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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9세기 상주지역 남인 세력의 갈등
-상주 옥동서원의 位次是非를 중심으로-
김순한
Ⅰ. 머리말 Ⅱ. 18세기 옥동서원의 위차시비 Ⅲ. 19세기 도남서원 追配를 둘러싼 상주 남인 세력의 갈등 Ⅳ. 맺음말 |
【국문초록】
본고는 옥동서원에서 발생한 위차 시비가 상주지역과 영남 남인계 서원으로 확산하는 과정을 검토하였다. 이 갈등은 옥동서원이 18세기에 시작한 청액활동에서 처음 발생하여 19세기 초반까지 약 80년간 이어졌다. 갈등의 중심은 옥동서원 제향자의 후손인 상주 장수황씨・옥천전씨 두 문중이며, 두 문중을 중심으로 벌어진 시비의 발단과 영남 전역으로 확산 및 보합하는 과정을 정리하였다.
첫 번째 시비는 1788년(정조 12) 옥동서원 청액 활동에서 청액 상소문을 작성하면서 처음 시작되었다. 두 번째 시비는 89년 사액이 결정되고 제향자의 사적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였고, 세 번째 시비는 옥동서원 사액 후 제향 축식 방법을 두고 일어난 두 문중 간의 갈등이다.
네 번째 시비의 발단은 1804년(순조 4) 옥동서원의 廟宇를 수리하고 제향자의 위패를 還安할 때 沙西 全湜의 위패를 본래의 위차 순이 아닌 세대순으로 두면서 일어났다. 결국 전식의 후손들은 전식의 祠版을 도남서원의 소수임원만이 허가한 상태에서 도남서원 사당에 추가배향 하였다. 이 사건은 공식적인 논의와 절차 없이 발생했기 때문에 전식 위패를 추배한 책임소재 추궁과 출향을 두고 상주 남인 사론까지 찬・반으로 양분되어 갈등은 일파만파 확산하게 된다. 이 갈등은 1년이 넘도록 해결되지 않았고, 오히려 영남 남인계 서원으로 확산되는 양상을 보였다. 결국 奉疏하여 해결하고자 하였으나 여러 문제와 부딪히게 된다. 다섯 번째 시비는 1808년(순조 8) 경상감사 關文에 의해 전식의 위패를 옥동서원 廟宇에 본래의 序次로 봉안하면서 장수황씨 문중의 격렬한 반대와 옥천전씨 문중의 세대순 서차는 불가하다는 대응으로 갈등이 다시 시작되었다. 결국 1868년 고종이 사당의 본래 서차로 두도록 하라는 전교와 함께 당시 대대적인 원사 훼철 조치 여파와 사액서원에 대한 훼철도 예고되면서 80여 년간의 시비가 봉합되었다.
17세기 중반 이후 서원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서원이 향촌 공동체적인 성격에서 벗어나 점차 문중 중심으로 전환되고 있었다. 옥동서원의 위차 시비도 그 연장선에서 볼 수 있다. 서원의 강학 기능은 점차 축소되었고, 제향 기능이 강조되면서 오히려 향촌 사회에서 각 문중의 기득권 경쟁을 위한 도구로 이용되었으며, 한편으로는 자기 문중의 사회・경제적 이해를 대변하는 도구로 전락하였다. 특히 향내 가문의 先祖 간 우열을 둘러싼 각종 시비, 서원의 위차 문제 등 서원을 중심으로 한 향전은 이러한 서원의 성격 변화에 기인한 바가 크다. 옥동서원은 본래 제향자 후손중심으로 운영되어 사액서원으로 발전한 서원이라는 점에서 서원 운영에 관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차원에서 그 갈등이 더욱 증폭된 것이다.
주제어 : 옥동서원, 도남서원, 위차시비(位次是非), 환안(還安), 향전(鄕戰)
Ⅰ. 머리말
향촌의 재지 세력 상호 간의 주도권 다툼, 쟁단, 분쟁을 ‘향중 쟁단’이라고 한다. 그 유형에는 향안입록과 鄕廳 임원의 선임 문제, 원・사의 配享・追享 및 위패의 序次 갈등, 鄕權과 官權의 충돌, 선조의 학통과 師友淵源문제, 문집간행과 文字 是非 등이 있다. 이처럼 다양하게 나타나는 향전에 관한 검토와 연구는 꾸준히 축적되었다.
본고에서는 약 80년간 이어진 옥동서원을 중심으로 발생한 위차 시비전말을 검토하고자 한다. 청액 활동에서 발생된 위차 시비와 제향 祝式을 둘러 싸고 벌어진 두 문중 간의 갈등과 사서 전식 위판을 도남서원으로 移安한 사건에서는 상주지역의 남인 세력 간의 갈등으로 확산되는 과정과 보합 과정 그리고 4년 후 또다시 발생한 위차 시비의 내막을 검토하고자 한다.
시비의 발생 배경과 과정, 갈등의 보합 과정을 추적하기 위해 1・2차 시비 관련 자료로 “소청일기”와 “본원일록”등을 활용하였다. 이 자료는 청액상소문을 작성할 때 元・配位 기록을 두고 벌어진 1차 시비의 전말과 정조에게 올릴 제향자의 事蹟 정리를 두고 발생된 2차 시비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3차 시비 자료는 백옥동잡록과 옥천전씨 문중의 “玉洞書院變錄”등을 활용하였다. 이 시비는 사액 이후 향사를 봉행하면서 제향자의 祝式을 두고 일어난 시비로 이 자료를 통해서 시비의 발단과 과정을 추적하였다.
4차 시비는 1804년 4월 사서 전식의 사판을 도남서원에 이안한 사건을 두고 벌어진 분쟁이다. 이 시비는 黃・全 門中을 넘어서 영남 전 지역으로 확산된 분쟁으로 明庵先生文集의 「雜著」에 수록된 「道南疏廳雜錄」과 1805년 6월 함창 靑巖書院에서 道內 서원에 발송한 「通文」, 같은 해 11월에 소수 宋智修 등이 올린 「上書」 등을 통해 그 전말을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1804년 사서 사판 이안 사건이 일어나게 된 배경과 도남서원을 비롯한 상주 향론이 이 시비를 해결하지 못하고, 영남 전역으로 확산된 과정을 확인하였다. 5차시비는 1808년(순조 8) 1월 경상감사 尹光顔이 행정적인 절차에 따라 전식의 위패를 옥동서원 廟宇에 본래의 序次로 봉안하면서 제향자의 후손인 두 문중의 시비 전말을 검토하였다.
Ⅱ. 18세기 옥동서원의 위차 시비
1. 請額疏 元・配位를 둘러싼 1차 시비
옥동서원의 제향자 후손인 장수황문과 옥천전문, 두 문중 간 위차 시비는1788년(정조 12)에 처음 시작되었다. 이때 중앙 정계에서는 남인 채제공을 우의정에, 노론 김치인을 영의정, 소론 이성원을 좌의정에 임명하여 새로운 탕평 정국을 구상하고 있었다. 이어서 정조는 戊申亂 1주갑 기념으로 진압에 가담한 충신을 대대적으로 재평가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정국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분위기는 정조의 영남 우대 정책으로 인식되어 상주 옥동서원도 청액 봉소를 위한 향론을 모을 수 있었다. 청액 봉소가 결정된 후 청액 활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두 문중의 시비가 발생했다.
향내 공론으로 차정되어 청액을 위해 상경한 이들은 1788년 6월 2일에 한성에 입성하여 가장 먼저 청액 상소문을 올리는 방법과 한성의 사례를 파악하기 위해 우의정 채제공과 長水黃門의 한성 本孫 黃瑗(監察)・黃昇源
(參判)을 차례로 만났다.
채제공은 疏廳부터 설치하라는 조언을, 황원은 상소문 작성부터 하라고 권유하였고, 황승원은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채제공과 황원의 조언을 따라 청액 임원진은 소청 설치 준비와 함께 會中에서 추천받은 전적 金紘을 만나 상소문을 부탁하였고 상소문 초안은 7월 1일에 완성되었다. 사건의 최초 발단은 바로 그 초안의 내용에서 비롯되었다. 초안을 본 임원진들은 다음과 같이 불편한 심경을 표현하였다.
상소문 가운데 배향 인물 중 元位만 거론하고 配位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것은 대개 한성의 의견이 근래의 사례에만 근거하고, 영남사람들이 다투는 것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비록 한성 사람들의 의견을 무조건 따르기는 하겠지만 마음이 심히 편하지 않았다.
당시 한성의 상소문에서는 배위를 거론하지 않는 것이 관례라는 사실을 듣고 청액 임원진 모두가 당황한 것이다. 청액 임원진에 옥천전씨가 없는 상황에서 배위에 대한 언급 없이 상소문을 작성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원위만 거론한다는 한성의 상소문 경향을 미리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당황한 것이다.
한성의 본손 황원은 상소문 초안을 등사해서 여러 곳에 자문을 얻으려고 하는 임원진에게 “한성의 최근 사례는 모두 그러합니다. 또 元位가 사액의 恩典을 입게 되면, 중요한 것을 들어 가벼운 것을 포함하는 것이 되니 조
금도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라고 하며 어찌 규정을 벗어나는 일을 하려고 하냐며 꾸짖기까지 하였다. 임원진은 상소문에 모든 제향자를 기록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여러 곳의 자문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황원은 김굉의 상소문과 별개로 자신이 작성한 상소문 초안까지 주면서 서울의 경향을 따를 것을 거듭 당부하여 결론적으로 그의 주장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청액 활동을 위해서는 한성의 본손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청액 임원진은 김굉과 황원 두 사람이 작성한 초안 중에서 봉소할 상소문을 결정하기 위해 洪義浩(洪仁浩의 弟), 趙錫簡, 孫必慶, 趙允浩, 李翼遠등에게 자문한 결과 황원의 상소문을 올리기로 결정하였다.
이 소식이 상주로 전해지자 장수황문 측은 “사액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配享을 거론하지 않는 것은 심히 의심스럽고, 서울에 있는 일가의 여러 사람이 근자의 사례라고 말을 하는데, 한 사당 내에 도리가 편안하지 않습니다.”라며 불만을 표시하였다. 또 일이 있어 상주에 방문한 李琬도 “이미 元位가 세워졌으면 즉 마땅히 무거운 것이 세워지면 가벼운 것이 거기에 포함되나, 끝내 마땅히 합의된 상소문을 만드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라며 서울의 경향을 비판하였다. 게다가 옥천전씨들도 “상소문 초고에 주향만 거론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이미 합의한 대로 원・배위를 포함하여 상소문을 올려야 합니다.”라고 강하게 주장하였다. 이에 옥동서원은 향내 사문의 공론을 정리하여 한성의 청액 임원진에게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냈다. 지난번에 상소문을 지을 때 단지 元位만을 거론하고 配位를 언급하지 않은것이 비록 사액을 청하는 최근의 사례라고 말하였지만, 마음에 끝까지 편안치 않았습니다. 최근 道南書院의 예전 경우를 보니, 한번의 상소에서 함께 거론하고 처음부터 오직 元位만을 거론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이것으로 말씀을 드리면, 본 서원의 상소문을 지을 때 잘못 헤아림을 면치 못했습니다. 서울의 의견이 비록 언제나 중요성을 갖기는 하지만, 일을 처리하는 것은 이미 疏首에게 있는 임무이니 반드시 반복해서 배위를 소상히 해야 할 것입니다. 상소문의 원본을 고쳐 지을 것을 약속하셔서 배위를 함께 거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차라리 상소를 그만두고 돌아올지언정 이전의 상소문으로는 捧入할 수가 없습니다. 헤아려주시기를
바랍니다.
특히 옥천전문 측은 이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이에 후손 全始玉의 주도로 도남서원의 옛 청액 상소 사례를 상세히 등사하여 각 서원으로 單子를 발행한 후 이들도 서둘러 한성으로 상경하였다.
한편 이 상황을 모르는 서울의 청액 임원진은 7월 26일에 정식으로 청액상소 임원진을 구성하고, 7월 27일에는 소청도 설치하였다. 상경 후 두 달이 지난 8월 6일에는 비로소 대궐문 밖에서 伏閤을 시작하였다. 이때까지 청액소청은 옥동서원의 서신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상주 향론이 반영되지 않은채 작성된 상소문으로 복합하였다. 매일 아침 소청에서는 청액 임원진이 식전에 모여서 疏色이 상소문을 읽고 등사를 하였다. 식사 후 상소문을 들고 대궐문 밖에서 복합한 후, 상소문 요지를 오전・오후로 나누어 하루에 두 번 승정원에 접수하였다. 승정원에서 상소문이 받아들여질 때까지 매일 이를 반복하였다.
옥동서원에서 보낸 서신은 9월 29일 청액 소청에 전달되었고, 상소를 그만둘지라도 상소문에 配位를 소상히 적어야 한다는 뜻을 확인한 임원진은 상주향론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다. 논의 끝에 이 사실을 황원
에게 알려서 방법을 찾기로 했다. 하지만 황원과 논의가 제대로 되지 않은 채 10월 8일까지 매일 같은 복합과 상소문 접수를 이어갔다. 10월 9일에는 옥동서원에서 상경한 옥천전문의 후손 全達德이 소청에 도착하였다.
여러 집사님들이 한성에 머문 것이 이미 여러 달에 이르러 노고를 짐작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우리 선조이신 忠簡公[全湜]께서 상소문 가운데 함께 진술되고 있지 않았다고 하는데 자손의 마음으로 행장을 꾸려 한성으로 올라오는 동안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전달덕은 이와 같이 불만을 토로한 뒤 도남서원의 청액 상소에서도 모두 합하여 올린 사례를 들어 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계속 찾아올 것이라며 으름장을 놓고 돌아갔다. 임원진은 한성의 상소문 경향을 부득이 따를 수
밖에 없었던 상황도 불편하였는데, 상주의 서신과 옥천 전씨 문중의 불만까지 겹쳐 사태가 심각해졌음을 인지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소청에서 齊會를 소집하였다. 하지만 상소문 수정을 두고 한성의 본손 黃夏鎭은 수정이 불가하다는 입장인 반면, 소청 임원진은 수정론을 강경하게 주장하면서 첨예한 대립과 긴 논쟁을 벌였지만 서로의 입장만 내세울 뿐 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재회가 끝나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한성의 본손 황원은 다음 날 이른 아침 소청에 도착하였고, 전달덕도 다시 소청을 찾아와 “만약 상소문에 합하지 않으면 우리 全氏의 명단을 명부에서 잘라내어야 할 것입니다. 잘라내기 전에는 대궐 밖에서 복합할 수 없습니다.”라며 전날보다 더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이에 황원은 “근래에 사액을 청하는 경우가 번거로울 정도로 많습니다. 그래서 한성에서 가까운 서원의 상소문은 正位와 配位를 두더라도 단지 正位만을 거론하고 配位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어찌 근래의 사례를 버리고 오래된 규칙을 따르려 하십니까? 차라리 중지할지언정 상소문에 합할 수는 없습니다.”며 물러서지 않았다. 하지만 전달덕은 굽히지 않고 끝까지 상소문에 합해주기를 요구하였다. 두 사람의 충돌이 해결되지 않자 黃聖休를 비롯해 掌議 柳鳳祚와 黃弼熙는 “상소문 복합이 늦어졌으니 우선 대궐문 밖에서 호소한 후에 조용히 서로 의논을 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는 중재안을 내었고, 전달덕도
이를 받아 들여 큰 충돌은 피하게 되었다. 이후 복합을 끝내고 소청으로 돌아온 임원진과 황원 그리고 전달덕 사이에 또다시 논쟁이 벌어졌다.
황원은 “상소문의 초안에 대해 重臣과 大臣들이 모두 이미 현인(황희)을 취하여 승정원 역시 원위 한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에 이르러 상소문을 고친다면 아주 불편해할 것입니다. 비록 도중에 상소를 거두더라도 사액을 함께 청할 수는 없습니다.”라며 한치의 물러남이 없었다.
결국 합의가 되지 않자 전달덕은 청액 상소 명부에서 숙부들의 명단을 잘라 반촌으로 가버리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다.
본손 황원과 옥천전문 전달덕의 충돌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복합은 계속 되었다. 4일 후, 전달덕은 소청을 방문하여 옥천전문의 명단을 잘라간 것과 자신의 경솔한 행동에 대해 사과를 하면서 분위기는 반전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全始玉도 합류하여 전달덕과 함께 매일 소청을 찾아와 정・배위를 합하여 상소문을 올리기를 청하는 의견과 아울러 서울의 경향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서 합의점을 찾고자 노력하였다.
11월 5일에 정조는 안동에서 올라온 영남무신창의록 신원 상소문을 열람한 후 창의록에 있는 충신들을 신원하라는 어명과 함께 특히 “黃翼再(황희 14世孫)를 신원하고 그의 죄명을 歲抄에서 특별히 씻어내도록 하라”
고 하교하였다. 이 소식은 청액 소청에도 전해졌는데, 그간 소청을 유지할 경제적 물력과 여러 어려움으로 인해 청액을 포기하자는 의견이 조금씩 생겨나던 차에 긍정적인 분위기로 전환된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지금까지 서술한 시비 과정을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표 1> 청액 활동에서 발생된 1차 시비 과정
일자 | 내용 |
1788년 7월 1일 | ⦁典籍 金紘의 상소문 초안 완성: 내용 중 배향자는 元位만 기록 한다는 한성의 경향을 설명 |
7월 8일 | ⦁長水黃門 한성 본손 黃瑗의 상소문 추가 완성: 한성의 경향에 따라 봉소할 것을 거듭 당부 |
〃 | ⦁상주 옥동서원과 향론: 한성의 경향을 비판하며 본래 합의 (원・배위 합한 상소문)된 상소문을 봉입할 것을 한성 청액 임원 진에게 서신 발송 ⦁沃川全門 측: 본래 합의한 대로 이행할 것을 강력하게 항 의, 도남서원 옛 청액상소 등사하여 각 서원으로 單子 발행 |
7월 26-27일 | ⦁청액 상소 임원진 구성 및 청액 소청 설치 |
8월 6일 | ⦁청액 봉소를 위한 복합 시작(元位만 거론된 상소문) |
9월 29일 | ⦁청액 소청에 상주 옥동서원과 향론 서신 도착 ⦁상주 옥천전문 사태 심각하게 논의. 해결되지 못한 채 복합 이 어감 |
10월 9일 | ⦁옥천전문 全達德 청액 소청 방문하여 상소문에 제외된 사 서 全湜의 配位에 대하여 수정해줄 것을 강력 항의 ⦁齊會 안건 - 한성 본손 측: 한성의 경향에 맞춘 청액 상소문 - 옥천전문・청액 소청・상주 옥동서원・상주 향론: 도남서원 사례를 따라 원・배위를 포함한 상소문. 결국 합의점을 찾지 못함 |
10월10일 | ⦁한성 본손 측과 옥천전문 의견 충돌 심화 ⦁옥천전문 측: 상소문 명부에 全氏 명단을 잘라버림 |
10월15일 | ⦁全達德 청액 소청 방문하여 경솔한 행동에 대하여 사과 |
10월22일 -11월6일 | ⦁全始玉과 全達德 매일 소청을 방문하여 상소문 수정 요청함 |
11월 5일 | ⦁정조는 소수 이진동의 “영남무신창의록” 신원 상소문을 열람 ⦁긍정적인 분위기 전환으로 상소문 수정 협의도 급진전 됨 |
11월 8일 | ⦁한성 장수황문 측: 상소문 수정에 동의하여 합의에 이름 |
11월11일 | ⦁황익재 죄명을 歲抄에서 삭제하라는 하교 |
11월16일 | ⦁상주 도남서원은 향회 개최 통문 발송(장소: 도남서원) - 안건: 전시옥 사적 기록에 대한 항의 단자 발행 건 |
〃 | ⦁옥동서원 측: 黃景幹(1775 옥원장), 黃瑞熙(1778 옥원장), 黃建 中(1787 옥원장), 金憲慶(1788 옥원재임)은 도남서원 원장 류광 억에게 전시옥이 단자를 발행하게 된 경위 답통 발송 ⇒ 향회 취소됨 |
11월21일 | ⦁화재 황익재 伸冤 고유제 준비를 위한 향회 개최 ⦁전시옥 참석하여 청액상소문 배위 기록 항의 관련 단자 발행 사 과 |
12월24일 | ⦁황익재 신원 고유제 봉행 (100여 명 참제) |
이러한 상황에서 11월 5일에 정조가 “영남무신창의록” 신원 상소문을 열람했다는 소식을 들은 청액 소청 임원진은 옥동서원 청액 상소에도 그 영향이 미칠 것이라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영남무신란창의록”소청에서 옥동서원 소청으로 보낸 다음 서신에서 짐작할 수 있다.
조금 전에 승정원으로부터 어떤 書吏를 시켜 창의록을 위한 상소와 사액을 청하는 상소가 어느 달에 올라와서 며칠간 대궐 문 밖에서 호소 하였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상소를 위해 머무르고 있는 유생이 역시 몇 사람인지 상세히 조사하여 적어 갔습니다. 이것은 필시 임금께서 처분을 내릴 모임의 기회가 있을 것이니 자지 말고 기다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疏首를 비롯해 자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이 글을 보고서 기뻐하는 것이 마치 취한 듯하고 꿈을 꾸는 듯했다.
이와 같이 승정원에서 옥동서원의 청액 진행 상황을 조사하자 정조의 의중이 아마도 사액을 수락하는 데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후 소청에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正位와 配位를 上疏文에 합하는 것이 우리들의 본래 뜻이니, 全氏와 黃氏 두 집안에 편지로써 타이르고 얼굴을 맞대고 의논하기로 하였다.’는 기록에 따르면, 옥천전씨들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그간 한성의 황씨 본손이 완강하여 청액 상소문을 수정할 수 없었지만 한편, 옥동서원과 상주 향론에 反하는 청액 상소문을 복합하면서 소청 임원진이 가졌던 부담감을 일시에 해소할 수 있었다.
이후 청액 소청 임원진은 한성 본손 황원・황도원・황하진에게 원・배위를 상소문에 합하는 것은 옥천전문 측의 강력한 주장이자, 상주 향론과 청액상소 임원진 또한 같은 의견임을 피력하였다. 청액소 임원진의 긴 설득 끝에 한성의 본손 측도 상소문을 수정하는 것에 동의하였다.
한편 상주에서는 화재 황익재 신원 고유제를 위한 鄕會가 열렸다. 향회에 참석한 전시옥은 청액 상소문에 대한 항의성 단자를 각 서원으로 발행한 것에 대해 사과하였다. 이처럼 7월부터 시작된 두 문중 간의 시비는 5개월간 이어지다가 11월 8일에 일시적으로 봉합되었다.
2. 제향자 事蹟 기록을 두고 벌어진 2차 시비
정조는 “영남무신창의록” 신원과 황익재의 죄명을 세초에서 삭제하라는 전교와 함께 우의정 채제공에게 “영남은 바로 士夫의 고장이다. 영남 사람중에서 名聲을 들어 알고 있는 사람을 우선 천거하는 것이 좋겠다.”며 영남인재를 천거하라는 하명까지 내리는 등 노・소론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영남 우대 정책 행보를 이어갔다.
이듬해 1월 12일 비로소 승정원에 옥동서원의 청액 상소문이 奉入되었다. 한성에 입성한 후 奉疏 8개월 만에 이룬 성과였다. 당시 청액 활동 1개월 만에 사액된 선산 駱峯書院을 제외하면 매우 이례적인 결정이었다.
1월 14일에는 소수 趙圭鎭이 승정원으로 들어가 “상소문을 보고 잘 알았다. 진실로 너희들의 말과 같이 翼成公의 공로는 제사를 받들어 높이 받들만하다. 그런데 扁額이 빠진 것은 보기 드문 典禮로 흠이 되는 일이다. 해당 관아에서 당사자들이 제출한 문서와 장부에 대해 상세히 검토해서 아뢰고 처리하도록 하라.”는 정조의 비답을 받았다. 이후 정조는 賜額날 致祭토록 하고, 祭文은 친히 지어 내리겠다는 批旨를 내렸다. 이에 소청 임원진은 왕이 제문을 지을 때 혹여 옥동서원의 正・配位의 事蹟이 필요할수도 있겠다는 판단하에 상주 옥동서원으로 급히 서신을 보냈다. 서신의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임금이 하사할 현판[額號]이 바라는 대로 들어온 후 현판을 인도하는[延額] 날짜를 정하여 보내는 흐름으로 가서 결국 관례를 따를 것입니다. 그런데 서울에서 여러 사람들이 의논하는 것을 잠시 들으니, 팔도의 각 서원이 비록 임금이 현판을 내리는 은전[宣額]을 입었더라도 만약 때에 맞춰 일에 호응하지 못하면 시일을 미루어 베풀지 않는 일이 없지 않다고 합니다. 바라건대, 반드시 이렇게 되어가는 흐름을 헤아리십시오. 현판을 인도하는 날짜가 3월 안에 정해져 보내지면, 때에 늦어 미치지 못했다는 탄식을 어떻게 면할 수 있겠습니까. …[중략]… 제문도 임금께서 친히 지으신다고 합니다. 그러니 주향과 배향의 문서와 文蹟은 아마도 마땅히 수정하여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바라건대, 반드시 서원에서 네 선생의 문서와 정부를 精書하고서 올려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렇게 하는 것은 혹시 임금께서 직접 교시를 지으실 때에 참고하실 것이니, 대강 대강 고치지 마십시오. 엎드려 생각건대, 상소한 일이 이미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중간에 도리를 어지럽히는 단서는 혹여라도 책망하여 그만두게 할 수 있을것입니다.
위 서신에서 요청한 두 가지는 첫째, 사액 날짜를 택일해 줄 것과 둘째,왕이 제문을 지을 때 참고할 제향자 네 선현(黃喜, 全湜, 黃孝獻, 黃紐)의 사적을 정리해 달라는 내용이다. 이에 옥동서원의 전・현직 임원진과 일부회원들은 白華書堂에서 재회를 개최하였다. 당시 참석한 인사는 원장 李禧遠(1788・1792년 원장)을 비롯해 金憲慶(1788년 재임), 黃景幹(1775년 원장), 黃瑞熙(1778년 원장), 黃世休, 黃建中(1787년 원장), 黃澣(1755・1756재임), 金相欽,趙重鎭(1773・1780・1783 재임) 등이다. 이때 옥동서원 전・현직 임원진이 정리한 사적의 내용이 옥천전문과 2차 시비의 단초를 제공하게 된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네 선생의 실록을 견주어 고찰할 수 있도록 그 세대, 연보, 과거의 합격,행적등을 간략하게 서술했다. 또 그들의 行狀과 墓碣을 써서 합하여 한 권의 책으로 만들었다. 먼저 厖村 黃喜에 대해, 다음으로 畜翁 黃孝獻에 대해, 그다음으로 沙西 全湜에 대해, 마지막으로 槃澗 黃紐에 대해 글을지었다. 이것은 세대순으로 지은 것이다. 아침에 미리 한성으로 사람을 보내 소청에 편지로 알렸다.
위 내용에 언급된 것처럼 택일한 사액 날짜와 정리한 사적은 다음 날 일찍 한성의 소청으로 발송되었고,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全始玉은 직접 사적 초안을 확인한 후 격앙된 소리로 “이번에 사적을 고쳐 기록한 것은 어찌 서원의 位次에 따라 쓰지 않았습니까?”라고 반발하였다. 이에 황경간은 “서원의 위차라면, 배향에 선후가 있기에 東과 西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적을 고쳐 기록하는 데는 그 세대를 차례로 기술한 것에 지나지않을 뿐입니다. 厖村이 세종 때의 사람이 되고, 畜翁이 중종 때의 사람이 되고, 沙西가 인조때의 사람이 되니, 세대를 거꾸로 쓰게 되면 고쳐 기록하는 데 뿐만 아니라, 國朝의 凡例에도 어그러짐이 있어 世代에 크게 편하지 못한 바가 있습니다. 그래서 얼마 전 상소의 원본에는 위차로 기록하고, 오늘 고쳐 기록하는 데는 결국 세대로써 기록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전시옥은 화를 내며 가버렸다.
전시옥은 이 상황을 또다시 單字에 정리하여 향내 각 서원으로 발송하였다. 단자 내용은 대체로 장수황문은 무능하다는 비방의 글과 함께 도남서원원장 류광억을 무시했으며 한성 소청에 보낼 사적의 내용이 祠宇에 정해져 있는 위차를 따르지 않고 世代 순으로 정리한 것 등에 대한 항의였다. 이에 옥동서원 측도 이 사태를 정리한 통문을 각 서원으로 발송하고,향회를 개최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황경간(1775년 원장) 등이 도남서원에 발송한 통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지금 사적을 정리하여 기록하는 것은 조정에서 내린 명령이 아니며, 또한 關文에 해당하는 것도 아닙니다. 한성에 사람들이 간혹 위로부터 묻고 상의하는 일이 있어 사람을 보내 급히 문서와 장부를 찾으니 미리 준비하려는 계책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 [중략] … 畜翁은 中宗 때의 사람이고, 沙西는 仁祖때의 사람으로 위아래로 100년이나 세대가 뛰어넘습니다. 비록 평범한 선비로 말을 해도, 아무개 왕조의 사람을 기록하였으면그 세대의 차례를 거꾸로 쓸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즉 하물며 祭享 하는선배에 있어서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만약 그렇게 하면, 서울 사람들이 보는데 거슬림이 될 뿐만 아니라, 아마도 임금께서 보실 때 의심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세대를 따라서 정리하여 기록 한 것입니다.
추후 배향하는 날에 祭享 先後가 있기 때문에 위패의 차례로 선후를 따르니, 위패의 차례는 저절로 위패의 차례가 되고, 세대는 저절로 세대가 됩니다. 일을 집행함에 과연 위패의 차례로 선후를 두게 하여 세대를 또한 거꾸로 쓰게 할 수 있겠습니까? … [중략] … 그러한즉 全氏가 單子를 발행하여 上京한 것은 어이없고 허망한 짓일 뿐입니다. 首席이 글을 쓰는 데 동참하여 사사롭게 기록을 했다고 비방하는 것은 그의 나이가 어려 잘못 헤아린 것이니, 진실로 견주어 다툴 만한 것이 못됩니다. 그리고 全氏가 거짓으로 올린 봉홧불에 매번 향중의 長老들께서 애써 움직이게 한 것은 심히 개탄스럽습니다. 이러한 일을 생각해보건대[그로 인해 삼가 생각건대], 저희 나이가 일을 그만둘 때가 임박했음에도 한 가지 잘하는 것이 없고, 남의 입에 올라 곤욕을 받음이 이에 이르렀습니다.
전시옥의 단자가 현전하지 않아 정확한 내용을 알 수는 없지만, 위 통문내용을 참고하면 일의 대체를 파악할 수 있다. 전시옥을 격분하게 한 것은
첫째, 제향자 사적을 정리하면서 향론을 구하지 않았다는 것, 둘째, 향론을구하지 못할 만큼 시급한 사안이었다면 본손인 옥천전문을 재회에 참석시켜야하나 배제한 채 제향자 사적을 정리한 점, 셋째, 특히 제향자 사적을
세대 순으로 정리하여 한성의 소청으로 보냈다는 점에서 불만이 극에 달했다.
이처럼 두 문중의 단자와 통문이 향내 각 서원으로 발송되어 鄕父老와 서원들이 개입하면서 갈등은 급속히 확산되었다. 이에 도남서원은 두 문중의 분쟁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향회를 개최한 후 옥성・속수・연악서원 원장과 회원들이 연명하여 옥동서원에 다음과 같은 답통을 보내왔다.
귀 가문과 全氏의 시비가 짐짓 일을 내버려 두고 혹시라도 마음 놓기가 어려운 지경에 이른다면, 우리 마을의 불행이 또한 어떠하겠습니까. 귀 가문과 全氏가 어찌 한갓 道內 풍자를 받는 데 그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일제히 모여서 혹시라도 잘 처리할 수 있는 도리가 있는지 생각해보았습니다. 그 뜻은 간절하고 그 마음은 수고로우니, 옷깃을 좌측으로 걷어붙이나 우측으로 걷어 붙이나 마을에서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거짓으로 올린 봉홧불에 매번 애써 움직이게 한다는 등의 말은 사실에 부합하는 것인지 알지 못하겠으나,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말씀하신 뜻이 이와 같다면, 다시 논할 것이 없으니, 어찌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바라건대 모름지기 아주 소상하게 하여 정중한 데로 돌아가도록 힘쓴다면 참으로 다행이겠습니다.
위 통문에서 보이는 상주의 향론은 두 문중 간 시비가 확산하면 사문의 불행이자 풍자의 대상이 된다는 우려와 함께 서로 자중할 것을 권장하고있다. 장수황씨의 통문에서 ‘위패의 차례는 저절로 위패의 차례가 되고, 세대는 저절로 세대가 됩니다.’라고 한 것을 사당의 위차까지 바꾸지는 않겠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옥천전씨의 불만에 대해서도 크게 확산되지 않을것으로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즉 세대 순으로 정리한 사적이 사당의 위차에도 영향을 끼친다면 걷잡을 수 없는 향내 분쟁으로 확대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외 원장 柳聖霖이 보낸 서신에서도 ‘전씨의 단자는 벌써 보았고, 편지에서 뜻을 보여 주셨으니, 어찌 또 다른 의심스러운 단서가 있겠습니까?
그러하니 세대를 바꾸어 쓰는 것은 불가하고 제향한 연도에 따라 차례대로 쓴다면, 전씨가 의심하면서 鄕中의 논의를 막은 일은 저절로 풀릴 것입니다.’라며 시비가 확산하지 않도록 중재에 나섰고, 장수황문 측 통문 내용에 옥천전문을 ‘得罪’했다는 두 글자는 지나친 비방임을 지적하였다. 또趙錫喆(1779・1780년 옥동원장)과 趙錫穆(1789년 옥동원장)은,‘만약 本孫[沃川全門]과 상의하여 정리하였다면, 本孫의 의심도 아마 이와 같이 심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本孫의 單子가 이미 발행된 사실을 미리 알지 못했으니 고을에서도 또한 의혹이 없을 수 없습니다. 또한 통상적인 문서나 文蹟으로 말하면, 세대로써 기록하는 것이 아마도 그 순서를 따르는 것이며, 사당 안의 儀式 절차로 말하면, 위패의 차례가 아마도 중함을 따지는 것이 될 것입니다.
라며 옥천전문과 논의가 없었던 점과 성대한 禮式에 충분히 살피고 신중해야한다며 장수황문을 우회적으로 질책하였다. 무엇보다 행여나 왕이 祭文을 지을 때 옥동서원에서 정리한 實錄에 의거하여 세대로써 차례를 삼으면, 사액이 내려져 致祭를 하는 날에 크게 편하지 못한 도리에 직면할 것이라며 우려하였다.
또 옥동서원의 전 원장 李承延(식산 이만부 孫子)은 사적을 기록한 책을 본 후 옥천전문 측의 행동은 갑자기 집마다 다니며 말해줄 수 없어 한 행동이니 이해를 해 주면 좋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옥동서원에 보냈다.
아울러 장수황문 측도 사림의 경사를 정성을 다하다 발생한 일이니 잘 해결하여 서원일에 폐를 끼치지 않게 하길 바란다는 서신을 보내왔다.
한편 이 사태에 대한 단자를 발송한 후 한성으로 상경한 전시옥은 전달덕과 함께 청액 소청을 방문한다.이후의 자료에는 이때 발생한 시비에 관련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朴天衡을 통해 내린 정조의 치제문에는 ‘익성공 黃喜를 제향함에/마땅한 곳을 얻었으니/드러난 익성공이여/동국의 기강이었네’라고 하여 주향인 황희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옥동서원에서 올린 사적에 ‘黃喜⇨黃孝獻⇨全湜⇨黃紐’로 정리된 世代순은 치제문에 반영되지 않았고, 두 문중 간의 갈등이 더는 확산되지 않고 일시적으로 봉합된 것으로 보인다. 이 내용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표 2> 事蹟 정리에서 발생한 2차 시비 과정
일자 | 내 용 |
1789년 1월 14일 | ⦁옥동서원 사액 批旨 내림 |
1월 27일 | ⦁한성 청액소 요청 사항: ① 사액 날짜 택일 ② 왕이 제문을 지을 때 참고할 제향자 사적 |
1월 30일 | ⦁백옥동서당에서 齊會 (옥동서원 임원들로 구성) - 일이 시급하여 鄕中에 고하지 못한 채 회의 ⦁사적 世代순 정리: 黃喜⇨黃孝獻⇨全湜⇨黃紐 |
2월 1일 | ⦁택일한 사액 날짜와(4월 1일) 정리한 사적 청액 소청으로 서신 발송 ⦁全始玉: 사적을 사당의 위차 순으로 정리하지 않은 것에 항의 ⦁전시옥 또다시 향내 서원으로 단자 발행 |
2월 | ⦁옥동서원 측도 일어난 사태를 정리하여 향내 각 서원에 통문 발송 - 내용: 사안이 시급하여 公議를 구하지 못한 상황 설명 - 사적 정리 시 세대순 정리한 것은 왕의 의심을 피하기 위함 - 옥동서원은 사당과 세대 위차는 다르다는 것을 인식한다는 것 - 강도 높게 옥천전문을 비방함 |
2월 | ⦁향회 개최 후 도남서원의 답통: 柳光億(道南院長), 李承延(玉成院 長), 趙錫喆(涑水院長), 姜世慶(淵獄院長) 외 회원 7명 연명 - 사당과 세대 위차는 다르다는 것을 인식한다는 점에서 해결을 긍 정적으로 봄, 옥천전문에 대한 과한 비방에 대해 우려 표명 |
2월 | ⦁원장 柳聖霖의 답신: 옥천전문의 불만 사항 해결해 주길 희망, 옥 천전문 과한 비방에 대해 우려 |
2월 | ⦁趙錫喆(1779・1780 옥동원장)・趙錫穆(1789 옥동원장)의 답신: - 향회와 옥천전문을 배제한 채 사적을 정리한 것을 지적하며, 치제 문에 옥동서원에서 정리한 세대로 지은 제문이 내려질까 우려함 - 신중하지 못한 장수황문을 질책 |
2월 | ⦁전원장 李承延(식산 이만부 孫子)의 답신: - 두 문중의 입장을 이해하고 원활한 해결을 요구 |
4월 1일 | ⦁정조의 치제문: 원위만 언급 ⦁두 문중의 분쟁은 일시적으로 봉합 |
3. 제향 祝式을 둘러싸고 발생한 3차 시비
앞에서 언급한 1・2차에 걸친 두 문중의 시비는 봉합되는 듯했으나,1789년 9월 秋享禮를 앞두고 또다시 시비가 발생하였다. 3차 시비의 발단은 옥동서원이 사액례 후 처음으로 봉행할 추향례에 기존의 祝式을 바꾸고자 각 서원에 품목을 발송하면서 시작되었다.
옥동서원은 1714년 사서 전식을 배향하여 승원한 후 향례의 축식은 各祝으로 하였고, 1786년 축옹 황효헌, 반간 황뉴를 추배한 후에도 축식은 네 선현에 대해 각축으로 향례를 거행하였다. 그런데 1789년 가을에 봉행할 제향부터는 기존의 各祝 방식을 合祝으로 바꾸고자 한 것이다. 당시 옥동서원장 趙錫穆이 발송한 품목 내용 중 일부분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외람되게 중요한 직임을 맡아서 여러 번 단자를 올렸으나 許遞를 받지못했습니다. 지금 향례가 임박하였는데 부득이 직책에서 물러나 향례의 계획을 말하고자 합니다. 다만 생각하건대, 본원은 각축을 합축하는데 鄕議가 일치하지 않거나, 혹자는 선배들이 이미 행한 규례를 갑자기 바꾸기 어렵다고 합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본원 일의 면모와 더불어 전일과 다름이 있었으나 이미 元位로서 사액되었으니, 配位는 이를 따라 사제한다면 元位에 合祝하는 도리가 당연하다’고 합니다. 또 ‘도남서원 원위는 처음에는 각축을 올렸는데, 끝에는 합축하였으니, 본원이 추후에 축문을 고쳐 올리는 것은 실로 미안한 점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품목에 따르면, 이미 몇 차례 단자를 발행하여 합축에 동의하는 향론을 모으려고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옥천전씨들이 합축을 반대하면서 각축을 주장하는 단자를 발행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의사를 표명했기 때문이다. 결국 조석목은 옥동서원장 재임기에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다. 이후 南必毅이 옥동서원장으로 취임하여 또다시 품목을 발송하였다. 이번에는 좀더 구체적인 도남서원의 사례를 들어 합축의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그는 ‘도남서원의 축식은 원래 우복 정경세가 오현의 각축을 지어 쓰다가 후에 선배들이 고쳐서 합축하였는데, 자손이 혐오하지 않고 따랐으며 지금까지 관례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처럼 도남서원도 合祝하는데 더구나 본원(옥동서원)이 배위를 元祝으로 합축한 것이 어찌 분명하게 드러난 것이 아니겠습니까.’며 배위는 원위 일체를 따라 치제한 사액서원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서 합축은 당연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자 옥천전문은 이 품목에 맞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단자를 작성하였다.
옥동서원의 각 祝式은 본디 先父老 대부터 정한 논의로 100년 가까이 시행해오던 법규입니다. 오늘날 후학들은 본디 옛법을 준수해야 하고 감히 가벼이 논의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뜻밖에 近來 황씨 일문에서 자신들의 의견을 가지고 축을 고치거나 합하자는 논의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안으로는 本院[옥동서원]의 古事로 두고 밖으로는 다른 서원의 다른 사례를 인용하여 장황한 말로 一鄕을 强迫하며 선배들의 儀文에 관한 내용을 기어이 바꾸고 말겠다고 합니다.
두 문중의 시비는 이미 1・2차 시비에서 향내 관심사로 부상하였고, 시비의 내용이 사당에서 제향자의 위차 혹은 세대 서차의 민감한 사항이다 보니 합의에 도달하기는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또한 옥천전문 후손은 위차와 관련해서 문제가 발생하면 항상 장수황문의 입장과 첨예하게 대립하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기 때문에 향내 공론을 취합하는 데 그만큼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한편 원장 남필의도 합축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상태로 향사를 이어갔다. 합축 문제는 이듬해 2월 황경간, 황건중 등에 의해서 다시 쟁점화되었다. 특히 내용 중 옥동서원이 모범으로 삼고 있는 소수서원의 축문에 ‘감히 先師 문성공 회헌 안선생께 밝게 고합니다. 엎드려 아뢰건대, 삼가 牲幣醴를 齊明하여 薦합니다. 文貞公 安氏와 文敬公 安氏, 愼齋 周氏는 추배합니다. 적지만 흠향하소서’의 합축문 사례를 들며 그 아래 배위의 祝文은 없다고 하였다. 이를 증명하고자 죽계지 내용이 부족하여 소수서원에 사람을 보내 합축한 내용과 이후 문제를 방지하고자 정해놓은 절목까지 등사해온 내용을 거론하며 합축의 당위성을 주장하였다. 또 이어서,
그것으로 인해 가만히 생각해보건대, 본 서원의 各祝과 合祝은 선조에게는 더하거나 빼는 바가 없어야 하고 자손에게는 미안한 바가 없어야 합니다. 다만 사액이 내려진 후 향례의 제수는 임금께서 내려주신 물건으로 이미 元位로써 아울러 配位를 포함한 것인데, 모두를 從享하는 데 무거운 것이 가벼운 것을 포함하는 뜻이 있지 않겠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정위와 배위의 각축은 임금이 내려주신 제수를 함께 사용하는 것이 되니, 명분도 예의도 없습니다. 이 어찌 더욱 미안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사서(沙西)의본손은 매번 합축이 持重함에도 어찌 여기에 생각이 미치지 않는 것입니까?
라며 옥천전문을 비방하였다. 이에 옥천전문 측도 다음과 같이 더욱 거세게 반발하였다.
본원[옥동서원]의 首席께서 이런 뜻으로 다시 稟目을 발송하였는데, 향중에서는 처음부터 발문을 덧붙이지 않았습니다. 또 哭班 때 온 경내 선비들이 다 모였는데, 회중의 여러 의견이 바꾸기 어렵다는 논의가 이미 있었
습니다. 금년 봄 연악서원 모임 때 편지를 보내어 두루 고하였는데, 각처의 답장에도 역시 바꿀 수 없는 뜻을 보였으니 이는 곧 公議가 예나 지금이나 항상 남아있기 때문이며, 人心이 멀고 가까운 것은 다 같다는 것입니다. 황씨들은 그만둘 수 있을 것인데, 그들이 바라는 것이 갈수록 더욱 심해집니다.
향내에서도 이를 해결하기 위해 淵嶽書院에서 향회를 개최하였으나 鄕父老 대부분은 참석을 피하였고, 그렇다고 참석한 소수의 인원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은 더욱 아니었다. 점차 향내 서원과 향부로는 두 문중에서 발송한 합축 시비 품목에 대한 답도 피하게 된다. 이처럼 두 문중의 시비는 향내 공론으로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격화되어 결국 합의점을 찾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축식을 두고 발생한 갈등 과정을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표 3> 축식을 둘러싼 3차 갈등 과정
일자 | 내 용 |
1789년 가을 | ⦁원장 조석목은 도남서원이 사액 후 제향 축식을 각축에서 합축으 로 바꾼 例를 들어 옥동서원도 합축으로 바꾸자는 단자・품목을 향내 서원으로 몇 차례 발송 ⦁제향자 후손 옥천전씨 문중: 합축 반대하는 단자 향내 발행하면 서 갈등 발생 |
″ | ⦁신임 옥동서원 원장 南必毅 합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품목 재 발송 ⦁옥천전씨 문중: 옥동서원에서 발송한 품목에 맞서 합축 반대 단 자 재발행 |
1790년 2월 | ⦁옥동서원 측(황희 후손): 소수서원 합축문과 합축 절목을 등사하 여 합축하기 위한 향중 父老 등 향론을 구하는 품목 발송 ⦁옥천전씨 문중: 옥동서원 품목에 대해 향중 부로의 발문이 없는 것은 향론이 합축을 반대한다는 뜻으로 해석하며 합축을 강력하 게 반대함 |
1790년 | ⦁옥동서원 축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연악서원에서 향회를 개 최하였으나 향부로 대부분 참석을 피함 ⦁향중 부로 등: 옥동서원 제향자의 후손인 두 문중의 축식 방법을 두고 점차 심해지는 갈등으로 인하여 향회, 품목에 대한 발문 등 관여하기를 기피함 ⦁합의점을 찾지 못함 |
Ⅲ. 19세기 도남서원 追配를 둘러싼 상주 남인 세력의 갈등
1. 全湜 祠版 이안 사건을 둘러싼 남인 세력의 갈등 확산과 보합
이 시비는 장수황・옥천전문 간에 1804년(순조 4) 옥동서원의 廟宇를 수리하고 還安祭를 올리면서 재발화되었다. 본래 이 사건은 1804년 4월에 옥동서원의 묘우를 중수한 후 환안제를 거행할 때 사당의 위패 序次를 세대순으로 두자는 논의에 대해 사서 후손 全達德이 동의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사서 전식이 남긴 遺稿 중 ‘年代가 앞에 있으면 位次는 마땅히 위가된다. 이것은 태어난 사람이 차츰 장성하는 뜻을 도리로 삼은 것이니, 내세와 현세가 어찌다르겠는가.’라는 글을 보이며, 전식의 혼령이 있다면 반드시 따르고 편안하게 여길 것이라며 위패를 세대순으로 두자는 논의에 찬성하였다. 이처럼 옥천전문 측의 동의로 사당의 위패는 황희-황효헌-전식-황뉴 순으로 정하여 환안제를 거행하였다.
그런데 전달덕의 이러한 행동은 옥천전씨 문중 전체 뜻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서차를 바꾸자는 의론을 발하고 사림에 혼자서 여쭈었다’는 기록과 ‘그런데 저 일족들은 先祖인 전식의 遺訓을 저버리고, 그 문중의 어른인 全達德의 바른 의론을 배반하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핏줄에 연연하여 다투었다.’는 기록에서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옥천전문의 내부 갈등으로 인해 사당 세대순 서차에 강력하게 반대했던 全宗德을 필두로 한 옥천전씨들의 주장이 힘을 잃게 되었다. 전종덕의 강력한 항의와 거센 반발에도 환안제를 봉행하면서 바뀐 사당의 서차를 다시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전종덕 측은 1804년(순조 4) 12월 옥동서원에 있던 사서 전식의 祠版을 들고 魯東書堂에 잠시 舁奉하였다가, 12월 12일에 도남서원에 추배하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도남서원에 일어난 이 사건은 都會 또는 鄕會 등 공론을 취합하기 위한 어떠한 행정절차나 齊會 없이 일어난 전례 없는 사태였다.
상주 향내와 道內 공론은 이 사건을 두고 ‘玉洞事變’ 또는 ‘一道士林聞變’ ‘斯文之極變’ ‘道南事變’등으로 기록할 만큼 영남 전역으로 회자되었다.
이어서 지난 세 차례의 시비 때와 같이 黃・全 양 가문은 이 사태에 대한 책임소재 및 상대 가문을 비방한 단자를 발송하여 또 다시 상주 향론이 분열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영남지역의 순흥 紹修・예안 陶山・경주 玉山・안동 虎溪・榮川 伊山・영천 臨皐・용궁 三江・예천 鼎山・영해 丹山서원등이 연대하여 함창 청암서원에서 통문을 작성, 이 사태를 두고 ‘斯文大變’으로 규정하고 ‘오히려 道內에서는 고요히 한마디 말도 없습니다’고 하며,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상주 향론에 대하여 질책하였다.
또한 黃・全 두 문중에 ‘마땅히 책임지고 침묵하며 공의를 기다리는 것이 도리인데, 불행히도 여러 곳에다 글을 먼저 보낸 행동에 대해 합당하지 못하다’는 의견을 보냈다. 그리고 서로 원망하는 글과 상대를 헐뜯고 배척하는 등 ‘어찌 鄒魯와 예의의 마을에 뜻을 둔 선비가 이런 거칠고 사나우며, 사리에 어그러지고 괴격한 習俗이 있을 수 있냐’며 격분하였다. 두 집안 사이에 발생한 사건의 진위는 잠시 차치하더라도, 사액된 상주의 수원에서 발생한 사태라는 점에서 도남서원이 받아야 할 영남 儒林의 비난은 클 수밖에 없었다.
저희들은 이 일의 소문을 듣고 날마다 정중한 의론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몇 개월이 이르도록 모두가 강 건너 불 보듯 하여 서로 도울 뜻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同室의 도리이겠습니까. 본디 저희들의말은 경중을 따질 필요가 없이 오직 분개함을 이기지 못하는 마음뿐이라는 것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1789년 청액 상소문에서 시작된 황・전문의 시비는 15년 동안 세차례나 이어지면서 가까스로 무마되었으나, 두 문중의 긴장 관계는 여전히 잔존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805년 사서 전식의 위패를 도남서원에 추배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사서의 위패를 이안하기 위한 都會 또는 鄕會가 없었다는 점과 향론을 취합하기 위한 통문발송등 공론 취합을 위해 어떠한 조치 없이 소수 임원에 의해 결정되었다
는 데 있었다. 사건 발생 1년이 넘도록 두 문중의 분쟁은 더욱 격렬해져도남서원에 추배된 사서 위패 문제는 상주 유림에서 해결하지 못한 채 답보 상태에 놓이게 된다.
만약 지금 강론해서 확정하여 지극히 당연한 데로 힘써 돌아가게 하지 않는다면, 일의 끝까지를 수습하는 어려움은 전날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찌하여 이에 이를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한결같이 서로 싸워 충돌하여 뒷일을 잘 처리할 도리를 생각지 않으십니까. 지금의 사태에는 다른 좋은 계책이 없습니다. 다만 전후 事端에 있어 편견과 사사로
운 견해를 버리고, 공정한 의론이 되도록 힘써서 속히 叫閽[伏閤]하는 일을 도모한 연후에 성상의 처분을 기다려 정돈의 바탕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비로소 道로써 존숭하고 예로써 제향을 올림으로써 길이 斯文에 빛이 날 것입니다.
결국 영남 도내 공론에서도 수습 방안을 찾지 못하자, 청암서원 외 도내9개 首院에서 제시한 방법은 위 통문의 내용과 같이 伏閤(奉疏)이었다. 이에 1805년 9월 도남서원 원장 權訪(1740~1808)은 釋菜禮를 마친 후 재회를 개최하여 도내 각처에 所任을 배정하여 奉疏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도남서원 측과 옥동서원 측의 주장은 이미 현격한 차이가 있어 연대하여 봉소하는 것조차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다. 따라서 도남소청(도남서원측)과 봉산소청(옥동서원 측)에서 각각의 상소문을 봉소하기 위해 상경하게 되었다.
도남소청 측은 소수 도우경을 비롯하여 李汝幹, 姜伯飮(都廳), 朴思㵯(掌議) 등이 한성으로 입성하였고, 이들은 東冸 李菅道의 집에 소청을 설치하였다. 이어서 상소문을 승정원에 봉입하기 위한 성균관 장의들의 謹悉(동의서)를 받기 위해 통문 발송을 준비하였다.
그런데 봉산소청 측 黃錫老, 鄭陽魯, 盧尙慶, 金獻慶, 李景實 등이 먼저 상경해 있었고, 도남소청보다 앞서 봉산소청 측이 봉소하기 위한 청탁 활동을 앞서 진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결과 먼저 봉산소청이 성균관의 근실 두 개를 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도남소청은 난관에 부딪혔다. 이는 太學의 전례에 한 가지 일로 두 가지 상소를 하면 한쪽은 근실을 주고 한쪽은 근실을 주지 않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도남소청의 도우경은 봉산소청에 통문을 발송하게 되는데 ‘이 일은 한 서원의 일이며, 營官에서 두 가지로 만든 것과 同室에서 서로 치고 싸우는 것은 듣는 사람을 놀라게 하며, 또 형제가 서로 송사하는 것과 같으며, 하나는 감히 하지 못할 바요. 둘째는 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라며 하나의 상소문으로 봉입하자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봉산소청 측은 현재의 비난을 감수하겠다는 내용과 도남소청에서 제시한 하나의 상소문으로 봉입하자는 의견에 대한 조건으로 환안 시 위차는 반드시 세대순이어야 된다는 일관된 주장을 보내옴으로써 두 소청간에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된다면 도남소청 측은 근실을 받지 못해 봉입조차 못한 상태에서 낙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그렇게 되면 봉산소청 상소문만 봉입되어 도내 유림의 원망을 받아야 할 상황에 놓이게 되니, 봉산소청 측과의 합의점을 찾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양측의 양보 없는 주장이 너무나 완강하여 보합은 커녕 오히려 상대편을 비방하거나 이 사태에 대한 책임 소재를 추궁하기에 이르렀다.
예를 들어 도남소청은 ‘沙西의 사판이 도남서원에 추배된 것은 都儒들이한 것이 아니며 바로 황씨입니다.’라고 한다든가, 봉산소청은 사서의 사판을 옮긴 全宗德을 두고 전식의 망령된 후손이라 비방하는 등 양측의 갈등은 더 격화되었다. 도남소청은 더 이상 보합에 대한 진전이 없자 성균관 장의 安光集에게 통문을 보내 근실을 청하였고, 마침내 3번의 통문 발송 만에 근실을 받게 되었다.
이에 1805년 11월 1일 도남서원 측 陽福煥의 집에 소청을 설치하고 임원진을 선출하였다. 양측의 봉소 임원, 연명자 등 관련 명단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표 4> 1805년 도남소청・봉산소청 임원 명단
도남소청(疎任錄) | 봉산소청 임원 |
疏首: 都禹璟. 製疏: 李汝幹(進士)・金相溫(生員). 寫疏: 安愿(幼學)・金永穆(生員). 掌議: 李東鳴(幼學)・金宗鐸(生員). 疏色: 李鎭坤(幼學)・姜瑥. 公事員: 鄭灝(生員)・安爾龍(生員). 直日: 洪升雨(幼學). 都廳: 趙錫年(幼學), 鄕都廳: 姜伯欽(幼學)・金恒壽(幼學). 管行: 李重燮(幼學)・權象奎(幼學). 陪疏: 金名鍊(幼學)・南漢龜(幼學)・李土+赫(幼學)・卞榮(幼學)・王允翼(幼學)・申冕周(幼學)・權進學(幼學)・權錄仁(幼學)・安廷采(幼學)・成孝兢(生員)・都土敬(幼學)・朴思㵯(幼學)・李同淳(幼學). 합계: 30인 | 疏首: 宋智修 鄭陽魯, 黃錫老(정종로 사위), 盧尙慶, 金憲慶,李景實, 柳喆祚(參奉), 柳璧祚(進士), 趙錫年, 李重燮, 鄭秉魯, 柳晦文(製疏, 進仕), 洪錫圭, 姜愿 白惟典 한성 자문 대상: 한성본손_ 黃明漢(持平, 노론),黃升遠(前吏判, 노론), 황승원 인척: 韓用龜(禮判) 상소문 연명 인원: 223명 (李氏 28名, 金氏 21名, 權氏 20名, 申氏 18名, 鄭氏 10名, 崔氏 10名, 朴氏 8名, 趙氏 7名 洪氏 8名, 柳氏 7名, 河氏 7名 등) |
그렇다면 두 상소문의 쟁점은 무엇일까. 먼저 도남소청의 상소문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지난 先朝 丙午년에 익성공의 本孫들이 황효헌, 황뉴를 忠簡公 아래에 追享하고, 그 후 3년에 사림이 상소하여 允許를 받아, 全湜은 제2위이며 황효헌은 제3위로 이미 백세에 바꾸지 못할 전례를 만들었습니다. 지난 甲子에 黃錫老등이 묘우의 개수로 인하여 그들의 선조 황효헌이 전식보다 연세가 높다고 감히 위차를 바꾸려는 계획을 만들어 姻婭들과 체결하여 士林들과 상의하지 않고, 어느새 동쪽에 있던 것을 서쪽으로 옮겨, 낮았던것이 위로 가서 양현의 위차가 혼란하게 되었습니다. 장차 옥동으로 들어간다면 한번 나와 다시 들어가는 것이 아마도 구차할 단서가 있고, 鄕祠에 배향하려 한다면 사액서원에 모시던 선현을 스스로 격을 낮추어 모신다는 혐의가 있어, 일편의 祠版이 지금 도로에 있어 붙일 곳 없으니, 본주의 사액서원은 다만 도남서원 하나뿐입니다. 충간공의 사판을 도남서원 사당 서벽의 末次에 追配한다면, 이것은 충간공으로는 불행 중 다행일 것이며, 70州 大同의 의론입니다.
도남소청의 상소문 핵심은 옥동서원이 사당의 序次를 바꾼 상태에서 사서 전식의 위패를 환안하더라도 원래 서차로 돌아갈 수 없으니, 사액서원인 도남서원에 추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옥동서원 측이 사서 위패
를 원래 서차로 환안해 주기를 바라는 뜻과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도남서원에 추배하는 방법 외에는 없다는 주장이다. 반면 봉산소청에서 작성한 상소문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특별히 명을 내리시어 全湜의 사판을 곧장 옥동서원으로 되돌려 배향하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되돌려 배향할 때에 황효헌과 전식 두 신하 위차의 상하가 만약 법에 따라 전하의 처결로 처리하
지 않는다면, 반드시 장차 분란을 불러오게 될 것입니다. 대개 도남서원에 위패를 몰래 배향한 선비들은 반드시 전식의 사판을 황효헌의 위에 올리려고 싸우려 할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연대를 뒤집어 놓은 것으로 근
거할 만한 의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문묘에 합사하는 圖式으로 先朝의 법에 있는 것입니다. 신들은 전하의 현명하신 판단을 기다릴 뿐입니다.
결국 1805년 11월 8일에 봉산소청이 궐문 밖에서 먼저 복합하게 되었다. 봉산소청은 宋智修를 소수로 趙錫年, 李重燮, 盧尙慶, 鄭陽魯, 鄭秉魯,金憲慶, 白惟典 등이 참여하였다.
도남소청은 11월 12일에 복합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양측이 함께 복합해야 하는 상황에 대하여 영남의 사론은 물론이고, 양 소청 임원들도 상당한 부담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봉산소청의 부담은 내부 갈등으로 확산되었다. 정양로와 노상경은 영남의 사론이 두려워 예전과 같이 환안하기를 바란다는 의견을 내고, 황씨는 사서의 사판을 전과 같이 모시면, 축웅(황효헌)의 위패가 서벽으로 가야 하니, 차라리 도남서원에 모시는 게 좋겠다고 주장하였다. 또 백유전은 黃・鄭씨가 봉소 과정에서 잘못한 부분을 지적하면서 상소문이 登徹되지 못하도록 난동을 부리기도 했다.
도남소청 역시 함께 복합하는 것에 대한 부담을 지니고 있었다. 본래 봉소 준비단계부터 같은 사건을 두고 두 소청이 함께 복합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봉산소청에 통문을 발송하는 등 애초에 단일 상소문을 올리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만약 두 소청이 함께 복합한다면 한성 사론의 부정적인 시선은 물론이고 특히 영남 유림이 원하지 않기 때문에 그 부담이 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양측의 이 같은 사정을 포착한 陞廡 疏首 李東汲(38~1811)이 양 소청의 소수와 면담을 시도하였다. 이때 도남소청 소수 도우경이 적극적으로 면담에 임하게 된 것은 이와 같은 부담에 기인한 것이었다. 이동급의 보합안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지금 玉洞으로 還安한다면 전과 같이 위차를 바꾸는 것은 피차가 함께어렵게 여기는데, 위차를 바꾸는 것은 士林이 하려 하지 않으며, 전과 같이 하는 것은 黃氏들이 하지 않으려 하고, 도남서원에서 그대로 모시는 것은 세 집안이 다 하려고 하지 않으니, 魯東에 나누어 排設하는 것은 실로 양쪽을 편하게 하는 것이라, 만약 사림의 공의로 서원을 영건하여 一新케하고 임금님에게 고한 다음 봉안한다면, 宣額을 기필하지 않아도 어찌 沙西에게 영광이 되지 않겠는가.
도남소청은 이동급이 제시한 위 보합안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봉산소청과 협의도 급진전 되었다. 이어서 승무소청은 정식으로 보합안 통문을 작성하여 봉산소청에 발송하였고, 봉산소청은 보합 통문에 동의하겠다는 내용과 함께 복합을 중간에 거두는 것은 난처하니 大論을 확실히 정해달라는 요청과 사서 전식의 사판을 魯東에 봉안할 기일을 回示해 달라는 답통문을 보내왔다.
1805년 11월 15일 양 소청의 임원진이 승무소청에서 재회를 열었다. 소수와 제소 정병로, 노상경, 황석로와 縉紳의 유생들이 모두 모였다. 보합임원으로 公事員은 李重燮, 洪錫圭를 선임하였고, 姜原, 정병로는 통문을 작성하기로 했다. 작성된 통문 내용의 핵심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옥동에 환안한다면 절차가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옳고 그른 사이에 公議는 격동하기 쉬우니, 만약 사변이 거듭 일어나고, 가닥이 다른 것으로 생겨 장차 수습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어찌 크게 尊賢의 예절에 손상이 있지 않겠습니까마는 우리 영남 一道의 수치가 이것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대저 공의를 保合하여 선현을 존모하는 의리를 잃지 않는 것은 마땅히 魯東에 分院하는 것만 한 것이 없습니다. 노동은 沙西 선생이 杖屨를 두던 장소이며, 영정을 봉안한 곳입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첨존의 통문이 도착한 다음 즉시 각 읍에 輪示하고, 택일하여, 노동의 논의를 확실히 정하여, 무릇 儀節 사이에 구획하는 즈음에 십분 살피고, 삼가 능히 爛商을 더하여 하나로 공의를 확장하는 도리를 만들고, 하나로 영구히 보합하는 처지가 되게 하면 다행이겠습니다.
위와 같이 노동서당에 분설하여 모시는 논의를 敦定하고, 세 곳의 소청과 縉紳, 유생들이 서명하여 상주와 도내에 통문을 발송하는 것으로 이 사태를 보합하였다. 이 과정을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표 5> 全湜 祠版 이안 사건에서 발생한 4차 시비와 보합 과정
일자 | 내 용 |
1804년 4월 | ⦁묘우를 중수한 후 환안제를 거행하면서 사당의 위패 序次를 세대 순으로 두자는 논의에 대해 사서 후손의 동의하에 환안제 봉행 ⦁옥천전씨 문중 측: 위패 세대순 동의는 문중 전체 뜻이 아니라며 강력하게 의의 제기하며 갈등 시작 |
1804년 12월 | ⦁옥천전씨 문중: 사서 전식의 祠版을 魯東書堂에 잠시 舁奉했다가 도남서원에 추배하는 사건 발생 ⦁사서 전식의 도남서원 추배 사건은 都會 또는 鄕會 등 공론을 취 합 등의 절차없이 일어난 전례 없는 사태 ⦁상주 영남 남인의 향론 분열 ⦁사건 발생 1년이 넘도록 두 문중의 분쟁은 더욱 격렬해져 향론의 침묵으로 이어져 해결하지 못한 채 답보 상태 놓임 ⦁소수・도산・옥산서원 등 奉疏로 해결하라는 통문을 발송 함. |
1805년 9월 | ⦁도남서원 원장 權訪(40~1808)은 齊會를 개최하여 각처에 所任을 배정하여 奉疏결의 ⦁도남서원 측과 옥동서원 측의 주장의 현격한 차이로 연대 봉소 합 의 실패 ⦁옥동서원 측: 봉산서원에서 소수 宋智修외 15명 임원진 구성 - 봉산소청 주장 내용: 사서 전식의 사판을 옥동서원 사당에 세대순 으로 환안 ⦁도남서원 측: 도남서원에서 都禹璟외 30명 임원진 구성 - 도남서원 주장 내용: 사서 전식의 위패를 옥동서원으로 환안하더라 도 원래 서차로 돌아갈 수 없으니, 사액서원인 도남서원에 추배할 수 있도록 비답을 내려달라는 주장 |
1805년 11월 8일 | ⦁봉산소청에서 먼저 복합 시작 ⦁같은 사건을 두고 두 소청이 복합하는 것에 양 소청 내부적으로 갈등 생김 ⦁두 소청 복합에 대하여 한성과 영남의 사론이 부정적인에 대해 양 소청 임원들도 상당한 부담을 가짐 |
1805년 11월 | ⦁陞廡 疏首 李東汲이 양 소청의 소수와 면담에서 보합안 제시 ⦁이동급의 보합안: 상주 魯東에 分設하여 사서 전식의 위판을 봉안 하자는 내용 ⦁양 소청 보합안 수용과 함께 서명 ⦁양측이 서명한 보합안 내용 → 상주와 도내에 통문 발송 ⦁상경한 두 소청팀 낙향 |
2. 전식 위패 환안에서 발생한 5차 시비
사서 전식을 도남서원에 추배한 사태를 두고 벌어진 황・전문의 4차 시비는 魯東에 分設하여 봉안하는 것으로 일단 보합되었다. 그런데 어렵게 보합된 황・전문의 위차 시비는 1808년 1월 경상감사 尹光顔이 關文을내어 전식의 위패를 옥동서원 廟宇에 본래의 序次로 봉안하면서 다시 시작되었다. 1808년(순조 8) 3월 27일에 지평 황명한(황희 14대손, 노론)이 올린 상소문에서 이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상소문의 일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前경상감사 金羲淳과 前예조판서 韓用龜가 병진년의 승무 近例를 들어, 본주에 관문을 보내 세대를 따라 還安하게 하였는데, 지금까지 실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금년[1808년] 정월 前경상감사 尹光顔이 도리어 신의
조상을 낮추어 이미 봉안해 놓은 위패 위에다가 전식을 다시 올려 버리니, 선대 조정에서 이룬 법을 크게 어겼으니, 한 서원의 倫序를 모두 잃어버려 영남 士論이 이로 말미암아 시끄러워졌습니다. 그런데 신의 조상은 中廟朝
己卯年에 경연의 신하로서 도학과 名節이 스승으로 삼을 만한데, 해를 넘겨 代享하였으나 예의상 禮貌가 아닌 것으로서 그 자손의 울분이 어떠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예조 당상에게 하문하시어 특별히 판지를 내려한 서원의 잘못된 예를 바로잡게 하소서.
상소문을 올린 지평 황명한은 봉산소청 임원진이 상경하여 자문을 구하기 위해 가장 먼저 찾았던 인물이다. 당시 鄕戰의 처리가 대부분 감사나 수령에 일임되어 있었기 때문에 윤광안이 부임한 후 관권을 통해 황・전문 시비를 해결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는 1804년 봉소한 상소문에 ‘사서의 위패가 봉안된 魯東書堂이 만약에 지금 훼철된다면, 나아가나 물러가나 궁지에 빠지는 것을 면하지 못하기에’라고 한 부분에서 옥동서원 제향자 후손뿐만 아니라 향내 유림에서도 노동서당이 훼철될 우려에 대해 큰 부담감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사서의 위패 환안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윤광안이 사서의 위패를 옥동서원으로 환안하는 과정에 관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시 영남과 상주의 공론은 대체로 본래의 위차를 따르는 것이 옳다고 여기고 있었고, 윤광안도 이를 감안하여 사액 당시 사당의 위차대로 환안한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장수황문은 관권을 이용하여 본래서차로 환안한 윤광안에 대하여 불만을 토로하는 呈文을 관에 올렸다. 이어서 한성 본손 지평 황명한을 통해 상소문까지 올렸다. 이 상황을 본 옥천전문 측에서도 관에 정문을 올려 강력한 대응에 나섰다.
1808년 4월 1일 순조는 ‘지위를 높이고 낮추게 하는 것은 막중한 데 관계되니, 본도에 공문을 보내어 널리 공의를 탐문하고 사실을 상고해 사리를 갖추어 보고하게 한 다음, 품처하도록 하겠다.’는 비답을 내렸다. 그리고 경상감사 鄭東觀(62~1809)에게 도내 공의를 널리 검토하고 조사하여, 사실을 상고해 사리를 갖추어 보고하라는 공문을 발송하였다. 정동관이 移文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금년 정월에 해당 목의 목사가 감영의 關文으로 인해 전식을 도로 옥동서원에 모셨다. 비록 서차에 관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이와 같은 데 불과하며, 전 목사가 도로 봉안하면서도 역시 예전 차서대로 하였지, 새로 바꾸어 고친 것이 없다. 근래에 들어와서는 士論이 각각 양쪽 집안의 說을 주장하여 양쪽 집안이 번갈아 와서 呈文을 올려 서로 심하게 다투고 있다.
사액한 서원에 대해 논의하는 것은 사체가 가볍지 않고 중하며, 위차를 높이고 낮추는 데 대해서는 공론이 귀일되지 않고 있다. 그런즉 위패의 전후 와 고하에 대해서 營邑에서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이 보고를 받은 순조는 6개월 전 황명한이 올린 상소에서 위차를 세대순으로 하게 해달라고 청한 것에 대해 1808년 9월 1일 ‘상주 옥동서원의 배향위차를 세대 순으로 하는 일을 그만두라’는 명을 내렸다. 이처럼 순조의 경우에도 道內 의론인 본래의 배향 서차에 대해서 일정부분 동의했기때문에 이 같은 하명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로부터 60년 후 1868년(고종 5) 9월 5일 예조에 장계가 올라온다. 옥동서원의 位次 시비에 대한 것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연대의 선후에 따라 올리고 내린다는 설과 배향한 선후에 따라 한다는 설이 각각 분명한 근거가 있어서 양 문중 후손이 서로 자신들의 의견만 고집부리고 있고, 한 道 안의 사론이 서로 다투고 있으니, 갑자기 확정지어 의논을 귀일시키기는 어렵습니다. 중수를 계기로 삼아 서차를 정할 계책을 내어 사체를 구차하게 만든 것은 黃氏 문중에서 먼저 그렇게 하였고, 위판을 가지고 나가 다른 서원에 배향해서 擧措가 해괴하게 한 잘못은 全氏문중에 있습니다. 대개 두 집안의 선조들은 모두 깨끗하고 맑은 이름과 명망이 있어서 당시 유생들이 소중하게 여겨, 마침내는 서원에 享祀 되었습니다. 더구나 서원에 관한 일은 전적으로 여러 선비의 공론에 따라 하는법입니다. 黃氏나 全氏 두 집안의 자손들이 각자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것이 비록 선조를 위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 하더라도, 함께 존경해야 하는 의리를 잃은 것입니다. 본도에서 올린 조사보고서에서는 시비에 대해서 특별하게 논단한 말이 없으니, 도내의 士論 역시 이를 미루어서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대간의 상소 가운데서 말한 위차를 올리고 내리는 문제에 대해서는 지금은 우선 예전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위 내용과 같이 1808년 9월 순조의 하교에도 불구하고 황・전문의 시비는 그 후로 계속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또다시 불거진 옥동서원 시비에 대해 예조는 첫째 잘못은 重修를 계기로 서차를 바꾼 黃氏 문중에 있음을 지적하고, 위판을 다른 서원에 배향해서 ‘擧措駭妄’하게 한 잘못은 全氏문중에 있다고 하였다. 또, 본원에 적을 두고 있는 자들은 그 사이에서 쉽사리 갑론을박할 수 없는 것이며, 서원에 관한 일은 전적으로 여러 선비의 공론에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고 지적하였다. 결국 예조에서도 이 사안에 대해 예전의 서차대로 내버려 두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내놓았고, 고종도 윤허한다는 전교를 내린 것이다.
이후 옥동서원의 위차 시비에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당시 정국이 옥동서원의 위차를 두고 분쟁을 벌일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864년 7월 대원군 집권 초기부터 疊設・私設 원사 철폐에 대한 시사 후 1865년(고종 2) 3월에 만동묘 철폐를 단행하였고, 1868년 8월부터 다섯 차례에 걸쳐 단계적으로 미사액 원사에 대한 대대적인 훼철을 시행한 후 지방관이서원 원장을 맡도록 하는 令이 내려졌다. 당시 상주의 원사 훼철 진행은1차에 14개소의 원사가 훼철되었고, 2차 때는 3개소, 3차에는 5개소의 원사가 철폐되었다.
게다가 ‘원생 정원 준수, 서원 면세전 불인정, 서원 신설 금지, 사액서원에 한에서 追配만 허가한다’는 등의 서원 운영 방침이 결정되면서 사액서원에 대한 훼철도 예고된 상황이었다. 이처럼 대원군의 대대적인 원사 훼철 조치의 여파로 서원이 존폐 위기에 처하게 되자 두 문중은 더 이상 분쟁을 확산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79년간 이어온 황・전문의 위차 시비는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으로 더 이상 지속되지 않았다.
Ⅳ. 맺음말
이상과 같이 옥동서원의 위차 시비의 전말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옥동서원의 제향자 후손인 장수황문과 옥천전문, 두 문중 간 시비는 88년(정조12) 청액 활동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한성의 상소문에서는 배위를 거론하지 않는 것이 근래의 경향이라는 자문에 따라 원위만 거론한 상소문을 작성하였다. 사서 전식 후손들은 한성의 경향에 불만을 성토하며, 배향자, 즉전식을 거론한 상소문을 작성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들이상주 각 서원으로 청액 상소문의 부당함을 알리는 단자를 발행면서 시비는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결국 옥천 전문의 뜻이 받아들여져 원・배위를 기록한 청액소가 작성되었고 시비는 5개월 만에 봉합되었다.
2차 시비는 89년 1월 14일 옥동서원의 사액이 결정된 후 왕이 제문을 지을 때 정・배위의 사적 요청을 대비하여 이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였다. 이 사적은 상주 옥동서원 측에서 작성하였는데, 옥천전문 측의 의견이나 향내의 공론을 취합하지 않고 사적을 세대순인 황희-황효헌-전식-황뉴로 정리하였다. 이에 옥천전문 측이 사당 위차순(황희-전식-황효헌-황뉴)을 위배했다는 이유로 격분하여 또다시 향내 각 서원으로 단자를 발행하면서 2차 시비가 시작되었다. 옥동서원에서 올린 세대순이 정조의 치제문에 반영되지 않았기에, 두 문중 간의 갈등은 일시적으로 봉합되었다.
89년 4월 옥동서원의 추향례 준비과정에서 기존의 축식인 各祝 방식을 合祝으로 바꾸려 했던 것이 전식 후손 측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히면서 다시 시비가 점화되었다. 이 시비는 두 문중의 첨예한 대립으로 해결되지 않자, 옥동서원 측은 향회를 개최하여 향내 父老 와 유림에게 자문을 얻고자 하였으나 대부분 불참하는 상황이 벌어져 시비는 답보 상태에 놓였다. 결국 두 문중의 각축 시비는 향내 공론으로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격화되어 합의점을 찾지 못하였다.
다음으로 4차 시비가 일어나게 된 전말을 추적하였다. 이 시비는 1804년(순조 4) 옥동서원의 廟宇를 수리하고 還安祭를 올릴 때 장수황문 측이 사당의 기존 위차를 변경하여 세대순으로 두면서 재발화되었다. 옥천전문
측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위차가 본래의 서차순으로 되돌려지지 않자 1804년(순조4) 12월 옥천전문은 전식의 祠版을 도남서원의 소수 임원만이 허가한 상태에서 도남서원에 추배하였다. 전식의 사판을 도남서원에 추배한 사
건은 상주향론을 찬・반으로 양분시켰고 격렬한 논쟁을 불러왔다. 결국 이 사태는 영남유림으로 확산되어 영남 9개 수원에서 도남서원에 전식을 추배한 사건에 대하여 奉疏를 통해 왕의 비답을 받아 해결하라는 통문을 보내
왔다. 이에 도남서원과 옥동서원 측은 단일 상소문을 작성하려고 했으나 합의에 실패하자 소청이 양분된 채 상경하였다. 같은 상소문을 두고 두 소청이 함께 복합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한성과 영남 유림의 부정적인 여
론이 형성되어 두 소청의 부담이 컸다. 결국 두 소청의 소수는 李東汲이제시한 보합안을 수용하게 되었다. 보합안의 핵심은 魯東에 分設하여 사서 전식의 위패를 봉안하자는 안이었다. 이로써 상주와 도내 유림의 향론을 양분시켰던 향전은 1년 7개월 만에 보합 되었다.
5차 시비는 1808년(순조 8) 1월 경상감사 尹光顔이 關文을 내어 전식의 위패를 옥동서원 廟宇에 본래의 序次로 봉안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에 격분한 장수황문 측은 세대순 서차를 요구하는 呈文을 관에 올리고, 동시에 한
성의 본손 황명한을 통해 세대순 서차를 요청하는 상소문을 올리게 하였다. 옥천전문 측에서도 세대순 서차는 불가하다는 정문을 올려 강력한 대응에 나섰다. 순조는 황명한의 상소문에 대하여 ‘세대순 위차를 잡는 일을 그만두라’는 비답에도 불구하고, 1868년(고종 5) 9월 5일에 또다시 옥동서원의 위차시비 장계가 예조에 봉입되었다. 고종의 비답도 ‘본래 사당의 서차로 두는 것이 좋겠다’고 전교함에 따라 두 문중 간 분쟁은 강제로 봉합되었다.
세기 중반 이후 서원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서원이 향촌공동체적인 성격에서 벗어나 점차 문중 중심으로 전환되고 있었다. 옥동서원의 위차 시비도 그 연장선에서 볼 수 있다. 서원의 강학 기능은 점차 축소
되었고, 제향 기능이 강조되면서 오히려 향촌 사회에서 각 문중의 기득권경쟁을 위한 도구로 이용되었으며, 한편으로는 자기 문중의 사회・경제적 이해를 대변하는 도구로 전락하였다. 특히 향내 가문의 先祖 간 우열을 둘러싼 각종 시비, 서원의 위차 문제 등 서원을 중심으로 한 향전은 이러한 서원의 성격 변화에 기인한 바가 크다. 옥동서원은 본래 제향자 후손 중심으로 운영되어 사액서원으로 발전한 서원이라는 점에서 서원 운영에 관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차원에서 그 갈등이 더욱 증폭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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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Conflicts among Namin Faction in Sangju Region in the 18th and 19th Centuries
-Focusing on the Disputes over the Order of Spirit Tablets in Okdong Seowon in Sangju
Kim, soon-han*
This study is to review the process of the disputes over the order of spirit tablets occurred in Okdong Seowon had been spread to Sangju and the Namin line seowons in Yeongnam region. The conflicts started from the activities of requesting for granting the board by Okdong Seowon in the 18th Century, and lasted for around 80 years until the early 19th Century. The houses of Hwang of Jangsu and Jeon of Okcheon in Sangju, who were descendants of the scholars enshrined in Okdong Seowon were in the middle of the conflicts, and the study summarizes the start of the disputes between both the houses and the process of
their spreading and steadiness in Yeongnam region.
The first dispute started when the appeal for requesting to grant a board for Okdong Seowon in 88(the 12th reigning year of King Jeongjo). The second one occurred in the process to record the history of the enshrined persons preparing for the King’s sacrificial writing after determination of granting the board in 89. The third accident was the reoccurrence of the conflicts between both the houses over the method of enshrinement, gakchuk(各祝: individual enshrinement) or habchuk(合祝: united enshrinement).
The study focuses on the fourth event. It occurred due to the rearrangement of the order of spirit tablet for Saseo Jeon Sik(沙西 全湜) according to the generation instead of its original one, when repairing the temple of Okdong Seowon and returning the enshrined persons’ spirit tablets in 1804(the 4th reigning year of King Sunjo) Then, thedescendants of Jeon Sik enshrined additionally their ancestor’s nameplate in the temple of Donam Seowon with permission by small numbers of the staffs of Donam Seowon only. As the accident occurred without the official discussions and procedure, the conflict became exaggerated, dividing the factions into two over the responsibilities for the accident and leaving even in Saron of Namin in Sangju. The conflict lasted over one year without resolution, even spreading among the Namin line seowons in Yeongnam region.
* Professor Extraordinary, Department of History, Yeongnam University
The fifth dispute started when the spirit tablet of Jeon Sik returned to the temple of Okdong Seowon with its original order by the official document by Gyeongsang Gamsa in 1808(the 8th reigning year of King Sunjo), and the house of Hwang of Jangsu opposed it fiercely and the house of Jeon of Okcheon responded to oppose the order of generation. As a result, King Gojong ordered the order of spirit tablet in the seowon should be in its original one, notifying to shut down the seowons with the board given by king following closing the private seowons in large scale at that time, and the disputes for about 80 years were resolved, finally.
Since the th Century, even though there were differences depending on the seowons, in general, the institute of seowon changed its characteristics from the local community to focusing on the houses of literati class. T he disputes over the order of spirit tablets in Okdong Seowon could be its expansion. The academic function of seowons was decreased, while its enshrinement function was emphasized as a tool for competing power among the houses in local society and representing individual house’s socio-economic interests. In particular, hyangjeon (local house conflicts) focusing on seowons including various disputes over the order of ancestors and that of spirit tablets in seowons were largely derived from the changes of characteristics of seowons. As Okdong Seowon was originally run mainly by the descendants of the enshrined persons and became the institute granted with the board by king, the conflicts had to become more expanded in order to secure priority in running the seowon.
Key word : Okdong Seowon, Donam Seowon, Dispute over the Order of Spirit Tablets, Returning tablets(還安), Hyangjeon(local house conflict: 鄕戰)
논문 투고일: 2022. 07. 18 심사 완료일: 2022. 08. 17
게재 확정일: 2022. 08. 2
[출처] 18-19세기 상주지역 남인 세력의 갈등*-상주 옥동서원의 位次是非를 중심으로-/김순한.영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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