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전례, 특히 성체성사는 바로 주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심으로써 그분 안에서 살게 해 주는 성사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아버지의 힘으로 사시듯이 우리도 주님의 힘으로 살게 해 줍니다. 우리 가톨릭 교회는 말씀과 성체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둘은 사실상 하나로서 서로 떼어 놓을 수가 없습니다. 둘이 모양은 다르지만 모두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요한 복음 6장에서 유다인들과 제자들롤부터 거듭되는 반대와 오해를 받으시고도 끝까지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성체성사를 강조하시는 모습을 보면, 예수님으로서도 거기에 온 생명을 거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은 결국 생명을 주는 말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당신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다며 군중이 모두 떠나간 다음 제자들과 제자들 사이에 오간 대화와 시몬 베드로의 대답에서 우리는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하고 물으셨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7-68)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은 바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요즈음 교회는 우리 믿음의 핵심적 내용을 '외우는 일'의 중요성에 다시 눈을 떠 가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서 성경 말씀을 외우는 일을 강조하고(126, 146항), 신앙의 해 선포를 기해서 반포하신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자의 교서 '믿음의 문'에서는 신경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이 신경을 외워야 했던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신경은 세례 때 했던 약속을 잊지 않도록 해 주는 매일의 기도 역할을 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신경을 건네주는 예식'에 관해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강론을 했습니다. '여러분이 모두 받았고, 오늘 한 사람 한 사람이 외운 거룩한 신비에 관한 신경은 어머니이신 교회의 신앙이 그리스도라는 확고한 토대 위에 견고히 세워 놓은 말씀들입니다. 여러분은 그 신앙을 받고 또 고백하였으니, 이제 여러분이 정신과 마음속에 늘 간직해야합니다. 잠자리에서도 되씹고, 저잣거리에서도 떠올리며, 식사 때에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몸이 잠들었을 때에도 여러분의 마음은 늘 그것을 지키고 있어야 합니다.'"
신경을 그렇게 해야 한다면, 하느님의 말씀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입으로 음식을 먹고 잘 씹어 삼키면 위장에서 그것을 완전히 소화시켜 우리 몸을 키우고 활력을 주듯이, 영혼의 양식인 하느님의 말씀도 우선 외운 다음 그것을 되씹듯 계속 묵상하면, 그 말씀은 차츰 정신을 비추어 주는 빛이 되고 생기를 주는 힘으로 바뀝니다. 주님의 말씀은 "영이며 생명"(요한 6,63)이기 때문입니다.
7. 신앙은 언제나 하느님과의 극히 개인적인 만남에서 시작되어 공동체에서 완성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자와 예수님 사이의 만남도 극히 개인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느 어느 쪽에서도 수치스럽고 상처투성이인 과거를 입 밖으로 끌어내어 치유의 과정을 시작할 수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일단 치유를 받으면, 사마리아 여인처럼, 누구나 그 기쁜 소식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사도가 되어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을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