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관 새내기 사회사업가와 '독서노트' 읽고 나누기 6월 모임도 풍성했습니다.
늘 두 시간이 짧아요.
6월 모임 안내 글
서울시복지재단 김민선 선생님, 강가희 선생님.
방화11종합사회복지관 박혜원 선생님, 이미진 선생님.
선의관악종합사회복지관 김승철 선생님.
관교여자중학교 홍보람 선생님,
공릉청소년문화정보센터 김윤혁 선생님,
신월복지관 정다희 선생님,
신목복지관 정한별 선생님.
이렇게 함께 모여 나눴습니다.
<사회복지사의 독서노트>는 읽지 못했습니다.
지난 모임에서 조금 나눴던 이야기를 이어서 깊이 나누느라
책을 읽지 못했습니다.
이웃과 인정을 살리는 일, 마을 공동체를 생동하게 하는 일을
공적 문제에 대한 사적 대응이라고 비판하는 글이 있습니다.
이 글을 읽고 나눴습니다.
도구화되는 ‘공동체’: 서울시 「마을공동체 만들기 사업」에 대한
비판적 고찰, 박주형(서울대 사회학과 석사과정), 공간과사회 2013년 43호
“마을공동체 만들기 사업은 신자유주의 도시화에 저항하는 ‘해방적 정치’라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구조적이고 광범위한 신자유주의 정치기획의 일환…(본문 가운데)”
사회복지의 상이한 실천과 새로운 길의 모색 :
한국사회복지의 흐름과 비판 그리고 새로운 사회복지실천의 모색 ,
정연정(성균관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이상에서 보듯이 마을만들기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마을만들기를 통해 사회적 위험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이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사회적 위험에 대한 공적 대응을 회피하는
지역차원의 사적인 대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이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실천의 혼동 상태에 빠져 있다. (본문 가운데)”
인식되지 않은 조건, 의도하지 않은 결과 :
노골적인 계급사회의 탈계급 정치, 서영표(제주대 사회학과),
특집 ‘낡은 진보에 대한 고별사 : 혁신을 위한 비판과 성찰’, <진보평론> 58호, 2013년 겨울호
“언제부턴가 사회적 기업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하더니 협동조합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정부와 지방자치 단체가 앞을 다투어 협동조합과 사회적 기업을 지원하는 법률과 조례를 제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마을 만들기 열풍이 불고 있다.
영국의 ‘제3의 길 ’과 ‘큰 사회 ’론을 언급하면서 지적했듯이
현재 논의되고 있는 ‘사회적인 것’(the political)은 폴라니가 생각했던 것과 같은 시장을
사회의 통제 아래 되돌려 놓는다는 의미에서의 그것이 아니다.
협동조합과 사회적 기업에 헌신하고 있는 활동가들,
그리고 마을 만들기에 참여하고 있는 활동가들이 바라고 있는 협동과 나눔의 정신 실현과도 거리가 멀다.
공동체와 사회적인 유대는 자본주의적 이윤논리를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한 채,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맷돌이 끊임없이 토해내는 잉여인간들과 패배자들이 겪게 되는 고통과
그로부터 생겨나는 불만과 저항이 자 본의 순환을 방해하는 것을
방어할 완충지대를 만드는 것에 이용된다. (본문 가운데)”
현장에서 실천하는 일을 낮게 보는 이들의 말이 불편합니다.
정책과 제도는 외면한채 현장에 몰입되어 있다는 비판도 불편합니다.
어떤 뜻으로 하는 말인지 모르지는 않지만,
자칫 현장 실천보다 정책과 제도가 먼저라는 뜻에서 하는 말이라면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오늘 모임에서 이를 직접 다루지 않았습니다.
인문학자 강신주를 비판하는 이들의 글과 그 반론을 읽으며 우리 현장을 돌아보았습니다.
강신주를 위한 변명 한영인, 프레시안, 2014.3.3.
“주체와 자아의 문제는 철학에 있어 그 무엇보다 중요한 성찰과 탐색의 대상이다.
사회학에 있어 사회와, 경제학에 있어 경제가 그렇듯 말이다.
따라서 개인의 자아와 새로운 주체화를 요청하는 철학적 담론이
사회와 정치의 문제의식을 내포하고 있지 않다는 비판은, 철학이 개인의 자아와 주체를 매개로
사회와 정치의 문제를 사고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일 뿐이다.”
(…) 강신주에게 왜 정치와 경제를 포괄하는 체계적인 사회구조에 대한 분석을 하지 않느냐고
힐난하는 것은 그에게 왜 사회학이나 정치학이나 경제학을 하지 않고
철학을 하고 있느냐고 비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물론 이는 인문학 전공 대학원생들이라면 늘 듣는 익숙한 힐난일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모두들 사회과학만 해야 하나?
모든 것을 사회구조의 반영이나 징후로 읽어야만 봐줄만한 글인가?
윤리적 주체에 대한 탐색과 성찰은 자기 일기장에만 써야 하나?)
(…) 강신주가 비판받은 노숙자 관련 글에 대한 반응을 보자.
이에 대해 영화감독 이송희일은 “노숙자에게 필요한 건 수치심이 아니라
자립과 재활을 위한 사회적 안전망이라는 것쯤은 초등학생도 알겠다”며 강신주를 비판했다.
이 역시 속류 사회학주의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발상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수치심의 회복을 이야기하는 강신주보다
노숙자들을 “재활”되어야만 하는 존재로 바라보는 이송희일의
‘유사 임상의학적 강박’이 더욱 폭력적으로 느껴진다.
노숙자들이 원하는 것이 그냥 그렇게 머무는 것인지,
혹은 그들을 자립시키고 재활시킬 수 있는 ‘시설’에 입소하는 것인지 그가 어떻게 안단 말인가?
물론 그가 말하는 사회적 안전망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그 노숙인의 자립과 재활을 돕는 사회안전망(시설)은 아마도
우리의 시선에 포착되지 않는 곳에 지어질 가능성이 많다.
강신주라면 “당신은 진심으로 노숙자들을 위하고 걱정하고 존중하는 듯
말하지만 실은 그들은 부담스러운 짐일 뿐이고,
그래서 그 짐을 국가와 사회가 떠맡아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들은 그저 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존재라서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냥 잘 지낸다고 내가 생각하며 살 수 있길 바라는 것 아닙니까?
결국 당신은 나를 비판했지만 노숙자라는 타자와 당신이 맺는 관계는 전무한 것이 아닙니까?
어쩌면 당신은 노숙자와 아무런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아서
국가와 사회라는 추상물 뒤로 숨는 것은 아닙니까? 그것은 기만이자 위선 아닙니까?
차라리 노숙자의 뺨을 때린 보들레르가 정직하지 않습니까?”라고 되물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
이 글을 다시 쉽게 설명한 글이 있어 이를 옮깁니다.
<강신주를 위한 변명>
모든 문제가 발생하는 원인을 사회에서만 찾고, 문제가 개인으로부터 비롯될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했다.
근데 박일권은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른다.
원래 철학은 사회학, 경제학과 달리 개인(주체, 자아)를 강조한다.
강신주가 사회 부조리를 지적 안 한 게 아니라 강신주는 철학자니까 개인을 좀 더 ‘강조’한 것뿐이다.
(…) 또 문제의 원인을 사회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개인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과 같다.
모든 문제를 사회의 탓으로 돌리는 분위기가 만연하면서
개인이 자신에게 집중하면서 어떻게 사는 것이 진실한 삶인지
고민하는 것이 비난받는 세상이 됐다.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어쩌면 우리는 문제를 개인에게서 찾고 개인이 변화해야하는 고통을 감당하기 힘들어 사회에
모든 윤리적 책임을 전가하는 데 익숙해진 것이 아닐까.
강신주가 개인을 강조하니까, 사회에서 쉽게 면죄부를 찾지 못하게 되고
그것이 불편하니까 강신주를 비판하는 것이 아닐까.
경향신문 이혜인 기자 블로그, insam.khan.kr/52
누군가는 현장에서 실천하고, 누군가는 정책을 고민합니다.
하지만, 각자 역할이 있을 뿐이지 무엇이 더 중요하다고 쉽게 말할 수 없습니다.
허핑턴 포스트 창립자 아리아나 허핑턴의 책
<담대하라, 나는 자유다>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윌리엄 제임스는 이렇게 썼다.
“우리 세대의 가장 위대한 혁명은 인간이 마음의 태도를 바꿈으로써
삶을 바꿀 수 있음을 발견했다는 사실이다.”
달리 말하면, 세상을 바꾸기 위한 첫 단계는
세상과 세상 속에서 자신의 위치에 대한 시각을 바꾸는 것이다. 205쪽
▲ 김민선 선생님이 찍은 단체사진. 고맙습니다.
대부분 바쁜 업무 마치고 저녁도 않고 달려와 나눴습니다.
7월에도 모임은 이어집니다.
7월에는 <사회복지사의 독서노트> 속 한두 주제를 읽고 나눕니다.
첫댓글 '잔인하지 않은 사람들의 무관심이 잔인한 사회를 만든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자기 삶의 변화, 자기 실천의 변화를 강조하는 말로 다가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