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광복단기념사업회 김병수 회장과 회원일동은
2015.6.25. 무연고 독립운동가 묘소를 찾아 벌초하고 제사를 모셨다.
회원일동은 6.25.(목) 오전 9시 30분, 영주시 문수면 권선리 고랑골
광복군 출신인 고 박태서 전 대한광복단기념사업회 제4대 회장 묘소를 찾아
묘소를 가다듬고 제사를 모셨다.
회원들은 행사를 마치고 마을을 둘러보며
박태서 전 회장께서 안동농림 학창시절,
17세의 혈기 넘치는 나이에
보리공출을 심하게 독촉하며 마을 어른들을 때리고 괴롭히는
일본인 지서장 이께시다(池下)를 직접 두들겨 패고
논바닥에 쳐박고 밟아버린 일로 학교에서 퇴학 당한 일과
또 만주에 가서 광복군에는 입대하여 동포학교에서 역사와 국어를 가르친 일,
광복군 입대 후 머잖아 전투에 투입되면 목숨을 잃을 것인데
죽기 전에 어머니를 한 번 뵙고 죽는다고
고향에 돌아오다가 황해도 사리원에서 체포돼
신의주로 압송되었다가 다행히 광복군 신분을 탄로나지 않아
2주일만에 석방되어 고향에 돌아온 일 등을 얘기하며
고인의 용감했던 청년시절, 당당했던 중년시절, 깨끗했던 노년시절을
회상했다.
이어서 풍기읍 금계리에 있는 하연 강택진 선생 묘소를 찾아 벌초하고 제사를 모셨다.
제사 모시고 나서 일행은 하연 강택진 선생이 35세의 짧은 생을
오로지 공적인 생활로 일관한 헌신적인 마음에 대하여 회고하였다.
선생은 9300여 평의 농토가 있어 살기에 넉넉했으나
자신의 토지를 전부 소작조합에 기부하고
지주권을 포기한 후 소작조합운동에 전념하였다.
그 후 상해 임시정부에 건너가 독립운동에 몸 바쳐
독립군자금을 모으다가 체포되어
손톱, 발톱이 다 빠지는 고문을 당하고
가석방되어 2주일만에 세상을 떠났고
당시 풍기에서 사회장을 치뤘다.
회원들은 선생께서 편하게 살려고 했으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을
무슨 일 때문에 사서 고생하고 후손도 어찌되었는지 알 수 없는
처지가 되어 이렇게 회원들의 제사상을 받는가 하고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이에 대해 박선경 박사(영주예섬교회 목사)는
"영주는 선비의 고장이다.
선비는 옳다고 여기는 의로운 일에 자신의 신념과 모든 것을 바친다.
이 옳다고 여기는 의로운 일은 이익이 생기는 일, 손해가 생기는 일을 따지지 않는다.
오로지 그렇게 하는 것이 옳기 때문에 자신을 돌보지 않고 거기에 전념하는 것이다.
하연 강택진 선생님이나 춘고 박태서 선생님도 당신들이 하신 일이 옳기 때문에
그 일을 하면 일신이 얼마나 괴롭게 되는 지 알면서서 당당하게 그 일을 하신 것이다.
바로 선비정신을 실천하신 것이다.
이것이 영주의 자랑이고 전통인 것이다.
그 선비정신을 이어 받으려고 오늘날 우리가 기념사업을 하는 것이다."
라고 설명을 했다.
이날 바쁜 일정을 끝낸 일행에게 장욱현 영주시장은
"바쁜 일정상 함께 하지 못해 안탂회장님 이하 함께한 회원 여러분들께 고맙고 감사하다"하는
격려 인사를 보냈다.
2015.6.26.
대한광복단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