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가보(萬家譜).
편집/해송
「만가보」에 실린 성씨는 모두 270여 가문으로서 조선시대 유명한 성씨들이 거의 망라되어 있다.
특히 과거에 합격한 인물들은 본관이 없는 성씨라도 별도로 기재할 정도로 그 수록 범위가 광범위하다.
문과 과거 합격자의 경우에는 해당 인물에 표시를 하였다.
기재 방법에 있어서는 출생 순서에 따른 기재, 외손 및 서자(庶子)에 따른 기재 등 초기형 족보류에서부터
본손(本孫)·남손(男孫) 중심으로 기록하는 후기의 족보 형태 등 그 기재 형식이 다양하다.
이것은 편찬 과정에서 참고한 족보가 시기적으로 각각 다른 족보를 참조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필체가 다른 것으로 미루어 보아 여러 사람이 여러 가문의 족보를 참고하여 필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만가보」의 기재 내용은 해당 가문의 원래 족보의 기재 사항인 생몰년(生沒年), 묘소(墓所) 위치(位置) 등을
기재하지 않고 있으나 등과(登科) 여부(與否), 사위(서, 壻)의 이름과 본관(本貫), 계자(係子) 등을 빠짐 없이 기록하였다.
「만가보」의 가장 큰 장점으로는 각 가문의 시조(始祖)에서부터 파별(派別) 갈래에 이르기까지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도시화(圖示化)하여 어떤 가문, 어떤 계파라 할지라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했다는 점이다.
이 점이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등 기존의 종합보와 구별되는 장점이라 하겠다.
따라서 어떤 인물이나 계파라 하더라도 파시조(派始祖)나 현관(顯官)을 지낸 사람의 이름만 알면 쉽게 찾을 수 있어서
조선시대 인명사전의 역할도 할 수 있다.
만가보의 사료적 가치
통상 족보에서 특정 계파나 인물을 찾기에는 상당한 예비 지식이 없는 한,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그러나 「만가보」의 경우 계파(系派) 나 파조명(派祖名)만 확인된다면 해당 인물을 찾는 데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는,
다시 말해 거미줄처럼 얽힌 족보 안에서 특정 계파나 인물을 찾아내는 데에도 이 「만가보」는 매우 유용하다.
그리고 「만가보」에 기재된 내용 이상의 것을 알고 싶다면 「만가보」내의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曾祖), 외조(外祖)
등의 가계나 계파 등을 통해 원래 족보를 찾아 들어간다면 보다 쉽게 해당 인물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만가보」의 사료적 가치는 곧 족보의 가치와 연관된 문제이다. 족보는 소위 개인적 또는 가문적 차원에서 발간되었으므로 그 객관성이 결여되어 있다던가 또는 위보(僞譜) 등으로 그 사료적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것은 조선시대 족보의 편찬 과정에서의 엄중성과 철저성을 감안한다면 위조 부분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만약 위조되었다 하더라도 시조(始祖)에 대한 것과, 각 인물의 등과(登科) 여부(與否)나 관력(官歷)에 국한되었을 것이며 정작 사료상(史料上)으로 중요한 세계(世系)나 생몰년(生沒年), 묘소(墓所) 위치(位置) 등에 대해서는 위조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더구나 이 「만가보」는 보학(譜學) 전문가가 그것의 진위(眞僞) 여부(與否)를 판단한 후 필사했을 것이므로 사료적 가치에 있어서는 특정 가문에서 편찬한 족보보다 오히려 높다고 할 것이다. → 안승준 「만가보」 해제(인창문화사, 1992)
19 세기 해남 고산 윤선도 종가에서 필사한 종합보
백성보(百姓譜)·천성보(千姓譜)·만성보(萬姓譜)라고 할 때 이름은 모두 조선시대 각 가문의 족보를 알기 쉽게 간추려 엮은 것을 말한다. 만가보 또한 이러한 형태의 족보류로서 270여 가문의 족보를 모아 이를 계파별로 분류한 일종의 종합보(綜合譜)이다. 필사로 된 유일본이며 모두 14권으로 되어 있다. 소장처는 해남윤씨(海南尹氏) 가문의 종택인 녹우당(綠雨堂)이다.
이 책의 편찬자는 소장처로 보아 해남윤씨 가문 문중의 한 사람일 것으로 보이지만 서문·발문 등 여타의 기록이 없어 편찬자 및 편찬된 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소장자가 해남윤씨 가문인 것을 보면 편찬자는 같은 문중의 인물일 것으로 보이며, 편찬 시기는 해남윤씨를 비롯한 가계 기록의 하한선이 조선 말기까지인 점을 보아 19세기 말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종합보의 특징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그들의 유학적인 지식 외에도 기본적으로 가계(家系)에 밝은 보학자(譜學者)들이었다.
자기 집안은 물론 웬만한 가문이면 그 가문의 내력과 인물의 출신에 통달했을 정도로 보학(譜學)은 조선시대 양반들의 기본 상식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보학에 뛰어난 보학자(譜學者)로는 문화유씨(文化柳氏) 가정보(家靖譜)를 편찬(編纂)한 류희잠(柳希潛, 1500~1562), 「서천씨(西川氏) 족보(族譜」를 편찬한, 정곤수(鄭崑壽, 1538~1602), 심희세(沈熙世, 1601~1645), 조종운(趙從耘, 1607~1683), 정약용(丁若鏞, 1762~1836)과 황윤석(黃胤錫) 등을 들 수 있다.
조선 초기에는 이런 보학에 뛰어난 학자들에 의해 개인 차원에서 족보가 간행되었는데 후기 족보와 다른 특징으로는 외손을 비롯한 다른 성씨에 대한 기록이 본손(本孫)의 기록보다 훨씬 많다는 점이다.
이것은 남녀나 본손(本孫)· 외손(外孫)의 구분이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시대 분위기를 반영하였던 것이었다. 따라서 조선 초기의 족보는 후기와 달리 관련 성씨들의 가계가 집합된 일종의 종합보적 성격을 지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초기의 대표적인 족보로는 안동권씨(安東權氏) 성화보(成化譜, 1476년 간행), 문화유씨(文化柳氏) 가정보(家靖譜, 1565년 간행) 등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초기의 족보 형태가 17 세기 이후에는 기록의 중심이 본손(本孫)· 남손(男孫) 중심으로 바뀌어 가고 18 세기를 전후한 시기에는 본손(本孫) 안에서도, 각 파별(派別) 집합인 대동보(大同譜)의 간행이 널리 유행하였다.
한편 전기의 족보 편찬이 대개 유력한 문벌 가문에 국한되었다면 18 세기 이후에는 대부분의 가문에서 족보 간행이 성행하게 되었고 이와 함께 족보 위조, 양반 모칭(冒稱) 등 사회적 문제점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이 일어날수록 그 진위(眞僞)를 판단하거나 교양 또는 혼인 등 현실적 필요에 의해 보학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었는데 종합보의 출현도 결국 이러한 배경 아래에서 생겨나게 된 것으로 보여진다.
잠영보(簪纓譜)·세가보(世家譜)·휘(姓彙)·팔세보(八世譜) 등이 개인적인 관심사에서 간행한 종합보의 형태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종합보 중에는 조종운(趙從耘)의「씨족원류」7권, 정시술(丁時述)의「동국만성보(東國萬姓譜)」18권, 임경창(任慶昌)의 성원총록(姓原叢錄) 28권이 유명하였고, 20 세기 초의 족보로는 구의서(具義書, 1861~1930)에 의해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백씨통보(百氏通譜)」46권이 가장 많은 성씨와 인물을 기재하고 있다.
그 후 1931년에 간행된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는 이와 같은 전통을 이어 받은 현대판 종합보(綜合譜)이다.
「만가보 (萬家譜)」도 기본적으로 이러한 종합보적 성격을 지니는 것이지만, '그 수록 범위에 있어서나 서술체제(敍述體制) 등에 있어서는 보다 광범위하고 사용하기 편리한 장점을 지니고 있다.
출처 : 한국학자료포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