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방 혜민호 (惠民號)
의방의 중심가에서 태어난 한 남자가 있습니다.
이름은 정혜민.
그의 선조는 운남 석병에서 의방으로 건너왔습니다.
정혜민의 부친은 과거에 합격했던 인재였습니다.
학구열은 아들에게도 이어졌습니다.
정혜민은 1913년 보이의 사범학교를 졸업합니다.
불해차창의 이불일 선생과 동급생입니다.
당시 육대차산이라는 산골에서 보자면 대단히 높은 학력입니다.
정혜민은 학문적 소양뿐만 아니라 겸손하고 인품이 바른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사모의 행정국 국장이며 천재 지략가였던 가수훈 선생의 눈에 띕니다.
가수훈의 추천으로 행정총국 사법과 과장으로 근무하게 됩니다.
1918년, 어째서인지 정혜민은 일을 그만두고 고향 의방으로 내려갑니다.
마을에 초등학교를 세우고 자신이 교장으로 부임합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건물도 보수합니다.
학교 운영에 필요한 자금은 차를 만들고 팔아서 보탰습니다.
자신의 차장이 없었던 시절에는 만든 차를 이무의 동경호에 보내 병차로 만들었습니다.
1926년, 의방에 그의 이름을 딴 차장을 설립합니다.
이름은 혜민호(惠民號)차장.
그의 나이 29세 때입니다.
혜민호를 세운 다음부터는 직접 병차를 만들었습니다.
문학적 소양이 높았던 정혜민은 글씨도 명필이었습니다.
혜민호 보이차에 들어가는 내비와 내표의 글을 모두 직접 썼습니다.
그가 만든 보이차는 베트남으로 팔려나갔습니다.
마방이 차를 싣고 베트남으로 내려갈 때 종종 정혜민도 함께 가곤 했습니다.
1931년, 정혜민은 대략
5톤의 차를 싣고 베트남으로 갔습니다.
무사히 베트남에 도착한 그는 상인에게 차를 넘겼습니다.
며칠 쉬면서 돈을 받으려고 기다리던 때.
그만 지독한 질병에 감염되어 사망하고 맙니다.
당시 나이 34세.
갑작스러운 죽음에 혜민호차장은 영업을 중단합니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 의방에 남겨진 가족이 많았습니다.
조모와 모친, 그의 아내와 아이까지
4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이는 다섯이나 있었는데 막내는 아직 한 살도 안 됐습니다.
정혜민의 아내는 유패금이라는 여성입니다.
석병의 유명한 의원 여식이었습니다.
용모단정하고 기품 있는 명문가의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부고를 듣고 크게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책임져야 할 식구들이 많았습니다.
그때부터 마음을 다잡고 절임채소를 팔아 생계를 유지해 갔습니다.
여성 혼자서 일곱이 넘는 식구를 책임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얼마나 고생이 심했는지 양손은 진한 소금물에 절여져 피부가 다 벗겨졌다고 합니다.
당시 차산에서는 젊은 남자들이 세상을 등지는 일이 많았습니다.
차마고도를 따라 차를 운송하는 일은 젊은 남자들의 몫이었으니 말입니다.
어지러운 시대, 곳곳에 비적 떼가 활개하고 돌림병까지.
차마고도를 따라 차를 팔러 가는 길은 위험하고 또 위험했습니다.
혜민호는 5년이라는 짧은 시간을 역사에 기록합니다.
정혜민이 오래 살았더라면 오늘날 동경호,
복원창호처럼 유명한 차장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첫댓글 혜민호는 들어보지 못했는데 슬픈 사연이 담겨 있네요.
당시 차장들이 다 그렇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