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군사저널 2018년
박경석 군사논단
6.25전쟁, 북침인가 남침인가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4월 27일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은 6.25전쟁 첫날부터 참전했던 나에게 남다른 감회와 충격을 동시에 안겼다.
대한민국 최초의 4년제 정규 육사에 입교한 나는 1950년 6월 25일 전쟁 발발 당일 계급도 군번도 없는 신분으로 포천전투에 투입돼 사선을 넘으며 청운의 꿈을 접어야 했다. 이 첫 전투에서 동기생 330명 가운데 86명이 전사하는 참상을 겪었다.
어디 그뿐이랴, 피난지 부산에서 단기 교육을 받고 육군소위로 임관한 나는 소총소대장이 되어 다시 6.25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결국 전투중 적탄에 의해 피를 흘리면서 나는 쓰러지고 말았다.
6.25전쟁 발발 67년 후인 2018년 4월 27일. 남북 두 정상의 평화와 종전을 향한 판문점 선언을 들으면서 마침내 벅차오르는 감동을 억누룰 수 없었다.
이제 지난 67년을 되돌아 보며 6.25전쟁 여러 고비 하나하나를 살피면서 그로부터 역사적 교훈을 얻는 작업은 6.25전쟁 참전 생존자의 한 사람으로서 해야 할 책무라고 생각한다. 그 첫째 과제로 6.25전쟁이 북침인가 남침인가를 확인 정리하고 넘어가겠다.
과거 6.25전쟁의 기원으로부터 시작하여 발발원인 및 전쟁 책임론에 이르기까지 사실과 다른 엉뚱한 학설로 대한민국은 때때로 곤혹스러운 국제적 입지에 처해진 일이 있었고 일부 세력에 의해 왜곡되거나 불확실한 내용이 인용되어 사회 혼란까지 야기하는 원인으로도 작용했었다.
한때 북한측이 주장하는 '미제의 사주에 의한 국군의 북침'이 학계의 일각에서 정설인양 보편화되어 있을 정도였다. 여하튼 당시의 6.25전쟁에 대한 왜곡은 우리에게 큰 충격을 주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더욱이 그 책임의 일단이 북한당국 뿐만 아니라 남한 자체에도 있었다는 데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는 한국전쟁 발발 직전의 국방장관 신성모와 육군 총참모장(당시의 호칭) 채병덕 소장의 허장성세(虛張聲勢)에 기인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유의해야 한다. 그들은 '북진통일' '북진준비 완료'등을 공식 비공식 석상에서 발설했다. 어디 그뿐인가 심지어 일부 언론은 전쟁 발발 3일째인 6월 27일 오전까지 '국군 북진중' 이라는 허위보도를 내보내고 있었다. 이는 곧 자충수(自充手)를 둔 꼴이었다.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자 일부 외신들은 '국군의 북진중'임을 보도하는 해프닝도 벌어질 정도였다.
6.25전쟁이 국군의 북침인가,북한군의 남침인가 하는 의문은 남과 북이 '종전 선언'을 하는 시점에서도 명쾌한 결론이 일반 국민에게까지 알려지지 않았음은 안타까운 현실이다.
벌써 20여 년이 흘렀지만 나는 용산 전쟁기념관 4층 한국군사학회 회장실에서 일어났던 일을 상기해 본다. 어느날 육사 교수를 역임한 후 전역한 정창인 박사가 급히 중요한 안건이 있다고 하면서 회장실에 들어섰다. "사관생도 여론수집 결과가 상식을 벗어났다"며 크게 우려하는 얼굴 빛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을 이어갔다. 내용인즉 "6.25전쟁이 북침인가,남침인가"를 묻는 한 조사에서 과반수가 넘는 사관생도가 "북침이다"고 응답했다는 내용이었다. 순간 나는 정 박사의 생각과는 달리 여론수집 과정에서 앙케트의 착각에서 온 착시현상으로 직감했다. 명예를 존중하고 사명감에 불타는 사관생도들이 6.25전쟁의 기초적 실상을 왜곡할 리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나는 정 박사에게 "지금 제시한 앙케트 문장이 명확하지 않으므로 구체적으로 기술한 후 다시 확인하도록" 일러주었다.
얼마간 지난 후 회장실을 찾은 정 박사는 지난날과는 달리 밝은 표정으로 들어섰다. 그의 설명을 들어보니 내가 처음 예측한대로 앙케트의 착시에서 온 결과였음이 밝혀졌다.
사관생도 거의 모두가 북한군의 남침이라는데는 뜻을 함께 했지만 최초의 앙케트에서 '남침'이 아니라 '북침'에 체크한 생도는 '국군의 북침'이 아니라 '북한군의 침공'으로 '북침'을 곡해했음이 밝혀졌다. 이는 흔히 한글세대의 한자 이해 부족에서 오는 경우라 하겠다.
그러나 생도들의 곡해의 결과가 아닌 학계의 일각에서 북한군의 군사(軍史) 그대로 '미제의 사주에 의한 국군의 북침'이 아직도 남아있음에 이제는 정확한 내용으로 결론을 맺을 때가 됐다고 판단해 그간 조사 확인한 팩트(FACT-사실-史實)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러시아의 퇴역 장성이자 사학자였던 볼코고노프가 쓴「일곱 지도자」,「소련 지도자의 회랑」두 권의 저서 속에서 왜곡되었던 일부 문제들이 명쾌하게 밝혀지고 있다. 그는 1995년 12월, 67세로 사망했지만, 살아 있을 때 소련 문서보관소 등의 극비 문서들을 찾아내어 김일성과 스탈린의 음모와 함께 한국전쟁에 대한 많은 의문을 속 시원하게 풀어 주었다.
볼코고노프는 저서 출간 이전, 즉 그가 살아 있을 때, 이미 "한국전쟁은 스탈린의 지원을 등에 업은 김일성에 의해 도발되었다"는 사실을 문서 고증을 통해 세상에 알렸다. 볼코고노프(Dmitriy Volkogonov)의 저서를 통해 새로 밝혀진 6.25전쟁 관련부분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국은 전쟁을 확대하여 중국(당시의 중공)까지 끌어 넣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중국과 동맹을 맺고 있는 소련도 개입할 것이다. 이런 사태를 두려워 할 것인가.내 견해로는 그럴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 두 나라가 합치면 미국과 영국을 합친 것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유럽에는 독일을 제외하고 미국을 도와줄 자본주의 국가가 없으며 독일은 현재 군사력을 보유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에 도움을 줄 수 없다.만약 3차 대전이 불가피하다면 현재가 좋을 것이다. 몇 년이 더 지나면 일본 군국주의가 미국의 동맹세력으로 부활할 것이다."
위 내용의 글은 1950년 10월 초,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으로 북한군이 참담하게 패주하자 중공군을 한국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한 속셈으로 스탈린이 중공의 모택동에게 보낸 서신의 일부이다. 위 서신 내용에서 몇 가지 사실을 유추해 낼 수 있다.
첫째, 김일성의 남침을 지원한 장본인이 소련의 스탈린이란 사실이다. 이때까지 중공은 한국전쟁에 관하여 방관자적 입장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중공의 모택동은 스탈린의 확실한 지원과 보장을 받음으로써 한국전쟁에 지상군을 출병했다.
셋째, 중공군의 개입으로 소련은 한 발 빠져 공중지원과 기술지원 그리고 군수지원 등으로 직접 개입을 피할 수 있었다.
당시 북한의 국력과 군사력으로 미루어 볼 때, 스탈린의 적극적인 지원없이 북한 단독으로의 남침은 상상할 수 없었다.설혹 중공의 지원이 가능했다 해도 남침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스탈린은 왜 북한의 김일성의 지원요청을 흔쾌히 수락했을까 그 의문 역시 소련의 붕괴로 풀렸다.
첫째, 북대서양 조약기구 (NATO)의 창설로 유럽에서 가중되는 미국의 군사적 압력을 극동쪽으로 분산시키기 위한 전략으로 한국전쟁 발발을 결심했다. 이 전제는 한국전쟁이 발발하더라도 미 지상군의 개입이 없을 것이라는 점과 전략적 부담을 미국에 안길 수 있다는 스탈린의 책략이다. 미국은 이미 1949년 여름 주한 미군을 철수시켰고 다음 해인 1950년 1월 12일, 미 국무장관 애치슨이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한 대로 '남한을 미국의 극동방위선에서 제외시킨 일련에 정세변화'가 스탈린을 고무시켰다.
둘째, 1949년 10월1일 중국 장개석 정부의 몰락과 함께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는 정황에서 보였듯이 중국 공산당의 대륙제패를 미국이 방관한 사실은 북한군이 남한을 공격한다 하여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했다. 그렇다면 이기회에 공산주의를 확장하여 남한을 일본 견제의 기지로 활용할 수 있다는 소련의 대 극동전략의 발전적 포석이 완성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셋째, 소련의 지원을 크게 받지 않고서도 중국 대륙을 제패한 중국 공산당에 대해 스탈린은 내심 불안하게 생각했다. 만약 중공이 독자 노선을 추구해 나갈 경우, 아시아 지역의 공산화와 함께 중공의 세력과 영향력은 걷잡을 수 없게 확장될 것으로 우려했다.
넷째, 소련의 극동전략상 꼭 필요한 해군기지의 확보가 어렵게 되어 있던 차에 북한을 지원, 적화통일을 성취하면 한반도의 항구에 해군기지를 설치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1950년 1월~2월 모스코바에서 열린 스탈린과 모택동의 회담에서 '황해의 연한 항구들을 더 이상 소련에게 빌려줄 수 없다'는 모택동의 주장에 스탈린은 큰 충격을 받았다. 따라서 스탈린은 중공을 소련의 공산주의 패권 야망의 걸림돌로 확신하고 있었다. 자칫 잘못하면 공산주의 종주권이 소련에서 중공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위기 의식을 느꼈다. 이리하여 소련은 김일성을 도와 한국전쟁 발발에 한발 내딛게 되었던 것이다.
스탈린으로부터 적극 지원을 확약받은 김일성은 지체없이 군비확장과 전투사단 증설 그리고 남침준비에 들어갔다. 그 첫 조치로 1948년 초 전투기, 전차, 통신 등 기술요원 양성 목적으로 북한 청년 1만여 명을 선발하여 소련내 극동군사학교에 파견시켜 1년간에 걸친 교육훈련을 받게 하였다. 같은 해 12월 중순, 소련은 모스코바에서 비밀군사회의를 소집하였다. 소련을 비롯하여 중공 및 북한의 군 수뇌가 참석한 이 회의에서는 향후 18개월 이내에 남침에 충분하도록 북한 인민군을 증강키 위하여 소련의 특별 군사사절단을 북한에 파견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 결정에 따라 북한 인민군은 급격히 증강되었다. 전투기는 물론 전차와 야포 등 중무장을 서둘렀고 보병사단 또한 증설하기에 이르렀다. 이어서 1949년 9월부터 야외기동훈련에 돌입하였으며, 그해 12월에는 최종적인 전술 평가까지 마쳤다.
1950년에 들어서자,북한 당국은 실질적인 준비,즉 부대이동,부대 재배치,공격 계획의 수립 등 직접 남침준비를 갖추었다. 이렇게 하여 5월에는 명령만 내리면 공격할 수 있는 전투준비를 완료했다. 그렇게 전쟁준비를 끝내 놓고서도 김일성은 남한에 대하여 줄곧 평화와 화해를 주조로 한 추파를 던짐으로써 남한 당국의 상황판단에 혼란을 빚게 했다.
특히 6월8일에는 대남 방송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제의를 해 왔다.
첫째, 1950년 8월 5일에서 8일까지 통일 입법기관을 설치하기 위한 총선거를 적극적으로 실시하자.
둘째, 동년 8월15일 서울에서 신설 입법기관을 개회토록 하자.
셋째, 6월15일에서 17일 사이에 해주 또는 개성에서 남북 조선대표가 모여 조국의 평화통일을 위한 여러 선거를 관리하는 중앙위원회 설치 등을 토의하자.
넷째, 조국통일을 방해한 분자들은 민족 반역자로 제외되어야 하며 유엔 한국위원회의 개입과 간섭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상 네가지 발표문은 남한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임을 북한 당국자 자신이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국제 여론의 환기,그리고 전쟁 기도의 은폐를 위하여 남한에 제의하였던 것이다. 이를 방송으로 발표한 다음날인 6월9일, 소련 외상과 중공 대변인은 성명을 통하여 "이번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서 발표한 결의문은 조선 반도의 평화와 민족의 통일을 위하여 가장 합리적인 내용"이라고 북한 당국을 두둔하고 나섰다. 이러한 일련의 전개과정으로 미루어 볼 때, 김일성의 남침은 소련과 중공의 지원하에 이루어졌음을 역사에 각인했다.
이렇듯 6.25전쟁 발발은 북한의 김일성이 소련 스탈린의 실질적 군사지원을 받아 중공의 모택동 동의하에 남침을 결행한 것으로 결론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