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반의 약 30년 동안, 인도네시아는 식민 통치자에 의해서 새로 확장된 영토의 설정과 그들에 의한 새로운 식민 정책을 묵묵히 수용하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 기간 동안, 인도네시아인들은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또 사회, 종교적으로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여 새로운 시대에 대비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막연하지만 폭넓게 하고 있었다. 교육을 사회 발전의 기본요소로 인식하고 있던 식민 정부의 관리들은 분명하게 현대적이라고 할수 있는 새로운 조직을 만들었다. 이 조직은 20세기 인도네시아의 주요한 사회적 변화와 문화적 흐름을 대변해 준다. 이들 구성원은 대부분이 아방안 계층이었는데 이들은 무슬림을 자처 하면서도 이슬람교리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다소 부족한 경향이 있고, 이슬람의 의식도 형식적으로 따르는 명목상의 이슬람 교도였다. 이들 조직에는 부디 우또모, 이슬람연합과 종족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이익 대변을 위하여 티모르 동맹, 까움버따위, 쟈바카톨릭정치협회등이 생겨 났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무엇보다도 인도네시아사회의 개혁운동과 급진 사상과 사회주의 세력의 대두였다. 민족주의 운동의 서막은 인도네시아 공산당(PKI)의 폭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폭동의 실패로 인도네시아인들의 생활은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그러나 이변화가 발전한 것인지 후퇴한 것인지확실하지 않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인도네시아인들은 분열의 감정을 겪었으나 이를 계기로 인도네시아 민족주의 발전을 위한 현실적인 인물들이 나타났고, 이슬람은 진정한 개혁을 경험했으며, 많은 인도네시아 인들은 네덜란드 식민 정부의 본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결국 인도네시아 민족 지도자들은 이러한 모든 정치적 요소와 사회적 여건들이 그들을 단결시켜 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러한 인식을 통해서 민족주의가 발아한 것이다.
1927년 말, 수카르노의 주도하에 이슬람 연합당, 부디 우또모, 수라바야 스터디 클럽, 그리고 기독교를 포함하는 주요 종교 조직 등이 PNI와 함께 인도네시아인민정치조직연합회라는 기구로 결합되었다. 민족주의 사상을 공통 요소로한 인도네시아 민족주의가 이렇게 해서 본격적으로 개화하기 시작 하였다.
인도네시아 민족주의 성장은 여러 사회적, 정치적 조직들이 아전인수격인 판단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피상적인 발판뿐만 아니라 보다 긍정적인 발판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수카르노등 많은 지도자들은 인도네시아인들은 모두 하나의 민족이고, 하나의 민족은 각각 독자적인 생존권을 향유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폭넓게 인식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