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vs 노자
<공자는 현실 2차원, 노자는 자칭 4차원>
생노병사의 3차원에 사는 우리의 처신은?
중국의 인문학엔 노자보다는 공자가 한 수 위라고 항상 보고 있다.
노자는 그의 저술 도덕경으로 무위자연 등등 좋은 말만 골라 치장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0.2% 부족한 도인취급을 당한다. 그건 중국인들이 똑똑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동물적 본능으로 그 이유를 느끼기 때문이다. 그럼 그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다음을 보면 그대로 즉시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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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道德經)’의 유명한 첫 구절 “도가도(道可道) 비상도(非常道)”가 그것이다.
얼핏 읽으면 “도라고 이름 붙일 수 있으면 오래가는 도가 아니다”라고 했으니 마치 이름 붙이면 그 자체로 도가 아니라는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뒷부분과 함께 읽으면 뭔가 이름 붙일 수 없지만 오래가는 도가 ‘있다’는 말이 된다.
이런 사고를 뒷받침해주는 것이 있다. ‘도덕경’에는 어이없게도 ‘참[眞]’이라는 말이 매우 고집스럽고, 지나칠 정도로 자주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미 말하는 사람이 참을 주장하는 순간 함께 이야기할 사람이 끼어들 여유 공간은 사라진다. 찬성을 하면 바로 종속이 되고, 논박을 하면 바로 정면 대결이 되기 때문이다. 바로 양자 중 택일이다.
이에 공자가 쓴 책은 아니지만 그가 등장하는 ‘논어’에서 공자는 단 한 번도 진(眞)을 말하지 않는다. 심지어 ‘정말로’라는 부사로도 쓰지 않는다.
우연일까? 그렇지 않다. 공자는 ‘논어’에서 무필(毋必)했다고 제자 자공(子貢)이 묘사했다. 무필(毋必)이란 옛날에는 “기필(期必)하지 않았다”고 옮겼다. 오늘날 ‘기필코’라고 할 때 남아 있는 그 ‘기필(期必)’ 말이다. 언제까지 뭔가를 반드시 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인데 이때 ‘반드시’나 ‘결코’ ‘절대’ 등을 말하지 않는 것이 무필(毋必)이다.
공자는 앞일뿐 아니라 지나간 일을 말하거나 기록할 때도 무필(毋必)했다. 그래서 그가 즐겨 쓰는 표현법이 바로 ‘아마도[其]~일 것이다[與]’인데 순임금이 대효(大孝)라고 말할 때도 반드시 “아마도 순임금은 대효이셨을 것이다”라고 하고서 바로 다음에 그 근거 사실을 열거한다. 근거 제시로 그의 말을 이끌 따름이다. 이처럼 무필(毋必)하니 제자 등 다른 사람도 참여할 공간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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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공자가 긍정(肯定)의 우익이라면, 노자는 부정(否定)의 좌익으로 가르게 된다. 肯定은 상대의 생각이나 의견을 옳다고 인정하는 말이지만, 否定은 그렇지 않다고 단정하는 말이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시종일관 부정으로만 상대를 꾸짖고 그의 논지를 펴고 있다. 논어에는 넘쳐나는 자기 반성을 찾기 어렵다.
참조: 이한우의 간신열전(168) 무필(毋必)) 중에서 인용함 in 조선일보 2023.1.5.(목) A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