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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공 정광필(鄭光弼)신도비명(神道碑銘)
좌찬성(左贊成) 소세양(蘇世讓) 撰
동래 정씨(東萊鄭氏)는 성보(姓譜)에 있어 가장 명가(名家)로 꼽히는 가문이다. 대대로 유명한 사람을 배출하였는데, 고려(高麗) 때에 정목(鄭穆)이라는 분이 관직이 좌복야(左僕射)에 이르렀으며, 네 아들을 두셨는데, 모두 현달(顯達)하였다. 그중에 정택(鄭澤)은 찬선대부(贊善大夫)가 되었다. 11대를 내려와 영의정(領議政)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에 이르러 더욱 크게 떨쳤다.
공의 휘는 광필(光弼) 자(字)는 사훈(士勛)으로,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을 지낸 익혜공(翼惠公)의 둘째 아들이다. 익혜공(翼惠公)의 휘(諱)는 난종(蘭宗)인데, 바로 성종조(成宗朝))의 이름난 재상(宰相)이다. 초서(草書)와 예서(隸書)에 뛰어났으며, 문장(文章)에 능하였다. 네 차례 과거(科擧)에 급제하였고 한 차례 훈맹(勳盟)에 참여하였다. 장상(將相)의 재주가 있었으며 동래군(東萊君)에 봉해졌는데, 공이 현귀(顯貴)해진 까닭에 공과 같은 관직에 증작(贈爵)되었다.
증조(曾祖)의 휘(諱)는 귀령(龜齡)인데, 결성 현감(結城縣監)을 지내고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조(祖)는 휘(諱)가 사(賜)인데, 일찌기 과거에 뽑혀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을 지내다가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하여 외직(外職)에 보임되어 마지막 관직으로 진주 목사(晉州牧使)를 지냈으며,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었는데, 모두 공의 관질(官秩)에 맞추어 추은(推恩)한 것이다. 선비(先妣)인 정경부인(貞敬夫人)은 이씨(李氏)인데, 또한 완산(完山,전주)의 망족(望族)으로, 장사랑(將仕郞) 이지지(李知止)의 따님이다. 천순(天順) 임오년(壬午年,1462.세조8) 6월 을축일(乙丑日)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기상과 도량이 있어서 우러러 바라보고 걷고 뛰는 등의 예의범절이 보통아이들과는 크게 달랐으므로, 익혜공(翼惠公)이 기특하게 여기고 사랑하였다. 공은 어려서 질병이 많아 집 바깥의 스승에게 나아갈 수가 없었으므로 백고(伯姑)인 정씨(鄭氏)를 따라 수업하였는데, 대의(大義)를 대략 이해하였다. 정씨는 바로 익혜공의 누님으로 여자 중의 대가(大家)였는데, 사람을 알아보는 식견이 있어서 공이 원대하게 이루리라는 것을 알고는 자손(子孫)들을 맡겼다.
자라서는 힘써 배움에 노력하여 경전(經傳)과 자사(子史)를 전심(專心)하여 독송(讀誦)하였는데, 은미한 말과 심오한 뜻을 묵묵히 이해하고 환하게 연구하여 널리 통하지 않음이 없었다. 특히 좌씨춘추(左氏春秋)와 주자강목(朱子綱目)을 좋아하여 손에서 잠시라도 책을 놓는 일이 없었으니, 속유(俗儒)가 다른 사람의 글귀를 표절하여 필요할 때에 써먹거나 과거 시험에 응시하기 위하여 공부하는 것과는 같지 않았다. 성품이 독실하고 효성스러웠는데, 나이 약관(弱冠)이 넘어 연달아 부친상과 모친상을 당하자 6년 동안 여막(廬幕)을 지키며 친히 제전(祭奠)을 갖추었으며, 슬퍼하여 몸을 훼손함이 상제(喪制)에 벗어났으므로 사람들이 그 지극한 정성을 칭찬하였다.
홍치(弘治) 임자년(壬子.1492.성종23)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이어 대과(大科)에 뽑혀 처음에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에 보임되었다가 규례에 따라 박사(博士)로 승진하였으며, 의정부사록(議政府司錄)과 봉상시직장(奉常寺直長)을 겸하였다. 공은 지위가 낮은 관리를 하찮게 여기지 않고 직무에 이바지하기를 더욱 부지런히 하였다. 부정(副正) 정성근(鄭誠謹)은 성품이 고상하여 남을 인정하는 일이 드물었는데, 공을 보고는 매우 인재 감으로 여기어 말하기를, “신중하고 후덕한 군자(君子)이다.”고 하였으며, 의정(議政) 이극균(李克均)이 일찍이 관직(館職)을 겸하였는데, 또한 공을 공보(公輔)로 기대하였다.
이때 국(局)을 설치하여 성종실록(成宗實錄)을 찬수하였는데, 조정의 명사(名士)들이 모두 모였다. 이공(李公,이극균)이 총재관(總裁官)이 되어 공을 발탁하여 도청(都廳)으로 앉히고 전적으로 편수하는 일을 위임하였다. 관원(館員)들이 여름철 고과(考課)에서 모두 성적이 깎여 중고(中考)를 맞았고 공도 이에 연루되는 상황을 면치 못하였으므로, 국(局)의 동료들은 모두가 공이 사진(仕進, 출근)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이공 혼자만은 큰소리로 말하기를, “정모(鄭某)의 넓은 도량은 틀림없이 이렇게 조그마한 일로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고 하였다. 그러자 조금 있다가 과연 공이 도착하였으니, 명공(名公)에게 추중(推重)을 받는 것이 이와 같았다.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와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에 제수되었으며, 마침내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가 수찬(修撰)이 되고 교리(校理)가 되었다. 상정국(詳定局)에서 사무가 번잡하고 많아(繁多)지자 예조정랑(禮曹正郞)으로 고쳐 임명되었는데, 오히려 지제교(知製敎)는 겸대(兼帶)하였다. 의빈부경력(儀賓府經歷)과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로 옮겼고,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를 거쳐 예빈시정(禮賓寺正)으로 승진하였다가 다시 홍문관으로 들어와 직제학(直提學)이 되었다.
이때 마침 문신정시(文臣庭試)가 막 출제(出題)되었는데, 공은 숙부(叔父)의 초상 소식을 듣고는 일찍 나와 버리고 글을 짓지 않았다. 이에 연좌되어 서반(西班)으로 폄척(貶斥)되었다가 다시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제수되었다. 계해년(癸亥,1503,연산군9)에 등급을 뛰어넘어 홍문관직제학(弘文館直提學)에 제수되었으며, 이조참의(吏曹參議)로 옮겼다. 연산주(燕山主)가 어리석고 포악하여 간언(諫言)하는 자를 원수처럼 미워하였는데, 공이 일찍이 항소(抗疏)하여 사냥에 탐닉하는 것을 간하였다가 갑자년(甲子,1504,연산군10)에 아산현(牙山縣)으로 귀양 갔다. 이때 법령(法令)이 준엄하여 귀양 처벌을 당한 자는 자유롭게 지내지 못하였는데, 공은 빗자루를 들고 관문(官門)을 지키면서도 짜증내거나 싫어하는 기색이 없었다.
병인년(丙寅,1506,연산군12) 가을에 장차 무거운 형벌(重典)에 처하고자 압송관(押官)이 갑자기 이르자 온 집안이 두려워하고 걱정하였는데, 공은 태연하게 길을 나섰다. 고을 수령이 초야(草野)에서 따라와 결별(訣別)하자 보는 자들이 안타깝게 여기며 말이 없었는데, 공은 말과 웃음이 태연자약하였다. 얼마 안 되어 어떤 사람이 와서 지금 임금을 폐하고 새 임금을 세웠다고 말하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뛸 듯이 기뻐하였는데, 공은 말하기를, “이것은 종사(宗社,국가)를 위한 대계(大計)이다. 다만 구주(舊主,연산군)의 생사를 아직 듣지 못하였다.”고 하고는 마침내 고기를 물리치고 먹지 않으매, 사람들이 그 지조에 감복하였다.
중종(中廟)께서 처음 정사(政事)하면서 경악(經幄)의 장관(長官)을 선발할 적에 부제학(副提學)으로 불러 조정으로 돌아왔고, 이어 승정원우승지(承政院右承旨)에 제수되었다. 정묘년(丁卯,1507,중종2)에 특별히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제수되었고, 무진년(戊辰,1508,중종3)에 병조(兵曹)로 전직되었으며,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거쳐 등급을 뛰어넘어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제수되고 얼마 있다가 예조판서(禮曹判書)로 옮겼다. 이조에서 예조에 이르기까지 항상 경연춘추관(經筵春秋館)과 의금부도총관(義禁府都摠管)등의 직책을 겸대하였다. 경오년(庚午,1510,중종5)에 다시 대사헌으로서 의정부좌참찬(議政府左參贊)에 제수되었다. 이해 여름에 삼포(三浦)의 왜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남쪽 지방이 소란하였는데, 전라도(全羅道) 지역과 서로 접한 곳이라 중신(重臣)을 얻어서 제압해야만 하였다. 이에 공을 명하여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삼아 위무(慰撫)하게 하자, 공은 바닷가 지역을 순찰하며 돌아다녔는데, 대체로 성진(城鎭)의 멀고 가까움과 방수(防戍)가 탄탄한지 허술한 지며, 사졸(士卒)의 강하고 약함과 군기(軍器)의 날카롭고 무딘 상태를 직접 발로 뛰면서 눈으로 조사하지 않음이 없었는 바, 그 계획이 모두 그때그때 상황에 합당하였으므로 남쪽 지방이 안정되었다. 돌아와서 병조판서(兵曹判書)가 되었는데, 전선(銓選,인사행정)이 공평하고 성실하였으며 군정(軍政)이 이내 다스려졌다.
임신년(壬申,1512,중종7)에 오래도록 권병(權柄)을 잡고 있었다는 이유로 사직하자 우참찬(右參贊)에 제수되었다. 9월에 외직으로 나가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가 되었다. 이 무렵에 북쪽 지방에 흉년이 들어 굶어 죽은 시체가 넘쳐났는데, 조정의 의론이 ‘지위와 명망이 평소부터 높고 정성을 다하여 나랏일을 몸을 바쳐 애쓰는 자가 아니면 구휼할 수 없을 것이다.’고 하였으므로, 이러한 명이 있었던 것이다. 공이 부임하여 다방면으로 굶주린 백성들을 어루만져 안정시키자, 한 지역이 이에 힘입어 온전하였다. 계유년(癸酉,1513,중종8)에 글을 내려 훌륭한 치적을 기리고 특별히숭정 대부(崇政大夫)로 승진시켰으며, 의정부우찬성으로서 관찰사를 겸하게 하였다. 공이 상소(上疏)하여 사양하였으나 윤허(允許)하지 않았다. 얼마 안 있어 우의정에 제수되었고, 조금 있다가 좌의정으로 승진하였다. 이에 앞서 의정(議政) 성희안(成希顔)이 일찍이 공을 천거하여 마땅히 단규(端揆,우의정)로 앉혀야 한다고 하였으므로, 관계의 차례를 뛰어넘어 발탁하여 등용한 것이다.
을해년(乙亥,1515,중종10)에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원자(元子,인종(仁宗))를 낳고 승하하자, 후궁(後宮) 중에 임금의 총애를 받는 자가 있어 먼저 자식을 낳은 것을 믿고서 중곤(中壼, 중전) 자리에 오르려고 엿보았는데, 상상(上相),영의정, 유순(柳洵))이 우물쭈물하면서 망설이기만 하므로 공이 당료(堂僚)를 거느리고 경전(經傳)의 의리를 끌어대어 합문(閤門)을 두드리며 강력히 아뢰자, 중전의 자리(坤位)가 이내 바로잡혔다. 병자년(丙子,1516,중종11)에 영의정(領議政)으로 승진하였다. 성종(成廟) 때부터 문(文)을 숭상하고 학문을 일으켰으므로, 김굉필(金宏弼)과 정여창(鄭汝昌)이 성리학(性理學)을 창도하여 밝히자 종유(從遊)하는 자들이 많았는데, 연산조(燕山朝)에 이르러 모두 죄망(罪網)에 몰아넣어 빠뜨려 버렸다. 중종(中廟)이 옛것을 좋아하고 선(善)을 즐거워하여 경학(經學)하는 선비들을 장려하고 등용하자, 선비들이 분발하여 힘쓰면서 ‘당우(唐虞,요순(堯舜)시대)의 치세를 조석(朝夕) 간에 이룰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는데, 개혁하여 새롭게(更張)하는 일이 점진적(漸進的)이지 못하였으므로 크게 유속(流俗)에 거리낌을 당하였다.
기묘년(己卯,1519,중종,14)에 두세 명의 신하가 거짓으로 벌레 먹은 나뭇잎과 참서(讖書)를 만들고는 후궁(掖庭,후궁)을 통해 몰래 아뢰어 천총(天聰)을 의혹시켰다. 그리고는 밤에 신무문(神武門)을 열고 편전(便殿)에 입대(入對)하자, 임금님의 위엄(天威)이 진동하여 앙화(殃禍)를 장차 예측할 수 없었는데, 어떤 이가 말하기를, “조정의 대사(大事)를 영의정(首相, 정광필)이 알지 못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고 하자, 마침내 공을 불렀는데, 공이 상(上) 앞에 이르러 만 번 죽기를 무릅쓰고 구원하여 화해시키려 하자, 상이 진노하여 일어나 버렸다. 이에 공이 상의 옷자락을 붙잡고 따라가면서 눈물이 말을 따라 흐르자, 상 또한 느껴 깨닫고서 마침내 사형의 형벌(斧鉞)을 너그러이 하였으니, 이는 공의 힘이었다.
공은 항상 홀로 거처하면서 나이 어린 무리들이 과격하여 화를 당한 것을 깊이 염려하면서 걱정거리로 삼았다. 어떤 재상이 미복(微服) 차림으로 밤에 공의 집에 와서는 ‘밀지(密旨)가 있다.’고 말하자, 공이 엄한 말로 이를 물리치며 말하기를, “오늘날의 계책으로는 잘 조정(調停)하여 사태를 진정시키는 것보다 나은 방법이 없다. 이와 같은 처치(處置)는 들어본 바가 아니다.”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또 정도(正道)를 벗어나 옳지 않은 길을 따르지 않았으므로 이내 정승에서 파직되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다. 정해년(丁亥,1527,중종22)에 다시 들어와 좌상(左相)이 되었고, 얼마 있다가 영의정으로 승진하였다. 기축년(己丑, 1529,중종24)에 병으로 사직하자, 내시(內侍)를 보내어 문병하고 이어 약이 되는 음식(藥餌)을 하사하였다. 신묘년(辛卯,1531,중종26)에 나이를 핑계 대어 치사(致仕)하자, 궤장(几杖)을 하사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처음에 김안로(金安老)가 아직 현달하지 않았을 때에 공이 그를 ‘간사한 사람[憸人]’으로 지목하였는데, 그가 궁궐에 혼인이 연관되기에 미쳐 내전(內殿) 세력을 의지하여 호곶(壺串)의 목장(牧場)을 취하여 전답(田畓)을 만들려고 하였다. 공이 태복시 제조(太僕寺提調)로 재임하면서 법을 끌어대어 허락하지 않자, 또 임금의 명령이라고 일컬으면서 반드시 그곳을 얻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공이 굳게 거부하고 따르지 않으므로 김안로가 앙심을 품었다. 김안로가 폄척(貶斥)되어 지방에 있을 적에 그를 방환(放還)하려는 자가 있었는데, 공이 또 자주 그 일을 중지시켰다. 이윽고 김안로가 권력을 쥐게 되자 사사로운 원한을 복수하고자 꾀하여 조정에 화근(禍根)을 만들어냈는데, 공이 재상인 이행(李荇)에게 말하기를, “김안로는 결코 착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고 하였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원한을 쌓아 온갖 방법으로 공을 함정에 빠뜨렸다.
마침 계사년(癸巳,1533,중종28)에 홍여(洪礪)의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공이 왕실의 지친(至親)을 궁궐(禁庭)에서 고문해서는 안 된다고 아뢰었는데, 사특한 무리들이 이것을 구실로 삼아 공이 고의적으로 대옥사(大獄事)을 늦추었다고 헐뜯었으므로, 다시 영상(領相)에서 파직되어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공은 국가 원로(耆舊)로서 의리상 나라와 기쁨과 슬픔(休戚)을 함께 해야 한다고 여기어 거리낌(忌諱)에 저촉되는 것을 돌아보지 않고 강석(講席)에 입시하여 아뢰기를, “요즈음에 재변(災變)이 있음은 필시 옥사를 남발한 소치가 아니라고는 못할 것입니다.”고 하였는데, 이때 좌우(左右)와 언관(言官)의 지위를 차지한 자들은 모두가 김안로의 우익(羽翼)으로서 그의 비위를 맞추어 자리를 얻은 자들이었으므로, 공을 공격함이 매우 거세었으니, 대개 공이 조정에 있는 것은 실로 사특한 무리들의 꺼리는 바였다.
갑오년(甲午,1534,중종29)에 영중추부사의 직책에서 체임(遞任)되자, 공은 도성에서 멀리 떨어지기를 바라지 않아 양근(楊根)의 시골 농막에 우거(寓居)하였는데, 자갈투성이인 밭과 초가지붕을 얹은 집에서의 생활은 남들이 감당하지 못할 바였지만 공은 처신이 여유로웠다. 을미년(乙未,1535,중종30)에 다시 관작을 삭탈하고 방귀전리(放歸田里)하자, 공은 마침내 회덕(懷德)의 농가에 거처하게 되었는데, 김안로는 그래도 후련하지 못하다고 여기어 남몰래 사람을 시켜 공의 과실을 슬그머니 엿보게 하였으나 끝내 얻어낸 것이 없었다.
정유년(丁酉,1537,중종32)에 희릉(禧陵)의 장지(葬地)가 불길하다는 말이 있어 천장(遷葬)하였는데, 공이 일찍이 총호사(摠護使)가 되어 그 일을 담당했다고 하여 중형(重律)으로 옭아매었다. 가인(家人)들이 달려와 울부짖자, 공은 바야흐로 다른 사람과 박륙(博六,쌍륙)을 하고 있었는데 끝내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얼마 있다가 가장 가벼운 형벌(末減)로 처벌하여 멀리 김해(金海)로 귀양 보내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공은 즉시 행장(行裝)을 꾸릴 것을 재촉하다가 밤이 되자 평상시처럼 잠을 자고는 날이 밝자 출발하여 길에 올랐는데, 또한 돌아보거나 미련을 두는 뜻이 없었다.
여름철 장마에 길은 진창이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는 힘든 여정에다가 압송하는 관원까지 날짜를 정해놓고 몰아 부치는 바람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인 중에 원망하면서 김안로(金安老)를 언급하는 자가 있자, 공이 대뜸 만류하며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이 있는 것이니, 어찌 사람으로 말미암는 것이겠는가?”라고 하고는 시(詩)를 읊어 회포를 서술하였는데, “비방이 산처럼 쌓였건만 끝내 용서를 받았으니, 이 목숨은 천은에 보답할 계책이 없네.[積謗如山竟見原 此生無計答天恩]”라는 구절이 있으니, 그 충후(忠厚)한 기상이 이와 같았다.
유배되어 있은 지 여섯 달 만에 삼흉(三兇)이 제거되자, 곧장 사환(賜環)하여 영중추부사에 제수하고서 영경연(領經筵)을 겸임하도록 하였다. 서울로 들어오던 날에 도성 사람들이 발돋움하여 구경하느라 저잣거리가 텅 비었으니, 마치 사마광(司馬光)이 낙양(洛陽)에서 궁궐로 나아오던 때1)에 조야(朝野)가 목을 빼고서 그가 재상으로 복직하는 것을 바라보던 것과 같았다. 그러나 갑자기 질병에 걸려 일어나지 못하였으니, 무술년(戊戌,1538,중종33) 12월 갑신일(甲申日)로 춘추는 77세였다. 공이 숨을 거두자마자 신령스러운 광채가 지붕에서 곧장 하늘로 뻗쳐올라갔는데, 마치 무지개의 형상과 같았으므로 매우 기이하게 여겼다. 부음(訃音)이 전해지자 상이 매우 슬퍼하면서 3일 동안 철조(輟朝)ㆍ철시(輟市)하였고, 규정에 정해진 대로 부의(賻儀)를 내려주었으며, 잇따라 근시(近侍)를 보내어 상주(喪主)를 조문하고 치제(致祭)하였다. 동궁(東宮)도 이와 같이 하였다. 태상시(太常寺)에서 시호(諡號)를 ‘문익(文翼)’이라 정하였다. 관청에서 장사를 거들어주어 4월 일에 광주(廣州) 성달리(省達里) 해좌사향(亥坐巳向)의 언덕에 장사지냈으니, 선영(先塋)을 따른 것이다. 금상(今上,명종) 초년에 보상(輔相)의 공적을 논하여 중종(中宗)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부인 송씨(宋氏)는 은진(恩津)의 세족(世族)으로, 예조정랑(禮曹正郞) 송순년(宋順年)의 따님이다. 성품이 온화하고 은혜로워 비복(婢僕)을 부리고 친척들과 화목하게 지냄에 있어 은혜를 베풀면서도 예절(禮節)이 있었으며, 종족(宗族) 중에 가난하여 혼인이나 장례를 치를 수 없는 자에게 재물을 대주고 보살펴 주었으므로 모두 그들의 환심(歡心)을 얻었다. 자손들 또한 가르침을 따르고 받들어 감히 나태하거나 거만하지 않아서 돈후(惇厚)한 습성을 이루었으므로, 세상에서 가법(家法)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자는 반드시 정씨 가문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공이 세상을 떠난 뒤로 부인은 지나치게 슬퍼하다가 병이 드는 바람에 다섯 달 후에 뒤이어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은 78세였다.
공은 네 아들을 두었으니, 정노겸(鄭勞謙)은 남부 주부(南部主簿)이고, 정휘겸(鄭撝謙)은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인데 모두 공보다 먼저 죽었다. 정익겸(鄭益謙)은 사재감부정(司宰監副正)이고, 정복겸(鄭福謙)은 강화부사(江華府使)이다. 측실(側室)에게서 네 아들을 두었으니, 장남은 정순(鄭純)이고, 다음 정화(鄭和)는 사역원정(司譯院正)이며, 다음 정상(鄭尙)은 율려 습독관(律呂習讀官)이고, 다음은 정종(鄭種)이다. 주부(主簿,정노겸)는 홍문관 전한(弘文館典翰) 김물(金勿)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 정유인(鄭惟仁)은 계묘년(癸卯,1543,중종38)의 과거에 급제하여 봉상시정(奉常寺正)이고, 딸은 군수(郡守) 신여량(申汝樑)에게 시집갔다. 참봉(參奉, 정휘겸)은 봉사(奉事) 권조(權操)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부정(副正, 정익겸)은 별좌(別坐) 최자식(崔自湜)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두었는데, 정유의(鄭惟義)로 익위사좌익찬(翊衛司左翊贊)이다. 뒤에 생원(生員) 이승형(李承亨)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2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정유신(鄭惟愼)으로 생원이고, 다음은 정유서(鄭惟恕)로 진사이고, 다음은 정유청(鄭惟淸)과 정유순(鄭惟醇)이다. 딸 중에 장녀는 이연(李衍)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장진(張進)에게 시집갔다. 부사(府使, 정복겸)는 참봉(參奉) 이수영(李壽永)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5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정유길(鄭惟吉)인데, 무술년(戊戌,1538,중종 33) 봄에 괴과(魁科,문과갑과(文科甲科))에 발탁되자, 중묘(中廟)께서 특별히 사자(使者)를 보내어 상공(相公,정광필)에게 잔치를 베풀고 또 연수(宴需)를 내리어 경연(慶筵)을 베풀었으므로, 온 세상 사람들이 영광스럽게 여겼다. 지금 예조판서(禮曹判書)이자 홍문관(弘文館)과 예문관(藝文館)의 대제학(大提學)이 되었다. 다음은 정유경(鄭惟慶)이다. 딸 중에 장녀는 직장(直長) 이문은(李文殷)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사평(司評) 김발(金潑)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별좌(別坐) 홍덕수(洪德壽)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신문빈(愼文彬)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이응생(李應生)에게 시집갔다. 봉상시 정(정유인)은 진사 구원(具元)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두었으니, 정지연(鄭芝衍)으로 생원이다. 증손(曾孫)은 남녀 모두 40여 명이다.
공은 자태와 용모가 뛰어나 큰 키에 아름다운 수염을 가졌으며 정신이 맑고 골격이 수려하여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진세(塵世,속세)의 사람이 아닌 듯하였다. 마음이 너그럽고 드넓으며 즐겁고 편안하여 사물과 경쟁하는 마음이 없었다. 평상시엔 상냥하고 너그러워 온통 온화한 기색일 뿐이었으나, 국론(國論)을 당해서는 의연(毅然)한 기색이 늠름하여 범할 수가 없었다. 여러 사람의 의론이 어지럽게 다투면 간단한 말로 결정하곤 했는데, 의심이 풀리는 것이 마치 얼음 녹듯 하였다. 입으로는 일찍이 남의 허물이나 단점을 말한 적이 없었고, 좋은 점이 있으면 이를 드러내기를 마치 미치지 못할 듯이 하였으므로, 사람마다 덕화(德化)를 입어 온 마음을 기울여 사랑하고 떠받들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나 자신의 몸 관리는 검소하기가 마치 빈한(貧寒)한 선비와 같아서, 여러 번 권력이 있는 지위에 있었지만 집 문에는 잡빈(雜賓)이 없었다. 공은 퇴청(退廳)하면 한 방에 앉아 서사(書史)를 읽었으며, 재물을 다루고 불리는 것은 일삼지 않았다. 성색(聲色, 음악과 여색)을 즐거워하지 않아 매양 ‘놀이에 탐닉하여 덕을 잃는 것’으로 가정의 경계를 삼았다.
연산(燕山) 때 사화(史禍,무오사화(戊午史禍))가 크게 일어나 말을 하다가 비위를 거스르는 경우엔 죽음을 면할 수가 없었는데, 공이 사초(史草)를 초록(抄錄)하는 일을 감독하면서 사지에서 살려낸 경우가 많았다. 중종조(中廟朝)에 원묘(原廟)의 신주를 잃어버리자 공에게 맡겨 다스리게 하였는데, 여러 사람들은 관아에 딸린 노비(典僕)가 묘랑(廟郞)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저지른 소행이라고 여겨 앞 다투어 고문(拷訊)하려고 하였으나 공만은 홀로 그렇지 않다고 여겼는데, 후에 도적을 잡고 보니 과연 공의 짐작대로였다. 기국과 도량이 넓고 크며 공명정대한데다가 학문으로 보충하여, 뜻하지 않은 좌절이나 굴욕에도 일찍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늙어갈수록 더욱 깊었으므로 조야(朝野)는 점칠 때 쓰는 시초(蓍草)와 거북(蓍龜)처럼 의지하였고 사림(士林)은 태산북두(泰山北斗)처럼 우러렀다. 몸이 국가의 안위(安危)와 경중(輕重)을 논하는 자리에 있은 지 거의 30년이었으니, 아! 공과 같은 분은 진정 이른바 사직(社稷)의 신하라고 하겠다.
나 세양(世讓)이 외람되이 형편없는 몸으로 공에게 인정을 받았는바, 공이 의정부(中書)에 있을 적에 세 번 옮겨 사인(舍人)이 되었는데, 뵈올 때마다 번번이 다정하게 세상에 처신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곤 했으므로, 공경히 종신토록 가슴에 새기고서 일찍이 잠시도 잊어본 적이 없다. 지금 임하(林下,은퇴한 곳)에 물러나 쉰 지가 거의 2주년이 다 되어 가는데, 지난날을 더듬어 생각해 보니 마치 꿈속의 일처럼 아득하다. 공의 손자인 대제학(大提學) 정유길이 직접 공의 행장(行狀)을 기술하여 공의 조카(猶子)인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전 대제학 정사룡(鄭士龍)과 더불어 서찰을 갖추어 습독관(習讀官)인 정상(鄭尙)에게 심부름을 시켜 나 세양(世讓)에게 보여주며 말하기를, “우리 선조(先祖,정광필)께서 세상을 떠난 지 23년이 되었는데, 묘도(墓道)의 비석조차 아직 세우지 못하였습니다. 그대는 선조에게 인정을 받아 문하에 출입한 지 오래되었으니, 선조를 자세히 알기로는 그대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이에 감히 명문(銘文)을 부탁합니다.”고 하였다.
아! 돌아가신 상공(相公)의 성대한 덕과 위대한 업적은 뚜렷이 사람들의 눈과 귀에 남아 있고 환하게 국사(國史)에 실려 있으니, 어찌 나의 말을 쓸데없이 덧붙일 것이 있겠는가. 더구나 내 나이가 노년(老年)에 다다라서 심지(心志)가 혼미하여 부족한 문장으로 대현(大賢)의 사업을 드러낼 수가 없으므로 두 번 세 번 사양하였으나, 정상이 연일 집으로 찾아오고 재촉하기를 그만두지 않았다. 돌아보건대, 친한 정의(情誼)에 있어 끝까지 사양하기가 어려우므로 마침내 행장의 말을 정리하여 이렇게 서술한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하늘이 뛰어난 인물을 내시어 나라의 보좌로 삼았도다. 명군(明君)과 양신(良臣)이 서로 만나는 것을 바로 제우(際遇)라고 하네. 훌륭하신 중종(中考)께서는 덕이 순우(舜禹)보다 뛰어나시어, 꿈속에서도 현인을 구하여 좌우에 두고자 생각하셨네. 아름다운 우리 공께서 기대에 응하여 큰 임무를 받았는데, 도량은 창해(滄海)처럼 깊고 명망은 교악(喬嶽)처럼 중후하였네. 원대한 계획과 중요한 정사를 아침부터 저녁까지 힘써 도왔고, 위난(危難)에 처해서는 우뚝하게 얼굴빛을 바루었네. 참소하는 자들이 작은 허물을 큰 죄로 얽어 사화(士禍)가 망극하였네. 한마디 말로 임금의 마음을 되돌리자 우레 같은 위엄이 이내 그쳤으니, 마치 큰 가뭄이 든 해에 단비가 쏟아지는 듯하였네. 다만 삼농(三農)만을 위로할 뿐 공을 감추고 차지하지 않았네. 짐을 벗고 한가하게 지냈어도 마음만은 임금을 바로잡아 구제하고자 하였고, 봉액(縫掖)을 인도하여 뒤에서 밀어주며 뒤쳐질까 염려했네. 아! 저 자질구레한 사람들이 어찌 식견 있는 분을 용납하랴. 스스로 잘못을 고쳐서 경계하지 않고서 도리어 모함하기를 일삼았네. 구름 낀 산과 독기 서린 바다에 한해도 편안히 지낼 수 없었건만, 공의 마음 얽매임이 없어 진솔하게 변함없이 지냈네. 뜬구름 홀연히 사라지매 햇빛이 밝게 빛나고, 이매(魑魅)가 멀리 달아나매 난봉(鸞鳳)이 높이 날았네. 원로(元老)에 가까운 나이에 다시 태전(台躔)을 맡으셨고, 여론이 막 갈망하였건만 공의 병은 낫지 않았네. 사마광(司馬光)이 다시 조정에 돌아온 듯하고 위공(魏公)이 임금을 부지한 듯하여, 빼어난 재상의 사업이 전후로 똑같았네. 아름다워라! 훌륭한 자제들이 공이 남긴 복경(福慶)을 이어서, 아들과 손자들이 잇따라 문병(文柄)을 맡았네. 가정에서 전수한 학문이 공의 가문에 더없이 성대하여, 덕망과 후손들이 한청(汗靑)에 실려 빛나네. 시호를 내리고 행실을 기록하여 마침내 묘정(廟庭)에 배향되었으니, 내가 공의 행적을 간추리어 묘소를 환하게 빛내노라.
주(註)
1) 송대(宋代)의 명신(名臣)인 사마광(司馬光)은 왕안석(王安石)이 추진하는 신법(新法)에 극력 반대하다가 외직(外職)으로 추방되었는데, 철종(哲宗)이 즉위한 뒤에 다시 재상(宰相)에 임명되어 조정에 복귀한 때를 가리킴.
출전(出典) : 국조인물고 권44 연산시 이화인(燕山時罹禍人)
2)훈맹(勳盟) : 공신의 명부에 서명하는 것.
3)관질(官秩) : 관직의 위계
4)자사(子史) :사기(史記)와 노자(老子) 장자(莊子)맹자 등의 경서
5)속유(俗儒) : 속행(俗行)이나 지행(志行)이 저속한 선비
6)고과(考課) : 관리나 학생등의 근태(勤怠)와 집무성적 재능 등을 조사하여 보고하는 일
7)폄척(貶斥) : 벼슬을 떨뜨려 물리침. 인품을 깎아내림
8)종유(從遊) : 학덕이 있는 사람과 놂
9)천총(天聰 : 타고난 총명
10)체임(遞任) : 벼슬을 갈아 냄
11)희릉(禧陵) : 중종의 계비(繼妃)인 장경 왕후(章敬王后)의 능
12)삼흉(三兇) : 김안로(金安老)ㆍ허항(許沆)ㆍ채무택(蔡無擇)을 말함
13삼농(三農) : 평지농(平地農)ㆍ산지농(山地農)ㆍ수택농(水澤農))을 통 털어 말함
14)봉액(縫掖) : 유현(儒賢)
15)태전(台躔) : 정승의 자리
16)위공(魏公) : 중국 송나라 영종(英宗) 때의 한기(韓琦) 한위공(韓魏公) 문집이 있음.
17)문병(文柄) : 대제학(大提學)의 별칭
18)한청(汗靑) : 사서(史書)
文翼公 光弼 神道碑銘
左贊成 蘇世讓 撰
東萊之鄭於姓譜最爲名家世有聞人高麗時有諱穆官之左僕射生四子皆顯曰澤爲贊善大夫十一代而領議政文翼公益大振之公諱光弼字士勛議政府左參贊翼惠公第二子也翼惠諱蘭宗卽成廟朝名宰相工草隸能文章四捷科第一歃勳盟有將相才封東萊君以公貴贈爵如公官曾祖諱龜齡結城縣監贈吏曹判書祖諱賜早擢科以藝文館直提學爲養補外卒官晉州牧使贈議政府左贊成皆視公秩以推恩焉妣貞敬夫人李氏亦完山望族將仕郞諱知止之女以天順壬午六月乙丑生公幼氣度瞻視步趨大異凡兒翼惠公奇愛之公少多疾病不能出就外傅從伯姑鄭氏受業略解大義鄭乃翼惠之姉而女中大家也有識鑑知公遠到以子孫爲託及長攻苦力學專心讀誦經傳子史微辭奧旨默識洞究靡不淹貫尤好左氏春秋朱子綱目手不暫釋非如俗儒尋章摘句就時用應科目而已性篤孝年踰弱冠連丁內外艱守廬六載親具祭奠哀毁踰制人稱其至誠弘治壬子中進士試仍擢大科初補成均館學諭例陞博士兼議政府司錄奉常寺直長公不卑小官供職彌謹副正鄭誠謹高亢少許可及見公甚器之曰愼厚君子李議政克均嘗兼館職亦以公輔期之時設局修成廟實錄朝中名士咸聚李公爲摠裁官擢公處都廳專委編靡館員於夏考俱見貶居中公亦未免連累局僚皆意其不仕李公獨大言曰鄭之弘量必不屑矣俄而果至其爲名公所推重如此歷造紙署司紙成均館典籍除司諫院正言遂入弘文館爲修撰爲校理以仕祥定局務劇皆禮曹正郞猶帶知製敎遷儀賓府經歷成均館司藝由司憲府執義進禮賓寺正復入弘文館爲直提學會文臣庭試方出題公聞叔父喪徑出不製坐是貶西旋授掌樂院正癸亥超拜弘文館副提學移吏曹參議燕山主昏虐仇疾言者公曾抗疏諫禽荒甲子竄牙山縣時法令峻急被謫者不得自由公擁帚守官門無厭惡之色丙寅秋將置重典押官遞至盡室恇擾公怡然就道邑守追訣于草野觀者憫默公則言笑自若俄有人來說廢立者座中忭躍公曰此爲宗社大計但未聞舊主死生遂却肉不食人服其操中廟初政抄選經幄長官以副提學徵還旋拜承政院右承旨丁卯特拜吏曹參判戊辰轉兵曹由司憲府大司憲超拜漢城府判尹尋遷禮曹判書自吏曹至此常兼經筵春秋館義禁府都摠管等職庚午復以大司憲拜議政府右參贊是年夏三浦倭叛亂南邊繹騷以全羅道壤地相接須得重臣控制命公爲都巡察使往撫之公巡歷海甸凡城鎭遠近防戌緊歇士卒之强弱軍器之利鈍無不親履而目閱其所規畫悉合機宜南服晏然還判兵曹銓選平允軍政乃理壬申以久執權柄辭拜右參贊九月出爲咸鏡道觀察使時北方飢荒餓莩枕藉朝議以非位望素高盡誠軆國者莫能救活故有是命公多方撫綏一境賴以全癸酉下書褒美特陞崇政以議政府右贊成兼觀察公上疏辭不許未幾拜右議政尋陞左先是成議政希顔嘗薦公當宅端揆故不次擢用乙亥章敬王后誕元子而薨後宮有嬖寵者挾先出窺陞中壺上相依違首鼠公率堂僚援引經義叩閤力陳坤位乃正丙子陞領自成廟右文興學金宏弼鄭汝昌倡明性理之學從遊者衆至燕山朝一切驅陷罪罟中廟好古樂善獎用經學之士士爭奮勵謂唐虞之治朝夕可致更張無漸大爲流俗所忌己卯二三臣詐爲虫葉讖書因掖庭密達以惑天聽夜開神武門入對便殿天威震動禍將不測或言朝廷大事不可使首相不知遂召公公至上前冒萬死救解上怒而起公牽裾從之淚隨言滴上亦感悟竟寬斧鉞公之力也公常獨居深念年少輩過激得禍爲憂有一宰以微服野抵公宅稱有密旨公嚴辭拒之曰今日之計莫如調劑鎭定如此處置非所聞也至是又不詭隨乃罷相領西樞丁亥復入爲左相尋陞領己丑以病辭遣內侍問疾仍賜藥餌辛卯引年致政賜几杖不允初金安老未顯時公目爲檢人及連姻宮禁依倚內勢欲取壺串牧場作田公爲太僕提調引法不許又稱上旨必欲得之公固拒而不從安老銜之其貶斥在外也有欲放還者公又數寢之及當柄用謀復私讐搆禍朝廷公謂李相荇曰安老決不得爲善人矣由是積怨百計擠陷會癸巳洪礪獄起公啓王室至親不宜拷掠禁庭羣邪以此籍口詆公故緩大獄復罷相爲領樞公以耆舊義同休戚不顧觸諱入侍講席啓曰日來灾變未必非濫獄所致時據左右言地者皆安老羽翼逢迎捃摭攻之甚力盖公之在朝實羣邪所忌甲午遞其職公不欲遠違都下寓居楊根村墅石田茅屋人所不堪而公處之有裕乙未復鐫秩放歸田里遂居于懷德農舍安老猶以爲未快竊令人潛伺公過竟無所得丁酉有言禧陵葬地不吉而遷之以公嘗爲摠護使掌其事羅致重律家人輩奔走號泣公方與人博六了無動色俄報末減長流金海卽促裝入夜寢息如平時明發登途亦無顧戀意夏澇路泥跋涉山谿加以押員刻日驅迫艱楚萬狀僕侍有怨及安老者輒止之曰死生有命豈由人爲賦詩敍懷有積謗如山竟見原此生無計荅君恩之句其忠厚氣像如此在貶月六殼而三兇見敗卽賜還拜領樞兼領經筵入京之日都人聳觀巷市爲空如司馬自洛赴闕之時朝野引領望其復相而忽感疾不起戊戌十二月甲申也春秋七十七纔屬纊靈光自屋宇直上于天如虹霓之狀甚可異也訃聞上震悼輟朝市三日贈賻加常數連遣近侍弔孤致祭東宮亦如之太常易名曰文翼官它喪事四月日葬于廣州省達里亥坐巳向之原從先兆也今上初年論輔相公配享中宗廟庭夫人宋氏恩津世族禮曹正郞諱順年之女性溫惠御婢僕睦婣당恩而有禮宗族之貧不能昏葬者給資撫視咸得其歡心子孫亦遵奉敎誨不敢怠傲率性惇厚之習世之談家法之美者必以鄭門爲先自公卒夫人過哀成疾後五月而繼逝壽七十八公有四子勞謙南部主簿撝謙慶基殿參奉皆先公沒益謙司宰監副正福謙江華府使側室有四男長純次和司譯院正次尙律呂習讀次種主簿娶弘文館典翰金勿女生一男一女男曰惟仁登癸卯科奉常寺正女適郡守申汝樑參奉娶奉事權操女副正娶別座崔自湜女生一男曰惟義翊衛司左翊贊後娶生員李承亨女生四男二女長惟愼生員次惟恕進士惟淸惟醇女長適李衍次適張進府使娶參奉李壽永女生二男五女長惟吉戊戌春擢魁科中廟特遣使者宣喜于相公且賜宴需設慶筵擧世榮之今爲禮曹判書弘文藝文兩館大提學次惟慶女長適直長李文殷次適司評金潑次適別坐洪德壽次適愼文彬次適李應生寺正娶進士具元之女生一男曰芝衍生員曾孫男女摠四十餘人公姿狀奇偉身長美鬚神淸而骨秀望之不似塵世中人寬洪樂易與物無競平居休休焉只是一團和氣及當國論毅然之色凜不可犯羣議紛爭片言決之渙若氷釋口未嘗言人過惡有善則揚之若不及人人飮德莫不傾心愛戴自奉儉素如寒士屢處權地門無雜賓公退則坐一堂讀書史不事營殖不喜聲色每以耽樂喪德爲家庭戒燕山時史禍大起言犯觸忤無得免死公監抄史稿多所脫活 中廟朝失原廟主委公治之衆意典僕謀陷廟郞者所爲爭欲拷訊公獨以爲不然後得賊果如公料局量恢恢光明正大充之學力非意挫辱曾不少撓忠君憂國之心老而彌篤朝野倚之如蓍龜士林仰之若山斗以身繫國家安危輕重者殆三十年嗚呼若公者眞所謂社稷之臣矣世讓猥以無似受知於公公在中書三薦爲舍人見輒諄諄敎以行已之方敬佩終身未嘗暫忘今也退休林下歲將兩周追思往日怳若夢寐公之孫大提學惟吉自述公行狀與公之猶子判中樞前大提學士龍具書授習讀尙평來示世讓曰吾先祖下世二十有三載而墓道之石猶未樹立子嘗被先祖鑑賞出入門下者久矣知先祖之詳無如子敢以銘文爲屬噫先相公盛德偉績赫赫在人耳目昭載國乘奚贅余說況年迫桑楡心志昏憒不可以不腆之文揄揚大賢之事業辭之再三尙也踵門屢日速之不置顧惟情誼難可固辭遂纂次狀辭以敍之銘曰 天生俊乂爲邦之佑明良相値斯爲際遇巍巍中考德邁舜禹夢卜求賢思置左右猗歟我公應期大受量深滄海望重喬岳訏謨密勿夙夜勵翼臨危處難屹然正色萋斐成錦士禍罔極一言回天雷威乃息若歲大旱甘澍霈然但慰三農斂功不專釋負居閑志切匡救誘引縫掖推轂恐後嗟彼鎖鎖寧容藻鑑不自改飭反事搆陷雲山瘴海靡歲寧居浮雲忽散白日騰輝公心無累任眞如如魑魅遠遁鸞鳳高飛庶幾元老復踐台躔輿情方渴公疾不痊司馬再入魏公扶日挺挺相業前後一轍美哉蘭玉克紹遺慶猶子曁孫繼掌文柄詩禮之學公門莫盛有德有後載耀汗靑易名記實終配廟庭我最其跡以賁泉扃
註
歃 : 마실삽 屑 : 가루설.께끗할설.편치않을설 俄 : 갑자기아 竄 : 내쫓을찬 帚 : 비추, 쓸추
寘 : 둘치.그칠치 恇 : 겁낼광 忭 : 기쁠변 控 : 끄을공殍 : 굶어죽을표 銜 : 재갈함
綏 : 편안할수.물러갈수 嬖 : 낮을폐 詭 : 어그러질궤 串 : 습관관.꿰미천 掠 : 노략질할약 詆 : 나무랄저 緩 : 더딜완 灾 : 재앙재 摭 : 주을척 墅 : 농막서 鐫 : 새길전 荅 : 당할답 纔 : 겨우재 纊 : 고운손광婣 : 혼인할인당 : 살당(居) 撝 : 찢을휘
蓍 : 잠치는풀시 輒 : 문득첩 怳 : 당황할황 憒 : 심란할궤 腆 두터울전 猗 : 길의 鎖 : 자질구레할쇄 魑 : 도깨비리萋 : 풀무성할처 斐 : 아롱질비 轂 : 사람천거할곡.
飭 : 신칙할칙 瘴 : 장기장 魑 : 도깨비리 魅 : 도깨비매 鸞 : 란새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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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의재선생님 글 감사합니다.
하완씨 종사에 수고 많습니다. 소신대로 자료 정리하여 조상들의 사적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