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석동 간석오거리에서 경인국도를 타고 부평삼거리 방향으로 올라가다 보면 약산아래 언덕배기에 언덕배기에 원통이고개가 나온다. 남동구와 부평구의 경계가 되는 곳으로, 발음이 바뀌어 원테이고개로도 불리는 이곳은 옛날 인천에서 부평을 거쳐 서울로 가는 주요 길목이었다. 이곳이 그 특이한 이름을 갖게 된 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 전설이 전해온다.
첫째는 조선 중종 때의 권신 김안로가 삼남지방에서 거둔 쌀을 한강을 통해 서울로 옮기기 위해 파려했다는 경인운하와 관계가 있다. 김안로는 당시 김포 고촌 일대 한강변에서 김포. 부평 들판을 가로질러 운하를 파고 맞은편 인천 앞바다에서도 지금의 백운역 방향으로 파왔다. 그러나 이 고개가 있는 곳에서 단단한 바위에 막혀 결국 공사를 끝내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청천의 상류인 서구의 안하지고개 쪽과 만수동 무너미고개 쪽으로도 이를 시도했는데 역시 모두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에 끝내 대업을 이루지 못한 그가 “이 고개가 아니면 물길을 낼 수 있을텐데 원통하다.”며 탄식을 했다고 해서 원통이고개라 불리게 됐다는 얘기다. 이 같은 경인 운하 계획은 고려시대 최충헌의 아들인 최이가 먼저 계횓했고, 김안로 이후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김자점도 시도했던 것으로 전해온다.
또 다른 전설은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얘기다. 태조가 조선을 세운 뒤 무학에게 새 도읍지를 세울 만한 땅을 알아보게 했다. 이에 무학이 전국을 돌아보다가 부평까지 와보니 벌판은 기름지고, 멀리 한강까지 끼고 있어 가히 한 나라의 도읍지가 될 만했다. 이에 예로부터 “한 나라의 도읍지가 되려면 주변에 골짜기가 100개는 돼야한다.”는 이야기를 생각하고 주변의 골짜기를 모두 세어봤더니 과연 딱 100개가 됐다. 이에 신이 난 무학대사가 이성계와 함께 와서 다시 세어봤는데 어찌 된 이유인지 아무리 세어도 99개 밖에 되지 않았다. 이에 무학이 이 고개 위에서 ‘골짜기 하나가 모자란 것을 원통해 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는 전설이다. 또는 같은 이야기로 “무학대사가 ‘한 나라의 도읍지가 되려면 주변에 봉우리가 100개는 돼야 한다’ 는 옛 말에 따라 처음에 세어봤을 때는 100개가 됐는데, 나중에 이성계와 함께 와서 세어봤을 때는 작은 봉우리 하나가 큰 봉우리에 가려 99개 밖에 안됐기 때문에 100개가 안 되는 것인 줄 알고 원통해 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재미는 있지만 선뜻 믿기는 어려운 얘기들이다. 그나마 김안로에 얽힌 이야기와 관련해서는 정사인 조선왕조실록 정조 21년 8월조에 이런 기록이 남아있다. “정조가 좌의정 채제공을 불러 말하기를 ‘장릉은 계양산으로 안산으로 하고 비단 병풍처럼 둘러싸여 지세가 매우 좋다......(중략)... 옛날에 듣건데 김안로는 주소를 40리까지 통하게 하여 원통현에 이르러 그쳤다 하는데, 이곳은 만년토록 감싸 호위하는 땅이니 어찌 인력으로 파고 깨뜨릴 여지가 있겠는가’ 하였다.” 정조의 말도 그 표현을 보면 김안로가 수로를 팠다는 것은 전해들은 이야기라는 것이니 실제 그랬다는 것인지 분명한 내용은 아니다. 또 무학대사에 얽힌 이야기도 야사일지언정 그가 도읍지가 될 만한 곳을 알아보기 위해 한양 일대를 누비고 다녔고, 이 때문에 왕십리 등의 땅이름이 생겼다는 이야기는 있어도 부평 일대를 다녀갔다는 기록은 없는 듯 하다. 하지만 이 같은 전설들을 빼놓고는 원통이고개라는 특이한 이름의 유래를 설명할 다른 자료가 없으니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없는 형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