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우편 강도, 과연 부끄러운 구원의 증거인가?(김삼환, 김장환, 장향희, 한영훈 박사가 추천한 김경규 교수님의 책 중에서...)
이제 ‘단순한 믿음을 통한 구원’의 예로 성경이 제시한 오른편 강도의 믿음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윗글을 쓰신 목사님의 논지는 이렇습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오른편 강도가 결국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강도는 너무 짧은 시간 동안(고작해야 반나절)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믿음이 진짜인지 확인할 수 있는 열매를 기다릴 여유가 전혀 없었기에, 그의 믿음은 단순한 믿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나 순종이 없는) ‘단순한 믿음’을 통해 구원 받는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분의 예증은 일견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 예증은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성경을 한 부분만 보았다’는 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예증에서와 같이 “오른편에 달린 강도는 삶에 언제 변화가 나타날 기회가 있었느냐, 그런 것이 없었어도 구원 받아 천국에 가지 않았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보십시오. 두 강도는 처음에는 다 같이 예수님을 비방하고 욕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오른편 강도는 회심을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7장, 마가복음 15장, 그리고 누가복음 24:39절 이하의 기록을 대조해 보면 나타납니다.
누가와 달리 마태와 마가는 두 강도들이 예수님을 조롱하고 욕하는 모습을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얼핏 보면 성경이 상반된 내용을 기록해 놓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십자가에 달린지 얼마 안 된 후의 상황을 묘사해 놓고 있습니다. 반면에 누가는 십자가에 달린 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이제 운명을 많이 남겨 놓지 않은 어느 시점의 정황을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고작해야 반나절”밖에 남지 않은 시점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태와 마가의 증언에 의하면, 처음에는 두 강도 모두 다 예수님을 저주하고 비방하며 욕을 했습니다.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마 27:44).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 하더라” (막 15:32).
그러나 마가의 증언에 의하면, 오른쪽 강도는 어느 순간부터는 왼편 강도와 더 이상 행동을 같이 하지 않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도 처음에는 왼편 강도와 똑 같았습니다. 같이 욕하고 같이 조롱하고 같이 저주했습니다.
그런데 언제 어떻게 된 일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오른편 강도는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에게 변화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누가는 바로 그 오른편 강도의 변화된 모습에 초점을 맞추어 증언하고 있습니다.
오른쪽 강도는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의인되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마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에 대해 그는 이미 들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을 가까이서 겪어보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처음엔 예수님을 욕하고 조롱하고 저주했지만, 그가 어느 정도의 시간을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과 함께 하고 난 다음에는 달라졌습니다.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을 용서해 달라는 예수님의 기도는 아마도 그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움직이는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또는 당신을 조롱하는 수많은 무리들을 향하여 대항하거나 남을 욕하거나 원망하지 않는 고결한 모습은 그의 마음을 움직이는 또 다른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크나큰 고통 중에서도 감사하며 평안을 잃지 않는 주님의 모습에 오른편 강도는 큰 감명을 받았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는 그를 바라보면 볼수록 그는 심경에 변화가 생겼을 것입니다. ‘과연 듣던 대로 이분은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구나.’ 그는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림들, 회심한 사람들의 특징은 바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성전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한 이사야는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았습니다. 이해되지 않은 말씀에 순종했더니 그물이 찢어질 듯이 고기를 잡은 베드로도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 앞에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눅 5:8).
마찬가지로 오른편 강도도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바라보고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는 것은 마땅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눅 23:41). 자신이 죄인임을 철저히 깨달은 사람의 고백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믿음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는(오른편 강도)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눅 23:40). 그리고 악한 자를 꾸짖고 대적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변호했습니다. 그는 하늘나라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하늘나라의 주인이 예수님인 것도 알았습니다.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눅 23:42). 그는 하늘나라를 소망했습니다. 도저히 바랄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이 하늘나라를 바라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간직했던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던 그 믿음입니다” (롬 4:18).
그에게는 참으로 놀라운 변화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마음이 새로워졌습니다. 그는 비록 늦었지만 이제 더 이상 왼쪽 강도와 같지 않았습니다. 그는 달라졌습니다. 더 이상 옛날의 그가 아니었습니다. 이제는 왼쪽 강도의 잘못을 꾸짖는 자가 되었습니다.
원래 이 오른편 강도도 십자가에 처음 달렸을 땐 왼편 강도와 같이 예수님을 비방하고 욕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왼쪽 강도가 황당했을 것입니다. “뭐 이런 녀석이 다 있어? 너 갑자기 왜 이래?” 뭐 이런 저런 대화가 오고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한 것까지 다 기록해 놓지 않았을 뿐입니다. 마음이 새로워지면 행동에 변화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즉, 믿음은 행동의 변화를 동반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마지막 날에, 양과 염소를 가르실 때 그들의 세상에서의 행위를 심판의 기준으로 삼으시는 것입니다(마 25:31-45).
믿음을 오해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믿음으로 천국 간다’고 말씀하시고서 왜 우리의 삶의 행위를 근거로 하여 심판하신다고 하시는지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오로지 그의 삶의 행위로서만 나타나고 증거 되며 입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약 2:18). 오른편 강도는 회심하여 아주 뚜렷한 행동의 변화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오른편 강도는 비록 믿음의 연조(?)는 짧지만 그는 온전히 회심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온전한 회개의 열매도 맺은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욕하던 자리에서 예수님을 변호하는 자로 바뀌었습니다. 오늘날 예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이와 같이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변호하고 나설만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지금 죽어가는 사람이 확실히 회개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을 확실히 믿지 않았다면, 누가가 기록한 이러한 이상한 일들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른편 강도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는 더 이상 죄악의 편에 서지 않았습니다. 그는 더 이상 예수님을 비방하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마귀를 대적하는 자의 자리에 든 것입니다. 그는 인격적인 예수님을 인격 대 인격으로 만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아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분에게는 옳지 않은 것이 없다”고 담대히 말할 수 있었습니다(눅 23:40). 그리고 그는 예수님은 아무리 흉악한 죄인이라도 참되게 회개하면 과거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고 받아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소망 중에 예수님을 믿었습니다(눅 23:42).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오른편 강도의 회개와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는 다음 말씀처럼 예수님은 그 오른편 강도를 받아 주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눅 24:43). 얼마나 마음이 새롭게 되어 그 생각이 변하고 삶에 변화가 나타나느냐가 중요란 것입니다(롬 12:2). 오른편 강도는 비록 짧은 시간밖에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자신의 회개의 열매와 믿음을 입증할 만한 확실하고도 많은 증거들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데도 ‘오른편 강도는 자신의 믿음이 참인지 증명할 만한 열매를 맺기에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 너희가 그러고도 천국 갈 줄 아느냐! (김경규)에서 발췌 -
첫댓글 오른 편 강도의 구원에 대해 이렇게 속 시원하게 설명하신 것을 읽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 상황이 그려집니다. 이상하게도 오른편 강도가 친근하게 느껴지고 사랑스러워졌습니다. ^^ 아마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는 자가 되었기 때문일것입니다. 감사합니다.
글 감사합니다.
전단지만 주면 잘 보지 않게 되지요.
그러나 본 글을 읽게 된다면 위 책을 다시 보게 되고 세미나에 관심을 더 갖게 되리라 여겨 집니다. 한 번 요약해 본 것을 올려 볼게요
다른 카페에 많이 스크랩해서 올려 주시면 좋겠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단순히 입으로 주를 시인했다고 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할 좋은 글입니다.
강도이야기를 믿음으로만 연결했는데 행위로도 연결되는군요. 내적변화에 의한 외적인 표현이 분명하죠.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니라.
아멘, 단순히 입으로만의 개념적 시인때문이 아니라, 그 한편 강도-우리가 통상 우편이라고 말하는-는 온전한 열매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증명된 것입니다.
천국은 확실히 있다 로 퍼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