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방 승의상 차장은 1932년에 세워졌습니다.
장주는 향승평으로 보이성립사범대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전에 소개했던 혜민호차장의 정혜민과 더불어 의방의 준재로 손꼽히던 인물입니다.
부친 때부터 의방에 차장을 열었다고 합니다만, 정확한 명칭이니 개장시기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기록은 승의상 차장부터라고 합니다.
1938년 이전까지 승의상 차장은 사업이 매우 잘 되었습니다.
다른 차장과 마찬가지로 많은 양의 보이차가 베트남으로 수출되었습니다.
장주 향승평은 문학적 소질이 뛰어났습니다.
그 시기에 드물게도 영어를 잘 했다고 합니다.
또한 그는 아내를 매우 사랑했습니다.
1935년, 운남성 세관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지만 아내와 함께 있기 위해 공무원 자리를 포기합니다.
그리고 의방에서 아내와 차장을 이어갑니다.
그의 아내도 교육수준이 높은 여성이었습니다.
신식 교육을 받았으며 성격도 명랑하고 밝았습니다.
그녀는 육대차산에서 최초의 여성 선생님으로 이름을 올립니다.
1938년, 프랑스가 베트남을 강점하고 운남 차의 수입을 방해하면서
육대차산의 보이차는 판로가 막힙니다.
승의상 차장도 영업을 그만두고 잡화, 특산물을 팔며 버팁니다.
1942년, 유락차산 사람들이 의방을 공격할 때 향승평과 그의 가족은 사모로 피난을 갑니다.
전쟁이 끝나고 다시 의방으로 돌아왔지만, 전염병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의 나이 30세였습니다.
홀로 남겨진 여성들의 삶은 비슷합니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떠나보내고 여러 식구를 책임지고 꾸려갑니다.
돼지를 치고 장아찌를 만들어 팔면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남장을 하고 마방과 차 운송에 동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녀가 흘렸던 눈물은 강이 되고 고생에 절은 손은 사막의 모래처럼 거칠어졌습니다.
당시 남겨진 사람들의 삶은 이렇게 가혹했습니다.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남아 두 자식을 키워내고 삶을 이어갔습니다.
그녀의 두 아이들은 의방에서는 최초로 대학까지 진학합니다.
2005년 이후, 고수차가 주목을 받으면서 잠들어 있던 의방에도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낡고 황량했던 의방 거리는 다시금 활기찬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의방은 이무보다 차장이 먼저 들어선 지역입니다.
청나라 때 황실에 조공되었던 차를 생산하던 지역이기도 하고
육대차산의 행정과 보이차 가공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러 역사적 사건에 휩쓸리면서 중심지 자리를 이무로 건네줬고
남아 있던 기록들도 유실되었습니다.
의방에 있었던 차장을 대략적으로 정리해보겠습니다.
1799년, 진모현과 진모달이 항성차호를 설립합니다.
이때 의방에는 이미 경창호, 서상호, 함풍호 등의 차장이 있었습니다.
1800년, 순창호, 양도흥 차장이 개업합니다.
1823년 진패흥장, 진리정 차장.
1858년 태강차장, 1868년 송빙호, 동창호
1895년 송경호 등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청나라 때 의방에 최소 20여 개 이상의 차장이 있었습니다.
이들 중 일부는 이무로 이전해 차장을 이어가기도 했습니다.
이무로 옮겨간 대표적인 차장이 복원창호, 그리고 건리정입니다.
첫댓글 옛날에 비하면 이 시대는 태평성대라고 하더군요.
과연 그럴까 싶지만 내외 전쟁이 그치지 않았던 옛날과는 다른 자신과의 싸움이 만만치는 않습니다.
젊은 나이에 요절한 남편, 그 뒤의 험한 삶...눈물겹습니다,
그렇지요, 지금은 태평성대라고 부를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