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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레 치메 라바레도에서의 비아페라타 등반은 제 1차 세계대전 시 파 놓은 동굴과 참호를 약 3-4시간 오르고 횡단하는 코스이다. |
1999년 9월 뉴욕 생, 노슨 하이랜드 고등학교 1학년, 최연 다이애나(Diane)는 오바마 대통령상을 받은 수재이자 건축사나 월 스트리트 금융인을 꿈꾸는 16살 소녀이다. 다이애나와 그의 아빠 에릭(최지연)이 처음으로 알프스에 같이 오른 것은 2년 전이다. 30년 이상 뉴욕에서 생활한 BSW/PPF Group의 회장이자 산악인인 아빠의 꼬임에 넘어가 미국에서 알프스까지 산행을 참가한 다이애나는 밝은 뉴요커였지만 어딘가 알프스에서 태어난 청순한 하이디 같은 면이 있었다. 마테호른을 끼고 산길과 호수를 도는 첫 알프스 산행에서 다이애나는 파란 하늘과 만나는 만년설, 푸른 초원에서 자유롭게 노는 동물들과 새들의 노래, 야생화의 향기와 아름다운 알프스를 가슴에 가득 안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2년이 지난 후 16살이 된 다이애나가 티롤 알프스의 정수 돌로미테 산속에 피어난 야생화처럼 다시 나타났다.
발 푸스테리아 비아페라타 코스는 난이도가 상당히 높은 루트이다. |
메스너와의 만남으로 시작한 돌로미테의 모험
로마(Roma)와 피렌체(Firenze)를 짧게 여행하고 하루라도 빨리 산에 오고 싶었던 에릭은 토스카나(Toscana) 지방을 더 보고 싶어 하는 딸 다이애나를 꼬드겨 볼자노에 도착 즉시 솔다(Solda)로 차를 몰았고 메스너 비박 산장에 몸을 풀었다. 2년 전 메스너가 인수해서 산장으로 오픈 한 숙소는 매우 담하고 깨끗하며 이번 겨울 리모델링을 해서 보다 고급스럽게 증축한다고 한다. 일행은 메스너의 7개의 박물관중 빙하, 얼음, 크레바스를 주제로 한 솔다 박물관 옆의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라인홀드 메스너가 진행한 야크 방목 산행은 유럽 내 방송과 기자들이 많이 참가했다. |
아빠 에릭의 영웅이었던 메스너를 만나는 것으로 다이애나의 이번 돌로미티 산행을 시작했다. 매년 6월 말 주말에 메쓰너는 히말라야에서 데려온 야크를 티롤의 고산 올트레스(Oltres) 산에 방목하는 행사를 한다. 이 행사는 주변 유럽 국가의 방송국과 기자들, 여행자들 수백 명이 참가해서 메스너와 같이 약 2-3시간을 걸으며 산행을 한다. 케이블카 역 옆의 밀라노 산장까지 올라가서 야크를 방목한 후 오후 3시에는 메스너 산악 박물관에서 사인회를 했다. 에릭과 다이애나는 헬멧과 옷에 메스너의 사인을 받고 같이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했다.
미국 생활 30여 년 동안 클라이밍을 거의 해 보지 못한 에릭과 다이에나의 등반실력을 테스트할 겸 살레와 인공 암장에서 간단한 훈련을 했다. 본사 건물 옆에 있는 건물 직벽에 비아 페라타 등반을 할 수 있는 루트를 만들어 놓았다. 직벽과 오버행에 처음 매달린 다이애나의 커다란 눈이 더욱 커지며 무척 무서워했지만 등반이 반복되자 점점 흥미를 느끼는 모습을 보였다.
뜨레 치메가 선사하는 아름다운 풍경 |
이탈리아의 역사를 만나는 비아페라타
다음 날 셀라 산군에서 비아페라타 등반을 하기로 했으나 다이애나가 어제의 훈련으로 겁을 먹었는지 배가 아픈 것 같다고 하여 등반 대신 뜨레 치메 라베레도로 갔다. 바닥이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아름다운 미주리나 호수에서 하루를 묵으며 아침 이른 시간 뜨레 치메로 갔다. 약 2시간의 워킹 후 빳쏘 뜨레 치메에서 오른편으로 약 10분을 올라가자 비아페라타를 시작하는 터널과 1차 세계대전 시 파 놓은 참호를 만났다.
100년 전 전쟁 시 수많은 군인과 무기를 벽 속에 숨겨 놓고 치열한 산악 전투를 벌였던 곳. 등반 장비를 착용하니 전쟁 시 희생당한 군인들을 위한 묵념을 절로 하게 된다. 볼자노에서 오는 도중 빳쏘 팔자레고(Passo Palzarego)에 있던 전쟁 박물관이 생각났다. 수많은 군 막사와 철조망, 참호들, 전사 기록 사진과 포스터들은 주인 잃은 무기들과 무언의 항의를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조국을 위해 싸웠고 이 산의 영혼이 되었지만 이제 다시는 전쟁 없는 평화로운 산을 지켜달라고,
중간 중간 유리창이 없는 창을 통해 뜨레 치메의 거벽을 옆으로 볼 수 있으며 주변의 아름답고 매혹적인 산군을 아래로 내려다보며 오를 수 있다. |
훈련 등반으로 실전 벽 등반에 겁을 많이 먹고 있던 다이애나가 헤드 랜턴을 켜고 터널을 지나며 가끔 만나는 유리창 없는 창문에 펼쳐지는 파노라마를 보고 벽 중간에 있는 잔설 지대에 고정되어 있는 와이어로프에 카라비너를 통과시키며 안정적인 등반을 하자 다시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거대한 돌로미테에 놀랐던 뉴요커는 다시 알프스의 하이디가 되어 여러 야생화들과 노래를 하고 산 속에 사는 동물들과 새들에게 웃음을 선사했다.
갑자기 내린 약간의 비와 안개에 벽이 미끄러워져 정상 등반은 포기했다. 정상 벽에 사람들이 줄을 서서 오르내리는 모습이 마치 주말의 북한산 백운대 같았다. 에릭은 조금 아쉬운 눈치였지만 아이들과 함께이니 안전이 우선이었다. 클라이밍 다운을 해야 하는 커다란 벽에는 눈과 직벽 구간이 많아 다이애나가 다시 무서워하기 시작했으나 다행히 일행과 호흡을 잘 맞추며 무사히 하산했다.
발디 솔레는 협곡의 물살이 세기로 유명해서 레프팅, 카약등 물에서 하는 익스트림 월드컵 대회가 열리는 곳이다. |
급류가 일품인 돌로미테 익스트림 레프팅
레프팅과 카약 월드컵이 열리는 장소인 발 디 솔레(Val di Sole)는 산세가 멋지지는 않지만 급류가 가히 일품이었다. 라면이 먹고 싶다는 다이애나의 소원을 풀어주는 날이기도 했다. 미국서부터 가져 온 컵라면을 레프팅 시작하기 전에 여유를 가지고 먹고 단팥죽까지 먹으니 두 아이의 표정이 밝아진다. 특히 해병대 수색대원이 되고 싶은 17살 소년 임동근에게 레프팅은 마치 실전 훈련을 하는 것처럼 기대가 되는 모양이다.
잠수복과 구명조끼를 입고 헬멧을 쓰고 안경테를 끈으로 질끈 묶은 임동근의 표정이 마치 특수 임무를 받고 침투하는 요원처럼 보인다. 기초 훈련을 하고 배에 승선하자마자 다이애나가 웃고 떠들기 시작한다. 럭비 선수처럼 넓은 어깨의 가이드가 한국어로 노를 앞으로 뒤로 젓는 게 무엇이냐고 묻고는 계속 ‘가자’하고 뒤에서 호령한다. 3시간 계속된 익스트림 레프팅은 급류를 따라 춤을 추기 시작했다.
몸이 튕겨 나갈 정도로 출렁이기도 하고 놀이 공원의 열차처럼 몸이 거꾸로 처박힐 정도로 앞으로 쏠리기도 하고 뒤로 날아갈 것 같기도 했다. 물살이 약한 곳에서는 가이드가 휴식시간을 주면 다이애나가 코를 고는 소리를 내기도 하고 긴 다리의 임동근은 발을 보트에서 꺼내 펴기도 했다. 해병대원들처럼 무거운 고무보트를 머리위로 들어 올리고 걸을 때는 정말 군가라도 부르고 싶어졌다.
다이애나와 임동근이 참가한 서바이벌 게임은 특수부대원간의 전투 게임과 흡사한 산에서 하는 실전과 비슷한 총격, 유격전이다. |
서바이벌 게임과 승마, 또 다른 돌로미테의 즐거움
서바이벌 게임 하는 날 임동근은 화가 많이 난 모양이었다. 애당초 계획은 필자와 에릭도 같이 게임을 하기로 했었지만 에릭이 등반을 원해 두 아이를 서바이벌 게임을 하는 브렛사노네(bressanone) 산에 데려다 주고 우리는 등반을 떠났다. 철두철미한 성격의 소년에게 한번 약속은 영원한 약속인데 필자가 몇 번이나 같이 게임을 가기로 하고 안 갔으며 특히 이번에는 동호인들에게 인원을 미리 통보한 상태에서 우리가 산으로 클라이밍 간다며 다이애나의 보호 임무를 맡기나 팀원들에게는 민망하고 두 아빠에게는 화가 났나 보다. 다행히 다이애나에게 기관총을 쏘는 법과 탄창을 갈아 끼우는 법 등을 설명하고는 굳었던 얼굴이 조금은 풀린 채 팀원들과 숲 속으로 사라졌다.
연일 계속된 등반과 익스트림 스포츠로 피곤해 하는 다이애나를 위해 아빠 에릭이 좋은 아이디어를 냈다. 등반 일정을 취소하고 다이애나가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인 승마를 하기로 했다. 볼자노 주변에는 수많은 승마장이 있다. 말들은 산에 풀어 놓고 건강하게 지내게 하고 승마 시에만 안장을 올린다. 승마 선생이 다이애나를 데리고 출발하려다가 에릭이 같이 말을 타겠다고 하니 다이애나의 눈과 입이 생글 생글하게 변한다.
돌로미테의 파노라마를 자신의 발로 걷고 등반을 하지 않고 말을 타고 편하게 다녀온 다이애나의 만족스러워 하는 목소리는 멀리서도 들렸다. 말에서 내리며 에릭이 딸에게 말한다. “난 내년부터는 자유야, 다이애나는 혼자 여행을 하고 나는 산에만 오를 거야.” 에릭은 내년에 돌로미테를 다시 찾아와 실컷 벽 등반을 하고 갈 것이고 다이애나는 피렌체를 중심으로 한 프로렌스 지방을 여행한단다. 피렌체 지방에서 나오는 끼안띠 와인을 좋아하는 에릭이 정말 다이애나를 혼자 여행하게 할 것인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올트레스 산을 배경으로 그랑 제르브 북벽 등이 웅장하게 펼쳐져 있다. |
돌로미테 아웃도어 체험이 성장의 발판이 되기를
이제 미국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다이애나를 끌어안으며 귓속말을 했다. 2년 반 전 알프스에서부터 다이애나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이었다. “최연 다이애나, 월 스트리트에서 일을 하거나 유명한 건축 디자이너가 되더라도, 꼭 한국을 위해서도 큰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주세요.” 다이애나의 볼이 장미공원 로젠가르덴의 꽃처럼 붉게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