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를 바라보자
히브리서 12:1~3,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오늘 본문 말씀은 믿음의 장인 11장의 결론 부분입니다. 구약 시대의 수많은 믿음의 영웅들을 언급한 히브리서 기자는 이제 이렇게 결론적 권면을 합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라고 시작합니다.
이제 히브리 기자는 과거 하나님 백성의 역사를 돌아보면서 그들의 믿음으로 살아간 족적을 살핀 기록자는 이제 시선을 돌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를 향하여 적용하고자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옛 신앙의 선진들과 동일한 믿음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우리들이 마치 믿음의 경주장에서 달음질하는 믿음의 선수들과 같다면, 스타디움 관중석에 앉아서 관람하는 구름같이 많은 관중들은 바로 앞서서 경주장을 돌았던 믿음의 선배들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이미 결승점을 다 돌고서 천국의 스타디움 관중석에 앉아서 지상에서 믿음의 경주장을 달리고 있는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들이 믿음의 경주장에서 열심히 잘 달리면 천국의 관람석에서 박수를 치고 환호를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혹시라도 달리다가 뒤처지거나 가다가 지쳐서 멈춰서거나 아예 경주를 포기하고 경주장 밖으로 나가 쓰러져 버리면 안타까워하고 슬퍼하며 어서 일어나라고 간절히 외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음의 선배들이 관중석에 구름같이 많이 모여 우리를 구경한다는 것은 믿음의 경주를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큰 관심이 있다는 것이요 우리의 믿음의 경주가 지상에서뿐 아니라 천국에서의 가장 큰 관심사 중에 하나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이 믿음의 경주장에서 달음질하는 우리의 신앙의 경주에 최선을 다하여야 하겠습니다.
신앙의 경주를 잘 달리기 위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 몇 가지를 결론적으로 권면합니다.
첫째로, 거추장스러운 것들은 벗어버려야 합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라고 하였습니다.
백 미터 경주자든, 오백 미터 경주자든, 만미터 경주자든, 마라톤 경주자든 간에 경주할 때 거추장스러운 옷이나 구두나 화장품 등의 휴대물품을 가지고 경주하는 사람은 상받는 데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단정하게 가볍고 거추장스럽지 않게 달리기에 방해되지 않는 복장을 갖추고 달려야 지치지 않고 속도감있게 결승선에 도착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인들도 믿음의 경주장에서 방해꺼리가 되는 육신적인 것들은 내려놓고 벗어버리고 끊어버려야 합니다.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들은 영적으로 지치게 만들고 침체에 빠지게 만들고 믿음의 경주를 힘차게 못하도록 만드는 것들입니다.
때로는 사회 통념상 큰 문제가 안되는 일반적인 것이라도, 성경과 믿음의 선배들이 영적으로 손해가 된다고, 영적 달음질에 넘어지게 되는 걸림돌이 된다고 귀뜸해주는 것도 있습니다. 그럴진대 그 말씀대로 실천하고 그런 것들은 아예 멀리하는 결단을 내리는 것이 좋습니다.
아브라함은 큰 부자였는데 그 물질에 매일 것 같으니까, 누가 지적하지 않았는데도 아예 한 가지 원칙을 삼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는 절대로 고대광실 같은 집을 평생 안 짓겠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 소와 양을 치는 목동들처럼 평생 천막을 치며 이리 저리 다니는 유목민의 생활 방식을 고수하겠다고 각오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당시 가나안 족속들과 어울려 지내지 않고 산과 들에 고적한 데 살면서 불편하지만 하나님과 동행하는 영적 생활을 하고자 결심한 것입니다. 조카 롯은 그렇지 않고 소돔 성의 도시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결국 영적 은혜를 잃어버리고 망하는 길로 가지 않습니까? 그래서 아브라함은 영적인 길로 안전하게 가기 위하여 자기에게 얼마든지 허용된 것도 스스로 자제하는 결단을 내린 사람인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더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아합 왕가를 처단한 개혁자 예후 장군 때에 민중들의 존경과 지지를 받았던 겐 사람 요나답의 후손들이 그러합니다. 그들은 레갑 족속이라는 이름으로 일컬어졌습니다. 요나답이 세상을 가만히 보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선민인데도 불구하고 가나안 땅에 정착하고서는 도시 생활하면서 물질 문화에 동화되어서 신앙이 부패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요나답은 본래 모세의 장인의 후손답게 미디안 광야에서 목축하면서 천막 생활을 하면서 살았던 그 처음의 순수한 생활을 고수함으로써 신앙을 지켜가라고 후손들을 명했습니다. 요나답은 자기의 혈족 레갑 족속을 불러놓고 그들에게 절대로 포도원을 갖지도 말고 집을 짓지도 말고 포도주는 먹지도 말고 포도송이도, 그 씨앗도 먹지도 말라고 단단히 명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스라엘 사람들이 범했던 영적 부패로부터 자기들이 지켜가도록 명했던 것입니다. 그 당시에 집을 세우고 사는 것이 당연한 것이요 포도원을 사서 농사를 짓고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지만, 아예 포도즙도 먹지 못하게 하고 집도 짓지 말고 오직 천막 생활하면서 목축만 하도록 자손들에게 명하였으니, 이는 순수 신앙을 위하여 기꺼이 할 수 있는 것도 내려놓은 희생이었던 것입니다. 그 명령에 순종한 레갑 족속은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침공으로 유다가 멸망당할 때 하나님의 보호를 받았고 또한 하나님을 섬기는 일꾼들이 레갑 족속들에게 계속 나오는 은혜까지 입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들도 신앙에 방해가 되는 것, 신앙을 주춤거리게 하고 영적 은혜가 가라앉게 만드는 일들이 개인적으로 있다면, 그것들이 비록 합법적이고 아무도 비난하지 않는다 해도, 스스로 이를 버리고 몸과 마음과 생활을 단순하게 가볍게 하는 결단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그러한 선택은 여러분에게 반드시 이전과 다른 영적 진보와 성숙의 은혜로 보상받을 것입니다.
둘째로, 끝까지 인내해야 합니다.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비유되는 달리기 경주는 단거리 경주, 곧 백미터나 이백 미터 정도의 경주가 아닙니다. 만미터나 마라톤 경주를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주에 참여한 선수는 경기 도중에 자기의 체력의 한계를 느끼는 상황을 맞이하곤 합니다. 얼마전에 티브로 국제육상경기를 본 적이 있는데 1위로 달리던 한 백인 여성이 중반쯤 가니까 2위로 쳐졌습니다. 그러자마자 그 선수는 트랙 밖으로 나가 그 경기를 포기하였습니다. 10여년 전에 보았던 마라톤 경기에서도 영국 출신의 한 여성이 내내 1위로 달렸습니다. 2위 그룹은 일본의 선수들이었는데 나이도 많고 키도 매우 작았습니다. 그들은 1위를 달리는 영국 자매 뒤에서 조용히 그림자처럼 붙어서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이변이 생겼습니다. 갑자기 1등 달리던 영국 자매가 달리기를 포기하고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자신만만했던 얼굴과 태도로 일관했는데, 왜 갑자기 무너졌는지 몰라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 만큼 장거리 경주에는 체력뿐 아니라 정신력과 그 때 그 때의 경쟁 상대에 의한 심리적 위축감 등이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의 경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신앙 경주도 마라톤과 같이 길고 긴 자기와의 싸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지속적으로 넘어뜨리려고 시험하는 경쟁자 마귀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속한 그 시대의 세속적 분위기 곧 시대 정신의 끈질긴 시험이 있습니다. 다들 믿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적당히 신앙 생활하면서도 얼마든지 구원받고 천국 갈 수 있다는 신자들이 많을 때 자기 혼자서 몸부림치면서 최선을 다한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달리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도중에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주위에 참 믿음의 사람은 별로 없고 자기 혼자 이렇게 고통스럽게 믿음 생활해야 하는가 하는 회의가 들곤 하는 것입니다.
일제 때에 주기철 목사님은 동지들이 고문과 회유에 못이겨서 신사참배에 다들 굴복해갈 때 끝까지 가혹한 고난을 견디면서 덩그렇게 홀로 감옥에 남겨졌는데, 그 때 주기철 목사님은 고문보다 더 괴롭고 힘든 것은 다 떠나고 홀로 남은 외로움이더랍니다. 믿음의 용사 엘리야도 두려움이라곤 털끝 하나 없이 보였지만 원수 이세벨의 갑작스럽고 서슬퍼런 위협을 만나자 얼마나 깊이 낙심하고 두려웠는지, 남쪽으로 한없이 달아나서 사막으로 도망쳤고 또 도망쳐서 호렙산의 깊은 동굴까지 들어가 숨지 않았습니까?
그런 만큼 신앙의 경주에서 끝까지 인내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의 마지막 날의 환란이 올 것을 예고하면서 그 마지막 결론부에서 이렇게 말씀을 맺습니다.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눅 21:19)
그러므로 우리는 잘 달리다가 중간에서, 혹은 결승점 코앞에서 포기하고 쓰러지는 자가 되지 맙시다. 아무리 어려운 일을 만나더라도 끝까지 인내하는 자가 됩시다. 마귀가 욥에게 한 것처럼, 우리를 시험하기를, “네가 이래도 믿음의 순전함을 지킬 것이냐?”라고 이리 저리 시험할 때 굴하지 말고 주님 앞에 설 그 날을 생각하면서 끝까지 인내합시다. 우리 주님께서 인내하는 우리들을 강한 팔로 끝까지 붙들어주실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에게서 눈을 떼지 말아야 합니다.
2절과 3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행하신 이를 생각하라”
여기서 히브리서 기록자는 믿음의 경주를 잘 달리며 끝까지 완주하기 위해서 반드시 지켜야 할 한 가지 수칙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라보다’는 헬라어 단어는 ‘아포라오’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딴 데 눈 돌리지 않고 바라본다’는 말입니다. 한눈팔지 않고 집중해서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자세히 살피고 깊이 생각하며 응시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3절 마지막에 ‘행하신 이를 생각하라’를 말씀의 ‘생각하라’는 단어와 취지의 권면입니다. ‘생각하라’는 이 단어 역시 깊이 사색하고 깊이 되새겨 생각한다는 의미입니다.
신앙의 경주를 끝까지 잘 달리기 위해서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달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 우리 구주에 대한 믿음, 그의 선포하신 진리에 대한 믿음으로 이 세상 믿음의 길을 달려갈 수 있습니다. 이 믿음 없이는 결국 도중에 심신이 지칩니다. 도중에 시험에 넘어집니다. 도중에 출발했던 세상이 그리워 되돌아갑니다. 세상의 푸대접과 냉대와 신앙의 고생을 당하면서 기쁨을 잃어버리고 슬픔과 원망과 불평과 분노 속에 신앙 길을 걸어갑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어야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어디서 오느냐 하면,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옵니다. 예수님은 누구시냐면,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원문 그대로 해석한다면, 예수님은 믿음을 시작하게 하시는 분이시요 믿음을 완성시키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은 믿음의 설립자요 그 믿음의 완성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철두철미,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은 주님의 선물입니다. 주님이 베푸시는 은혜로 얻는 선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의 태양이신 주님으로부터 눈을 떼지 말고 한눈팔지 말고 계속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우리에게 계속하여 믿음이 공급되어 온전한 믿음으로 시험의 고비를 이기고 전진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인간의 대표로 오셔서 모든 시험을 다 경험하셨습니다. 마귀의 시험, 사람들의 육신적 환대와 환호, 왕으로 삼으려는 사람들의 욕망, 동지요 친구들인 제자들의 배신을 다 경험하셨습니다. 그는 외로움, 절망, 육신적 고통, 부끄러움과 수치, 분노감정을 다 겪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믿음으로 그 모든 것을 견디셨고 극복하셨습니다. 그는 그 앞에 있는 궁극적인 기쁨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그 고통을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습니다. 결국 하나님 보좌 우편에 승리자로 앉으셨습니다. 그가 겪으셨던 정신적, 육체적, 영적 고통은 말할 수 없이 컸지만 끝까지 인내하며 참으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를 깊이 생각하며 그 믿음을 본받고자 할 때 주님은 우리들의 마음과 생각과 영의 형편을 잘 아시고 너끈히 믿음을 더해주시어 이기게 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예수님을 항상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에게 우리 영혼의 시선을 항상 두어야 합니다. 마치 해바라기가 태양을 향하여 계속하여 얼굴을 돌리듯이 우리는 주님을 계속 바라보아야 합니다. 마치 연한 가지의 식물이 창가의 햇살을 향하여 그 가지를 길게 뻗듯이, 우리들의 연한 심령의 가지는 오직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만 집중해서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머물 때 동족 이스라엘이 광야 시내산에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숭배함으로써 심판받아서 몇 천 명이 죽는 어수선하고 슬픈 상황이 펄쳐졌습니다. 그 때 모세는 지도자로서 너무 힘들었으나, 그 백성들을 위하여 간절히 중보 기도를 하여 용서를 약속받은 후에 모세는 하나님께 이렇게 간청합니다.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출33:18)
모세는 하나님의 공의로움과 그의 진노의 무서움을 알면서도 그는 더욱 하나님을 알아가기를 원했고 그의 영광의 광대함을 더 직접 보기를 갈망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 더 집중하여 바라보는 것이 광야 길을 잘 지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힘이요 지혜와 능력이라고 느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주의 영광을 더 분명히 보고 안다면 광야 길에서 헛된 것을 만들어놓고 하나님이라고 숭배하는 우상숭배를 절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감히 재물을 하나님이라고, 감히 권세와 세상 높은 지위를 하나님이라고, 나의 개인적인 성공이나 자녀의 세상적 성공을 하나님이라고 감히 생각조차 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크신 영광과 위엄을 알면 알수록 우리들은 헛된 세상의 유혹을 우습게 여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사랑으로 광야의 모든 시험과 유혹과 어려움을 기쁨으로 견디고 약속의 가나안을 향하여 찬송하며 전진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세처럼 “주의 크신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기도하며 주님을 더 집중해서 바라보며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다윗도 원수의 핍박과 죽음의 위협의 시련 속에서 동일하게 하나님만 바라봄으로써 승리하였습니다. 시편 16:8 말씀에,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요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라고 하였습니다.
고라 자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는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시 42:1~3)사람들의 조롱과 모욕이 넘실 거리며 날마다 눈물로 음식을 삼는 신앙 조롱의 상황 속에서 이 시인은 도리어 하나님께 집중함으로써 그 고난을 이겨냅니다.
그렇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겪어야 할 시대는 주님께서 예고하신 대로 점점 배교의 시대로 접어들어갈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신앙에 대하여 조롱하고 핍박하는 것이 더 극심하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 신앙인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성경적 진리를 저버리고 인본주의적 신념과 정치적 이념적 색채를 가지고 진리를 곡해하고 주님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시대가 돌할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인간적인 욕구를 만족시켜주는 적그리스도의 정치적 권세와 온 세상을 미혹하는 바벨론 음녀의 쾌락과 육신적 풍족함과 편리함의 유혹 앞에서 너무나 쉽게 굴복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 속에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달음질하는 일이 점점 어려워질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거추장스러운 세상 옷과 세상 장신구들을 착용하고 믿음의 길을 가겠다고 나섰다가 다들 자기의 긴 드레스 옷에 걸려 달리다가 자빠지고 말 것입니다. 다들 달리다가 지쳐 멈춰설 것입니다. 핍박과 조롱을 만나면 화들짝 놀라 세상으로 되돌아갈 것입니다. 마지막 환난의 격심한 고통이 찾아오면 끝까지 인내하지 못하고 주님 재림 직전이라도 배교하고 말 것입니다.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만이 끝까지 믿음의 주님만을 변함없이 바라봄으로써 은혜로써 그 신앙의 십자가의 수치를 기쁨으로 견디고 결승점에 마침내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우리 시선을 여러 가지에 두지 맙시다. 빌라도 총독이 매를 실컷 때리고 온 몸이 찢기고 살점이 다 떨어져나간 예수님을 데리고 나와 그 대제사장과 악독한 유다 백성들 앞에 세워놓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보라 이 사람이로다”
이 말씀 속에 빌라도의 의도는 이것입니다.
“보거라. 이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너희 주장이 가당치나 하냐? 이렇게 일개 인간 총독의 권세 아래 이처럼 처절하게 짓뭉겨져서 한 마리 슬픈 짐승처럼 깨어지고 부서진 모습인데 무슨 그런 주장을 하면서 죽이려고 드느냐 그냥 놔두거라 그는 사람이 아니라 벌레요 구더기와 다를 바 아닌 존재 아니냐 그런 그를 어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발하여 죽이려 드느냐 살려주어도 아무 해가 안되는 연약한 존재 아니냐?”
그렇습니다. 철저히 짓뭉개져 죽음 일보 직전의 어린양이신 우리 주님의 모습이 그들 앞에 간신히 휘청거리며 서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보라. 이 사람을”
그는 놀랍게도 모든 시대 속에 영원히 울릴 귀한 명제를 남겼습니다.
“보라. 이 사람을!”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봐야 합니다. 그 십자가에서 죄인인 우리를 위하여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이리들에게 찢기신 어린 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자리에 우리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 대신 주님이 이렇게 당하신 것입니다. 저 지옥불에서 마귀에게 그토록 우리가 당해야 하는데, 주님이 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주님의 피 흘리신 십자가를 자주 생각합시다. 우리가 거역하였을 때, 우리가 죄를 범하였을 때 오래 참으신 주님을 바라봅시다. 그의 인내, 그의 피 땀 흘린 기도, 그의 말없는 순종, 그가 몸소 홀로 겪으시며 참아내신 십자가의 외로움, 그 배신의 아픔 등을 생각합시다. 또 그가 가지셨던 그 본래적 영광과 그 성품의 아름다움을 생각합시다. 그가 이 땅에서 이루신 구원의 크고 놀라운 은혜를 묵상합시다. 그가 예비하신 천국의 아름다움을 생각하며 그 나라에 들어가 어린양 예수 우리 주가 받을 영광을 묵상합시다.
이렇듯 주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의 생각과 묵상과 영적 시선이 계속된다면 분명 우리들은 세상의 고달픔, 마귀의 시험의 소리, 세상의 죄악의 달콤한 유혹들이 결코 우리를 흔들지 못할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넘어지고 낙심하고 포기하고 변질될찌라도 우리는 끝까지 인내하며 마지막 결승선까지 달음질을 멈추지 아니할 것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 장차 주님과 함께 어리양의 혼인잔치에서 누리게 될 기쁨과 영광을 인하여 고난 중에도 더욱 기대 속에 행복할 것입니다. 이 신앙의 경주길에서 한 사람도 뒤처짐없이 끝까지 결승점까지 잘 달려 주님 앞에 안겨 귀한 면류관과 영원한 기쁨을 나누는 동역자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