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일보 박경석 시론
1999년 10월 1일 국군의 날 특집
통일시대를 바라보는 국군
군사평론가협회 회장 박경석
대망의 21세기가 바야흐로 다가오고 있다. 21세기는 우리 민족에 있어 통일이 성취될 감동적 시대가 될 것임은 분명하다. 통일시대를 바라보는 국군은 보다 큰 비전을 가지고 철저히 대비해야한다.
완벽한 국방태세와 불굴의 국군장병이야말로 통일을 성취하는데 있어서는 가장 핵심적인 역활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시기에 있어서 신라의 삼국통일과 고려의 후삼국통일에서 어떤 교훈을 찾아야한다. 역사에서 교훈을 찾는 일은 가장 현명한 방편이라는 것이 여러 학계의 통념이다.
신라가 당나라 군대와 함께 백제를 평정하고 그 여세를 몰아 고구려군을 굴복시킨 사실은 상식에 속하지만 통일을 성취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사적 교훈이 잠재되어 있었음을 읽어야 한다. 당시 백제는 의자왕의 난정(亂政)으로 국기(國基)가 흔들리고 민생고가 극에 달했고 백제군도 거의가 흐트러져 싸울만한 병력이란 계백이 이끄는 3천여 군사에 지나지 않았다.
백제가 멸망한 뒤 고구려 정벌에 나선 신라군은 북진작전에서 김유신장군의 지휘없이 제2군을 보내어 고구려를 굴복시켰다. 당시 고구려는 연개소문의 쿠데타 이후 줄곧 그의 동생 연정토와 3형제 남생 남건 남산 사이의 권력 투쟁으로 국정이 흔들리고 인민이 도탄에 빠져 붕괴의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서 연정토는 연개소문의 아들들에의해 권력투쟁에서 패하자 신라에 항복해 버렸다.
어디 그뿐이랴. 연개소문 사후 고구려의 막리지(莫離支-정권과 군권을 쥔 실권자)였던 장남 남생은 두 동생에게 쫓기어 당나라 고종에게 귀순하는 이변이 일어났다. 이처럼 신라군이 북진하기도 전에 대고구려는 멸망의 길에 들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왕건에 의한 후삼국통일에서도 통일신라의 붕괴과정의 교훈적 의미는 주목할 만하다.
통일신라의 경순왕은 통수권을 잃고 중앙의 귀족은 물론 지방의 호족들에 대해서도 통제력을 상실하고 있었으므로 지방 세력가들은 제멋대로 사병(私兵)을 조직하여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런 혼돈에서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굶어죽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이때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궁예와 견훤이 후고구려와 후백제를 표방하고 나섰다. 궁예는 얼마 안가 포악한 성품으로 신하들에게 쫓겨나고 그 대신 왕건을 옹립했다. 후백제를 일으킨 견훤 또한 그의 아들 신검에게 쫓겨나니 반란의 두 두목은 모두 왕위를 잃었다.
이렇게 하여 통일신라의 영토는 북방의 고려와 서남방의 후백제 그 리고 동남방의 무력한 신라로 3등분으로 분할되었다. 이때를 역사에서는 후삼국시대라고 부른다. 고려의 왕건은 선정을 베풀어 민생을 안정시키고 굶주림으로 부터 벗어나게 하자 그의 명성은 신라와 후백제에까지 알려졌다. 왕건은 이때 지금의 햇볕정책과 유사한 포용정책을 폈다.
신라를 보호하면서 후백제를 견제한 것이다. 특히 이 무렵 왕건의 고려군이 철통같이 단결하여 임전태세를 갖추고 있었다는데 주목해야한다. 신라의 경순왕은 더 이상 국정을 이끌어 나갈 자신을 잃고 고려 왕건에게 나라를 맡겼다. 이 여세를 몰아 왕건은 후백제를 공략, 마침내 통일을 달성하였다. 삼국통일 당시의 신라군이나 후삼국통일 당시의 고려군은 철저히 훈련되어 전투태세에 만전을 기했을 뿐만 아니라 통수권자의 통일정책을 빈틈없이 뒷받침했다.
지금의 북한상황은 삼국통일 직전의 고구려나 백제, 후삼국통일 직전의 신라와 후백제와 같이 국력이 쇠잔하고 인민이 굶주리며 인권이 말살된 공황상황에 처해있다. 우리 국군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거울삼아 어떤 정책변화에도 흔들림없이 임전태세를 갖출때 통일의 주역군으로서의 영광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햇볕정책에 대해 일부 논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국군은 임전태세를 갖추어 어떤 상황하에서도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구비해야 할 것이다. 이 길이 바로 통일에의 전제조건이다.
우리의 주적(主敵)은 북한군이지만 북한이 우리의 햇볕정책에 순응할 때에는 위대한 통일의 길로 들어서게 될것이다.
첫댓글 나는 많은 보수인사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제한된 포용정책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왕건의 후삼국통일에서 그 효용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좌파정권 10년 간의 햇볕정책은 동의할 수 없었다.
이 킬럼은 그 시절 국방부의 요청에 의해서 썼다.
이 글의 끝에 강조한 것처럼 '햇볕정책에 순응할 때'에 한정한다고 명백히 밝혔다.
북한당국은 햇볕정책에 순응한 것이 아이라 햇볕정책을 이용했기 때문에 나는 분명히 그런 햇볕정책에는 반대했다.
따라서 마치 내가 그 시절 햇볕정책을 지지 했다는 일부 보수인사의 지적은 옳치 않다.
또한 그 시절 우리의 주적을 분명히 북한군임을 명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