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성에서 만든 흑차는 티베트에 많이 공급되었습니다.
명나라 때부터 티베트 사람들은 호남성 흑차를 좋아했습니다.
호남성 흑차는 발화라는 과정을 거쳐서
관돌산낭균이 생기게 했습니다.
이제 운남으로 가보겠습니다.
1910년에 맹해에 한족이 들어가서
차장을 열었습니다. 항춘차장입니다.
항춘차장을 시작으로 한족들이 맹해로
들어가서 차장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에 이곳은 토사가 다스리는 땅이라
한족이 쉽게 들어가지 못했는데
1910년부터 토사가 없어지고
중국의 행정구역으로 개편되니까
한족이 들어가서 사업을 하기에
편해졌습니다.
처음 몇년 동안은 맹해에서 모차를 만들어서
사모에 있는 상인들에게 팔았습니다.
그때는 사모가 보이차 가공의 중심이었습니다.
사모에서 차를 원차, 긴차 등으로 만들어서
사천으로도 보내고 티베트로도 보냈습니다.
티베트로 보내는 차는 사모를 떠나
려강을 거쳐 높고 험한 산과 계곡을 건너
죽을 고생 끝에 티베트에 도착했습니다.
가는 동안 벼랑에서 말이 떨어져 죽기도 하고
도적떼가 나타나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뺏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사모를 떠나
티베트까지 가는 데 시간도 오래 걸리고
비용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1923년에 아주 특별한 일이 일어납니다.
양소기라는 사람이 맹해에서 사모로 가지 않고
미얀마로 나가 인도를 거쳐 티베트의 입구인
칼림퐁까지 가는 길을 개척한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하면,
이제 차가 더이상 위험한 길로 가지 않고
트럭, 기차, 배를 타고 아주 편하게
티베트까지 가게 된 것입니다.
게다가 기존에는 마방을 고용해서
말에 차를 싣고 갔는데, 말 한 마리가
실을 수 있는 양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미얀마-인도-티베트로 가면
모두 현대식 교통 수단을 이용하기 때문에
한번에 운송할 수 있는 양이 어마어마했습니다.
이후로 맹해에는 차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었습니다. 홍기나 항성공처럼 기존에
다른 지역에서 크게 차사업을 하던 회사들도 왔고
공무원이나 다른 일을 하던 사람들도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