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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 맺는 말: 아시아적 자연주의의 새로운 형이상학을 위하여
현대인들의 정신적 빈곤의 이유 가운데 하나는 탈 정신화된 세계 자체가 아무런 인간적 의미를 주지 못하는 데 있다. 세계를 어떻게 이해해야만 자연에서 영적 의미를 다시 읽어내는 권리를 되찾을 수 있을지는, 서양 근대 철학이 거의 포기하다시피한 일이지만, 오늘날 세계 철학계가 당면한 가장 심각한 도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19세기 서구 낭만주의 운동은 계몽주의의 유산인 주체와 객체 사이의 균열을 치유하고자 했던 시도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칼라일의 말대로, 초자연적인 것을 자연화하고 신적인 것을 인간화하려는 ‘자연주의적 초자연주의’(naturalistic supernaturalism)의 입장을 대변하는 운동이었다. 그러나 낭만주의는, 계몽주의 후에 일어난 근대 산업-기술 문명에 대한 여타 반동들과 마찬가지로, 역사의 조류를 막는 힘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철학이 사실상 있으나마나 한 것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그러한 노력을 포기할 수 없다. 우리는 자연이 아직도 우리에게 다시 ‘말을 걸 수’ 있게 하는 방법이 없을지, 계속해서 물어야만 한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인간이 다시금 ‘자연적’ 존재로서, 하이데거의 표현대로 ‘땅과 하늘과 신들과 유한한 인간들’의 세계에서 겸손히 거할 수 있는지 물어야 만 한다.
이 글은 아시아적 자연주의나 해월의 삼경사상을 현대의 영적 빈곤과 문명의 위기를 치유하는 만병통치약으로 제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나는 또 동양이든 서양이든 자연주의가 지닌 심각한 철학적 문제들을 외면할 생각도 없다. 가령, 인간이 만약 철저하게 자연적 존재로서 자연에 내재적인 존재라면, 인간의 보편적 존엄성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을 것이며, 어떻게 인간의 자유의지나 도덕적 책임을 자연주의적 존재론의 바탕 위에 정초시킬 것인가 하는 오래된 문제들이 제기된다. 도덕적 가치들에 대한 진화론적 설명이 이런 문제들에 대해 만족스러운 답을 제공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또 이와 밀접하게 연관된 문제로서, 어떻게 우리는 몸과 마음의 관계에 대한 심리철학적인 문제를 여러 형태의 자연주의적 환원주의나 결정론과 같은 만족스럽지 못한 결론들을 피하면서 해결할 수 있을지도 자연주의가 답해야 할 문제다.
아시아적 자연주의가 이러한 문제들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너무나 안이한 생각이지만, 우리는 왜 아시아적 자연주의가 그러한 문제들을 야기하지 않았는지는 생각해볼만 한 가치가 있다. 아시아적 자연주의에 따르면, 인간의 마음과 자연계 사이에는 근본적인 존재론적 연속성이 있다. 인간과 자연은 그 존재의 깊이에서 원초적인 일치성이 존재한다. 인간과 자연은 똑같이 도(道) 또는 하늘(天)의 현현들이다. 아시아적 자연주의의 통전적 사고는 결코 인간을 육체를 벗어난 영 혹은 자아로 생각할 수 없고,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적 사고, 혹은 물질과 정신(matter and spirit)의 이원론과는 본질적으로 거리가 멀다. 아시아적 자연주의의 관점에서는 서구 근대철학의 이른바 ‘인식론적 전회’(epistemological turn)라는 것은 지극히 부자연스럽고 불행한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아시아적 자연주의는 한편으로는 인간의 주체성(res cogitans)을 과장하는 철학,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순전히 물질주의적이고 기계론적인 세계관(res extensa)으로 가는 길을 닦아 준 데카르트 같은 철학자를 배출하지 않았다. 아시아적 자연주의는 서양의 지적 전통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고 오늘의 전 지구적 위기를 초래한 유물론적 기계론과 신학적 정신주의, 혹은 영적 불모지 같은 물질주의와 비합리적인 초자연주의 사이의 불행한 선택에 갇히지 않고도 근 2,000년 이상이나 잘 작동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몇몇 사변적 질문이 아시아적 자연주의에 대해 제기될 수 있다. 가령, 만약 아시아적 자연주의에서처럼 자연이 전부라면, 왜 세계는 현재의 성격과 모습을 갖추게 되었는지, 세계의 합리적 구조와 자연이 지닌 자기조직화(self-organizing)의 성격은 도대체 어디서 유래하는지 하는 문제들이다. 앞서 보았듯이, 아시아적 자연주의에 의하면 세계는 자기조직화하기 때문에 ‘자연적’이다. 그 질서는 도 혹은 하늘 자체의 자발적이고 자연적인(spontaneous) 것으로서, 초자연적 존재에 의해 예정되었거나 결정되어 있지 않고, 도의 자연스러운 운동과 함께 출현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가 왜 그러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지, 특히 질서를 부여하는 그 성격이 어디서 오는지 더 물을 수 있을까? 아니다. 왜냐하면 도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신(God)처럼, 그 자체로 존재하는 실재(ipsum esse subsistens)이기에 그 이상의 이유 혹은 그 배후나 그 너머를 물을 수 없는 궁극적 실재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결정적 차이는 도 혹은 하늘이 철저히 세계에 내재하고 그 역동적 창조성으로 인해 항시 세계와 함께 변화하는 실재라는 점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차이점은 도 자체가, 특히 그 원초적 상태에서, 혼돈의 성격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반면, 그리스도교의 신학적 전통에서는 신은 언제나 원초적 혼돈을 대적하거나 제어하는, 즉 혼돈으로부터 질서를 창조하는 힘으로 간주되었다는 사실이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아시아적 자연주의를 향해 도대체 세계가 왜 존재하는지, 일찍이 라이프니츠가 제기했던 유명한 문제, 즉 세계는 왜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는가라고 물을 수 있을까? 그렇다, 물을 수 있다. 그러나 답은 필경 도나 하늘은 항시 창조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왜 도가 그러한지 더 이상 물을 수 없고 도 혹은 하늘이 애당초 왜 존재하는지도 물을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도는 신처럼 원초적이고 스스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차이가 있다면, 아시아적 자연주의는 필연유(necessary being)라는 개념이 없었고 도에 대해 존재론적 증명(ontological proof) 같은 것을 시도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이다.
많은 서구인들이 그리스도교의 초자연주의에 실망해서 이미 동양사상, 특히 선불교 나 도가사상으로 전향했고, 또 많은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이 동양사상의 도전 앞에서 그들의 그리스도교 메시지를 이해하기 위해 씨름하고 있다. 서양의학과 기(氣) 중심적인 한의학의 협진도 적어도 아시아 국가들에서는 유행을 더해가고 있다. 가장 의미 있는 일은 데카르트-뉴턴 이후의 물리학은 이미 오랜 동안 근대적 사고를 지배해왔던 원자론적이고 기계론적이고 결정론인 세계 이해를 이미 넘어섰다는 사실이다. 상대성이론, 양자역학, 카오스 이론, 가이아 이론, 시스템 이론, 그리고 최근 과학의 새로운 분야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생태학 등이 물질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관계적이고 통전적인 방향으로 변화시키고 있으며, 아시아적인 유기체적 세계관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자극하고 있다. 1950년대에 이미 니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라플라스(Laplace) 이래 신이라는 가설을 자연법칙의 근거로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가능하고 바람직스럽다고 보아온 현대과학이 어떤 의미에서는 도가적 시각으로 되돌아왔다는 것은 지극히 흥미롭다. 이것이 그 위대한 학파(도가)가 지닌 이상하게도 현대적인 울림을 설명해준다.
이런 관찰이 있은 후 세계 과학계의 많은 사람들이 전통적인 아시아 철학과 탈 뉴턴적인 과학 사이의 의미 있는 일치에 관심의 눈을 돌리고 있다. 클락이 도가의 존재론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은 아시아적 자연주의 일반에도 타당하다.
자연을 운동, 흐름, 변화로 보는 역동적 견해를 지닌 도가사상과, 실체보다는 기(氣)의 에너지를 강조하는 것, 인간과 자연의 모든 현상을 엮는 관계망의 이해, 그리고 엄격한 법칙들과 절대적 경계들을 거부하는 도가사상은 세부사항과 방법론과 전반적인 목적들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현대 물리학의 정신에 특별히 가깝다.
이제 세계 철학계는 아시아의 오랜 통전적 사고를 단지 중국학을 하는 사람들이나 중국 연구가들 혹은 아시아 철학사가들의 손에 맡기지 말고 철학적 레벨에서 보다 심각하게 받아들일 때가 되었다. 그들이 수행해온 작업의 근본적인 전제를 재검토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좀 더 적극적이고 야심적으로 말하면, 아시아적 자연주의가 단지 시적 영감이나 신비적 통찰의 원천 이상이 되려면, 다른 철학 사상들뿐 아니라 현대 과학들과 활발한 대화를 하면서 이론적 작업을 통해 발전을 꾀할 노력을 게을리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아시아적 자연주의의 입장을 대변하는 새로운 형이상학, 말하자면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이 1920년대에 달성했던 것에 비견할만한 형이상학이 요구된다는 말이다. 데카르트적 이원론과 이성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공격을 넘어, 새로운 형이상학을 구축하는 일이 요구된다. 아시아적 자연주의는 현대를 위한 주희(주자)의 출현을 기다려야만 한다!
다른 한 편, 이러한 새로운 형이상학을 구축하는 노력과는 성격이 전혀 다른 새로운 도전이 도사리고 있다. 많은 연구들이 아시아적 자연주의의 비합리주의적 측면들, 특히 도가 사상이나 불교 사상과 하이데거의 ‘신비적’ 사유 혹은 데리다의 해체주의 사이에 있는 유사성에 대한 비교 연구가 이미 이루어졌다. 따라서 형이상학적 담론 같은 것이 반 형이상학적 회의론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아직도 추구할 수 있고 바람직한 것인지 하는 핵심적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이 회의주의는 과학 앞에서 세계에 대한 인식을 포기한 서구의 근현대 철학으로부터 올 뿐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는 실재를 파악하는 인간의 이성과 언어에 대한 신뢰의 상실에서 온다.
문제의 핵심에는 언어 일반의 성격에 대한 철학적 문제가 있다. 이것은 단지 과거논리실증주의(logical positivism)의 주장처럼 단지 형이상학적 언어의 타당성 문제를 넘어선다. 아시아적 자연주의의 새로운 형이상학은 더 이상 언어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최근 공격을 무시하고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작업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언어가 사물/사태를 반영한다는 생각에 대한 회의론은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뿐 아니라 고전적인 도가 철학과 불교 철학 자체에 의해서도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나 자신도 아시아적 자연주의에서 궁극적 실재의 불가언적 성격, 비록 종종 과장되기는 하지만 그 비합리적이고 신비적인 차원을 강조했다. 따라서 문제는 우리의 사고나 언어가 실재를 반영하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철학적 담론의 성격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또는 아시아적 자연주의의 형이상학적 담론이 과연 불가언적인 도와 천, 그리고 공(空)에 대해서 논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진짜 아시아적 자연주의는 차라리 형이상학을 구축하려는 노력을 자기 모순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것으로 포기해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여기서 이 중요한 문제를 더 자세히 다룰 수는 없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실하다. 도가와 불가의 실재관과 하이데거의 신비적 사유나 데리다의 해체주의적 사고 사이에 어떤 유사성이 존재하든, 아시아적 자연주의가 지닌 언어와 철학적 담론에 대한 부정적 견해는 언제나 형이상학적 절대에 대한 직접적인 직관적 앎을 단순히 가정하는 정도가 아니라 전제로 했고 주장했다는 사실이다. “세계를 경험하는 변화된 양식”을 통해서 가능해진 궁극적 실재에 대한 특권적 접근이다. 언어의 매개 없이 이러한 도에 대한 직관적 앎에 따라 살고 행동하는 것은 아시아적 자연주의에서는 최고 형태의 영성으로 간주된다. 아시아적 자연주의가 언제나 모든 철학적 담론을 본질적으로 실재에 대한 직관적 앎을 유도하기 위한 보조 내지 방편(upāya)으로 간주해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철학이 제아무리 숭고한 동기나 심오한 통찰을 지녔다 해도, 철학은 단순히 부정적 언사만으로 만족할 수 없으며, 또 단지 기표들(signifiant)만 가지고 무한정으로 놀고 있을 수도 없다. 실재를 포착하는 데 개념적 지식이 지닌 근본적 한계는 마땅히 의식하고 경계해야 하지만, 아시아적 자연주의의 새로운 형이상학은 형이상학적 담론을 위한 정당한 자리를 확보할 방도를 마련해야만 한다. 내 생각으로는, 이를 위한 한 가지 좋은 방법은 대승불교의 공사상이나 힌두교의 불이론적 베단타(Advaita Vedānta) 철학에서 말하는 이제설(二諦說)에 의지하는 길이다. 즉 높은 차원의 진리 혹은 최고의 진리와 낮은 차원의 관행적 진리를 구별하면서 철학적 논의를 진행하는 길이다. 이제설에 따르면, 불교나 불이론적 베단타를 포함한 모든 철학적 담론은 관행적인 진리 즉 속제의 차원에 속한다. 그들은 모두 불가언적 실재를 가리키는 손가락에 지나지 않으며, 결코 초월적 실재(signifié)의 기표(signifiant)들이 아니다. 최고의 진리에 관한 한, 모든 언어 – 철학적 혹은 일상적이든, 기술적(記述的, representational, 표상적)이든 혹은 메타포이든, 부정적 언사이든 혹은 긍정적 언사이든지, 또는 전복적이든 혹은 건설적이든 간에 – 는 아시아적 자연주의에서는 보조적이고 방편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미래의 아시아적 자연주의의 형이상학적 담론은 예부터 그랬듯이 이런 정신으로 수행해야 한다. 왜냐하면 용수(龍樹, Nāgarjuna)가 우리에게 상기시켜주듯이, 속제를 통하지 않고는 진제에 도달하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 과거의 아시아적 자연주의 철학자들도 역시 합리적 논쟁을 전적으로 피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비록 그들의 궁극적 목표는 언제나 언어 너머의 실재를 접하는 데 있었다 해도 그렇다. 따라서 아시아적 자연주의의 새로운 형이상학은 자신의 입장을 합리적 논증이나 이론적 논의를 통해 구체화하려는 노력을 자신의 정신을 배반하거나 자기모순을 범하는 일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오늘의 전 지구적 위기가 자연계로부터 소외된 인간의 문명에 있다면, 철학자들의 사명은 아직도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물질과 정신, 몸과 마음, 사실과 가치, 과학과 영성을 나누는 철지난 이분법적 사고를 넘고, 형이상학을 기피하는 현대 철학계의 소극적인 태도를 극복함으로써 자연의 ‘인간화’ 혹은 영성화(spiritualization), 그리고 인간과 영성의 ‘자연화’로 나아가는 데 있다. 이를 위해서 아시아적 자연주의가 지속적으로 중요한 통찰과 영감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 글을 마무리 하면서 자연주의는 아시아에서 단지 철학적 비전 이상임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고 싶다. 자연주의는 아시아의 보통 사람들에게도 오랜 동안 삶의 방식이었고, 비록 현대세계에서 다른 사고방식과 삶의 양식에 의해 도전받고 침식되고 있지만, 여전히 그러하다. 이제는 철학자들이 너무 늦기 전에 이 소중한 자산을 지키고 발전시켜가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