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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의 시대에 착한 말만 하는 사람은 의심스럽다." 한 정치인의 말이 눈에 띈다. 물론 험한 말을 한다고 상황이 크게 달라지진 않는다. 그러나 고통받고 아파하는 시대에 올바른 가치관을 갖고 사는 것 자체가 일종의 순교다. 착한 말만 할 수는 없는.
2
하나님에 대해 우리는 많은 걸 잘 모르는 상태로 이 세상을 산다. 그분에 대해 다 모른다는 것과 내가 모르는 걸로 그분이 없다고 여기는 건 다르다. 내가 몰라도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늘 그 자리에 계신데 내가 자꾸 바뀌어 그분이 안 계신 듯 느껴진다.
3
하나님은 그분을 만날 수 있는 자리에 내가 있을 때 만나지는 분이다. 그 자리는 상하고 통회하며 가난한 마음으로 남는 자리다. 많은 사람들이 힘들다고는 하지만 아직 거기에까진 안 가 있다. 다른 것으로 채워져 있거나 채우려 하기에 그분을 못 느낀다.
4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새롭게 깨달아간다. 그분은 도저히 측량치 못할 분이다. 그래서 내게 알려주신 말씀의 분량만큼이라도 순종하는 삶이 얼마나 귀한 가치를 지녔는지 실감한다. 무한하신 하나님이 유한한 내게 맞게 무한한 가치를 좇게 하시는 통로가 성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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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너무도 놀랍고 위대하신 분인데 내게 요구하시는 건 친밀한 관계와 거룩한 삶이다. 뭔가 더 거창한 걸 요구하실 법도 한데 이것뿐이다. 그렇다면 이 요구의 실체에 세상의 그 무엇보다 귀중한 가치가 깃들어 있을 법하다. 나는 그 가치를 다 몰라도.
6
하나님은 호락호락하시지 않다. 내 뜻대로 안 해주신다고 함부로 무시할 수 있는 분도 아니다. 그래서 믿음이 하나님을 만나는 중요한 방식이 된다. 그의 선하심을 절대적으로 믿고 불평없이 말씀이 이끄는 길을 가야 한다. 그것이 믿음이 요구하는 핵심가치다.
7
하나님이 정말 무한하신 분이라면 그분을 함부로 대적하지 않는 게 좋다. 피조물은 하나님을 다 담을 수 없다. 오히려 내가 아무것도 아닌 만큼 무한하신 그분을 더 잘 이해하는 자리에 선다. 우주의 한 점에 불과한 나를 보며 내가 얼마나 교만한지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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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하지 않으면 창조주일 수 없다. 눈송이는 사람 얼굴이 다르듯 다 다르다. 피조물의 다양한 본질에 하나님의 무한성이 반영되어 있다. 무한하지 않으면 이토록 속속들이 정교하고 다양할 수 없다. 이걸 우연으로 돌리려 하면 무한히 소모적인 방황에 빠진다.
9
하나님은 자신의 무한광대하심만큼 인간의 영혼에도 무한한 무언가를 심으셨다. 핀트가 안 맞으면 무한한 방황이 일어난다. 사실 가족의 가치도 무한하고 사람이나 사람 서로간의 관계의 가치도 무한하다. 무한한 가치를 있는 그대로 보는 눈의 가치도 무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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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적인 신학과 신앙으로 지식을 뽐내는 사람들은 어린아이 같아야 한다는 예수님 말씀도 업신여긴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속은 평토장한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 하나님은 너무도 크시기 때문에 사람은 아주 작고 순진한 어린아이 같아야만 주파수가 맞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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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 보이려고..."(마 6:1). 삶에 여유가 없어지는 건 하나님보다 사람에게 보이려는 삶을 살아서다. 주께는 언제든 보일 수 있는데 사람은 빨리 지나간다. 그들의 시야를 붙잡으려니 여유가 없다. 하나님만 봐주시면 된다는 마음이 진짜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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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보다 더 쉬운 경건훈련도 없다. 자족하는 마음만 있으면 언제든 즉각 감사할 수 있다. 그렇게 감사를 표현하면 믿음이 커진다. 인상쓰고 있어봐야 도움될 게 없다. 인상 찌푸리거나 불평할 시간에 한 번이라도 더 감사하면 분명히 한 걸음 더 전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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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에 두 번 세무서에 가서 세금을 신고하는데 갈 때마다 빈 네모 칸과 세무용어들이 새롭다. 도우미가 오가며 안 도와주면 혼자는 감당 못할 연례 시험거리다. 전자계산기가 있는데도 숫자들의 대양 한가운데 둥둥 떠다니는 듯한 느낌... 여전히 막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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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척교회를 섬기며 가장 고마운 사람이 아내다. 아내는 내가 목회자가 아닐 때 나와 결혼했다. 목회자의 아내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면서도 보이지 않게 1인 2역의 사역들을 잘 감당해준다. 나서는 체질이 못 되는 아내의 조용한 내조가 늘 큰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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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한테 칭찬 듣기가 제일 힘들다. 아내한테 칭찬 듣는 게 하나님께 칭찬 듣는 거라 믿고 사는데 점수가 그리 안 높다. 때로 '아내도 불완전한 사람이니까' 하고 기준을 달리 해보지만 뭔가 개운치 않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아내를 통해 뭔가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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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에 대해 어떤 생각만 하면 늘 가슴 찡해온다. 그 중 하나는 온 우주의 부요한 주인이시면서도 그 마음은 가난하고 겸손하시다고 느낄 때다. 천국의 그분 보좌 앞에 엎드려 아무리 경배하고 또 경배해도 부족하고 아쉬울 내 사모함의 주된 제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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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 낮은 땅에 역사적 존재로 오신 적이 없다면 나는 지금처럼 그분을 사랑하진 못할 것 같다. 마굿간에서 태어나 외지고 궁벽한 나사렛 촌동네에서 천민으로 사신 평범한 목수. 가장 처참한 십자가형으로 짐승처럼 죽은 사형수. 그가 내 하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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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거 사건이 이상하고 낯설게 느껴지면 사탄의 큰 미혹에 빠져서거나 너무 세상만 쳐다보고 살아와서거나다. 지금 사탄이 교회의 영혼들을 노략질하려고 어떤 장난을 꾸미는지 잘 관찰해야 한다. 휴거나 종말에 대해 부끄러워하는 자를 주님이 부끄러워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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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구원이 영원한 구원이라 믿는다면 장차 나올 짐승의 표도 반드시 상징이어야 한다. 그 표를 받으면 구원을 잃는다는 성경을 정면 거부해야 한다. 이 거대한 신학적 카르텔의 사슬이 행함 있는 믿음의 중요성을 성경이 그토록 강조해도 못 들은 척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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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대주의 신학을 안 좋아한다. 다만 성경을 보니 이스라엘 회복이나 환란 전 휴거설의 근거가 풍부했다. 세대주의도 미국에선 탄탄한 복음주의 신학의 한 지류여서 그 공과가 정당히 평가된다. 상징 일색의 종말론에 균형을 잡아준 공로는 인정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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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금 보유량은 미국이 1위로 8,133.5톤, 독일이 2위로 3,391.3톤, 한국은 32위로 104.4톤이라고 한다. 이땅에선 금이 이렇게 희귀한데 천국에선 땅바닥이 금이다. 세상에서 귀히 여기는 게 천국에선 흙이다. 얼마나 통쾌한 일침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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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육적인 사람들은 더 육적으로, 영적인 사람들은 더 영적으로 되어갈 듯싶다. 육적이든 영적이든 아무도 그들을 못 말린다. 교회 안에서 세상맛을 본 자들도 못 말리고 세상에서 주님맛을 본 자들도 못 말린다. 두 쪽 다 그 길에 가속도가 붙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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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일어난 적그리스도들은 진짜 적그리스도의 모형이다. 그들은 온 세계를 하나의 정부와 경제, 종교로 묶은 적은 없다. 성경은 최후의 적그리스도가 온 세상을 짐승의 표로 통제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 표가 상징이라면 과거의 적그리스도들도 다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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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시대에 느부갓네살이 자신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는 자들을 죽였다. 네로가 그리스도인들을 죽이고, 히틀러가 나치 표시 대신 유대인 표시를 한 이스라엘 백성을 죽였다. 휴거 사건 이후 적그리스도 역시 짐승의 표를 거부하는 기독교인들을 죽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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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거는 성경이 명시하는 마지막때의 중대 사안이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이 진리에 대한 정당한 논의 과정도 없이 처음부터 항복해버렸다. 적그리스도는 이제 무주공산에 깃발만 꽂으면 된다. 신학으로 성경을 무시하면 나중에 후회해도 하나님께는 책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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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역사의식은 종말론이 큰 틀이다. 그런데 보조자료인 인문학적 역사의식을 중시하는 자들은 그 눈으로 기독교의 종말을 비기적적, 이성적인 종말론으로 적당히 희석시킨다. 그 결과는 현재의 세계사에 대해 세상이 겪는 것과 똑같은 무지와 답없는 혼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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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에 대한 욕심이나 지나친 지성주의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방해한다면 경계하고 절제해야 한다. 진정한 진리의 삶을 곡해하면서도 여전히 진리를 위한다고 오해하기 쉽다. 하나님과 영적으로 깊이 교제하지 못하면 지식과 철학의 매력이 더 끌리고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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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적으로 생각해보라. 성경을 통틀어 가장 중시되는 주님의 재림 사건을 하나님께서 상징으로 어렴풋하게 처리하셨겠는가. 마지막때의 역사는 창세기부터 성경 전체에 걸쳐 뚜렷하게 반복 제시되어 있다. 손에 쥐어준 종말의 지도가 특정 신학 탓에 행방불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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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자들 가운데 진리보다 자기 이미지 관리를 더 중시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은혜를 말하고 진리를 말하지만 그것조차 성도 각자의 생명보다는 자신의 실력을 드러내는 데 더 큰 목적이 있다. 세상이 좋아하고 높이는 것을 똑같이 높이는 것도 우상숭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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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탈출할 때 하나님께서 쏟아부으신 10대 재앙이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재앙들과 거의 일치한다. 세상을 사탄의 권세로부터 건져오는 값은 재앙으로 치른다. 계시록의 재앙들이 상징이라면 출애굽시의 재앙들을 상징이라 우겨도 할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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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교회들 가운데서도 보수적으로 전천년설 신앙을 갖고 마지막때에 깨어 있으려던 교회들이 차츰 무천년설로 전향하고 있다. 정확한 나침반보다 약간 애매모호한 것이 더 고상해 보였나보다. 종말론은 집단적으로 교단을 따르기보다 개인적으로 성경을 따라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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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은 있는 그대로 보면 해석의 큰 흐름을 잡기가 안 까다롭다. 이 책에 구약과 복음서, 바울 서신이 들어 있다. 그러나 무천년설을 기반으로 해석하면 아주 심오해 보이지만 장차 현실에서 경험해야만 풀려질 해석도 너무 일찍 원리적으로 화석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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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는 모든 시대에 존재해온 일곱 교회의 유형인 동시에 교회 시대의 순서를 보여준다. 지금도 일곱 교회 유형이 다 있지만 시대적으로는 마지막때의 라오디게아교회 시대다. 교회가 부요하단 말을 듣지만 실상은 헐벗고 가난하고 눈먼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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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도 여느 성경 책들처럼 교회사 전체를 통해 적용될 수 있는 일반적 원리를 가르친다. 그러나 동시에 일곱 교회 시대 이후 마지막때의 큰 환란기와 특별한 심판에 대해서도 보여준다. 상징적 해석과 문자적 해석을 병용하면 이 사실은 더욱 분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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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을 마지막때의 지도라고 보면 통속적이라 하고, 모든 시대 교회의 상황을 다룬다고 보면 학문적이라 한다. 그러나 일반 교회와 성도는 전자에 더 친숙하다.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은 이미 알릴 것은 다 알리셨고 사람들도 알 건 다 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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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거의 때가 가깝다는 지식이나 정보를 아는 것은 주의 재림을 준비하는 삶의 기본일 뿐이다. 늘 주의 임재와 동행 가운데 그와 친밀하게 교제하며 일상의 삶에 충실한 것이 진짜 준비다. 예수님이 100년 후에나 올 것처럼 일하되 내일 올 것처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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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말씀 자체보다 사람의 교리에 안주한다면 실은 위험지대에 깊이 빠져 있는 것이다. 갑작스런 휴거나 행함 있는 믿음에 대한 말씀들은 성경에 여러 차례 강조되어 있다. 모두 일이 터지고 나서야 뒤늦게 알게 될 진리다. 신학적 회심도 타이밍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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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가 평소에 성도들에게 만에 하나라도 가능성이 있다며 갑작스런 휴거에 대비하라고 일러놓는다면 설령 일이 터진다 해도 후환이 없다. 당사자 각자의 책임으로 돌려지니까. 그러나 침묵으로 일관하면 훗날 모든 책임을 자신 한 사람이 다 져야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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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거는 휴거되지 못한 자들을 위한 마지막 구원의 기회라는 말은 진실이다. 한 번의 최후 재림만으로 모든 게 끝난다면 구원에 대해 깨어날 길이 없다. 휴거는 모든 믿지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과 역사, 참된 믿음에 대해 일깨워줄 최후의 나팔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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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의 사람들이 가지 않으려 하는 좁은 길을 끝까지 가기로 결심하는 것을 하나님은 아무것도 아닌 걸로 보시지 않는다. 인간적으로는 그 길이 너무 외롭지만 진리 안에서 받아 누리는 주의 친근한 위로와 사랑은 그 무엇보다 끈끈하다. 그거 하나면 다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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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거에 대해 말하면 화를 내는 사람들이 있다. 주님을 빨리는 만나기 싫은 사람들이다. 열애중인 남녀가 서로 보고 싶어하듯 그렇게는 주님이 아쉽지 않은 사람들이다. 세상살이에, 신학에, 사역에 너무 닳고닳아서 가장 중요한 기본을 놓치고 사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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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우들끼리 경쟁 아닌 협력관계로", "출세보다 세상을 위해 공부한다." EBS 다큐 '학교란 무엇인가'를 가족과 함께 보고 난 후 마음에 남는 말들이다. 굳이 기독교학교가 아니어도 깨어 있는 세상은 때로 더 기독교적일 수 있다는 것도 하나님 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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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러아ㅏ난토ㅜㅇㅇ의아우어아아..." 아무렇게나 자판을 막 쳤더니 이런 글 아닌 글이 나왔다. 도로에 수없이 지나다니는 차들의 운전석에 사람이 없다면 도로 역시 순식간에 이런 난장판이 되고 만다. 정교한 우주만물의 질서와 운행은 더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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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란 전 휴거의 소망이 섣불리 도피주의로 매도될 순 없다. 주님이 언제라도 오실 수 있다는 믿음이 날마다 맞는 현실의 삶에 오히려 더욱 빈틈없이 충실케 한다. 이 소망의 방향이 잘못 잡히면 시한부종말론으로 가는데, 진위를 혼동시키려는 사탄의 장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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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역사, 심지어 오늘 나의 하루의 역사까지도 예수님의 재림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런데 땅만 쳐다보는 기독교인들은 땅에서 이룰 목적밖에 못 본다. 끝의 구심점이 없다. 초림 때 예수님을 못 알아본 종교인들은 재림 때에도 여전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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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내용은 다 사실이다. 명백한 상징조차 명백한 사실을 말하기 위해 존재한다. 천국과 지옥의 존재 역시 에누리없이 그대로 다 사실이다. 여기까지를 모두 사실로 만나면 구원의 유일한 통로인 예수님의 보혈도 더 이상 종교적 교리가 아닌 사실로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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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저 종교 경전 속의 어록이 아니다. 특정 시간에 특정 대상에게 실제로 공기를 가르며 전하신 말씀이다. 그것이 보편적인 구전으로 교회 안에 널리 가르쳐지다가 문자로 기록된 것이다. 기록되기 전에 더 생생히 살아 있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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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탈무드를 중심으로 암송을 중시한 고대 유대 문화에서 구전은 기록보다 더 정교하고 정확했다. 복음이 이방으로 전해지면서 기록된 문서를 중시한 헬라 문화에 적응시킨 전도매체가 복음서다. 그러나 복음서 이전에 교회 안에는 이미 완벽한 복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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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존재나 사건을 신화로 만들려면 적어도 100년은 걸린다. 그러나 예수님 사건은 아주 짧은 시간에 수많은 목격자들에 의해 역사적 사실로 굳어졌고, 그를 죽인 자들이 살아 있을 때 공식 문서화되었다. "너희는 의인을 정죄하고 죽였으나"(약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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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사건에 대한 증인인 사도들의 공개적 전승은 구약성경을 기초삼았다. 모세 같은 선지자 예수님이 나실 때 모세가 날 때처럼 아기들이 죽임당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구약 십계명을 받았듯 예수님도 산에 올라 신약 산상수훈을 선포했다. 예수님은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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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 어..." 돌아보니 주의 일은 이 세 마디 하는 사이에 이뤄져왔다. 주님이 앞서시고 나는 기도하며 뒤를 따라간 것밖에 없다. 때로 내가 무언가를 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기도에 깨어 있지 못한 때에 잠깐 드는 어리숙한 치기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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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할 수 없는 것에 욕심내지 말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더 잘 해야 한다. 서로 남의 것에 욕심내면 자기 것을 더 잘 할 수 있는 기회만 자꾸 놓친다. 주님은 우리 각자를 은사따라 다르게 부르셨다. 거기에 순응하는 삶이 가장 잘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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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표준을 최대한 높게 잡아야 한다. '다들 그렇게 사는데 뭐' 하는 마음은 성화에 치명적 독소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은혜를 강조하는 교인들은 대체로 이런 애매한 태도가 다분하다. 늘상 죄에 잘 걸려 넘어지는 게 은혜인 양 둘러대는 건 패배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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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스스로 구입한 질병..." 버스 측면에 나붙은 한 금연 광고의 카피다. 질병은 피치 못해 걸리는 건데 스스로 구입한다면 200% 손해다. 알면서도 계속 죄짓는 데 미련을 둔다면 죄를 돈 주고 사는 것과 같다. 죄를 못 버린단 말은 거짓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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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를 걸을 때 행인들의 얼굴을 가볍게 슬쩍 관찰하는 편이다. 지금까지 본 바로는 예측 가능하지 않은 얼굴이 없었다. 그러려니 하는 얼굴인데 각기 특색있는 얼굴이다. 만약 그 얼굴들을 한 분이 안 만드셨다면 얼굴 분위기도 무질서 그 자체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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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세상에 주의 심판을 담대히 못 외치는 시대가 됐다. 반사회적이란 비난을 들을까봐 다가올 종말의 큰 환란에 대해서도 유구무언이다. 스스로 초월적이길 거부하고 윤리적이기만을 자처한 이빨 빠진 호랑이, 높은 하늘이 두려운 겁 많은 독수리로 전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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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과 늘 동행하면 작은 죄도 그때그때 물리쳐진다. 곧바로 역반응이 튀어나온다. 정말 1초도 안 걸린다. 보통의 순발력으로는 쉽게 기대치 못할 거의 초자연적인 반응이다. 죄는 묵상하고 궁리하면 반드시 엮이지만 성령님이 단속해주시면 즉시 무장해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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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 대한 진실한 사랑이 세상에서 좋다 하는 모든 걸 초월케 하는 유일한 동기가 되길 원한다. 마음 속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비교가 된다. 그게 좋으냐,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에 주어지는 기쁨이 좋으냐? 세상을 이기는 전천후 버팀목은 후자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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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교회 안에 교회가 있는 시대라고들 한다. 주님이 남은 자들, 이긴 자들을 찾아 구별하시는 때다. 종말이나 재림에 대해 말하지 않는 교회에서도 종말적으로 사는 이들이 있다. 지극히 일상적인 데 충실하되 초점은 늘 재림하실 주님께만 두는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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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함은 주께 속하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시 6:12). 비합법적인 용서가 아닌 정당한 심판이 하나님의 인자함이다. 과잉징벌하지 않고 행한 대로 갚는 것이 인자다. 지옥이 하나님의 인자라면 천국 또한 그분의 충분한 공의다.
61
"사진만 잘 나왔다. 이상하다." 야외에서 가족 사진들을 찍을 때 아내가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다. 사진이 정상인지 여부는 자신의 얼굴이 잘 나왔나로 결정된다. 아무리 사진 자체가 선명하게 잘 빠져도 소용없다. 나도 예외가 아니라서 별 말 못한다.
62
세상에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서로 연결되는 사람만 연결된다. 아는 사람도 서로 약속을 해야 만난다. 밖에서 지인을 우연히 만날 확률은 거의 제로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만날 약속을 안 하거나 하고도 안 지키면 하나님을 우연히 만나며 사는 사람이다.
63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모든 상황에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생각할 때 두루 적용해볼 만한 잣대다. 이 말을 놓치면 이것도 저것도 다 중요해보여서 예수님을 놓친다. 반드시 하나는 더 중요하고 다른 하나는 덜 중요한데 예수님은 전자에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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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이전에 교회 다니다가 떠난 이들이 너무 많은 때다. 이들은 전통적인 접근방법으로는 못 되돌린다. 복음을 새롭게 제시하거나 교회가 철저히 복음 중심으로 되돌아가야 가능하다. 복음에 연민을 가진 자들이 적대감을 가진 자들보다 더 다가가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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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이 하루라도 끊긴다면 어떻게 될까. 이미 세상은 글로벌 네트워킹에 촘촘히 얽혀 있고 사람들의 삶은 거기에 더 의존적이다. 사이버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만큼 내 삶도 무방비 상태다. 누구도 넘보지 못할 오프라인의 삶을 더 많이 확보해야 진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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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삶을 최대한 단순화하지 않으면 마냥 급류에 휩쓸린다. 그 급류를 조절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단순히 거기서 빠져나오는 길뿐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것만이 삶의 급류에서 나를 지켜준다. 먼저 안 구하면 끝내 거기서 못 헤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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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물이 많거나 이땅에서 누릴 게 많은 사람은 천국을 사모하기 어렵다. 가난한 자도 현실의 짐에 매여 천국을 소망하지 못하기 쉽다. 천국은 사모하는 자의 것이다. 부자나 빈자나 재물의 유무만으로는 천국 입성에 차별받지 않는다. 진정한 사모함이 관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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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많은 이땅에서 영원한 천국으로 들이실 자를 하나님은 매우 귀하게 보신다. 그는 예수님을 따라 왕의 보좌에 함께 앉을 자다(계 3:21). 비록 작아도 왕의 위엄을 갖고 이땅을 살아야 한다. 분명한 신분의식이 흔들리지 않는 성화에 큰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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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근한 신자들이 열성 있는 신자들을 박해할 때 더 효과적인 교회 타락이 이뤄진다." 대천덕 신부의 말이다. "적당히 좀 하지", "뭐가 그리 유별나?" 방향이 말씀과 주님께 정확히 향해 있는데도 주위에서 이런 말을 듣는다면 그것은 참신자인 증거다.
-안환균 목사의 트위터, 페이스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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