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공주는 왜 자꾸 문을 열어줄까>를 읽고
이미영, 서울시교육청
묻지 마 이불 공주를 깨우려면
절망은 잠을 부른다. 무력감은 신체를 무기력하게 만든다.
나는 마녀의 저주를 피해 탑에 유폐된 공주가 끝없는 잠에 빠져든 것은 무력감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마녀의 마법이 효력을 발휘하는 것은 마녀가 저주의 마법을 건 순간부터가 아니라
어른들이 그 말을 믿고 공주를 탑에 가둔 그 순간부터일 것이다.
마녀는 마력을 발휘할 필요조차 없었다. (179쪽)
“이 아이는 자라서 물레 바늘에 찔려 죽을 것이야”에 놀란 왕과 왕비.
즉 공주의 부모는 공주를 탑에 가둔다.
물레 바늘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만든 것이다.
탑에 갇힌 공주에게는 아무 것도 없다.
위험도 없지만 도전도 없다. 싸울 사람도 없지만 사랑할 사람도 없다.
힘든 일도 없지만 성취할 일도 없다.
이 고립된 탑을 세상 전부로 알고 살아 온 공주가
깊고 깊은 잠으로 도피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 아닐까? (179쪽)
묻지 마 이불 공주에게 필요한 것은 꿈이다. 꿈을 꾸는 것을 허락하는 사회이다.
그에게 관심을 갖고 소중하게 여겨 주는 누군가의 존재이다. (180쪽)
부모에 의해 탑 속에 갇힌 잠자는 공주는 절망에 잠을 더해 무력감, 신체적 무기력에 빠져 있다.
즉, 절망+잠=무력감(무기력). 이 공식을 거꾸로 생각해 보고 싶다.
몸과 마음은 연결되어 있다.
신체에 활력을 넣으면 심리적 무력감에서 해방될 수 있지 않을까.
신체에 활력을 넣는 방법은 몸을 움직이는 것이다. 즉 운동이다.
몸을 움직인다는 것은 몸속의 피를 돌게 하는 것이고
피를 돌게 하면 심장과 폐가 운동을 하여 우리 몸 곳곳으로 산소와 영양소를 운반하여 생명을 유지하게 된다.
나는 움직임(가장 기초적 생명활동 유지 수준을 넘는)을 통해 살아있음을 느껴보는 것 자체가
심리적 무력감에서 벗어나게 만든다고 믿는다.
나에게는 20대 후배들에게 인생의 선배로 기회가 될 때마다 하는 얘기가 있다.
일종의 이십대 버킷리스트다.
그것은 천 미터 이상 산을 세 개 이상 올라보는 것과 마라톤을 뛰어보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내가 이십대 때 체득한 것으로
반백년 넘게 살아오면서 나를 밀어가는 심리적 에너지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극한의 경험이 언제가 힘들고 지친 삶을 지탱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 당시는 물론 몰랐지만.
잠자는 공주가 무기력에서 비롯된 잠에서 벗어나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왕자님의 키스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공주 자신의 신체적 활동에서 찾으면 어떠할까.
내가 잠자는 공주의 부모였다면 어떻게 대처했을까?
탑에 가두지도 않을 것이며, 물레를 피하는 다양한 방법을 알려 줄 것이며 운동을 하도록 할 것이다.
그럼 무기력해서 잠에 빠져들지도 않았겠지.
‘묻지 마 이불 공주에게 필요한 것은 꿈’이라고 한 작가의 말에 덧붙여
꿈을 꾸기 위해서는 먼저 몸을 움직여야 한다.
우리가 만나는 아동청소년에게도
10대, 20대에 맞는 움직임(신체적 한계를 극복할만한) 버킷리스트가 필요하지 않을까.
첫댓글 학교사회복지사협회 서울지회 선생님들 책모임 '책갈피'에서
읽고 쓰고 나눈 글을 허락을 얻고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