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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내용은 1998년 이영춘 신부님의 "전농동성당 특강" 자료를 일부 삭제하고, 일부 추가하여 실은 것이다.
天主敎의 東洋 傳來와 한국 교회사 연표
* 1492년 : 콜롬부스에 의한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
* 1498년 : 바스코다가마가 희망봉을 돌아 인도에 이르는 항로를 개척
* 1510년 : 서구에 문예부흥운동이 일어남
* 15세기 말∼16세기 초 : 로마성청에서 스페인과 포르투갈 두 나라에 새로 점령한 지역에서의 포교상의 특권(Padroado)을 부여하는 동시에 분계선을 설정해 줌.
* 1517년 :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남
* 1521년 : 마젤란이 세계 일주 도중 필리핀을 발견한 이래 포교가 시작됨
* 1530년 : 인도의 고아(Goa)가 포르투갈 지배의 거점이 됨
* 1534년 : 고아 교구의 설정(일본과 중국을 포함)
* 1534년 8월 15일 : 예수회 창설
* 1540년 : 교황 바오로 3세, 예수회 인가
* 1542∼5년 :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 Xavier) 인도에서 포교 활동
* 1545-1563년 : 트리엔트 공의회
* 1549년 : 하비에르 일본 포교를 위해 일본 남단 가고시마에 상륙
* 1552년 : 하비에르 중국의 남부 상천도(上川島)에 도착
12월에 하비에르 상천도에서 서거
* 1568년 : 진 리베이라 신부 마카오 도착
* 1569년 : 스페인의 필리핀 점령
* 1576년 : 마카오 보호교구 설정
* 1581년 : 예수회의 필리핀 진출
* 1582년 : 마테오 리치의 마카오 도착
미첼 루지리 신부 광주 도착
* 1585년 : 광주에 처음으로 천주교 교회당 건립됨
* 1587년 : 일본의 선교사 추방령
* 1592∼8년 : 임진왜란
* 1593년 말 : 세스페데스 신부 내한 1년반 체한
* 1601∼1610년 : 리치 신부, 북경에서 활동
* 1602년 : 마테오 리치 양의(兩儀)를 제작하여 정부에 바침
* 1603년 : 마테오 리치, `천주실의' 출판
* 1605년 : 예수회의 노빌리(de Nobili) 신부가 인도에서 적응주의란 새로운 포교 방법을 시도
* 1614년 : 일본 포로 권 빈첸시오가 北京에서 4년간 조선 전도를 시도
* 1616년 : 남경의 심회(沈淮)가 천주교를 멸하여야 한다고 상소문 올림
서광계는 변학장소(辨學章疎)를 저술하고 천주교 신부를 변호하는 상소문을 올림
심회는 상소문이 윤허되기 전에 천주교인 19명을 체포하여 고문하고 죽임
왕풍숙, 옹삼발, 방적아 신부를 체포하여 마카오로 압송함
* 1618년 : 아담샬 베이징 도착
* 1619∼1666년 : 아담샬(湯若望)의 중국에서의 활동
* 1620년 : 중국인 徐光啓의 조선 전도 계획
* 1622년 : 로마 포교성서의 발족
* 1622년 : 일본의 대박해 (長崎)
* 1623년 : 중국의 예수회에서 티베트에 전교
* 1625년 : 중국에서 景敎碑가 발견됨
* 1630년 : 淸의 조선 침략
* 1631년 : 도미니코 선교회 선교사들 중국 도착
* 1633년 : 프란체스코 선교회 선교사들이 중국에 도착함
* 1634∼1742년 : 中國儀禮論爭
* 1635∼1854년 : 일본의 "잠복 기리스당" 시대
* 1637∼8년 : 日本의 島原의 亂
* 1644년 : 명제국의 마지막 황태후가 교황에게 구원 요청 서신을 보냄
청의 이자성 베이징 점령
5월, 청의 베이징 입성
10월 1일, 大淸帝國의 건립을 선포
아담샬이 수력 수정사업 시작, 태상사, 광록대부라는 벼슬을 받음
* 1645년 : 조선의 昭顯世子가 아담 샬에게서 서양 과학과 천주교 교리책 및 마리아상을 선물로 받음
예옥범 신부가 중국의 제공사조문제를 교황에게 질문함
교황 인노센트 10세는 제공사조 금지령을 내림
* 1655년 : 교황이 명 황태후에게 회답
* 1656년 : 교황 알렉산델 7세 제공사조의 금지령을 해제
필리핀에서 예수회가 보르네오에 전교
* 1657년 : 청 세조 순치 황제는 베이징에서의 천주교 회당의 건축 허락.
통현가경(通玄佳境)이라는 현판을 하사함
* 1658년 : 파리 외방 전교회의 설립
* 1659년 : 명제국의 마지막 왕인 계왕(桂王)이 운남에서 탈출하였으나 미얀 마에서 체포되어 사형당함.
* 1659년 : M.E.P. 회원인 Pallu 신부 등이 통킹과 코친차이나의 代牧으로 임명됨.
* 1659년 : 중국을 3개 대목구로 分割
* 1660년 : 남경 교구를 설정하면서 조선 왕국을 이 교구에 포함시킴..
* 1664년 : 파리 외방 전교회 신학교 설립
* 1666년 : 양광선의 상소로 아담 샬이 체포되어 고문당하는 제2차 교난이 발생
아담 샬은 황태후의 명령으로 석방되었으나 옥고로 인해 곧 사망
* 1669년 : 교황청에서 중국 동북부 지방을 북경 대교구로 편입함
* 1673년 : Siam 대목구를 설정하고 M.E.P.에 위임
* 1678년 : 통킹의 약 30만 신자. 그러나 그 후의 거듭된 살해로 거의 전멸
* 1680년 : Pallu 신부가 중국의 福建代牧이 됨
스페인과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큰 반발
* 1688년 : 北京에 프랑스 예수회원 도착
* 1690년 : 北京과 南京이 마카오에 이어 새로 포르투갈 보호권 교구가 되면서 그 구획이 재조정됨.
* 1692년 : 淸 康熙帝-천주교 公許의 칙령을 내림
* 1693년 : 복건성 주교 안당 신부가 목회서신으로 제공사조 금지령을 내림
* 1696년 : 중국에 다시 8개의 대목구가 설정되었다.
* 1702년 : 중국의 프란치스코 회원들은 카발레로 신부의 조선 전도의 시도가 있은 후 조선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조선이 남경보다는 북경에서 더 가깝다는 이유로 조선 지역에 대한 재치권을 로마에 청하였다. 그리하여 교황청은 프란치스코 회원인 북경 주교에게 조선에 대한 裁治權을 허가함.
* 1704년 : 중국과 인도의 의례가 로마로부터 단죄됨(적응주의도 함께)
- 끌레멘스 11세 : Ex illa die
* 1706년 : 교황 특사 도우라 신부가 제공사조 문제로 강희 황제를 접견
* 1707년 : 특사 대리 안당 신부가 강희 황제로부터 무식한 자라는 책망을 받음.
강희 황제와 교황 특사의 회견 결과는 선교사 추방으로 이어짐.
* 1710년 : 도우라 특사 마카오에서 객사
강희 황제는 중국 각 지방 측량 시작
* 1717년 : 황여전람도를 작성
* 1720년 : 조선 동지사 이이명이 베이징에 머무는 동안 천주교 신부들과 접촉
교황의 특사 가락 신부가 베이징에 도착. 강희 황제와 13차례 접촉, 제공사조문제는 끝내 해결못함.
* 1722년 : 옹정 황제 즉위 후 천주교 말살정책 시작
* 1723년 : 복건성 선교사 전원 추방됨
외국인 선교사를 전원 추방하기를 원하는 상소문 진상
* 1724년 : 중국 의례의 단죄 <擁正帝-금교의 교서를 내림>
* 1727년 : 중러 수호조약 체결, 북경에 러시아 정교회 설립
* 1742년 : 제공사조문제로 많은 신부들이 희생된 후 교황 삐오 12세가 제공사조금지령 완전 해제
* 1744년 : 인도 의례의 단죄
* 1751년 : 남회인 신부가 서양식 분수대를 완성함
* 1763년 : 영·프 사이에 7년간의 식민지 전쟁을 종결하는 조약 체결
* 1767년 : 대청제국 전도(全圖) 제작
* 1773년 : 예수회 해산됨 (복원 1814년)
* 1775년 : 예수회 해산령이 중국에서 실시됨
* 1776년 : 남회인 신부가 무기 제작법을 가르침
미합중국 독립 선언
* 1782년 12월 : 구베아 신부가 포르투갈 보호권 교구인 북경 교구의 주교로 추천,
임명되어 이듬해 2월 2일 고아(Goa)에서 주교 서품.
* 1783년 : 천주교 라자리스트회가 예수회의 중국 선교 사무를 인수함
* 1784년 : 북경에서의 이승훈의 영세
수표교 근처 이벽의 집에서, 이어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조선 최초로 천주교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어 집회를 가짐
* 1785년 : 북경 교구장 구베아 주교의 부임(1월 18일) - 청의 고종(高宗) 건륭제(乾隆帝)에 의해 흠천감(欽天監) 감정(監正) 및 국자관(國子館)의 산학관장(算學館長)에 임명됨
라자리스트 회원-북경의 北堂에 부임
<조선> 을사 추조 적발 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 발생 – 김범우 유배(충북 단양) - 유배지에서 사망(묘지 : 경남 밀양군 단장면)
* 1786년∼1788년 :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 시행
유항검에 의해 평신도에 의한 성사 집행이 독성죄임을 알고 중단
* 1787년 겨울 : 정미반회사건(丁未泮會事件) : 이승훈과 정약용이 과거 공부를 핑계로 실은 서학서(西學書)를 강습하였다고 이기경이 선전함으로써 일어난 사건
* 1789년 : 프랑스 대혁명
<조선> 신자들의 희사를 모아 북경에 밀사를 파견(윤유일 1차 파견)
* 1790년 : 베이징의 동서남북에 성당 건축함
9월 <조선> 건륭제(乾隆帝) 80회 탄신 축하를 위한 진하사(進賀使) 파견 때 윤유일을 다시 북경에 보내어 사제 파견을 요청(윤유일 2 차 파견 - 제사 문제에 대한 구베아 주교의 답서를 가져옴)
10월 구베아 주교는 조선 교회 탄생을 알리고, 조선 교회를 관리할 책임자로 자신을 임명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 1791년 : <조선> 진산사건(珍山事件) 발생- 윤지충과 권상연이 神主를 불태우고 제사를 거부한 사건
* 1791년 2월 : 최초의 조선 선교사로 마카오 교구 소속 중국 사제 레메디오스(J. Rem dios, 吳) 신부 파견하였으나 조선 교우들과 만나지 못하였고 오 신부는 2년 후에 사망하였다.
* 1792년 : 조선교구가 포르투갈 보호권 교구의 구베아 주교 개인에게 위임됨(교황 비오 6세)
구베아 북경 주교는 1790년 10월 6일 조선에 복음이 기묘하게 전래하여 발전하고 있는 사실을 로마 포교성성에 알렸고, 교황 비오 6세는 이 기쁜 소식을 1792년, 즉 프랑스 대혁명의 무서운 시련이 시작되던 무렵에 받았다. 교황은 천주께 감사를 드리고, 신입 교우들에게 교황 강복을 보내시며, 포교성성을 통해 1792년 4월 1일 조선 포교지의 관리를 구베아 북경 주교에게 위임하였다. 그러나 이 위임은 구베아 주교 개인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 1794년 :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조선으로 밀입국
* 1801년 : 순조(純祖) 즉위
* 1801년 : 신유대박해로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서 순교
* 1804년 이후 10년간 나폴레옹에 의한 유럽 교회의 종교 박해
* 1805년 : <중국> 서양인 전교 금지령
* 1808년 : 구베아 주교 사망 - 후임 수자 사라이바 주교에 이어 삐레스 뻬레이라 남경 주교가 북경 교구의 임시 관리자의 자격으로 역시 조선 포교지를 관할하였다.
* 1811년 : <중국> 신부들을 예고 없이 귀국 조치하고 교회를 폐쇄시킴
<조선> 성직자 영입 운동 전개 - 권기인(요한), 신태보(베드로), 조동섬(유스띠노), 이여진(요한), 정하상(바오로), 유진길(아우구스띠노), 조신철(가롤로) 등
* 1812년 : 교황님께 1차 청원서 발송
* 1814년 5월 24일 : 불란서 파리 근교에서 25년간연금 생활을 하던 교황이 로마로 귀환함(비오 8세)
* 1825년 : 정하상과 유진길 등이 교황님께 2차 청원서 발송
* 1827년 9월 : 포교성성 장관이 조선 교회에 대한 포교 활동을 담당해 줄 것을 파리 외방 전교회 신학교장 랑글로아(Langlois) 신부에게 요청
- 전교회 측에서는 이에 대해 거부의 의사를 밝혔지만, 당시 샴의 부주교였던 브뤼기에르 소 주교가 자원하고 나섬.
* 1830년 11월 30일 : 포교성성 장관이던 까뻴라리(Cappellari) 추기경이 비오 8세를 뒤이어 교황에 선출됨 - 그레고리오 16세
* 1831년 9월 9일 : 조선 대목구 설정 - 브뤼기에르 소(蘇) 주교를 초대 조선 대목으로 임명
* 1833년 말 : 중국인 여항덕(余恒德, 유방제) 신부 조선에 밀입국
* 1833년 4월 : 파리 외방 전교회가 `이제는 주저할 이유가 없고, 모든 회원이 조선 포교지를 맡는 것을 간절히 원한다'고 하면서 조선 포교지를 수락하였다.
* 1835년 10월 20일 : 초대 조선 대목구장 브뤼기애르 주교 사망.
* 1836년 : 불란서인 모방 신부(羅)가 조선에 입국함
* 1836년 4월 26일자: 교서를 통해 조선에 들어올 선교사들의 입국을 편리하게 하도록 하고자 일본의 류우큐우(琉球)섬 포교지를 조선 대목구에 위임
- 같은 날짜로 앵베르 신부가 조선 대목의 보좌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 임명이 브뤼기애르 주교의 사망 이후였으므로 임명 즉시 그는 자동적으로 제2대 조선 대목이 되었다.
* 1836년말 : 여항덕 신부가 중국으로 돌아가고, 그 길에 최방제, 최양업, 김대건 신학생을 마카오로 파견함.
* 1837년 1월 15일 : 샤스탕(鄭) 신부가 조선에 도착
* 1837년 12월 30일 : 조선의 2대 교구장 앵베르 주교 서울 도착(12월 18일 조선에 입국)
* 1838년 12월 1일 앵베르 주교가 교황님께 조선 교구가 북경 교구로부터 독립되었음을 기념하기 위해 조선의 주보를 성모무염시태로 정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 1839년 : 교황청에서 중국 동북 만주와 요동지역을 북경 교구로부터 분리 독립시켜 만주 대목구 설정 - 파리 외방 전교회
<조선> 기해 박해(己亥迫害)
* 1840년 : 아편 전쟁 발발
* 1841년 8월 22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성모무염시태를 조선 대목구의 주보로 하되 지금까지 지켜오던 성요셉(북경 교구 주보)도 함께 기억하도록 허락하였다.
* 1844년 : 황포조약-중국에서 그리스도교인에 대한 해금(解禁)이 이루어짐
* 1845년 : 중국과 프랑스간에 황포조약을 체결하여 천주교 금지령을 해제
8월 18일 김대건 신부 사제 서품
* 1845년말 : 조선의 3대 대목구장 페레올 고(高) 주교 입국
* 1846년 병오박해가 발생하여 김대건 신부, 현석문 순교
* 1846년 11월 2일 : 성모성심회 창설(수리치골)
* 1849년 6월 9일 : 철종(哲宗) 즉위
* 1849년 : 조선인 2번째 사제 최양업(토마) 신부가 서품됨, 12월 입국
* 1853년 2월 3일 페레올 고 주교 선종
* 1856년 베르뇌, 쁘띠니콜라, 브르띠에 신부 입국
* 1857년 3월 25일 : 다블뤼 안(安) 보좌 주교에 대한 주교 성성식(成聖式)을 최초로 조선에서 거행함.
3월 26일 : 최초의 조선 교구 성직자 회의(Synodus)를 개최하여 선교사 행동 지침에 관하여 의결하고 성직자의 행동 규칙과 활동 계획이 분명히 수립되었으며, 애덕의 결합을 더욱 공공연히 하였다.
8월 2일 : 제4대 조선 대목구장 베르뇌 장(張) 주교는 성직자 회의 결과 조선 최초의 사목서한인 <장주교윤시제우서>(張主敎輪示諸友書)를 일반 신자들의 지침서로서 발표하였고, 성직자들에게는 1858년 4월에 Latin語로 따로 발표함으로써 교구 활동을 확고히 하였다.
장주교는 매스트르 이(李) 신부로 하여금 영해회( 孩會) 사업을 시작케 하였다(죽을 위험에 있는 어린이들에게 代洗를 주고, 외교인 기아(棄兒)들을 거두어 키우는 일 - 유모를 두어 43명 고아를 맡아 키우게 하였다).
* 1857년 김대건 신부 등 조선 순교자들 가경자 칭호 받음
* 1858년 : <중국>천진조약으로 중국 내지에 교회와 학교 설립이 가능해짐
* 1860년 : <중국>제2차 아편전쟁 후 북경조약으로 중국에서의 서양 선교사 포교의 자유 인정
* 1861년 : 포르투갈과 마카오 조차조약 체결
<조선 교회>
장 주교는 조선 교구의 포교지를 전부 거룩한 동정 성모님께 봉헌하고 나서 조선 교구의 각 구역을 성모 마리아의 축일 중 하나의 이름을 가지도록 8개 구역으로 나누고 각 구역에 담당 신부를 배치하였다.
(1) 서울(수도) : 성모무염시태지역 - 교구장
(2) 충청도 홍주지역(상부 內浦) : 성모성탄구역 - 안(安) 주교
(3) 경상도 서북부 지방 : 성모승천구역 - 페롱(權) 신부
(4) 제천 배론, 성요셉 신학교 : 뿌르띠에(申), 쁘띠니꼴라(朴) 신부
(5) 진밧(공주군 사곡리 신영리) : 성모자헌구역 - 리델(李) 신부
(6) 공주와 그 인근지방 : 성모영보구역 - 조안노 신부
(7) 둠벙이(공주군 신하면), 서부 충청도 : 성모왕고(往顧, 성모 방문)구역 -랑드르 신부
(8) 동부 경상도 : 성모취결례구역 - 깔레 신부
* 1861년 최양업 신부 급환 선종
* 1866년(고종 3년) - 1871년(고종 8년) : 병인박해
1) 1단계러시아의 침입을 물리치려는 문제로 말미암아 일어난 병인년 봄의 박해
2) 2단계불란서 함대의 침입 후에 일어난 병인년 가을과 겨울의 박해
3) 3단계남연군의 무덤을 도굴한 사건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고종 5년(1868년)의 박해
4) 4단계미국 함대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고종 8년(1871년)의 박해
*1866년 병인박해, 새남터 서소문 양화진 갈매못 등지에서 프랑스 성직자 9명,신자 8000여명 순교
*1882년 한미통상조약
*1886년 한불통상조약
*1892년 약현성당 준공
*1911년 조선대목구를 경성 대목구, 대구 대목구로 분리
*1925년 7월 5일 79위 시복
*1931년 10월 15일 브뤼기에르 주교의 유해를 용산 성직자 묘지로 이장
*1942년 1월 18일 노기남 신부 경성 대목구 교구장 착좌식
*1946년 9월 16일 “조선 천주교 순교자 현양회”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 기념미사후 발기식
*1955년 4월 12일 새남터 성지 확보
*1956년 7월 8일 “가톨릭 순교성지” – 새남터 임시 순교탑 제막식
*1956년 11월 절두산 성지 확보
*1962년 3월 10일 한국 천주교 교계제도 설정 서울, 대구, 광주 대교구 승격 (노기남,서정길,헨리대주교)
6월 29일 한국 교계제도 설정 공포식-명동 대성전
*1962년 ~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1964년 한국교회사 연구소 설립
*1965년 1월 1일 우리말 미사,
*1967년 9월 12일 절두산 성지 성당과 기념관 축성
*1968년 5월 29일 김수환 대주교 서울대교구 교구장 착좌식- 명동 대성전
7월 23일 “평신도 사도직 중앙협의회” 첫 모임- 대전 대흥동 성당
10월 6일 24위 시복-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
*1969년 4월 30일 김수환 추기경 서임식 –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103위 성인 시성 – 서울 여의도 광장
*1989년 10월 4일~10월 8일 제 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 - 서울 여의도 광장
*1998년 6월 29일 정진석 대주교 서울대교구 교구장 착좌식 – 명동 대성전
*2002년 9월 4일 “하느님의 종” 124위에 대한 시복 추진 허락 - 교황청 시성성
*2005년 10월 첫 우리말 완역 ‘성경’ 발간
*2006년 2월 2일 정진석 추기경 서임( 3월 24일 서임식- 로마 성 베드로 광장
*2012년 염수정 대주교 서울대교구 교구장 착좌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