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1980년대에 철학 공부를 할 때
가장 중요한 화두/범주/개념은 계급의식 내지는 이데올로기였다.
소련이 망하고 난 다음에, 문화연구 관련 책들을 읽으면서,
특히, 프로이트를 읽으면서 들은 생각은 "계급 무의식"이란 범주가 더 중요할 수 있겠구나 하는 것.
그런데, 예컨대, 프레드릭 제임슨의 <정치적 무의식(The Political Unconscious, 1981)>은 나를 만족시켜 주지 않았다.
제목과는 달리, 이 책은 결국 문학 연구에 속하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번역되지 않은 책이었고 책 자체가 상당히 어려웠다.
(조금 읽다가는 포기...쩝)
이후, 그람시, 니체, 부르디외 등을 읽으면서
이 새로운 화두에 대해 틈틈히 생각하기도 했는데...
하지만, 난 워낙 이론 지향적인 사람은 아니어서 그때 잠깐 뿐이지
그 화두를 지속적으로 깊이있게 파고들지는 못했다.
오늘, 다른 일로 李泽厚의 책을 잠깐 들춰 보다가
잘 알려진 "문화심리 구조"를 언급하는 대목과 마주치면서
이제는 내게 낡게 느껴지는 바로 그 화두를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우선, 李泽厚에 대해서 말하자면,
"문화심리 구조"라는 개념에 관한 한,
그는 문화인류학적, 혹은 발달심리학적 접근 + 에스닉한(or 내셔널리스틱한) 태도를 취하는 것으로 보인다.
실용이성이란 개념도 마찬가지다.
"중국 사람은 돈을/금을 좋아한다", "중국 사람은 졸라 현세적/현실적이다" 등과 같은 우리의 통념을
李泽厚가 실용이성이란 말로 몰아서 정리해낸 것에 불과하다.
난 유럽 애들에 대해서나 중국 애들에 대해서
걔네들 책 몇 권 읽고 걔네들의 개념이나 이론틀에 대해서 호들갑 떠는 걸 매우 싫어한다.
그래서, 예컨대 포포주의에 환장한 애들이 지겨운 것이다.
철학(사)나 사상(사)는 기본적으로는, 거시적으로 & 상대적으로 "쿨하게" 봐야 하고
때에 따라 필요하면, 아주 꼼꼼히 읽어내야 한다, 당연히 자기 힘으로 말이다.
李泽厚의 "문화심리 구조" 개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하자면
그것은 소위 "장기 지속"에 상응하는 멘탈리티의 범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李泽厚의 "문화심리 구조" 개념은 일반적 멘탈리티 범주와는 다르다.
중국 사상 이외에 다른 분야에 적용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위에서, "에스닉한(or 내셔널리스틱한)"하다고 한 것이다.
(李泽厚가 이 주제와 연관해서, 중국과 일본을 서로 비교한 논문이 있기는 하다)
李泽厚는 칸트 철학을 포함해서 서구 근대철학에 대한 이해가 상당하다.
또, 일정하게 맑스주의적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모종삼과 같은, 터무니없는 사상적 사기를 치지는 않는다.
(성리학과 칸트 철학을 나란히 놓는, 그 말도 안되는 사기 말이다.)
하지만, 내게 李泽厚는 "에스닉한(or 내셔널리스틱한)" 것으로 읽힌다.
건방진 얘기로 들리겠지만, 그런 점에서 나로서는 별로 배울 게 없다.
내가 볼 때, 고대사상사의 경우, 李泽厚의 서술은 그다지 중립적이지 않았다.
간결하게 요약해서 정리해주기보다는
너무 자기만의 개념적 프레임을 통해서 보여주려고 했다.
중국 철학이나 사상은 결국 시간의 문제다.
내 힘으로, 내 나름대로 읽어나가면 되는 거니까...
각설하고, 계급 무의식을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할까?
두서없이 메모해두기로 한다.
1. 통념, 내지는 일상의식이 중요하다.
(체계적이고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2. 논리적인 차원(로고스)보다는 습속, 관습, 관행, 정서 등의 차원,
즉, 에토스와 파토스의 차원이 중요하다.
3. 특히, 소유 범주와 관련된 아비튀스가 중요하다.
(물론, 오늘날에는 소비의 아비튀스도 중요...)
4. 다른 종류의 정체성 형성 요인과 관련된 무의식의 여타 영역,
예컨대, 성/섹슈얼리티, 세대, 국가/민족, 인종, 종교 등과 관련된 무의식 영역과 계급 무의식의 영역은
서로 어떻게 연결, 교차, 착종되고 있는가를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된다.
5. 역사, 문화, 지역이라는 차원에서, 충분히 체험적, 경험적으로 탐구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몇 자 적어 놓고 보니
"계급 무의식"이 그다지 별로 생산적, 효과적인 범주/개념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팍 온다.
암튼, 시간 날 때 다음 몇 가지를 서로 비교해가면서 정리해 둬야겠다.
- 아날학파 mentality
- 레이먼드 윌리엄즈 감정의 구조(structures of feeling)
- 부르디외 아비튀스
- 李泽厚 문화심리 구조
- 정념, 정서/감정, 정동; 인지 발달...
-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이것들을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과 연결지어 볼 것
교통 정리가 그러한 것처럼, 개념 정리는 매우 중요하다.
생각과 사고의 혼잡, 정체를 없애거나 줄이기 위해서다.
근데, 이건 다른 사람한테 맡겨서는 안된다.
책을 뒤적이면서 & 생각의 뜸을 오래 들여가면서 스스로 해내야 한다.
그래야, 씹을 때 맛있고, 먹어서 다 살로 간다.
물론, 늘 나는 조로와 불균형/불비례와 비만이 문제이기는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