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하는 믿음의 기도도 받아들여지는가
마가복음 9:24,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귀먹고 말 못하는 아이의 아버지는 확고한 믿음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의 불확실한 믿음, 의심하는 믿음의 기도는 결과적으로 행복한 결말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아버지의 기도에 응답해주셨고 그 아이를 온전히 고쳐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기도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볼까 합니다.
기도란 무엇입니까? 기도란 우리의 삶의 문제에 예수님을 모셔들이는 것입니다.
기도란 내 삶의 문제에 대하여 예수님이 일하시도록 내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모셔들이는 것입니다. 기도란 우리의 문제에 관심이 전혀 없는 예수님을 내 삶에 문제에 끌어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이미 내 삶에 문제에 대하여 깊이 관심을 갖고 계시고 도와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신 예수님께 내 삶의 문제에 관여하시도록 기회를 드리는 것이 기도인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기도를 설명할 수 있는 있는 적절한 성경 말씀은 계시록 3:20 말씀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서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믿는 우리들의 삶의 문밖에, 우리 마음문 밖에 찾아와 서서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삶의 현장에 벌어진 일들을 다 알고 계시면서 우리 삶에 간섭하시며 구체적으로 돕고 싶어하십니다. 그래서 사실은 우리 가까이 문밖에 계시면서 문을 두드리며 우리가 문을 활짝 열어주기를 기다리고 계신 상태입니다. 우리가 문만 열면 예수님은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먹고 마시면서 교제하면서 함께 문제에 대하여 상의하시고 도와주시고 해결해주시는 일에 팔을 걷어부치고 일하시는 것입니다. 기도란 바로 우리의 문을 열어서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함께 우리 일을 돌보시도록 허락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란 예수님을 내 삶 속에 모셔들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항상 우리 곁에 계시면서 늘 우리의 문제, 우리의 삶의 고민, 우리의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고자 하시는 예수님을 내 마음의 문을 열고 모셔들이는 것이 기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만리 장천에 계시면서 전혀 우리 삶에 관심이 없으시고 딴 데만 신경 쓰시는 예수님을 소리 소리 질러서 우리에게 관심을 갖게 만들고 우리 문제를 떠 맡아 달라고 떼를 쓰는 것이 기도가 아닙니다. 도리어 예수님은 이미 우리가 구하기 전에 있어야 할 것을 알고 계시는 분이시며, 우리의 고민과 무거운 삶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주실 것인가에 대하여 이미 해결 방도를 잘 준비해놓고 기다리고 우리 문밖에 서 계신 분입니다. 그런 분이 우리 문밖에서 이미 서 계시며 문을 두드리고 계시면서 우리가 그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문을 활짝 열여주시기만 기다리는 중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란 쉬운 것입니다. 그냥 예수님께 문만 열어들이기만 하면 예수님께서 곧장 환한 얼굴로 들어오셔서 우리 마음의 거실에 오셔서 고민과 근심과 낙담으로 인하여 어두운 우리들에게 환한 빛으로 비추셔서 소망을 주시고 힘을 주시고 격려해주시고 문제를 말끔히 해결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란 마치 숨을 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숨을 쉬면 바깥의 공기가 우리 폐에 그냥 들어오는 것과 같습니다. 기도란 영혼의 호흡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가 폐로 숨을 들어마시면 그냥 신선한 공기가 들어오듯이, 예수님께 마음 문을 열면 그냥 예수님께서 우리 삶에 힘들이지 않고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거주하면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이 기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란 힘이 많이 들고 어려운 것이 아니라 어찌 보면 참 쉬운 일입니다. 마치 숨을 꾹 참는 것보다 숨을 들어마시고 내쉬는 것이 더 쉬운 것과 같습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자연스럽게 숨을 마시고 또 내쉬는 것처럼, 우리 곁에 계시면서 늘 문밖에서 문을 두드리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반갑게 문을 활짝 열어드리는 일 곧 기도를 쉽게 생각하시고 늘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 예수님을 우리의 삶의 모든 일에 함께 하시도록 모셔들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이렇게 예수님께 문을 활짝 열어 드리고 마음의 거실에 반가이 맞아들이고 그 말씀을 열심히 듣고 그가 마음껏 일하시도록 기꺼이 기회를 드릴 수 있을까요? 한마디로 자기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절실히 느낀 사람들이 예수님께 문을 활짝 열어드리고 간절히 모셔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 저것 다 해보았으나 사람으로서는 절대로 자기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절실히 느낀 사람들이 예수님이 문을 두드릴 때 기꺼이 문들을 활짝 활짝 예수님께 열어 드립니다. 예수님께 대문도 활짝 열고 현관도 열고 안방 문도 열고 작은 방문도 열고 다락방문도 다 예수님이 들어가실 수 있도록 열어드리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 문제를 놓고 아무리 스스로 고쳐보려고 해도 도저히 해결할 수 없다고 고통스럽게 인정하는 사람이 만일 예수님께 나와 솔직하게 자기의 문제를 고백할 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죄 문제에 있어서 난 못한다고 주님 도와달라고 간청하는 자에게 예수님께서 열려진 문에 기꺼이 들어오셔서 단단히 얽어맨 죄의 결박을 하나씩 하나씩 단칼에 끊어주십니다. 그의 진홍 같은 붉은 죄를 완전히 깨끗이 씻어주십니다. 바윗돌 같이 무거운 죄악들을 깊은 바닷속으로 던져 다시는 찾지 못하도록 해주십니다.
남편의 구원 문제, 자녀의 구원 문제를 놓고 그 동안 애써 보았지만 더 완악해집니다. 그래서 아무리 애써도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못하겠다는 무력감과 절대 한계를 더 느낍니다. 그러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와서 자기의 이 무력함을 솔직히 고백할 때 주님께서 그 문제를 대신 받아들이시고 놀랍고 기이하게 완악한 남편의 심정의 변화를 일으켜주시고 고집스럽게 반항하는 자녀의 마음도 놀랍게 완전히 돌려 놔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그 외에도 삶의 여러 가지 문제를 만나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도저히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습니다. 이 문제는 자기의 능력으로 도저히 해결 불가능한 일입니다. 무력하고 연약해서 완전히 자기를 포기한 상태에서, 문밖에 계신 예수님께 문을 열고 그러한 자기 고민을 털어놓고 자기의 무력함을 솔직히 인정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그의 무능력과 한계를 책망하시거나 무능력함을 비난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즐거이 그 문제를 친히 맡아주시고 기이하고 놀라운 방법과 능력으로 그 문제를 해결해주십니다.
물론 이렇게 자기의 연약함과 한계를 절감하고 예수님께 솔직히 고백하면서 도와주심을 청한다고 해서 시간적으로 곧장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과 무력함, 무능함을 안타까워하시며 그런 우리를 껴안으시며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하여 계속하여 일하신다는 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시편 말씀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 땅에서 겪는 많은 고난과 역경 중에 인간의 연약함과 무능함을 절감하면서 그 연약함을 하나님께 아뢰는 고백들로 가득차 있음을 보여줍니다. 시편의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그렇게 연약함과 고통을 하나님께 아뢰는 기간이 길고 오래 지속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고백들을 통하여 우리의 아픔과 고민과 슬픔에 동참하십니다. 우리의 환난에 동참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로해주시고 이길 힘을 주십니다. 그리고 종국적으로는 시편 126편 5,6 말씀에,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고 하신 대로, 눈물로 뿌린 기도의 씨앗들로 인하여 기쁨으로 충만한 응답의 곡식 단을 거두는 역사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할렐루야.
한 가지 더 여기서 생각할 점은 기도에 있어서 믿음이 비록 온전하지 않더라도 주님은 용납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기도란 예수님을 자기 삶에 모셔들이고 자기의 무력함을 인정하면서 자기의 문제를 예수님께 맡기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기도 행위에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기도로 나온 자들에게 믿음을 강조하셨습니다.
“네 믿음대로 되라”
“네 믿음이 크도다”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도, 못 듣고 말 못하는 아이의 아버지에게 예수님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고 기도하는 자의 믿음을 강조하셨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이 아버지의 믿음은 처음부터 나중까지 온전한 믿음, 장성한 믿음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처음에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아이를 고쳐주기를 바랄 때에도 믿음이 부족한 상태였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왔을 때에도 예수님께 고백하는 말에는 믿음이 부족함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귀신이 그를 죽으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좀 도와주옵소서’라는 말은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예수님조차도 자기 아들의 심각한 질병을 못 고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하면서 좀 도와달라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니 여전히 믿음이 부족합니다. 그 때 예수님으로부터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는 책망의 뜻이 담긴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이 아버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렇게 소리를 질러서 곧장 응답합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이 대답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은 이 아버지가 믿는다고 하지만 사실 자기의 마음에 여전히 확신은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믿음이 없는 것을 스스로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믿음 없는 상태를 예수님께 솔직히 고백하면서 자기 믿음이 더하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아버지의 믿음은 의심이 섞인 믿음입니다. 연약한 믿음입니다. 흔들리는 믿음이요 갈등하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아버지의 믿음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모를 리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 아이 아버지에게 요청한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다”라는 확고한 믿음에는 어림없는 함량 미달의 믿음을 가진 것을 잘 아십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온전치 아니하니, 네 아이는 고치지 않겠다.”라고 대답하셨습니까? 그 아버지의 믿음이 연약하고 불완전하고 의심이 여전한 믿음이지만 예수님은 기꺼이 그 사람의 아들을 깨끗이 고쳐주셨지 않습니까?
이것을 볼진대, 우리들이 믿음이 부족하다고 해서 기도에 용기를 잃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기도할 때 우리가 가지는 믿음이 비록 의심이 섞여 있고 흔들리며 연약하며 갈등하는 믿음일지라도 주님은 얼마든지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주시고 우리의 삐끔히 열어놓은 문으로도 즐거이 들어오셔서 우리들의 고민과 아픔과 슬픔과 상심한 마음을 어루만져주시고 우리의 깊은 슬픔과 큰 문제를 기꺼이 도와 해결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믿음이 부족해서 기도해도 소용없어~”라고 생각하고 기도를 시작하지 못하거나 기도하다가 그만 포기하거나 응답에 대한 소망을 포기한 채 형식적인 기도로 일관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기를 간절히 부탁합니다. 주님이 요구하는 우리 믿음의 수준은 우리의 고통과 문제들을 주님 앞에 기꺼이 가지고 나와 털어놓으면서 주님께 도와주시기를 청하는 정도면 충분합니다. 문제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와 울면서 털어놓고 도와주시기를 청하는 것만으로 이미 응답해주시기에 족할 만큼의 믿음을 주님 앞에 보여주신 것입니다. 죄가 많다고 해도 용서를 청하기 위하여 기도하러 주님께 나오러 올 만큼의 믿음이 있다면, 그는 용서받을 만큼의 충분한 회개와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의 십자가 한편에 매달린 강도의 회개의 고백조차 받아들여주신 예수님께서 어찌 죄가 많다고 그를 내치겠습니까?
그러므로 응답이 더디다고 내 믿음이 부족해서 응답받지 못할 것이라고 주저앉지 말고, 주님이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다 알고 계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가장 멋지게 응답해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계속하여 간절히 기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기도란 예수님을 내 삶에 모셔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이미 우리 곁에 오셔서 우리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주님 앞에 문을 열어드리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란 쉬운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돕고 싶어합니다. 그러니 기도합시다. 주님께 나와 내 연약함을 털어놓기만 하면, 내 문제를 진심으로 맡기기만 하면 족합니다. 응답해주시기에 넉넉한 믿음으로 주님은 보시고 놀라운 도움의 손길을 펼쳐보이실 것입니다. 모두가 기도에의 용기를 가지고 주님 앞에 담대하게 더 달려나와 주님과 함께 삶의 모든 문제를 나누는 복된 동반자가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