도록 하면, 물이 그대의 이마를 넘게 할 수도 있다. 또는 물을 밀쳐서 움직이면 물이 산 속에 있게 할 수도 있다. 이러한 것이 어떻게 물의 본성일 수 있겠는가? 물이 그렇게 되는 것은 힘(의 강요) 때문이다. 사람 역시 선하지 않은 짓을 행하게 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본성이 그렇게 하도록 강요를 받을 때이다.”
유교 전통 내에서 인간이 본성적으로 악하거나 이기적이라는 관점은 언제나 순자(荀子, 235-267)의 주장으로 이야기되어 왔다. 인간 본성에 관한 맹자의 주장 – 유교 전통에서 정통설로 인정되는 - 이 소개될 때면 순자의 관점이 반대 입장으로서 또는 맹자의 관점을 더욱 설득력 있게 돋보이도록 하는 장치에 가까운 차원에서 아울러 함께 언급되곤 할 정도다.
우선 맹자가 인간 본성의 선함을 지지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가장 잘 알려진 논증을 들어보자.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의 괴로움을 차마 보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 고대의 왕들은 이러한 측은지심이 있었다. 그들은 물론 측은지심의 통치를 했다. 측은지심으로 측은지심의 통치를 실천해서 온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손바닥 안에서 물건을 다루듯 쉬웠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남들의 고통을 차마 보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고 말하는 이유는,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를 발견한다고 가정할 때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불쌍하다는 마음이 든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마음은 그 아이의 부모와 잘 지내고 싶어서이기 때문이 아니고, 이웃과 친지의 칭찬을 바라서이기 때문도 아니며, (나쁜) 평판을 싫어해서이기 때문도 아니다. 이로써 판단해볼 때, 사람은 측은지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사양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이에 대해 몇 가지 점을 언급할만한 사항이 있다. 무엇보다도 우선 맹자는 사람의 마음이 지닌 천부적인 도덕적 본성을 말해주는 징표로서 네 가지 도덕의 싹 곧 초기의 단서(四端)를 열거한다. 즉. 불쌍히 여기는 마음(惻隱之心), 겸손하게 양보하는 마음(辭讓之心), 악을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羞惡之心),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是非之心)이다. 이러한 네 가지 마음은 유교에서 인(仁, 어질움), 의(義, 의로움), 예(禮, 예의), 지(智, 도덕적 지혜)의 네 가지 중추적인 덕(四德)의 기초가 된다. 이 네 가지 도덕의 싹과 네 가지 덕은 성인이나 보통사람이나 매한가지로 모든 사람에게 공통되는 인간의 본성을 이룬다. “선을 행할 수 있을 때 하지 않고 선하지 않은 짓을 저지를 때, 우리는 그들의 본성적 역량(材) 탓이라고 비난할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 본성은 본질적으로 선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개인 간의 도덕적 차이는 우리가 어떻게 도덕을 계발하고 육성하느냐에 달렸다. 이것은 나무나 식물의 기본적인 속성은 어디서나 동일하지만 그 성장은 다양한 자연 환경과 사람의 돌봄에 달린 것과 같다.
맹자의 중요한 통찰에 따르면, 우리 마음의 본성이 덕스러운 행동을 기뻐하는 성향이 없다면, 다시 말해서 우리가 애초에 본질적으로 도덕적 존재가 아니라면, 도덕성은 우리에게 강요되는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도덕은 “외부로부터 우리에게 주입되는” 것으로서 우리에게 억압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맹자는 따라서 우리 마음에 본래 네 가지 도덕의 싹이 있어서 인, 의, 예, 지의 덕스러운 삶을 따르는 본성적 성향이 있다는 점을 역설한다. 맹자가 이 네 가지 마음 각각에 대해 네 차례나(!) 반복해서, 그러한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다고 말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맹자는 우리에게 생물학적 욕구도 있어서 우리의 네 가지 덕스러운 마음이 요청하는 것을 종종 무시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맹자에게 도덕이란 기본적으로 우리의 본성과 충돌하지 않으며 우리의 본성에 폭력을 가하지 않고 오히려 본성을 완성한다는 점이다. 인간을 근본적으로 이기적이라고 보는 생물학적 관점의 주창자들과 달리, 맹자는 도덕성이 인간 본성의 자연스러운 발로이며 인간 본성을 완성시켜주는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또한 맹자는 그와 동시대의 또 다른 철학자인 고자가 인간 본성이 도덕적 차원에서 중립적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맹자는 이러한 관점을 날카롭게 반박한다.
고자(告子)라는 철학자는 말하였다. “인간의 본성은 버드나무와 같고 의로움은 컵이나 대접과 같다. 인간의 본성에 인과 의를 형성하는 것은 버드나무에서 컵과 대접을 만드는 것과 같다.” 맹자가 대답하였다. “그대는 버드나무의 본성을 건드리지 않은 채 컵과 대접을 만들 수 있는가? 그대는 버드나무에 폭력과 상처를 가해야만 컵과 대접을 만들 수 있다. 버드나무에 폭력과 상처를 가해야만 컵과 대접을 만들 수 있다면, 마찬가지로 그대는 인간성에 폭력을 가해야만 거기서 인과 의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 주목할 점은 맹자가 네 가지 도덕의 싹을 열거할 때 ‘다른 사람의 괴로움을 차마 보지 못하는(不忍人之心)’ 측은지심을 제일 먼저 든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측은지심이 우리의 도덕적 본성에서 최초의 주요한 단서라는 점을 시사한다. 측은지심은 유교의 도덕 전통에서 주된 덕목으로 간주되는 인(仁)의 싹이자 단서다. 측은지심은 다른 사람에 대하여 ‘날카롭고 잔혹한 칼 같은(忍)’ 마음을 품을 수 없는 마음, 따라서 다른 사람의 괴로움을 ‘차마 두고 볼 수’ 없는 마음을 뜻한다. 신유학(新儒學) 철학자 정이(程頤, 1033-1107)는 말하기를, “이 측은지심은 우리의 배를 채우고 있다”고까지 말했다.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에 관한 이야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듯이, 측은지심은 순수하고 즉각적이며, 어떤 배후의 동기에서 야기되는 것이 아니라고 맹자는 강조한다. 맹자에게 측은지심은 인간의 도덕적 본성을 의문의 여지없이 알려주는 징표이며, 도덕이 우리에게 ‘자연적’이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측은지심은 우리로 하여금 행동을 취하게 만드는 직접적인 동기의 힘을 가지고 있다. 다른 어떤 요인들이 우리가 행동하는 것을 방해할 수도 있지만, 측은지심은 그 자체로써 우리를 행동하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측은지심은 물론 후에 그 아이를 어떻게 도울지에 대해 생각해보는 실천이성으로 이어져서 보강될 수도 있다. 다만 측은지심 그 자체는 우리가 그 아이를 위하여 행동을 취하도록 동기를 부여할 어떠한 외부적 이유가 따로 필요하지 않다. 도덕에서 이러한 인간론적 기반이 없다면, 우리는 도덕성을 신의 처벌이나 보상, 사회적 압력, 또는 업에 의한 인과응보와 같은 어떤 외적 권위로부터 우리에게 강요되는 것으로 보거나, 혹은 우리로 하여금 무고한 고통의 희생자들을 위해 행동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그 밖의 어떤 실천적 이유에 호소하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게 된다.
위의 단락에 대하여 주목할 가치가 있는 세 번째 점은 맹자가 나머지 세 가지 마음도 우리의 본성적 도덕성을 말해주는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맹자는 측은지심과 다른 세 마음 사이의 관계를 논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맹자가 이 세 마음을 측은지심으로 환원하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맹자는 네 가지 덕을 우리 몸의 팔과 다리에 견준다. 다만 맹자는 정감적인 현상인 측은지심과 옳고 그름을 가리는 시비지심(是非之心)을 뚜렷이 구분한다. 시비지심은 오히려 지성적 성격의 활동을 하는 마음으로서, ‘우리의 선천적인 도덕 감각’의 ‘은밀한 평가 활동’이다. 다른 두 마음, 곧 수오지심과 사양지심 역시 측은지심과 같은 느낌이기보다는 우리의 ‘도덕 감각’에 속한다. 이 두 도덕 감각, 특히 사양지심은. 측은지심에 기반을 둔다. 왜냐하면 측은지심 없이 노약자에 대하여 사양지심을 지닐 수 있을지 의문스럽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옳고 그름을 가리고 도덕적 승인과 불승인을 표현하는 시비지심은 수오지심과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의 행위가 측은지심을 드러내는지에 의해 상당히 영향을 받는다. 이러한 관찰에서 우리는 맹자에게 측은지심이 거의 모든 도덕적 활동에서 주도적이고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고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맹자가 제례에 쓰기 위해 도살장에 끌려가면서 두려워하는 소를 우연히 보게 된 어떤 왕에 대해 말하는 또 하나의 유명한 이야기도 주목할 가치가 충분하다. 그 소를 차마 두고 보지 못한 왕은 신하에게 명하여 소를 놓아주고 양으로 대체하라고 한다. 그러면서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그 소가 두려워하는 모습을 차마 두고 볼 수가 없다. 그 소는 마치 처형장에 끌려가는 무고한 사람 같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측은지심의 지향적 성격을 확인할 수 있다. 애초에 왕이 무고하다는 선행 관념이 없었다면 –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의 경우 혹은 처형장에 끌려가는 무고한 사람의 경우에서처럼 – 왕이 연민하는 마음을 내지 못하였으리라는 점은 명백하다. 측은지심은 정신적 진공 상태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측은지심이라는 감정의 힘이 아무리 순수하고 무조건적이라 해도, 측은지심은 언제나 고통을 당하고 있는 특정한 ‘대상’에 지향되어 있다는 점에 우리는 유의해야 한다. 맹자는 측은지심의 인지적 측면에 대하여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측은지심이 정신적인 진공 상태에서 발생하지 않고 언제나 그 마음이 지향되어 있는 대상(사람 혹은 동물)에 대한 모종의 정보 곧 인지적 판단이 선행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 이야기에서 주목되는 또 하나의 점은 측은지심은 쉽게 인간의 범주를 초월해서 동물에게까지도 쉽게 확장된다는 사실이다. 이는 오늘날 결코 사소한 사실이 아니다. 사실 측은지심은 후대 신자들에게 우주적 차원을 지닌다. 우리는 15세기의 유명한 철학자 왕양명에 관한 이야기에서 이러한 차원을 볼 수 있다. 그는 심지어 깨진 기와 조각에 대해서도 연민을 느꼈다고 한다.
더욱 중요한 점을 이야기하자면, 위의 소에 관한 이야기에서 맹자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맹자는 왕에게 무고한 존재의 괴로움을 ‘차마 두고 보지 못하는’ 부드러운 마음을 간직하라고 권한 다음, 아래와 같은 말로 왕을 훈계했다:
그대 자신의 가족 중에 어른들을 나이에 걸맞게 존중하면서 대하십시오. 그러면 다른 가족의 어른들도 마찬가지로 대우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대 자신의 가족 중에 어린이를 그 어림에 알맞게 친절하게 대하십시오. 그러면 다른 가족의 어린이들도 마찬가지로 대우를 받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십시오. 그러면, 나라가 그대의 손바닥 안에서 움직이게 될 것입니다. … 선인들이 다른 이들보다 훨씬 탁월하게 된 방법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다만 자신들이 행하는 것을 어떻게 실천할지를 잘 알아서 다른 이들을 감화한 것뿐입니다. 지금 그대의 친절은 동물들에게 이를 정도로 충분합니다. 하지만 그 혜택이 백성들에게는 연장되지 않고 있는데, 어째서 그러합니까? 이건 예외입니까?
이러한 이야기는 맹자가 유추적인 ‘서(恕)’ 개념에 기초해서 우리의 측은지심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고 얼마나 멀리 가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곧 측은지심이 심지어 정치적 차원까지 가야 한다는 생각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우리는 공자에서뿐 아니라 맹자에서도 개인윤리와 사회윤리 사이의 날카로운 구별은 없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들에게 사회윤리는 단순히 개인윤리의 자연스러운 연장에 지나지 않았다.
맹자에게 도덕성의 자연스러운 성격이 중요하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맹자는 말한다. “우리는 본래 우리 안에 도덕적 덕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그저 그것에 관해 생각하고 있지 않을 뿐이다.” 맹자에서 내가 가장 중요한 단락이라고 생각하는 단락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 단락은 그의 도덕 사상의 요점을 아름답게 간추리고 있다: “자신의 마음을 다하면 자신의 본성을 알게 되고, 자신의 본성을 알게 되면 하늘의 뜻을 알게 된다. 자기 마음을 보전하고 자기 본성을 함양하는 것이 바로 하늘을 섬기는 길이다.”
내가 맹자의 ‘도덕적 신앙’(moral faith)이라고 부르는 것은 기본적으로 루소와 칸트의 정신과 일치한다. 그들 모두에게 도덕은 하늘/신에게 이르는 주요한 길이다. 루소는 자신의 누벨 엘롸즈』 (La Nouvelle Héloise)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참된 예배는 바로 우리의 올바른 행위다.” 루소는 양심을 하늘의 목소리(voix celeste) 또는 신의 목소리로 보았고, 칸트는 루소의 이러한 관념을 받아들여서 양심을 이성의 목소리(voix de la raison)로 간주했다. 이는 맹자 사상과 매우 가깝다. 맹자는 우리 안에 내재하는 도덕적 성향을 ‘양능(良能)’이라고 부르며, 우리에 내재하는 도덕적 앎을 ‘양지(良知)’, 우리에 내재하는 도덕적 마음을 ‘양심(良心)’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이 세 용어를 각각 우리의 ‘자연적인 도덕적 능력’, ‘자연적인 도덕적 앎’, 그리고 ‘자연적인 도덕적 마음’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다른 곳에서 맹자는 “사람들이 배움을 통하여 획득하지 않고도 가지고 있는 능력이 양능(良能)이고,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고도 가지고 있는 앎이 양지(良知)다.”라고 뚜렷하게 설명한다. 맹자의 세 가지 천부적 능력 가운데에서 왕양명(王陽明)은 나중에 특히 ‘양지’를 자신의 도덕 철학의 토대로 삼았다. 신유학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 주희(朱熹, 1130-1200)에 따르면, ‘양(良)’은 ‘본래의 선함’, 곧 하늘이 부여한 우리의 도덕적 본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자신의 마음을 다할 때 자신의 본성을 알게 되고, 자신의 본성을 알게 될 때 하늘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자신의 마음을 보전하고 자신의 본성을 함양하는 것이 하늘을 섬기는 길이다.” 맹자에게 인간의 마음과 본성과 하늘(天)은 불가분적인 삼자관계(triad)를 형성하며, 나는 이것이 맹자 도덕사상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정신에서 중용(中庸)의 서두는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하늘의 명한 것이 [우리의] ‘본성(性)’이고, 본성에 따르는 것이 도(道)이다. 도를 닦는 것이 가르침(敎)이다. 도는 잠시도 떠날 수 없다. 떠날 수 있는 것은 도가 아니다.
맹자에게 도덕성이 하늘에 이르는 확실한 길이라면, 그에게는 하늘 자체가 도덕적 성격을 지니고 있음에 틀림없다. 다만 맹자는 이 점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을 뿐이다. 맹자에게 ‘도덕적 신앙’은 인간의 마음에서 인간의 본성과 하늘로 이어지는 도덕적이고 존재론적인 연속성에 뚜렷이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맹자에게 도덕성은 그저 인간의 일이 아니다. 그에게 도덕성은 인간론적일뿐 아니라 우주적 토대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심지어 맹자에게 도덕성이 신비적 차원을 가지고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곧 우리의 도덕적 마음과 본성과 하늘이라는 세 요소의 완벽한 일치를 추구하는 ‘도덕적 신비주의’다.
이 지점에서 유교의 도덕사상에 대한 우리의 관점, 우리의 해석에 대해 예비적인 결론이 되는 것을 언급하는 것이 적절할 듯하다. 폭넓게 말해서, 유교의 도덕사상에 대한 우리의 관점은 ‘유신론적’(theistic)이라고 할 수 있다.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의 초자연적인 유신론이라는 의미로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서구 사상에서 오랜 전통이 있는 자연법(natural law) 사상과 부합한다는 뜻에서 유교의 도덕사상이 ‘유신론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연법 개념에 따르면 도덕은 – 도덕의 핵심 덕목, 가치, 그리고 그 규범과 원칙 등 – 세계의 구조와 성격 그 자체에, 곧 외부적인 자연(external nature) 세계에 새겨져 있다. 도덕성은 또 하늘 혹은 신에 의해서 우리 인간에게 특별하게 부여된 것으로서, 우리 안에 내재하는 도덕적 본성(moral nature)으로 새겨져 있다. 도덕성은 따라서 우리에게 ‘자연적’이다. 도덕성이 스토아철학에서와 같이 우리의 합리적 기능인 이성에 기초한다는 의미로 ‘자연적’이든, 유교 전통에서 우리에게 자연적으로 주어진 도덕적 마음의 성품 내지 성향이라는 뜻에서 ‘자연적’이든, 도덕성은 인간에게 ‘자연적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차원을 나는 유교 도덕성의 ‘우주적 차원’이라고 일컫는다. 도덕성에 대한 우리의 신뢰와 확언은 곧 도덕의 우주적 성격에 대한 믿음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유교에서 우리가 세계와 인간에 대하여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진리이다. 나는 이것이 유교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유교 도덕 사상에서 그 우주적 성격과 믿음을 도외시 하고 신유학의 도덕 형이상학과 인간론을 무시하는 해석, 그러면서 이런 성격을 공자의 가르침과 날카롭게 구별하는 일부 현대 학자들의 ‘세속주의적이고’ 반형이상학적인 유교 이해에 대해 동의할 수 없다. 나는 더 나아가서 – 유교적 방식의 자연법이든 고전 스토아학파와 그리스도교 방식의 자연법이든 - 도덕이 자연법이라는 우주적 차원과 토대가 없다면 사회의 모든 실정법과 도덕적 가치는 자의적이고 억압적인 성격을 면할 수 없다고 본다.
유교 전통에서 도덕성의 우주적 차원은 장재(張載),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형제, 그리고 주희(朱熹)와 같은 신 유학자들에 의해 더욱 상론화 되었고, 왕양명의 형이상학과 마음 개념, 특히 양지 개념에서 절정을 이룬다. 아이반호(Ivanhoe)는 이러한 차원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맹자는 전통에 기반을 두는 공자의 도덕성에서 마음의 즉각적인 반응에 기반을 두는 도덕성으로 전환함으로써 도덕성의 범위를 확장했다. 우리는 왕양명의 도덕성 관념이 지니는 범위를 검토할 때 그가 이러한 과정을 몇 단계 더 취했음을 본다. 왕양명은 우리의 연민하는 느낌이 식물이나 기와나 돌에까지도 미치며, 인(仁)이 우주의 모든 구석에까지 미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우리가 가지는 인(仁)의 감정의 기반에 대한 그의 주장과 일관된다. 그 감정은 우주의 기저에 깔린 ‘하나 됨’을 반영한다. 다만 이러한 관념이 맹자에게는 전혀 낯설다.
아이반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왕양명은 자신의 도덕성의 기반을 우주의 기저에 있는 하나 됨에 두었다. 그에 따르면, 어떠한 불의를 범하든 그 불의는 그 자신에게 가해지는 불의이고, 어떠한 무질서든 그 자신이 겪는 질병이고, 어떠한 상처든 그 자신의 몸이 고통을 겪게 된다. 이러한 주장은 개인 구원과 세상 구원의 과제를 매력적인 방식으로 통합한다. 이러한 입장은 분명히 신유학에서 언제나 느낄 수 있는 영향으로서, 보살의 역할에 관한 대승불교의 관념에서 파생되었을 것이다.
나는 우주적인 하나 됨이라는 관념이 “맹자에게는 전혀 낯설다”는 아리반호의 해석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그가 신유학의 형이상학적 성격, 특히 왕양명의 형이상학을 대승불교의 영향으로 귀속시키는 점은 확실히 옳다고 생각한다.
맹자는 도덕적 완벽성과 하늘과 신비적 합일로 가는 길은 여러 단계로 이루어진 길고도 고된 과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길은 선함을 바라는(欲) 단계에서 시작하고 실제로 선함을 얻는 확신(信)의 단계, 선함이 우리를 채우는 아름다움(美)의 단계, 선함이 우리를 채울 뿐만 아니라 세상으로 확산되는 위대함(大)의 단계, 이러한 위대함이 자연스러운 감화력을 지니는 성인(聖)의 단계, 그리고 마지막으로 선함이 우리에게 헤아릴 수 없고 불가해한 마지막 단계인 신적(神) 단계에 이른다.
인간 본성이 선하다는 교설에 기반을 둔 유교적 휴머니즘의 정신이 더욱 명확해지는 것은 서구 그리스도교 도덕 전통과 대조될 때이다. 서구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도덕이 일반적으로 초월적 하느님의 의지를 따르는 것이라고 간주되어 왔으며, 플라톤적인 이원론과 일원론적 형이상학의 영향을 받아 금욕주의와 오랫동안 연계되어 왔다. 이에 더하여 또한 다른 두 흐름이 서구의 도덕 전통에 깊이 영향을 주었다. 하나는 그리스도교의 원죄(冤罪) 사상에 기인하는 인간성에 대한 강한 비관적, 비판적 정서다. 다른 하나는 서구문화의 합리주의적인 정신으로서, 이러한 합리주의 정신에서 도덕성은 생물학적인 본능을 억제하는 우리의 합리적 자기통제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이러한 입장은 다시 니체나 프로이드와 같은 현대 사상가들에 의한 극도의 반발을 초래하기도 했다.
맹자가 우리의 도덕적 본성과 육체적 욕망 사이의 갈등을 모르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궁극적으로 하늘이 인간에게만 부여한 도덕적 본성이 우월하다는 입장에서 여전히 낙관적이었다. 두 욕망/욕구 사이의 갈등은 대등한 두 힘 사이의 근본적 대립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존재의 주요한 부분과 덜 주요한 부분 사이의 대립, 맹자 식으로 표현해서 대체(大體)와 소체(小體), 곧 우리의 고귀한 부분인 마음이라는 기관(心之官) 내지 ‘마음의 의지(心志)’와 우리의 낮은 부분인 눈과 귀라는 기관 사이의 대립으로 간주된다. 맹자에 따르면, 소인(小人)이 되느냐 대인(大人)이 되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작은 부분이 큰 부분에 해가 되느냐 아니면 도움이 되느냐에 달려 있다. 다음과 같은 맹자의 고백적 언어는 그 자신의 도덕적 투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보여 준다:
삶도 내가 바라는 것이고 의로움도 내가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둘 다 가질 수 없고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삶을 버리고 의로움을 택하겠다. 나는 삶도 바라지만 삶보다 더 바람직한 것을 갖고 있기에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삶을 추구하지는 않겠다. 또한 죽음은 내가 싫어하는 것이지만 내게는 죽음보다 더 싫어하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나는 때때로 괴로움을 피하려 하지 않겠다. … 이러한 이유로 나는 삶을 보존하기 위한 수단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며, 괴로움을 피하기 위한 방편도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 이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만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다 이 마음을 가지고 있다. 다만 지혜로운 사람은 이 마음을 잃지 않는다.
맹자는 적절하게 함양하고 계발하면 우리의 도덕적 성향이 우리의 육체적 욕망을 이길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레이엄(Graham)의 표현대로 “선함이 자연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도덕적 성향을 갖고 있어서 이 성향을 충족시키면 다른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즐겁게 되며, 우리의 욕구들이 서로 충돌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이 성향은 우리의 욕구들과 충돌한다. 인간 본성이 선하다는 것을 더욱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맹자는 더 큰 어떤 주장, 곧 다른 성향보다 도덕적 성향을 선호하는 것이 자연적이라는 주장을 암시한다.
맹자가 자신의 도덕적 신앙에 기초하여 주장하는 도덕적 낙관주의는 그 당시의 정치적 문제들에 대한 그의 도덕적 접근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맹자(孟子)라는 책이 그와 양나라 왕 사이의 대화로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이 대화에서 맹자는 왕이 인(仁)과 의(義)보다 이로움(利)의 추구를 우선시한다고 꾸짖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왕께서 ‘내 왕국을 이롭게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라고 말씀하시면, 고위 관료들은 ‘내 가족을 이롭게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라고 말할 것이고, 하위 관료들과 일반 백성들도 ‘우리 자신을 이롭게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라고 말할 것입니다. 높은 사람들과 낮은 사람들이 모두 이로움을 추구하려고 할 때 왕국은 위험에 빠질 것입니다.” 맹자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하가 자기 이익 때문에 왕을 섬기고 아들이 자기 이익 때문에 아버지를 섬기고 동생이 자기 이익 때문에 형을 섬기면, 이러한 섬김은 마침내 인과 의를 포기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 이익을 이유로 서로 관계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망하지 않는 자는 여태껏 없었습니다.”
덕치(德治)와 인정(仁政)에 대한 맹자의 꾸준한 추구는 그가 살았던 전국시대(戰國時代)가 격동기였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그리고 그가 마주해야 했던 거친 마음의 현실주의적인 통치자들을 생각해 볼 때 실로 인상적이다. 물론 맹자는 도덕성만으로 훌륭한 통치가 가능하다고 볼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았다. 그는 백성들이 도덕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물질적인 생계가 핵심적인 조건임을 잘 알고 있었다:
백성들의 길은 이러하다. 그들이 안정된 생계(恒産)를 꾸리고 있다면, 그들은 안정된 마음(恒心)이 있을 것이다. 그들이 안정된 생계를 꾸리고 있지 못하면, 그들은 안정된 마음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안정된 마음이 없으면, 그들은 자포자기 속에서 도덕적으로 왜곡되고 타락하여 무절제한 길을 가는 데 하지 못할 짓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백성들이 범죄에 연루되었을 때 그들을 쫓아가서 벌하는 것은 백성들을 함정에 빠트려 잡는 것이다. 백성들을 함정에 빠트려 잡는 것과 같은 일이 어찌 어진 사람의 통치 하에서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정치에 대한 유교의 전통적인 접근법에 대해 종종 도덕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난이 근거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맹자가 정치에서 도덕적 원칙의 우선성을 지치지 않고 고집하면서 당시의 거친 마음을 지닌 통치자들을 대담하게 맞섰다는 사실은 여전히 인상적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깊이 뿌리박힌 ‘도덕적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떠나 설명될 수 없다. 그의 이러한 신앙은 도덕성이 하늘이 우리에게 부여한 우리의 본성을 완성하며 도덕성은 그 자체가 보상이라는 그의 확고한 믿음을 반영하고 있다.
맹자는 우리가 삶에서 종종 경험하는 도덕과 행복 사이의 명백한 괴뢰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앎도 정치에 대한 도덕적 접근이 정당하다는 그의 견고한 확신을 흔들지는 못했다. 맹자에게 세계의 도덕적 질서는 바꿀 수 없는 하늘의 도(天道)이다. 맹자는 어떤 알 수 없는 이유 때문에 하늘의 도덕적 질서가 때로는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는 듯 보이기도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공자와 마찬가지로 이에 대한 맹자의 대응은 평온하고 초연하게 천명(天命, 하늘의 명령 또는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정치적 문제에 대한 자신의 도덕적 접근이 효과가 없을 경우에 무엇을 하겠는지 하는 물음에 대해 맹자는 우리가 먼저 우리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면서 그 마음에 아직 어떤 결함이 있는지 여부를 알아보아야 한다고 대답했다. 인간과 세계의 본성 그 자체에 뿌리박은 도덕은 맹자에게 거의 자연법과 같았다. 한 가지 드문 경우에 맹자는 세계의 도덕적 질서에 대해 ‘법(法)’이라는 단어까지 사용하면서 말하기를, “군자는 법을 행한 후 하늘의 명령을 기다린다.”고 했다. 줄리앙(Julien)이 지적하듯이 이러한 입장에서 우리는 ‘노모스(nomos)’라는 스토아적 개념, 즉 자연법, 그리고 이성을 떠올리게 된다.
서구에서 신정론(神正論)의 가장 일반적 주장들 가운데 하나는 도덕적이든 자연적이든 악이 궁극적으로는 더 큰 선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맹자에서 이러한 사고방식에 가장 가깝게 다가가는 것은 다음과 같은 언급일 것이다: “하늘이 어떤 사람에게 중요한 일을 맡기려 할 때 하늘은 먼저 반드시 그의 근육과 뼈를 수고롭게 하며, 그의 몸과 피부가 배고픔에 노출되게 하면서 그를 극도의 가난에 처하게 해서 그의 마음의 의지를 교란시킨다. 그리하여 하늘은 그가 착수한 것들을 혼돈에 빠지게 함으로써 그의 마음을 일깨우면서 그의 본성이 인내하도록 하며 그의 약한 점들을 강화시킨다.”
그러나 의로운 사람의 부당한 고통이 그를 위대한 사람이 되도록 키우려고 하늘이 뜻한 시련이라는 점을 이러한 논증보다 더 근본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도덕성이 그 자체로 좋은 것이며 도덕성은 그 자체로 보상이 된다는 맹자의 확고한 신념이다. 자신의 평정을 유지하고 역경에 의하여 흔들리지 않는 것이 진정으로 덕 있는 사람의 징표다. 덕 있는 사람은 견고한 인내심과 함께 천도를 따르는 데 기쁨을 느낀다. 궁극적으로 정의가 승리한다(事必歸正)는 확고한 믿음과 결합된 이러한 태도는 중국문화나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 사회 일반에서 ‘가난 속에서도 평안하며 도를 즐긴다(安貧樂道)’라는 태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러한 삶이 군자의 이상적인 삶이다.
맹자의 도덕적 신앙은 도덕의 힘을 거의 마법적이고 신비적인 차원에서 바라보는 데까지 이른다. 공자가 군자(君子)를 바람에 비유하고 소인(小人)을 풀에 비유하는 것이 암시하듯이, 맹자는 도덕의 힘이 사회에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물처럼 흐른다고 믿었다. “군자의 덕이 바람이라면 소인의 덕은 풀이다. 바람이 풀 위에 불면 풀은 누울 수밖에 없다.”는 생각은 한 걸음 더 발전해서 맹자에서는 도덕이 ‘자연적’이고 그 자체의 생명력을 갖고 있는 기운(氣), 말하자면 일종의 ‘에너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 온 세상에 퍼질 정도로 역동적이라는 생각도 발견된다. 이 기운은 우주적 에너지로서 단지 인간뿐 아니라 모든 존재에 스며든다. 기(氣)를 중심으로 하는 중국의 자연철학에 따르면 만물은 도덕적 힘이 방출하는 막대한 에너지를 나누어 받는다. 맹자는 이러한 ‘홍수와 같은 기운’으로서 ‘호연지기(浩然之氣)’의 ‘함양’을 직접 체험했다고 말한다. 자신의 체험에 대해 맹자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나는 나의 호연지기를 잘 키운다. … 호연지기는 지극히 방대하고 지극히 확고한 기운이다. 그대가 올바름으로 호연지기를 키우고 방해하지 않는다면 호연지기는 하늘과 땅 사이의 공간을 다 채운다. 호연지기는 의로운 자를 도(道)와 합치시키는 기(氣)이다. 의로운 자들이 없으면 호연지기는 굶어죽는다. 호연지기는 올바른 행위의 축적에 의해서 생성된다. 가끔씩 올바른 행위를 해서는 호연지기를 잡을 수 없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정이(程頤)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본성과 기의 함양에 관한 맹자의 두 이론은 이전의 성인(공자)이 언급했던 바가 아니다.”
마지막으로, 맹자 정치사상의 다른 두 중요한 측면이 오늘의 시각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하나는 정치권력이 도덕적 정당성을 지녀야 한다는 그의 주장이며, 다른 하나는 이러한 주장과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서, 국민이 폭력적인 통치자에 대항하여 봉기를 일으켜서 그 통치자를 폐할 권리가 있다는 사상이다. 맹자가 국민을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民本)로서 통치자보다 더 중요한 요소라고 간주했다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리하여 맹자는 국민이 전제적인 통치자에 대항하여 봉기함으로써 그 통치자를 폐할 권리가 있음을 대담하게 긍정했다. 레게(Legge)는 오래 전에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국민이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고 군주는 가장 가볍다. 이것은 확실히 대담하고 울림이 있는 확언이다. 맹자는 이 논리를 따라 군주가 해로운 통치를 하고 있다면 폐위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군주의 존재가 보편적 선을 방해하도록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경우에 그 군주를 죽이는 것은 살인이 아니다. … 통치자와 국민의 관계에서 기반이 되는 것에 관해 맹자는 매우 뚜렷하게 신(하늘)의 의지를 언급한다. … 그러나 다음과 같은 의문이 떠오른다. 이러한 하늘의 의지가 어떻게 알려질 수 있는가? 맹자는 그 답을 구하고자 노력했다. 맹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늘이 왕좌를 준다. 그러나 왕좌에 앉는 것은 구체적인 명령과 함께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늘은 말하지 않고 다만 사람의 인격적 품행과 사건들의 처리를 통해서 하늘의 의지를 보여준다.” 이 전체 문제의 결론은 “하늘은 백성들이 보는 것에 따라 본다. 하늘은 백성들이 듣는 것에 따라 듣는다.”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맹자의 가르침이 지니는 이러한 진보적이고 심지어 ‘과격한’ 측면이 근대의 대의민주주의 사상과 닮은 어떤 것으로라도 나아간 적이 있었다는 증거를 발견하지 못한다. 결론적으로 국민의 행복은 전통적인 유교의 도덕체계와 정치체계에서는 통치자의 선의에 불안정하게 의존하였다.
맹자의 정치윤리에 대한 우리의 논의를 현대적 시각에서 비판적인 언급과 함께 간략하게 결론 짓는다면, 맹자는 자신의 도덕적 평등주의에도 불구하고 그가 보편적 인권개념과 같은 어떤 것을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보편적인 인권개념은 정치와 법에서 근대적 평등주의 의 기반이 된다. 그러나 맹자에서 발견되는 중요한 한 문장은 보편적 인권은 아니라 해도 인간의 보편적 존엄성이라는 아이디어로는 쉽게 이어질 수 있다. “고귀함(nobility)은 사람들의 마음에 공통적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 안에 어떤 고귀한 것을 가지고 있다. 다만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따름이다.” 맹자는 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심지어 굶어 죽어가는 거지도 음식을 발로 차서 주면 그 음식을 마다할 것이다.” 흥미롭게도 주희는 이 부분이 ‘예의를 무시하는 행위를 혐오하고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羞惡之心)이며, 인간의 마음을 드러낸다고 해석하면서 말하기를, “그는 그 음식을 받기보다는 차라리 굶어죽을 것이다.”고 했다.
7. 측은지심은 도덕의 기초: 다산
본 강좌를 다산(茶山, 丁若鏞, 1762-1836, ‘茶山’은 ‘정약용’의 호이다.)의 도덕철학에 대한 간략한 소개로 마무리하는 것이 좋겠다. 다산은 한국에서 가장 탁월한 유교 철학자들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근세로 넘어가는 전환기의 대표적 인물로서, 그의 사상에서 우리는 전통적인 유교의 교설을 벗어나는 몇 가지 중요한 통찰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 통찰들은 몇 가지 근대적인 아이디어들을 예견하고 있는데, 특히 인간을 자유로운 도덕적 주체로서 보는 점이 가장 인상적이다.
다산은 한국 유교 철학사에서 인간의 본성을 기호(嗜好)로 보는 이론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다산에 따르면 인간은 음식, 섹스, 거주, 그리고 그 밖의 자연적 본능에 따른 육체적인 기호와 이기적인 욕망에서 동물들과 별로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인간은 하늘로부터 또 하나의 본성을 특별히 부여받았다는 점에서 동물들과 다르다. 다산은 이 도덕적 본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본성이라고 불리는 것은 그 본래적인 의미에 기초하면 바로 우리 마음의 기호이다. … 태아가 형성될 때 하늘은 그 태아에 비어 있고 영험하고 형태가 없는 바탕(虛靈無形之體)을 부여한다. 이 바탕이 무엇인지를 말하자면, 이 바탕은 선을 기뻐하고 악을 미워하며, 덕을 즐기고 수치를 부끄러워한다. 이 바탕을 본성이라 한다.
이렇게 하늘에서 부여받은 우리 마음의 ‘허령무형한체’(虛靈無形之體)가 맹자가 언급하는 사단(四端), 곧 도덕의 기초로서 네 가지 어린 싹과 같은 도덕적 기호를 갖고 있다는 것이 위의 인용문이 뚜렷하게 말하는 바이다. 다산은 우리의 본성이 도덕적 기호의 차원에서 본질적으로 선하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상술한다.
모든 사람의 본성은 변함없이 선을 기뻐하고 악을 부끄러워한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선한 행위를 하면 그 사람은 행복으로 가득하고, 악한 행위를 하면 우울함으로 그 마음이 흐려진다. 선한 행위를 한 적이 없더라도 칭찬을 받으면 기뻐하고, 나쁜 행위를 한 적이 없더라도 비난을 받으면 화가 난다. 왜냐하면 그는 선한 행위가 만족스럽고 악한 행위는 수치스럽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선한 행위를 보면 그 행위를 우호적으로 바라보고, 악한 행위를 보면 그 행위를 혐오스럽게 여긴다. 왜냐하면 그는 선한 행위가 바람직하며 악한 행위는 가증스럽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즉각적으로 보이는 것들에 대한 기호이다.
다산은 이렇게 사람의 마음에서 하늘로부터 부여된 독특한 도덕적 경향을 다양한 용어로 기술한다. 예컨대 ‘허령무형한체’(虛靈無形之體), ‘공적’(空寂, 비어 있으면서 영적인)하고’, ‘영명(靈明, 영적이면서 밝은)한’, 그리고 ‘공적영지’(空寂靈知, 비어 있고 고요하면서 영적이고 앎이 있는)와 같은 용어들이 있다. 또는 간단히 ‘영지불매’(靈知不昧, 영적인 앎이 있으면서 결코 어두워지지 않는)라고 기술하기도 한다. 이러한 용어들은 인간 마음의 본성을 특징짓는 신유학의 철학적 용어들로 드물지 않게 쓰이지만, 기본적으로 대승불교에서 불성(佛性)을 가리키는 말에서 유래한다. 다산은 이러한 사실을 뚜렷이 알고 있었으며, 불성 개념이 신유학에서 인간의 본성을 ‘본래 순수한 본성(本然之性)’이라고 보는 관점이 해로운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비판적인 태도를 취한다. 다산에 의하면, 그러한 불교적 이해가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의 본성을 결정론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수양의 도덕적 노력을 소홀히 하도록 오도할 수 있다고 염려했다. 따라서 다산은 인간 본성이 형이상학적 실재 혹은 덕성 그 자체를 가리키기보다는 오히려 단지 소박하게 우리의 자연적인 도덕적 성향 – 실제로 맹자가 말하는 본성의 본래 의미 – 정도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해야 한다는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다.
다산은 전통적인 신유학의 인간론을 구성하는 두 개념 가운데 다른 한 개념, 곧 기질지성(氣質之性, 생리학적인 본성) 개념에 대해서는 더욱 더 비판적이었다. 왜냐하면 이 개념은 전적으로는 아니라 해도 사람들의 개별적인 도덕적 차이를 그 사람이 물려받은 생리적 본성의 청탁(淸濁, 순수함과 불순함) 등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다산은 이러한 입장이 명백히 도덕적 결정론을 수반하며, 이러한 결정론은 우리의 도덕적 노력을 무의미하게 한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우리는 다산의 저술에서 인간 마음의 본성을 형용하는 ‘공적(空寂, 비어 있으면서 영적인)’이라는 단어가 지니는 이중적 의미를 구별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 한 가지 의미는 맹자에서처럼 마음의 자연적인 도덕적 성향을 가리키고, 다른 하나는 하늘에 의해 부여된 것은 매한가지이지만 오히려 선악시비를 가리고 자신의 행동을 결정할 수 있는 중립적인 마음의 특수한 기능을 가리킨다. 내가 알고 있는 한, 다산 자신이 이러한 구별을 한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곧 보게 되듯이, 그의 도덕 철학에서 큰 중요성을 지니는 것은 후자, 곧 인간 마음의 특수한 기능이다. 이 기능은 자유로운 도덕적 주체로서 인간이 지니는 ‘초월적인’ 요소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기능은 맹자 그리고 나중에 왕양명에서 선악시비를 아는 우리의 선천적인 양지(良知), 그리고 그 앎에 따라 실천할 수 있는 우리의 자유에 상응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산이 도덕적 판단과 결정의 기능으로서 인간 마음의 영적인 밝음을 강조하는 배후에는 도덕적 삶에서 인간의 자유가 차지하는 중추적인 중요성에 대한 그의 뚜렷한 인식이 있다. 다산은 이 자유를 선악을 재단하고 선택함에 있어서 ‘저울질(權)을 할 수 있는 독자적인 능력’(自主之權)’이라고 부른다.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지는 자유로운 도덕적 주체다. 다산은 자유 혹은 ‘자유 의지’ 없이는 우리의 행위가 동물의 행위와 마찬가지로 ‘고정되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도덕적 삶이 의미가 없거나 불가능하게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다산은 도덕적 삶에서 자유의 핵심적 중요성을 오해할 수 없을 정도로 뚜렷이 기술한다:
어떤 사람의 선한 행위가 흘러내리는 물이나 솟아오르는 불길과 같다면, 그 행위는 그 사람의 노력에 기인한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하늘은 사람들에게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해서 선을 바라면 선한 행위를 하고 악을 바라면 악한 행위를 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자유로이 [자신들의 의지와 행동을] 변경한다. 그들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들의 힘은 그들 스스로에게 속한다. 그들은 고정된 마음을 갖고 있는 금수와는 다르다. 그러므로 그들이 선한 행위를 하면 그 행위는 실로 그들의 공이 되고, 그들이 악한 행위를 하면 그 행위는 실로 그들의 잘못이 된다. 이것이 마음의 힘이니, 이른바 마음의 본성이 아니다.
다음과 같은 그의 언급은 자유와 인간의 도덕적 책임성이 지니는 중요성을 더욱 강하게 역설한다:
벌은 벌이고, 따라서 벌들은 여왕벌을 보호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벌이 충성스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벌은 고정된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호랑이도 호랑이고 호랑이는 살아 있는 것들을 해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을 담당하고 있는 어느 누구도 호랑이가 살아 있는 것들을 죽이는 행동에 대해 말할 수 없다. 호랑이의 마음이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러한 면에서 다르다. 왜냐하면 인간은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지(主張)는 자기 자신의 것이어서 인간의 행위가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이] 선을 행하면, 그 선은 그 인간 자신의 공이 되고 [악을 행하면] 그 악은 그 인간의 잘못이 된다.
다산에게 도덕성은 우리가 자유로운 주체로서 도덕적 결단을 내릴 수 있는 독특한 능력을 어떻게 행사하는지에 달려 있다. 그는 심지어 인간은 동물과 달리 ‘정해진 기준을 범하거나 그 기준에 못 미치는(過不及)’ 것에 대해 책임을 추궁당할 수 있는 것은 인간뿐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이는 칸트의 도덕적 자율성을 상기시킨다. 이처럼 자율적인 힘과 자유의지의 결정적인 중요성에 대한 뚜렷한 인식은 오랜 유교 전통 속에서 다소 독특한 특색이라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수신(修身)의 주체로서 개별적 주체성이라는 아이디어는 유교와 같이 강하게 도덕주의적인 전통에서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임에 틀림없다.
유교는 일반적으로 인간을 추상적이고 초연한 개인이기보다는 오히려 주요한 측면에서 미리 정해진 사회적 역할을 해야 하는 관계적인/사회적인 존재로 본다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유교의 도덕전통에서 의지(志)의 개념이 지니는 중요한 역할에 주목하는 것은 극히 의미심장하다. 성중영(成中英)은 유교의 인격관념에 관해 발표한 탁월한 논문에서 이러한 역할을 잘 밝히고 있다. 성중영은 유교의 인격개념에서 초월적인 자아와 칸트적인 자유의 관념이 존재한다는 점, 그리고 이 초월적 자아가 내재적 자아 사이의 변증법적 일치를 이루면서 존재하고 있음을 강하게 제시하면서 다음과 같은 결정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러한 의미에서 맹자 또는 공자의 자아와 의지에 대한 관점이 자유를 성취하는 데 실패하고 있는가? 아니다. 그들의 관점은 이러한 칸트적 의미의 자유를 성취하는 데 실패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의 관점이 성취한 것은 이러한 칸트적 자유를 포함하고 그러면서도 칸트적 자유 이상의 어떤 것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유교 형이상학에서는 신과 같은 것이 없기 때문에 신이 자신의 이미지로 인간을 창조했다고 상정하지는 않지만, 인간은 특수한 본성(性)을 갖고 있다. 이 본성은 성찰을 통해 마음에 대한 자의식을 성취한다. 이 자의식은 또 성찰을 통해 경험적 자아로부터 비상하여 ‘초월적 자아’라고 불리는 것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초월적 자아는 실증적 자아와 별개의 것이 아니다. 다만 이 초월적 자아는 세속적 실재의 내면성과 초월적 실재의 초월성을 결합하는 본성을 지닌 자아가 된다.
성중영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한 초월이 가능한 것은 성(性)의 본성에서다. 이러한 초월을 통해서 우리는 [도덕 활동에서] 판단과 진단과 평가와 선택과 결단이 어떻게 독립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지 볼 수 있다. 결단이 일단 내려질 때 그 결단은 사람의 인격의 본성에 즉각적으로 뿌리박고 있으며 행동을 위한 기반이 된다. 여기서 초월자는 칸트의 이성이나 합리적 영혼과 같은 입법자가 아니라 본성에 깊이 있는 것을 밝히고 드러내며 이미 본성 안에 담겨 있는 법을 제정한다.
이 통찰력 있는 단락에서 성중영은 내가 유교 윤리에서 핵심적 이슈라고 간주하는 것, 곧 유교의 도덕사상이 인간의 도덕적 주체성, 곧 우리의 인격을 둘러싸고 있는 구체적이고 우연적인 온갖 요소들로부터 초연한 자유로운 도덕적 주체 내지 초월적 자아에 대한 명확한 관념이 있는지, 그리고 그 주체성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있는지 여부의 문제다. 적어도 다산에게서 이 결정적인 질문에 대한 답은 우렁찬 ‘네’이다. 성중영이 “이 특수한 본성(性)은 성찰을 통해 마음에 대한 자의식을 성취한다. 이 자의식은 또 성찰을 통해 경험적 자아에서 비상하여 ‘초월적 자아’라고 불리는 것이 된다.”고 말하면서, 이 특수한 본성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하여서는 말하지 않고 있다. 필시 다산이 말하는 “하늘의 영적인 밝음은 우리 인간의 마음과 직접적으로 닿아 있어, 그 밝음이 볼 수 없게끔 숨겨져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 밝음이 조명할 수 없을 만큼 모호한 것도 결코 없다”라고 기술하는 ‘하늘의 영적인 밝음’일 것 같다. 그렇다면 이 밝음이 실제로 무엇이며 실로 얼마나 ‘초월적’인지 등에 관한 추가적 질문이 제기된다.
다산 역시 자신의 도덕 사상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의 변화에 의해 흔들림이 없는 우리 양심의 목소리로서 의지(志)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물론 인간 마음의 이러한 ‘영적인 밝음’의 ‘초월적’ 성격에 관련해서 다산에게는 다소의 모호성이 있다. 다산은 한편으로 세상의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마음이 기(氣, 물질적인 에너지 내지 힘)와 하늘에 의해 우리의 본성으로 주어진 원칙인 이(理)라는 두 측면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는 전통적인 성리학적 관념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다산은 자신이 초기에 접했던 가톨릭 사상의 영향으로 인간의 마음이 신의 이미지(imago dei)로 창조된 영혼으로서 초월적 성격을 지닌다는 데 대해 보다 강력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드러내고 있다.
마지막으로 여기서 우리는 다산의 도덕적/정치적 사상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측면에 대해 진지하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산의 정치사상은 근대 대의민주주의 사상에 매우 가깝게 다가가는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다산에 따르면, 가장 낮은 관료에서부터 천자(天子)에 이르기까지 모든 관료들은 국민들에 의해 추천(推)되었던 적이 있다고 한다 – 그리고 지금도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산은 말한다: “그[공직자]를 체포하고 [그의 지위에서] 끌어내리는 것은 백성이고, 그를 높여 영예롭게 하는 것도 백성이다. 그를 높여 영예롭게 하는 것이 백성이고 이제는 그에게 죄가 있다고 발견하는 것도 백성이니, 백성이 그를 다른 사람으로 대체한들 어찌 이것이 이치에 반할 수 있겠는가?”
다산에 따르면 국민에 의한 이러한 권력 교체가 불가능하게 된 것은 한(漢)나라 때부터일 뿐이다. 물론 이것이 역사적 사실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이러한 아이디어는 참으로 ‘혁명적’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아이디어가 실행되고 제도화되면, 근대의 대의민주주의 제도로 쉽게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다산은 결코 혁명가는 아니었고 어떠한 형태로든 급진적인 성격의 정치 운동에 참여한 적도 없지만, 그에게 이러한 정신은 뚜렷하다. “나에게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나라의 모든 국민이 양반(兩班)이 되도록 해서 온 나라에 반상(班常)의 차별이 없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산이 의심의 여지없이 지니고 있었다고 여겨지는 인간에 대한 도덕적 평등주의와 보편적 인간 존엄성의 관념을 넘어서, 그의 정치사상이 품고 있는 이러한 급진적인 요소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 요소들은 현대 민주주의의 기반이 되는 법적, 정치적 평등주의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첫댓글 놀랍습니다. 금강불괴의 경지가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