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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리스도께서 홀로 달려 있다고 믿는가?
이제 내가 못 박힌 십자가를 보라.
1. 십자가를 자랑하라
Glorying in the Cross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는 일만큼 어려운 일은 없다. 새로운 본성이 주어지지 않는 한, 그것은 불가능하다. 사람은 자신에게 명예를 가져다주는 일을 자랑한다. 자신을 남보다 더 나은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일을 자랑한다. 그렇게 하면 할수록 있는 그대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데서 멀어져갈 뿐이다. 사람의 교만은 다른 사람보다 자신에게 이로움을 가져다주는 일에 빠져듬으로써 커져만 간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재능을 자랑한다. 사람의 마음은 다 다르다. 어떤 사람의 마음 속엔 허영이 가득하며, 그저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평판을 얻는 일에만 몰두한다. 그러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평판을 얻으면 얻을수록 교만은 더욱 커져만 간다. 사람을 다른 사람들과 구분시켜주는 것, 이를 테면 재산이나 지식이 많아질수록 그는 더욱 자랑할 것이고, 그렇게 자랑거리가 많을수록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더욱 멸시할 것이다.
재능, 가문, 재물들 외에 사람이 자랑하는 또 다른 것이 있다. 그것은 종교이다. 한 유대인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그가 자신이 터키인이 아닌 것을 자랑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소위 크리스천들도 마찬가지로, 자신이 이교도나 세리가 아닌 것을 자랑한다. 이렇게 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사람을 건져내주신 그 자리를 다시 취하는 것이다. 힘이 있는 사람에게 빌붙고자 하는 사람들은 자랑할 거리가 없거나, 아니면 허황된 것을 자랑하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이 종교를 붙잡고 싶어 하는 이유도 사실은 자신의 자랑거리를 삼고 싶어 하기 때문일 경우가 많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터키인도 자신의 종교를, 아직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어 한다. 유대인도 마찬가지로, 자신이 진리를 가지고 있고 또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나기 때문에 자신의 종교를 자랑한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도 진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이 일은 잘못된 것이다. 대적의 간교한 역사는 여기에 감추어 있다. 즉 사람이 진리를 가지고 자신을 자랑하는데 빠지게 한다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인이 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면, 이러한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다소 어려울 수도 있다.
참 하나님의 자녀가 자신이 하나님을 아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십자가의 능력으로 행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요나의 경우를 보면, 이러한 교만이 확실히 있었다. 그는 자신이 유대인인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니느웨로 가기를 원치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명성을 잃을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는 선지자로서 자신의 평판이 나빠지는 것을 감내하기 보다는 차라리 니느웨 사람들이 모두 멸망하길 바랬다. 요나는 참 선지자였지만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그 결과 자신의 종교를 자신을 자랑하는 도구로 삼고 있었다. 당신 자신을 빛내줄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 있다면, 심지어 그것이 성경을 아는 지식일지라도, 그것은 다만 육신을 자랑하는 것일 뿐이다.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하는 일을 하기엔 충분하다. 달리 신경쓸만한 것으로 보이지 않지만, 우리 자신의 중요성을 뽐내기에 충분한 것들이 있다.
종교를 자랑하는 것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 영혼 속에 더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가치가 없다. 사람은 죄인이기에 자랑할 것이 없다. 우리 양심도 자랑할 것이 없다. 사실 양심이 없다면 참 종교도 없다. 이런 일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義)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렇다면 사람이 자랑하는 종교에는 무엇이 있는가? 이 일은 항상 율법적인 성격을 띠고 나타난다. 왜냐하면 여기엔 사람이 해야만 하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자랑할 수 있는 일이라면 힘든 고행, 또는 어떠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받게 함은 …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갈 6:12,13) 사람은 아무리 무거운 짐이라도 기꺼이 지고자 한다. 어째서 그런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인가? 왜냐하면 자아는 무슨 일이든 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아를 자랑하고 싶어 할 때, 거기엔 어느 정도 진실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일은 항상 율법적인 특징을 띠고 있다. 왜냐하면 거기엔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어느 정도 있기 때문이다. 자아를 자랑하는 것은 죄를 자랑하는 것과는 다르다. 빌립보서 3장을 보면, 종교적인 자랑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무언가를 자랑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십자가를 보면, 사람은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다. 이는 나의 십자가가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여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죄(sin)뿐이다. 나의 죄가 십자가에 관여되어 있다. 왜냐하면 죄가 그리스도를 십자가로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이 십자가는 사람도 함께 끌어들인다. 십자가는 사람을 구원하는 일을 하며, 하나님은 그 일을 기뻐하신다. 사람은 그 십자가를 지는 일에 손가락 하나 더할 수 없었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다.”(고전 1:25) 내가 십자가에 더한 유일한 것은 나의 죄(my sin)이다. 더 생각할 부분이 많이 있을 것이다. 십자가가 없다면, 우리는 완전히 잃어버린 존재로 남을 뿐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나를 전적으로 잃어버린바 된 죄인으로 다룬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보면 볼수록, 나 자신이 얼마나 천하고, 완전히 가증스러운지, 얼마나 더럽고, 잃어버린 존재인지를 더욱 보게 된다. 나는 더럽혀진 나를 좋아했다. 나는 불쌍한 죄의 노예였고, 나 자신을 더럽히는 데까지 몰락했다. 내가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보았을 때, 십자가는 나 자신을 자랑하는 나란 사람 자체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었으며, 비로소 진리를 내 영혼 속에 스며들게끔 해주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나에게 나 자신이 얼마나 나쁜 존재인가를 보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나의 죄를 회피하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나의 죄를 고백하는 것을 기뻐하게끔 해주었다. 나는 심지어, 이 모든 죄를 사랑하는 죄성이 내 속에 있음을 인정할 정도로 각성되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의 마음을 열어주었고, 그리스도에게 나아가 내가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를 고백할 수 있게끔 해주었다. 나는 이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과 내가 그분께 빚지고 있는 모든 것과 그분께 대한 감사한 마음을 기쁘게 증언할 수 있다. 나는 이제 아무 숨김도 없이, 내 마음의 천하고 악한 것을 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죄(the sin)에 대한 치료책이 있음을 기쁘게 증언할 수 있다.
또 다른 측면에서 우리는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기쁨을 볼 수 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 하나님은 십자가의 가치를 보게 해주심으로써 우리도 자신과 함께 기뻐하길 바라신다. 우선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을 볼 수 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사랑과 같이, 사랑할만한 대상을 사랑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이 사랑은 그 자체의 힘으로 사랑의 행위를 하는 사랑이었다. 다시 말해서, 한 영혼이 자신이 사랑받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베풀어지는 거룩한 사랑인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의 방식은, 사람이 감히 생각도 하지 못했고 또 생각할 수도 없었던 방식으로 나타났다. 나는 참으로 가련하고 비참한 죄인이다. 그럼에도 십자가에서 나는 자신의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본다. 하나님이 용서하는 일을 하실 때, 거기엔 최상의 것을 내어주시는 사랑의 강력한 힘이 있다. 그 사랑과 가장 거리가 가까운 것, 즉 자기 아들을 내어주셨고, 그 사랑과는 가장 거리가 먼 것, 즉 죄 때문에 내어주셨던 것이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나는 완전하면서도 무한한 사랑, 즉 자기 아들을 죄가 되도록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본다. 뿐만 아니라, 거기서 나는 완전하면서도 무한한 지혜를 본다.
양심적으로 생각해볼 때, 내가 지은 죄들(my sins)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통을 생각해보지 않고서, 그저 하나님의 사랑을 즐거워할 수만은 없다. 하나님은 참새 한 마리에게 조차 선을 베푸는 분이 아니신가? 그렇다. 하지만 내가 지은 죄들이 있는데, 어찌 하나님이 나를 그저 받아주실 수 있단 말인가? 과연 하나님께서 흠이 있는 제물을 받아주실 수 있을까? 미가 선지자가 말한 것처럼,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 수 있는가? 가인은, 죄에 대한 아무런 각성도 없이, 그저 자기 노력의 산물을 제물로 드렸다. 그 마음의 강퍅함은 그 사실 자체로 증명되었다. 그는 자기 죄를 철저히 망각한 사람이었다. 나는 십자가를 통해서 나 자신의 죄가 무엇이었는지를 볼 수 있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채, 나는 하나님이 보시는 것처럼 십자가를 볼 수는 없다. 사람은 자신의 비참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 치료책을 가지고 오신 하나님을 대적할 정도로 하나님을 잊고 살아왔다. 그래서 심판이 반드시 집행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권위는 옹호되어야만 한다.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히 2:10) 과연 천사들은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가슴에 품고서 하나님 앞에서 날아다니는 것을 보게 될 것인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시기에 죄에 대한 심판이 반드시 집행되어야만 한다. 십자가에는 사랑 뿐만 아니라 심판도 있다. 그래서 거룩하신 그리스도께서 죄가 되셨을 뿐만 아니라, 죄 때문에 심판을 대신 받으셨다. 죄를 향한 아낌없는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 부어졌지만, 죄인을 향해서는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이 쏟아 부어졌다. 우리가 모욕했던 하나님의 위엄이 바르게 세워질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아들이시라도 그 앞에 엎드려야만 했던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의 광채를 밝히 빛내고자 하신다면, 그리스도는 반드시 하나님의 위엄을 세우시는 방식으로 행하셔야만 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진리가 십자가에서 확증되었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사람은 이 사실을 망각했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그러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증인으로 우뚝 서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 사실인 것을 증언하셨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하나님이 영혼을 얻으신 것은 모두 사랑 때문이지만, 이 사랑은 동시에 이 모든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십자가에는 그 이상의 것이 있다. 하나님은 여전히 십자가를 통해서 자신의 모든 목적을 이루신다. 하나님은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을 하고 계신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이처럼 죄로 더럽혀진 죄인들을 자기 아들과 동일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는 일을 하실 수 있는가? 그리스도께서 그 십자가 사역을 완수하셨을 때, 우선적으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영광의 자리에 앉게 하셨다. 장차 우리는 그 영광이 나타나는 날, 그 영광의 일부로서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엡 2:7)고 말씀하신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를 생각해보라. 그들은 영원무궁토록 이러한 은혜의 상징이다! 하나님은 어떻게 그들을 그 아들과 함께 하는 자리에 앉게 하실 수 있는가? 하나님의 영광과 사랑은 우리 모두의 죄보다 더 높이 솟아올랐을 뿐만 아니라, 그 모든 죄를 없이 해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 일을 하셨다.
이제 십자가는 우리를 위해서 두 가지 일을 해주었다. 십자가는 양심의 평안을 준다. 이것은 사람이 겉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마저도 망가질 것이다. 그럴 수 없다. 하나님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다.”(히 10:14) 모든 죄와 죄의 얼룩까지도 말끔하게 씻어졌다. 모든 죄 문제가 영원히 해결되었기에, 나는 이제 십자가를 자랑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다.”(갈 4:9) 우리는 불쌍하고 가련한 죄인이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담는 그릇이 되었다. 우리 양심은 확신과 평안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 이상으로 무죄상태에 있었던 아담조차 가질 수 없었던 자신감마저 소유하게 되었다. 나의 영혼 속에는 교통과 평안이 있으며, 또 다른 것이 있는데, 즉 하나님의 섭리를 확실히 이해하는 것이 생겼다. 이처럼 십자가가 가져다준 영원히 온전케 된 것 외에 무언가를 더하고자 율법 앞에 무릎을 꿇거나 아니면 율법이 정한 무슨 예식을 드려야 하는 것인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당신은 아직 십자가를 모르고 있다. 만일 당신이 자신을 더 낫게 만들기 위해서 다른 일들을 하고자 애쓰고 있다면, 당신은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신 일, 즉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 무엇인지 도무지 감도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렘 13:23) 십자가를 모르고 있다면, 당신은 자신의 양심을 잠재우거나 아니면 만족시키고자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십자가를 안다면, 모든 인간적인 노력과 자기 힘으로 무언가를 해보려는 애착을 버리고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십자가를 바라보았을 때, 나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었다. 내가 하나님께 범죄했을지라도, 나는 즉시 하나님께 나아가 자백하는 일을 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는 비록 죄를 짓는 일로도 변경되지 않는다. 나는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하는 사귐을 나눈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가진 행복한 특권이다.
내가 십자가를 자랑할 수 있을 때, 거기엔 나 자신, 곧 자아에 대한 자랑은 끝난다. 왜냐하면 나는 죄인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가까이 이끄셨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의인으로서 죄인을 대신하여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 영혼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는가? 아니면 헛되고 헛될 뿐인 자아를 자랑하는가? 만일 당신이 십자가를 자랑하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당신 자신에겐 엄청난 손실이다. 그렇다면 당신 속에 있는 죄는 그대로 있게 된다. 이는 당신이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도, 하나님의 거룩도, 하나님의 지혜도, 하나님의 진리도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저 당신이 서있는 자리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라. 당신은 십자가를 바라보기 위해 일부러 갈보리 언덕에 올라갈 필요가 없다. 오히려 십자가는 당신이 있는 자리까지 내려올 것이다. 당신이 좀 더 나은 사람이 된 후에, 십자가로 가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좀 더 나은 사람이 된다면, 당신은 결코 십자가로 나아가고자 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오로지 죄인의 자격으로 나아가야 한다. 사도 바울은 죄인의 괴수였을 때, 나아갔다. 그리고 그는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고백했다. 세상과 연결되어 있는 우리 속에 있는 바로 그 본성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초래했다. 그러므로 내가 십자가를 자랑할 때, 나는 세상에 대하여 못 박힌 사람이 된다.
2.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다
Death with Christ
로마서 6장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신자의 삶에 적용시킴으로써, 은혜는 결코 죄를 짓는 일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백히 밝힌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실천적인 삶과 그러한 실천적인 삶을 가능케 해주는 토대가 무엇인지를 볼 수 있다. 우리는 노예상태가 아니라 자유로 부르심을 받았으며, 거룩한 삶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이 거룩한 삶은 의(義)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그것도 실제적인 열매를 맺게 해주는 의(義)다. 이 의는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나오고 또 나와야만 하는, 경이로운 깊이와 가치가 있다. 이 말은 그저 이 땅에서 (육신의 열매인지, 성령의 열매인지 분별도 없이) 아무 열매나 맺으면 된다는 식이 아니라, (그런 것이 사람의 생각이다) 하나님에게로 올라가고 또 하나님이 받으실 수 있는 열매를 맺는 차원을 의미한다.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만이 하나님에게로 올라가는 법이다. 제단 위에 있는 번제물을 불에 살라 하나님께 드렸던 화제(火祭)를 생각해보자. 화제는 제사장이 먹을 수 있었지만, 그 향기는 하나님에게로 올라갔다.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그리스도는 자신을 향기로운 제물로 바치셨다(엡 5:2). 하나님에게서 내려온 것이 다시 하나님에게로 올라가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그리스도인의 도덕성이다. 여기에 부족함이 있다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그 참된 가치는 마음의 동기에 있다.
여기엔 두 사람이 개입되어 있다. 한 사람은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하고, 다른 사람은 자기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한다. 한 사람은 이기적인 목적으로 행하고, 다른 사람은 한 가정의 가장처럼 행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끊임없이 판단하는 일을 해야만 하며, 그럴 때 판단을 받지 않게 된다. 자신을 늘 판단하는 일을 하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일에 거룩하지 못한 것들이 혼합되는 것을 볼 때, 마음이 상하는 것을 느낀다.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일에 자아가 개입되면, 그 제물에서 나는 향기는 육신의 냄새가 날 것이고, 역겨울 수밖에 없다. 순전한 믿음과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만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영적 예배인 것이다.
로마서 4장은 지극히 큰 능력으로 개입하심으로써 죽음의 권세 아래 있던 예수를 다시 살리셨고, 자신의 우편에 앉게 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소개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들이다(롬 4:24). 주님은 자신을 가리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고 말씀하셨고, 말씀하신 대로 다시 살아나셨다.
로마서 5장을 보면 믿음이 칭의에 적용되고 있으며, 그러자 율법이 들어온다. 율법은 그 자체로 의로울 뿐만 아니라 율법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불의를 확증시켜준다. 왜냐하면 그들이 아무리 율법을 환영할지라도 율법을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무죄하거나 아니면 구원을 받아야 한다. 만일 무죄한 사람이라면, 그는 율법이 필요치 않다. 율법이 아담에게 ‘탐내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그는 그것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누구의 것을 도둑질한단 말인가? 율법은 사람을 죄인으로 정하고 있지만, 약속을 주신 후 적어도 400년 동안 율법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다만 한 사람(첫째 아담)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될 수 있었다.
이러한 은혜의 나타남은 은혜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신자가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것처럼 보이기에, 로마서 6장은 이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다. 육신의 왜곡성 때문에, 율법은 본래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목적과는 정반대되는 일을 하게 되었고, 은혜도 다른 목적에 사용될 수밖에 없었다. 즉 율법은 사람에게 죄를 깨닫도록 주어진 것이건만, 그들은 자기 의를 쌓는데 사용했다. 은혜는 사람을 거룩하게 만들고자 주어진 것이건만, 그들은 도리어 방종으로 바꾸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도 (그리스도의 오심을 바라보면서) 영혼이 살리심을 받는 일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사람이 타락한 인류의 머리인 아담 아래서 타락한 죄인일 뿐만 아니라, 잃어버린바 된 자라는 진리를 배울 필요가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구속받은 새로운 인류의 머리가 되기 전에도 의로우신 사람이셨다. 사람은 자연스럽게 거룩하지 않은 것을 좋아하는 성향이 있다. 어떻게 이 성향을 제거할 수 있는가? 그래서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2)란 말씀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진리와 함께 시작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죽으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만일 우리가 칭의(justification)를 소유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하고 있으며, 바로 거기에 거룩한 삶의 샘(the spring of holiness)이 있다. (우리가 지은 모든 죄들을) 속죄(贖罪)해준 피는 양쪽 귀와 손과 발에 발라졌다. 이로써 성별되었다. 이제 그 피가 가진 효력을 훼손하는 것은 (생각이나 사상이나) 그것이 무엇이든지 용납해서는 안된다. 죽은 사람은 더 이상 죄에 대해 사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일단 죄에 대해 죽었다면, 나는 죄 가운데 살 수 없다. 하나님이 금하신다! 그리고 나서 당신의 지체들을 죽음에 넘기는 일을 해야 한다. 그럼에도 당신은 이미 죽은 사람이기에, 죽고자 애쓸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sin)를 죽였다. 나는 이제 이 옛 것, 즉 죄를 나와는 상관없는 것처럼 다룰 수 있다. 나는 죄와는 모든 관계를 끝낸 사람이다. 나는 새로운 생명을 가지고 있으며, 이 생명을 통해서 다른 이가 내 속에서 승리의 삶을 사신다.
어떤 그리스도가 당신의 삶에 개입했는가? 죽으신 그리스도이시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를 이 새로운 권능으로 살리려는 것이다. 나는 이 표현을 참된 것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구절을 묵상할 때, 이 표현이 매우 적절하다고 느낄 뿐만 아니라 마음이 영적인 자양분을 얻게 되고, 세상의 간교함과 우리 자신의 간교함을 해소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관계가 없는 아버지의 영광은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부활 속에는 특별히 하나님의 능력과 아버지의 사랑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게다가 하나님의 영광도 연결되어 있는데, 왜냐하면 그 대상이 아버지의 아들이고, 그 아들은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였으며, 또한 하나님의 의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하나님은 의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실 수 있게 되었다. “주께서는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이라.”(시 16:10, 행 13:35) 그리스도는 육체를 입고 오신 하나님이셨고, 성령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셨고, 천사들에게 보이셨다. 천사들은 아들의 부활이라는 엄청난 역사의 증인으로 나타날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지 못하셨다면 하늘엔 빈자리(gap)가 생겼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생명의 새로움이 무엇으로 나타나야만 하는지를 볼 필요가 있다. 혹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의를 보지 못하고 있지는 않는가? 혹 그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지 못하고 있지는 않는가? 혹 그 속에서 그리스도 신격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의 정서 체계는 이러한 것과 연관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땅의 아래 깊숙한 곳으로 내려가셨기 때문에다. 그리스도는 어찌 그곳까지 내려가셨는가? 왜냐하면 죄인인 나 때문이었다. 그처럼 낮은 곳까지 내려가셨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시는 것이 지극히 합당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그분은 과연 누구이셨는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사마리아 여자에게 말씀하실 때에도, 주님은 “네가 만일 …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이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물을 좀 달라”고 하신 후에, 그녀의 양심에 호소하셨다. 그러자 그녀의 마음에 깨달음이 왔다.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그렇게 주 예수의 위격이 그녀의 마음을 가득 채울 수 있었다. 그러자 그녀는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고 말할 수 있었다. 우리의 양심도 바로 이 지점까지 도달해야 한다. 우리 마음이 그리스도를 좇되, 소위, 새 생명 속으로 연합되어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될 정도로 그리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하늘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 속에 묻혀 있기 때문이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싸움이 없을 거라고 나는 말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우리 마음은 그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우리는 얼마나 가까운가! 성경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함께 심겨졌다(planted together)”(롬 6:5)고 말한다. 이것은 그저 단순히 지적인 이해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나는 그리스도께서 나의 모든 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죽음의 자리에 내려가신 것을 보고 있다. 이것은 나의 모든 필요를 충족시키는 하나님의 방법인 것이다.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되었고, 함께 심겨졌다. 이는 우선적으로 나의 죄들을 위한 것이고, 또 이것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이를 통해서 내가 배우는 것은 이 모든 것이 모든 죄문제(우리 지은 죄들(sins) 뿐만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죄성(sin)까지)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죽음 속에 하나님의 능력은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나는 그리스도의 죽음 속에서 성화의 능력을 본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나를 위해 친히 죄가 되어 주실 정도로 나를 아꼈다. 이제 나의 마음은 부활 안에 계신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좇아야만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절반만 소유할 수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 속에 함께 심겨졌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도 함께 심겨졌다.
그리스도는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로 열납되셨다. 이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는 것이다.”(롬 6:6) 당신은 노예였고, 다른 것의 지배 아래 있었으며, 내일 아침에 해야 할 일을 그 전날 밤엔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 있었다. 이렇게 당신은 죄에 노예 또는 율법 아래서 종 노릇하고 있었다. 율법이 죄는 아니다. 요한복음 8장 32,33절을 보라.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여기서 유대인들은 율법 아래 있는 존재로서 이 말씀을 듣고 있다.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 8:35,36) 이것은 완전한 자유를 의미한다. 죄(sin)와의 관계를 끝낸 사람은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이다. 죽은 사람에게 무슨 책임을 물을 순 없다. 당신은 어째서 죄에 매여 이런 저런 일을 하는 것인가? 만일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다면, 그래서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된다면 “죄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될 것이다(롬 6:6,7, KJV 직역) 죄에 부속된 모든 것이 다 끝나는 것이다. 나는 내 자신이 죽지 않았음을 아는데, 어떻게 그리 말할 수 있느냐고 묻고 싶은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당신도 죽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자리에 들어가셨다. 그 자리를 자신의 자리로 삼으셨으며, 그리하여 죄에 대하여 죽으셨다. 이제 나를 괴롭히는 것들은 그리스도를 죽음에 내몬 것들이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죄와의 관계를 끝내셨다. 그러므로 당신도 죄를 죽이라.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만일 죽이는 일이 필요치 않다면, “여기라”는 말도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유는 죄를 마음껏 지을 수 있는 자유가 아니라,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거룩한 자유(holy liberty from sin)인 것이다.
“생명의 새로움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그리고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라는 구절을 주목하자. 은혜라는 위대한 교리는 중보자에 의해서 효력을 발휘한다.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 주의 눈 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시 143:2) 만일 나를 심판하신다면, 나는 그야말로 끝장이다. 당신이 아무리 깨끗하게 씻었다한들, 당신을 주목하시는 하나님의 눈을 바라보는 순간, 당신은 스스로를 오물 구덩이에서 나온 사람처럼 볼 수밖에 없다. 욥은 “우리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를 바라보았다(욥 9:33). 양심이 더러움을 느끼는 정도가 약하면 약할수록, 실제로 중보자의 필요성은 더욱 커진다. 당신은, 나는 죽어야 마땅한 사람이지만 여전히 살고 있다는 말을 심심찮게 한다. 과연 그리스도는 당신의 죄들을 위해 돌아가셨는가 아니면 당신이 짓지 않은 죄들을 위해 돌아가셨는가? 당신이 찾아낼 수 있는 그 죄들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신 것이다. 양심이 더욱 선명하게 작동하면 할수록, 은혜는 더욱 크게 보일 것이다.
우리는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된 양심을 가지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것을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셨기 때문이다. 심판도 그것을 건들지 못하고, 죽음도 그것을 건들지 못한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감당하지 않고 남겨두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와 함께 존재하는 새로운 상태 속에 심겨졌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났으며, 게다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있다. 그리스도는 죽으셨지만, 그냥 죽으신 것이 아니라 죄가 되셨다. 게다가 모든 일에 시험을 받으셨다. 그리스도는 그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셨다. 그리스도는 모든 것, 즉 세상의 멸시와 사탄의 권세, 심지어 하나님의 진노까지 모두 감당하셨고 또 통과하셨다. 그리스도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셨다. 사탄은 아무 죄도 그리스도에게서 발견해낼 수 없었다.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을 자신의 양식으로 삼으셨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죄 때문에 고난당하는 것을 기뻐하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간구하셨다.
이제 그리스도는 죽음 너머에 있는 부활 가운데서 사신다. 그리스도는 성결의 영을 가지고 계셨다. 그리스도의 전체 생애 동안, 거룩한 성령으로 사셨다. 그리고 모든 일에 시험을 받으셨다. 이제 우리는 새 생명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를 본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절반만 영접할 수 없다. 그리스도는 죄에 대하여 죽으셨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사신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겨야 한다.
이것은 매우 실제적인 문제이다. 이것을 당신 삶에 실현시키지 못했다고 해서, 당신이 피의 효력과 가치의 적용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렇지 않다. 하지만 당신은 피의 가치를 반드시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로서 그 가치를 당신 자신에게 적용시켜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을 향해 살아날 수 있다.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는 자가 될 수 있는 토대는 (십자가의 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지위(position)의 문제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것을 ‘경험하라’고 말하지 않고, “여기라”고 말한다. 즉 당신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기는 것이다. 그럴 때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된다. 성경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나고, 그 다음 그렇게 여기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다는 믿음의 능력을 통해서 나는 세상 앞에서 하나님께 속한 자로 살아갈 수 있게 되고, 열납된 자로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 의롭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을 향해 살라. 옳은 일을 해야 하는 것을 알고 있지만, 정작 하나님을 위해서 그것을 하지 못할 때, 나 자신을 미워하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최악의 상황은 가장 좋은 것을 버리고, 가장 나쁜 것을 취하는 것이다. 자신을 미워하는 쪽 보다는 하나님을 향해 사는 쪽을 택하라.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 과연 그리스도는 자신을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가? 그리스도의 삶은 사랑의 삶이었다. 그리스도는 항상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사셨기에, 먹을 시간조차 없으셨다. 그리스도는 물론 명령받으신 것을 행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명령이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에 대해서 아무 것도 생각지 않는 삶이란 얼마나 복된 것인가! 이는 세상에서 최고로 복된 것이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라.”(14절) 하지만 당신은 이렇게 말하고 싶을 것이다. “죄가 나를 다스리고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저를 모른다고 하실까봐 두렵습니다.” 당신에게 은혜는 무엇인가? 어떻게 당신은 마치 은혜 가운데 서있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가? 당신이 은혜 가운데 있지 않다면, 과연 누구에게 나아갈 수 있는가? 로마서 5장이 로마서 6장 앞에 온다. 만일 당신이 그 순서를 바꾸고자 애쓴다면, 당신은 곧장 로마서 7장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만일 내가 그리스도를 마땅히 사랑해야 함을 알지만 그럼에도 사랑하지 않고 있다면, 내가 정말 그리스도의 사람인지를 의심하게 될 것이고, 나 자신을 율법 아래 두게 될 것이다. 이 일은 그리스도를 십계명 대신 율법으로 삼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은혜를 체험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은혜는 자격 없는 사람들에게 베푸는 호의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은 은혜를 오용하는 마음의 간교함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무시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 6:18) 율법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었다고 해서 방종에 빠져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어야 한다. 거룩이란 무엇인가? 악한 모든 것에서 분리하는 것이다. 타락하기 이전 아담은 거룩했다기 보다는 무죄상태였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그리스도도 거룩하시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거룩하다. 이는 우리가 죄를 미워하고, 의(義)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이 의를 사랑하시는 것만큼 우리는 그렇게 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의를 사랑한다. 거룩의 대상은 반드시 하나님이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거룩한 이로서, 전적 순종과 의존의 삶을 사셨지만, 믿음의 대상은 필요치 않으셨다. 하지만 우리는 바울처럼, 믿음의 대상을 필요로 한다. 바울은 영광 중에 계신 주님을 보았고,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다. 죄는 무슨 열매를 맺을까? 아무것도 없다. 죄는 다만 사망과 심판을 불러올 뿐이다. 그렇다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을 좋아해야 한다. 이 일의 결과는 무엇일까? 즉 우리는 거룩하지 않은 것에서 분리하게 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의해서 자라가게 될 것이다. 실제적인 열매가 나타나게 될 것이며, (사실이다. 그 열매를 통해서 나무를 알 수 있는 법이다.) 이렇게 실제적인 열매를 맺는 일은 하나님의 의와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자주 들어가라.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기 때문이다(시 25:14). 그리고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지속적으로 살피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마 6:22) 우리는 하나님을 배워야만 하며, 점점 흘러 떠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헌신과 더불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의에게 종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종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 속에 형성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하늘로 떠나가시면서 제자들을 이 땅에 남겨 두신 것이다.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우리 영혼 속에 하나님의 성품이 형성되는 일은 그 만큼 가치 있는 일이다. 이 땅에서 거룩에 이르는 열매를 얻은 사람은 언제라도 하늘에 올라갈 준비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적극적인 기쁨의 삶이 있다. “하나님의 선물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모든 것이 은혜이다. 이 세상에 속한 열 개의 목숨을 가지고 살 수 있다 해도 나는 하나님의 선물로서 영생을 취할 것이다. 왜냐하면 영생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난 자로 여길 수 있는 진리를 늘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데까지 자라가길 바란다. 그럴 때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하늘에 속한 자로서, 세상의 악에서 분리되어 이 세상을 넉넉히 이기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J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