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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네 마트에 가서 우유를 살 때 유통기한이 하루라도 더 긴 우유를 사는 방법을 아내가 가르쳐줬다. 앞쪽에 진열된 우유를 슬금슬금 제치고 뒤에 꼭꼭 숨어 있는 우유를 뒤지다보면 쉽게 잡아낸단다. 지금까지 이 유통법을 제맘대로 어기는 우유를 못 봤다.
2
평소에 많이 걷든지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는 운동을 하면 잠을 많이 못 자도 별로 안 피곤하다. 피곤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이들은 대체로 몸을 움직이길 싫어한다. 몸이 약해지면 영적으로도 약해지고 경건훈련을 쌓는 데도 마귀의 공격에 더 취약해진다.
3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살후 2:10). 하나님의 사랑만 강조하면 충분하다며 굳이 지옥에 대해 언급하지 말라는 이들이 많다. 하나님의 사랑은 진리의 사랑이지 그저 마음씨 좋은 이웃집 아저씨의 사랑이 아니다.
4
"후에는 내가 그들을 모아 고국 땅으로 돌아오게 하고 그 한 사람도 이방에 남기지 아니하리니"(겔 39:28). 지금은 혈통적으로 순수한 유대인이 없어 이스라엘 회복이 무의미하다는 무천년설자들이 많다. 하나님만 아실 유대인의 기준을 못 미더워해서다.
5
마지막때에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해 어두운 신학자나 목회자는 가장 중요한 종말의 이정표에도 어둡다. 그들의 신학이 아무리 정교해도 종말의 역사를 감지할 방향감각을 잃고 만다. 사람들에게 미래에 대해 막연한 낙관적 전망이나 윤리적 지침만 전달해줄 뿐이다.
6
"주님은 얼마나 크십니까? 얼마나 위대하십니까? 그럼에도 이토록 선하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기도할 때 나를 가장 크게 감동시키는 것은 주의 한없는 선하심이다. 나에게 주의 선하심을 알아보고 그 은택에 감사할 수 있게 해주신 것보다 더 큰 복이 없다.
7
말씀묵상으로 날마다 말씀이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데 깨어 있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때마다 주시는 응답을 못 알아본다. 하나님이 멀리 느껴지는 이유는 내가 말씀을 멀리 두고 살아서다. 말씀이 내 안에 충만한 만큼 일상에서 더 분명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8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모든 일에는 큰 일도 있지만 작은 일도 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는 훈련은 작은 일들에 대해서도 주께 아뢰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9
작은 일들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믿음으로 간구한 것이 많은 사람은 응답도 많다. 그는 작은 일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느껴 믿음이 계속 자란다. 그러나 간구한 것이 적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일이 다 자기가 스스로 해낸 일이어서 믿음도 적다.
10
복 있는 사람은 말씀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한다(시 1:1-2). 아침 한때의 묵상보다 더 중요한 건 그 묵상한 말씀을 하루 종일 기억하며 사는 것이다. 아침 묵상이 좀 부족해도 말씀을 기뻐하여 종일토록 간절히 마음에 품으면 묵상이 절로 풍성해진다.
11
말씀을 주야로, 곧 하루 종일 묵상하라는 건 묵상은 실력으로 하지 않고 마음으로, 삶의 자세로 한다는 뜻이다. 묵상에서 말씀을 기뻐하는 삶의 태도보다 성경 실력이나 삶에 대한 통찰력이 더 중시되면 말씀이 삶으로 들어가기보다 말씀에 대한 말로만 남는다.
12
사람은 떡으로만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마 4:4). 떡만 바라고 살면 어제나 오늘이나 똑같다. 신자의 오늘이 어제와 같지 않은 건 그가 아침마다 새로운 말씀을 공급받아서다. 말씀이 없는 하루하루를 살면서도 잘 사는 것 같으면 신자가 아니다.
13
하나님께서 어떤 종은 이렇게, 어떤 종은 저렇게 사용하신다. 각각의 특성과 목적에 따라 교회도 마찬가지로 다양하게 쓰임받는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의 가치와 관점만으로 쉽게 자기 외의 다른 대상들을 비판하길 좋아한다. 하나님의 눈과 마음이 더 필요하다.
14
내 삶에 뭔가 필요한 게 있으면 일단 하나님께 다 아뢰고 봐야 한다. 괜히 하나님의 바쁜 사정 봐드리느라 뒤로 미룰 이유가 없다. 하나님은 내 사정을 세상에 호소하기 이전에 하나님께 호소해오길 원하신다. 그렇게 아뢰는 것 자체를 큰 믿음으로 여기신다.
15
"세상에게 당신은 한 사람뿐일지는 몰라도 한 사람에게 당신은 세상일 수도 있습니다." 새로 이사한 사무실의 화장실에 이런 글이 붙어 있어 순간 잠언에 있는 말씀인가 했다. 내 주위의 아주 작은 한 사람에게 나는 정말 세상이고 내게도 그가 한 세상이다.
16
법을 어긴 대통령과 정치인들을 법대로 심판하는 일에 왜 진영 논리가 필요한가. 어떤 한 진영의 논리가 적용되면 그것이 정의가 되고 면죄부가 될 수 있다는 논리는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인가. 법을 적용하는 일마저 진영 논리로 좌우되는 현실이 답답하다.
17
이스라엘과 아랍의 관계를 인본주의적으로만 보면 하나님의 섭리가 안 보인다. 그처럼 좌우 진영이 한국의 정치를 인본주의적으로만 보면 끝까지 싸울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를 알고 믿는 신자들마저 좌우로 나뉘어 서로 물고 뜯는 모습은 그야말로 불신앙적이다.
18
하나님께는 진리를 다 드러내시는 게 중요하다. 세종대왕이 구원받았는지 여부를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모든 시대 사람들의 구원의 초석인 십자가의 복음이 이땅에서 다 한 번은 증거되는 게 중요했고, 거의 다 증거되어가는 지금이 마지막때다(마 24:14).
19
우연은 전적으로 아무런 실체도 힘도 없다. 어떤 효력이나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한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진화론자들은 우연에 의해서 만물이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0 더하기 0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끝까지 0이지 1이나 2가 못 된다.
20
성경에 기록된 사실들을 딴 세상 이야기쯤으로 여기는 이들이 많다. 천사가 등장하고 기적, 천국과 지옥, 종말의 묵시 같은 것들이 낯설다. 그러나 세상과 사람의 존재 자체가 기적이고 과분한 은혜다. 이걸 무시하면 성경은 내 삶속에 깊이 스며들지 못한다.
21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더 잘 드러내고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을까. 내가 늘 촉각을 곤두세우는 관심사다. 하나님이 이 일을 좋아하셔서 얼마든 잘 도와주실 것 같은데 쉽지 않은 난관과 힘든 일이 많다. 내 일이 아닌데도 내가 할 일을 대신해주시진 않는다.
22
신자들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로만 성경의 적용을 제한하기 시작하면,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을 언급하기도 머쓱해져서 나중에 자기 이야기만 한다. 하나님은 스탭이 되시거나 나레이터 정도의 역할로 축소되고 자신이 드라마의 당당한 주인공이 되어 살아간다.
23
하나님께서 내가 이땅에 사는 동안 나의 부족함과 형편없음을 드러내실 때,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 존재인지를 알게 해주실 때 진심으로 감사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내게 진짜 복을 주시고 세상이 모르는 평안을 주시려 한다는 아주 중요한 전조다.
24
지옥에는 사람이 견딜 만한 괜찮은 형벌이 없다. 지렁이와 구더기와 뱀이 사람을 물어뜯는다 해도 누구도 하나님이 이런 형벌을 사람에게 내리면 안 된다고 말 못한다. 하나님이 티끌 만한 죄 하나도 얼마나 미워하시는지 모르면 지옥도 끝까지 이해되지 않는다.
25
몸이 불에 타면 검게 그을려서 나중에는 몸이 없어져야 견딜 만하다. 그러나 지옥에서는 영원히 거듭 화형을 당하면서도 죽진 않는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불가사의한데 사람이 지옥에서 참혹한 형벌을 받을 때조차 그 진노의 무게를 다 감당하진 못한다.
26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실은 죽는 것보다 영원히 안 죽는 것이 영원히 가장 큰 문제다. 지옥의 고통은 지금처럼 상처받고 흠집나기 쉬운 연약한 사람의 몸으로는 못 견딘다. 그래서 죄인도 영생불사하는 부활의 몸을 새로 받고는 영원한 불못에 던져진다.
27
주일학교 아이들에게도 어릴 적부터 지옥과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걸 철저히 가르쳐야 한다. 좋은 프로그램이 아무리 많아도 이걸 놓치면 요즘 같은 세속주의 문화 한가운데서 나중에 신앙을 떠나버리기 일쑤다. 교회가 지옥을 버리면 사람들이 신앙을 버린다.
28
사람은 언제 죽을지 모른다. 늘 만반의 태세로 내세를 준비시키지 않고 땅의 일들에만 관심쏟게 하는 지도자들을 조심해야 한다. 그들은 주의 진짜 관심사보다 자기 관심사에 더 매력을 느낀다. 그래서 자신과 타인의 영혼을 열심히 도둑질하는 줄도 잘 모른다.
29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 4:2). 기도에 항상 힘쓰라는 단순한 명령을 제껴놓고는 온 세상사를 혼자 다 짊어진 듯 고민하는 이들이 많다. 기도 안 하면 세상에서 감사할 이유를 못 찾는다. 기도하면 감사에도 깨어 있게 된다.
30
감사의 반대는 원망과 불평이다. 많은 신자들이 자기 성향을 따라 원망하고 불평하는 일을 당연하게 여긴다. 감사는 반드시 마땅히 원망하고 불평해야 할 때 해야 효력이 있다. 범사에 감사하지 못하면 범사에 내가 여전히 육신을 따라 사는 줄 알면 정확하다.
31
예수님의 품에 내 등을 기댄 채 별빛이 너무 아름다운 우주 공간을 날아다녔다. 앞으로 내민 주의 손등을 만지고 목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깼는데 나를 뒤로 안으신 느낌이 그대로 너무 생생해서 깜짝 놀랐다. "내가 늘 이렇게 널 안고 있다"는 말씀 같았다.
32
"불교를 좋아하는 천주교 신자로 사돈이 목사." 한 대선 후보가 무슨 일인지 어디엔가 공개한 이력서의 종교 난에 이렇게 썼다고 한다. 자신의 종교를 밝히면서까지 정치적일 필요가 있을까. 정치 과잉의 시대는 개인의 신앙도 두루두루 가볍게 정치화시킨다.
33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눅 9:48). 스스로 크기를 원치 않는 자만이 가장 작을 수 있다. 가장 작기는 사실 얼마나 쉬운가. 다 앞다투어 크려고만 하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로 끝까지 남을 수 있는 거야말로 큰 실력이다.
34
자신의 작음에 감사하는 자가 큰 자다. 작거나 크거나 범사에 감사하는 자가 큰 자다. 크고자 하면 이미 주신 것에 감사할 겨를이 없다. 더 많이 가져야 더 커지는 줄 알면 늘 불안하고 자기 욕심으로 만족이 없다. 마음이 가난한 자만 감사할 줄 안다.
35
요즘은 공무원이 신의 직장이라고들 한다. 월급은 안 많아도 근무 시간 분명하고, 확실한 연금으로 노후도 보장된다고 한다. 그런데 천국에선 모든 이웃사랑의 직업이 다 신의 직장이다. 천국은 일과 휴식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노후가 아예 따로 없는 곳이다.
36
각기 다른 한 사람 한 사람을 상대로 목회한다는 것은 결코 만만치 않다. 한 사람을 그저 대중의 한 사람으로 보느냐, 우주만큼 복잡한 각각의 한 세계로 보느냐에 따라 목회의 난이도는 천차만별이다. 천하보다 한 영혼이 귀하지 않으면 목자의 심정은 없다.
37
하나님이 우리 각자의 실력을 따라 우리를 대하신다면 그 앞에 제대로 설 자가 아무도 없다. 그의 사랑에는 분명히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측면이 있다. 그러나 신자의 입장에선 또다른 의미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심과 충심을 다해 주를 사랑해야 한다.
38
동네 단골 마트 주인에게 '당신에게 가장 좋은 소식'을 선물했다. 일전에 소설을 읽고 계신 걸 보고 문서 전도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아, 책 쓰는 분이었어요? 꼭 읽어볼게요!" 비신자인 그분에게 예수님이 일평생의 가장 좋은 소식이 되길 기도한다.
39
식당이든 어디든 명함을 받으면 그 연락처로 변증전도용 컨텐츠를 보내볼 수 있다. 카톡으로 보내보다가 받아보는 낌새가 있으면 계속 보내고 1이 안 없어지고 계속 무시한다 싶으면 안 보내면 된다. 이렇게라도 해서 한 번이라도 더 복음을 접하게 해야 한다.
40
"그것이 내가 너에게 준 마지막 기회였다." 모든 사람이 언젠가는 죽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님께 이런 말을 들을 때가 있다. 죽음을 앞둔 모든 사람은 어떤 것에 대해서든 마지막을 경험한다. 그 중에 가장 큰 마지막이 단 한 번의 기회를 놓치는 것이다.
41
한국인들에게는 늘 북한의 갑작스런 전쟁 도발에 대한 불안감이 있다. 요즘은 선제공격이 하나의 대안이라는 제안도 나오지만 그 역시 남한을 잿더미로 만들 원치 않는 결과가 동반된다. 기독교인에게만 북한의 도발보다 하나님의 심판을 더 두려워할 특권이 있다.
42
나이 들면 자기 얼굴에 책임져야 한다는 말이 있지만 더 중요한 건 죽은 직후의 얼굴이다. 많은 경우 그 얼굴에 천국과 지옥이 어려 있다. 종교 본연의 책무는 죽음 이후를 준비시키는 것인데 지금은 기독교마저 유행따라 이땅의 얼굴들에만 분칠하기 바쁘다.
43
먹는 일이 없다면 세상 일의 절반 이상이 없어진다. 먹는 일을 중시하도록 세상이 만들어진 이유는 함께 먹는 것이 영육간에 친밀한 교제의 관계성을 상징해서일 듯싶다.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44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고 그로 인해 부요한 자만이 진정한 자유함을 얻는다. 경건훈련이랍시고 유교적인 극기 훈련이나 인내 훈련을 하는 사람들은 그러는 만큼 더 크게 무너질 수 있다. 주님 한 분께 집중하면 자연스럽게 주변이 정리되는 게 진짜 경건이다.
45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에게는 믿음도 행위다. 그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눅 17:19)는 말씀이 거슬린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것(롬 1:17) 역시 행위다. 주의 주권만 인정하면 철저히 수동적인 구원론으로 사람의 책임을 영구제명시킨다.
46
구원을 천국행 티켓 따는 걸로 오해하면 신자의 삶은 그 자리에서 정체되고 만다. 이땅에서 천국의 삶을 사는 것까지가 구원인 줄 알고 그러한 삶에 근신하지 않는다. 천국을 중시하면 자연스럽게 구원의 시작과 과정과 완성 또한 중시하는 삶을 살게 된다.
47
입으로만 고백하는 믿음 갖고는 천국에 못 간다. 속죄의 사실만 믿는 믿음은 성경에서 말하는 총체적인 구원의 믿음이 될 수 없다. 주님을 속죄하신 구주로도 믿지만 주인으로 믿는 믿음도 중요하다. 속죄 신앙은 입으로 고백하고 주님 신앙은 삶으로 고백한다.
48
오직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는 건 분명하다. 그러나 그 믿음이 어떤 믿음이냐가 중요하다. 내 죄를 용서해주신 십자가에 대한 믿음과 더불어 그 십자가에서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고 부활의 새생명으로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사는 것까지에 이르는 믿음이 참된 구원의 믿음이다.
49
내 자아가 죽어야 그 자아와 함께 죄가 죽고 그 죄가 용서된다. 십자가를 통한 죄 사함의 진리를 믿는다는 것은 그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내 자아가 처리되었다는 것까지를 믿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를 부인하는 순종의 삶으로 이어져야 진짜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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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학하고 새 반이 편성되면 담임목사님이 누군지 알 수 있겠네." 봄 방학을 맞은 딸한테 담임선생님을 담임목사로 잘못 말하고는 가족들의 빈축을 샀다. 교육이 곧 목양이라는 고상한 가치관이라도 있었다면 모르는데 단순히 목사티를 낸 거라 할 말은 없었다.
51
지하철 막차를 타려고 역에서 기다리는데 젊은 역 직원 한 사람이 왔다갔다 했다. 왜 그러시냐고 물었더니 막차가 오는데 혹시 역 벤치에서 주무시는 분이 있나 확인하려고 그런단다. 그 날은 자는 사람이 없었지만 그들을 대신해서 고맙다고 진심으로 인사했다.
52
그냥 대충 교회 다니는 이들의 십중팔구는 왜 교회 다니는지 모른다. 따라서 자기 생명이 얼마나 귀한지도 모른다. 영생 얻는 것에 초점이 맞춰지지 않으면 기독교를 종교의 하나로 전락시킨다. 자기 생명이 귀한 줄 알면 영생의 가치에도 눈과 귀가 뜨인다.
53
이땅에서의 구원도 기독교의 구원에 속한다. 그러나 구원의 핵심은 죄와 지옥으로부터 건짐받는 것이다. 사람들이 듣기 싫어한다고 해서 지옥에 대해 경고하지 않는 사역자들은 주께서 강조하신 파수꾼의 사명(겔 33:6)을 저버리고 자기 뜻을 따르는 자들이다.
54
기독교 지성인이라는 사람들 중에 천국과 지옥을 강조하는 이를 별로 못 봤다. 최고의 지성이신 성자 하나님이 그토록 강조하신 진리가 고만고만한 지성인들에 의해 홀대받고 있다. 그들의 지성이 예수님처럼 완벽했다면 내세를 강조하고 심각하게 경고했을 것이다.
5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눅 8:15).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다. 듣고 지킬 뿐만 아니라 끝까지 인내로 결실해야 한다. 처음부터 예수님은 구원과 성화를 연결지어 가르치셨다.
56
말씀이 흔해진 시대의 함정은 말씀을 듣는 데만 익숙해지게 만든다는 것이다. 듣고 읽고 보는 데 시간을 쓰느라 그대로 지키고 결실하는 데 들일 시간과 에너지가 희소하다. 말씀 부족도, 말씀 과잉도 다 재앙이다. 몰라서 못하는 게 아니라 알아도 안 한다.
57
내 안에 계신 예수님과 늘 친밀하게 교제하며 살아가면 주님이 언제 재림하시든 두렵지 않다. 주님보다 재림의 징조들에 대한 관심이 더 많은 이들은 주님보다 자신의 구원을 더 중시한다. 주께 깨어 있지 않고 징조에만 깨어 있으면 여전히 깊이 잠든 것이다.
58
"하나님은 뭘 하고 살아요?" 교회에서 가장 어린 학생이 카톡으로 내게 질문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만든 창조자이시고 그것을 다스리는 왕이라고 답했다. 하나님의 직업은 장인이요 왕이다. 지금도 뱃속의 아기와 동물의 새끼를 포함해 계속 창조중이시다.
59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눅 5:20). 주의 말씀으로 죄를 용서받는 자는 성경에 나오는 죄인, 악인이 정확히 자기를 가리키는 말인 줄 아는 사람이다. 자기 죄를 모른 채 용서받을 순 없다. 죄를 모르고는 진정으로 회개할 수도 없다.
60
떡 한 부스러기라도 주워먹으려던 수로보니게 여인(막 7:28)처럼 자기 자존심을 꺾고 주님 앞에 서는 자가 복을 받는다. 비진리인 줄 알면서도 기존의 생활방식에 안주해 있는 한 은혜의 물꼬는 안 터진다.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은데도 사자만 탐한다.
61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단 12:2). 예수님 없이 육체의 생명만 가진 자들은 다 눈뜬 채 자고 있다. 영생의 기회가 주어져 있을 때 어떤 일이 있어도 무궁한 부끄러움만은 피해야 한다.
62
한시적인 이땅의 일들에만 눈을 고정시키게 만들고 영원한 천국과 지옥을 강조하지 않는 자들은 진정한 기독교인이 아니다. 그들이 말하는 복음은 세상의 윤리주의자들의 말과 비슷하다. C. S. 루이스는 내세가 중심이 될 때 현세를 더 충실하게 산다고 했다.
63
천국에는 세상사람들이 좋게 여겨 추구하는 모든 것들이 다 있다. 완전한 만족의 한계를 훨씬 넘어서는 양과 질로 다 갖춰져 있다. 세속적으로 천국을 추구하는 자들은 오히려 그 진짜 천국엔 눈멀어진다는 게 얼마나 역설적인가. 그래서 천국은 감춰진 비밀이다.
64
좋은 화가의 그림을 보거나 영화를 보거나 하다가 예수님의 십자가가 연상되면 금세 눈시울이 붉어진다. 어디서 그 이미지가 촉발되었는지는 잘 몰라도 그럴 때마다 영원히 떼놓을 수 없이 사무치는 사랑이 밀려온다. 이런 사랑은 절대로 딴 데서는 못 만난다.
65
아부처럼 들릴지 몰라도 누가 내 취미나 관심사가 뭐냐고 물어보면 예수님이라고 대답할 것 같다. 솔직히 예수님 외에는 추구하고 싶은 게 별로 생각나지 않는다. 이걸 영적 상사병이라 해도 좋다. 세상을 섬길 원심력도 이 은근한 구심력에서 뻗쳐나오는 듯싶다.
66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나가사 그 이방 나라들을 치시되 이왕의 전쟁 날에 싸운 것같이 하시리라.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쪽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슥 14:3-4). 곧 재림하실 예수님이 "내가 여호와다"라고 직접 말해도 이상할 게 없다.
67
예수님이 이미 휴거된 수많은 성도들과 함께 지상의 예루살렘에 재림하실 때 실제로 이스라엘 땅에서 진행되고 있을 아마겟돈 전쟁을 상징으로 보려는 건 치명적인 실수다. 결국 성도들이 휴거에 깨어 있지 못하게 한다. 무천년설은 종말론을 없이하는 종말론이다.
68
24시간 주님 바라보기를 비판하는 의견들이 많다. 그러나 성경은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늘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고 한다. 모든 일을 주께 하듯 주의 이름으로 하라고도 한다. '24시간'은 물리적 시간이기보다 주께 붙들린 삶의 자세요 방향이다.
69
세상에서 다양한 직업을 갖고 열심히 일하면서 주님을 바라보기는 쉽지 않다. 일에 열중하는 시간 자체가 주님을 바라보는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을 바라보는 건 물리적인 양이 아닌 질의 문제다. 그 일을 하는 동기와 목적이 주님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70
주님은 내 모든 일상에 나와 함께하길 원하신다. 연인과 함께하는 일이 부담된다면 사랑이 식었다는 증거다. 괜한 종교적 죄책감을 주려는 게 아니다. 주의 임재 가운데 연합된 삶을 사모하는 일은 신학적, 합리적 상식으로 쉽게 비판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71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미지근하다면 세상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 중립지대는 없다. 하나님은 나에게 독점적인 사랑을 원하실 자격이 있다. 그 사랑이 미약하면 회개할 일이지 세상과 하나님의 이원화나 일상과 신앙의 통합을 말할 계제가 아니다.
72
모든 일상에서 주와의 동행을 사모하는 일이야말로 신앙과 일상을 통합하는 일이자 신앙의 정체성을 올바로 세우는 일이다. 이게 어렵다고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된다"고 단정짓는 것과 연약하고 때로 넘어져도 거듭 다시 은혜를 구하며 일어서는 건 다른 태도다.
73
"뜨거운 열정보다 중요한 것은 지속적인 열정이다." 마크 주커버그의 말이다. 한 번 뜨겁고 말면 세상에서도 지속적인 열매를 못 거둔다. 신앙생활에서도 지속성은 연습과 훈련 없인 이룰 수 없는 영적 가치다. 지속적으로 주님을 생각할 때 그분을 닮아간다.
74
시대마다 성도가 받는 고난의 내용이 다르다. 예전에는 가난과 어려운 환경으로 인한 물리적 고난이 많았다면 지금은 세속주의에 타협하지 말아야 하는 정신적, 영적 고난이 많다. 때로 기존의 신학적 권력에 맞서 참된 말씀을 따르려는 데서 겪는 고난도 많다.
75
교회 안에 들어온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은 성경 말씀의 권위를 노골적으로 깎아내리고 있다. 성경 해석의 기본인 문자적 해석을 교묘히 이단시하면서 자유주의 신학이 걸어간 길을 가려 한다. 창세기의 권위가 무너지면서 노아의 홍수도 신화로 휩쓸려가기 직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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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알게 해주신 지식만큼 소박하게 작은 한 걸음씩 순종하는 데 마음쓰지 못하고 더 많은 지식에 목말라하는 자들은 오도된 지성주의의 암초에 걸린다. 그들이 지식을 추구하는 목적은 하나님께 있기보다 자기 열등감이나 무익한 변론에 매여 있기 십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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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믿은 자도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의 열매를 지속적으로 거부하면 지옥에 갈 수 있다고 분명히 경고하지 않으면 세속주의에 물든 이 시대 신자들의 잠을 못 깨운다. 은혜도 순종도 다 적당히 강조하는 자는 그저 그 잠을 더 적당히 방조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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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부족하다, 부족하다 하면서도 여전히 죄를 안 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부족함을 잘 모른 채 죄 짓는 사람들보다 죄가 더 크다. 하나님께서 부족함을 알게 해주시는 것만도 큰 은혜인데 그 은혜로 자기 뜻을 더 강화해가는 격이 되기 때문이다.
79
많은 신자들이 주의 말씀을 듣고도 자기를 바꾸려 하기보다 오히려 말씀을 바꾸려 한다. 자기를 비판하기보다 그 말씀을 전하는 자들을 비판한다. 이들은 하나님보다 자신의 구원이 더 중요하다. 하나님을 자기 구원에만 이용하고 주인으로는 안 섬길 심산이다.
80
주의 말씀을 올곧게 전하려다보면 목회현장에서도 반드시 사람의 눈치를 보는 문제와 맞닥뜨리게 된다. 그때 말씀을 후퇴시키면 그 목회와 말씀사역은 영적으로 계속 후퇴한다. 사람보다 하나님의 종 됨을 우선시하면(갈 1:10) 결국 사람을 더 잘 섬기게 된다.
81
"변증에 빠져 있는데 무슨 번듯한 목양을 기대하겠나?" 연구소장을 겸한 목회자로서의 나에 대해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고 들었다. 그러나 난 기독교변증이 곧 기독교이며 말씀사역의 핵심이라 믿는다. 목양 또한 말씀으로 성도 각자를 바로세우는 일이라 믿는다.
82
내가 배우기로 옥한흠 목사의 제자훈련 철학은 성도 각자에게 자립신앙을 길러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큐티를 강조하고 삶속의 경건훈련을 중시했다. 그러나 제자훈련을 교회성장 프로그램의 하나로 여긴 목회자들은 목양 강화의 수단으로 훈련 시스템을 남용하곤 했다.
83
목회자는 목양에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그런 처방은 임시적이고 최소한이어야 한다. 항구적으로는 신자 각자가 하나님과 동행하며 스스로 강건해져가도록 말씀과 기도와 섬김으로 길을 터주고, 그가 또 다른 제자를 재생산해내도록 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줘야 한다.
84
목회자들은 성도들을 자신에게 매이게 해선 안 된다. 목양을 열심히 한다면서 신자들을 자기 양으로 만들려는 건 월권이다. 목회자는 신자들 각자가 만인제사장으로 하나님과 직접 소통하도록 돕는 주의 종일 뿐이다. 기도와 말씀만으로도 충분해야 진짜 목양이다.
85
이땅에선 완전한 교회나 교리가 없다. 이걸 주장하는 교회는 이단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한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주의 마음을 함께 구하며 겸손히 진리 안에 서고자 한다면 적어도 잘못 가게 하시진 않는다. 좁은 길은 방향이지 완전한 데 있지 않다.
86
기자는 정확성을 중시한다. 내게는 기자의 경험이 변증 사역에 유익했다. 거듭 확인해보고 정확하지 않으면 말을 아끼려는 습성이 있다. 칼빈주의의 무리함이나 행함 있는 믿음, 환난 전 휴거의 정당성을 강조하게 된 배경에는 이런 나름의 검증 과정이 있었다.
87
예수님을 한 번 구주로 믿은 자는 무조건 필연적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온전한 성화의 열매를 맺는다는 말이 성경에 없다. 그런데 왜 칼빈주의는 성경보다 자기 교리를 더 절대화하려 하는가. 한국에선 그래도 대세라는 우물 안 개구리식 편견을 벗어나야 한다.
88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요 12:43). 예수님 당시처럼 지금도 교회 지도자들 중에 사람의 영광을 더 중시하는 이들이 많다. 그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위하는 듯하지만 실은 자기 실리를 위해 말씀을 파는 장사꾼들이다.
89
하나님은 사람들이 천국 갈 건수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천국 보내시려고 마음을 쓰시지 않을까. 하나님은 온 우주만물을 홀로 다 소유한 부유한 분이시다. 나눠도 나눠도 또 무언가 줄 게 있는 분이시다.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 무엇을 아끼실까.
90
예수님께 대해 진정한 신앙 고백이 있는 자는 천국의 씨앗을 품고 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천국은 그의 것이다. 그것만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 없이는 경험 못할 기적이다. 구원의 확신은 주님이 귀하게 여기는 것을 나도 귀한 줄 아는 데서부터 자란다.
91
"다 그렇게 블랙 리스트를 입었다고 하는데 빨간 옷 발견하기가 그렇게 힘듭니까?"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들이 상식처럼 벌어지는 이땅에서 해학과 풍자와 유머의 여유마저 없다면 얼마나 삭막할까. 진보든 보수든 사람 냄새를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92
"아빠 얼굴은 안정감이 있지만 쉬워보여서 난 싫어요." 내 얼굴에 대한 딸의 관상평이다. 딸은 뭔가 범접하기 어렵게 튕기는 듯한 인상의 얼굴이 좋단다. 낯선 사람이 거부감 안 느낄 얼굴이라 도를 전하는 데는 도움이 될 거란 말에 그나마 위로를 받았다.
93
서점에서 카드를 사서 즉석에서 글을 쓰느라 볼펜을 잠시 빌렸다가 호주머니에 그대로 넣고 나왔다. 서점에 전화를 걸어 이러이러하니 곧 돌려주겠다고 했다.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잘못은 이렇게라도 바로잡지만, 안 보이고 모르는 죄들은 그저 은혜만이 답이다.
94
뉴욕이나 파리 같은 도시는 사람이 만들고 자연미 가득한 시골만 하나님이 만드셨다고 여기는 건 오해다. 스티브 잡스에게 천재, 곧 하늘의 재능을 주신 분이 스마트폰의 뛰어난 성능 또한 창조하셨다. 복잡한 도시나 단순한 시골이 예외없이 다 천재적인 이유다.
95
"그것이 성경에 있는가?" 내가 어떤 교리의 진실성 여부를 판별하는 기준이다. 물론 특정 해석의 방향과 역사로 인해 특정 교리가 형성되는 건 자연스럽고 또 필요한 일이지만, 그 한 방향의 관성이 낳은 논리가 성경을 있는 그대로 못 보게 할 수 있다.
96
지금 내가 목회자로 섬기는 교회는 변증전도와 말씀묵상의 삶을 큰 틀로 삼고 세워진 교회다. 교회에 기득권자가 아무도 없어 오직 주님의 눈치만 보고 이 두 가지 테마로 말씀과 삶을 나눈다. 이 소박한 교회의 강단과 성도들이 내 가슴을 뛰게 하는 이유다.
97
사역자들 중에도 이땅과 천국이 얼마나 가까운지를 잘 못 느끼는 이들이 많은 듯싶다. 지금이라도 내가 죽으면 천국의 가장자리든 보좌 가까이든 곧장 내 자리로 간다. 이땅의 자랑과 영광을 구할 틈이 많다면 그는 실은 영원한 천국을 안 믿는 사람인지 모른다.
98
예전에는 커피숍에서 주문한 커피를 쟁반에 담아 나를 때 냅킨을 사람 수보다 많이 집어 가곤 했다. 요즘은 가능하면 사람 수만큼만 집는다. 특히 종이는 생때같은 나무를 베어내야만 생산 가능한 물품이다. 웬만하면 이면지 쓰는 것부터가 하나님나라 일이다.
99
인터넷 신문들의 댓글러들은 요즘처럼 우울한 시국에 그나마 내게 웃음을 주는 이들이다. 좌우를 막론하고 그들이 갑론을박으로 주고받는 풍자적 이야기들에서 나는 세상을 들여다보고, 변증과 설교를 배운다. 몇 줄 글이지만 가끔 번뜩이는 지성에 놀라기도 한다.
100
작은 교회는 큰 교회로 가는 과정중의 교회가 아니다. 몸집이 크든 작든 다 사람의 완전한 몸이듯 작은 교회나 큰 교회나 다 똑같은 주님의 몸이다. 작은 대로나 큰 대로 주님이 주님의 일을 하신다. 작은 교회를 작게 여기는 그에게만 교회가 작을 뿐이다.
101
하나님께서는 나의 목회를 통해 내 힘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걸 철저히 알게 해주신다. 여전히 모든 일에 나의 최선을 요구하시면서도 내가 자랑할 만한 건 어떤 것도 허락지 않으신다. 주님은 나의 자리에서 내가 아닌 주님만이 드러나길 원하신다.
102
사명자가 쉽게 사명을 버리면 그는 아무것도 아닌 것과 같다. 하나님나라 사역에 대해 인간적인 관점으로 생각하고 처신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주님이 맡기신 사역이라는 것만으로도 이미 그 일은 무한한 가치가 있는데 그것을 보는 눈이 없거나 종이 아니거나.
103
삶을 최대한 단순하게 만드는 것은 욕심을 줄이는 것과 관련이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잘 할 수 있는 것과 잘 할 수 없는 걸 구분하면 삶은 단순해진다. 내게 없는 남의 것을 가지려다 단순한 삶도 제대로 못 사는 이들이 많다.
104
오늘날에는 더 이상 방언이 없다면서 지금 교회 안의 방언은 가짜 방언이거나 사탄의 방언이라고 강하게 주장하는 자들이 극단적인 칼빈주의자들 중에 많다. 이들은 당연히 행함 있는 믿음에도 무지해서 성령훼방죄의 위험성이나 신자의 회개의 중요성도 잘 모른다.
105
누군가가 성경에서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만날 때 그 단어를 '여러 신화와 종교와 민족들의 신들 중 유대교적 신의 한 존재'쯤으로 여기면 그에게 성경은 없는 것과 같다. 성경은 역사의 주관자이신 유일무이한 절대자가 모든 사건들의 주인공이신 책이니까.
106
천지 만물을 만들고 수많은 법칙 가운데 그 모든 것의 안팎을 질서있게 주관하는 절대자 하나님의 역할은 아무나 못한다. 작은 풀잎 하나에도 정교한 지혜와 지식이 깃들어 있다면 오직 무한한 지성을 가진 존재만이 모든 순간에 그 모든 만물을 붙들 수 있다.
107
성경의 모든 말씀을 내 취향에 따라 적당히 걸러서 들으면 안 듣는 것만 못할 수 있다. 하나님은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말씀하시고 계속 일하시며 전체 건물을 보여주신다. 그 어딘가에서 내 맘대로 나사나 부속품을 빼버리면 나중에 왕창 무너질 수 있다.
108
한 교회를 목회자로 섬기며 복음을 위해 고난받는다는 게 무엇인지 조금씩 더 알아가는 듯싶다. 애초부터 복음은 내가 전하는 게 아니다. 주의 명령에 따라 내가 어디 있느냐가 복음을 전한다. 그 고난 가운데 전하는 복음이 아니면 복음이 귀한 줄 모른다.
109
이땅에선 신자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완전한 삶은 못 산다. 다만 그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라고 명하는 요구에 온전한 마음으로 집중하는 삶이 중요하다. 이런 방향의 삶을 고의로 무시하거나 지속적으로 불순종한다면 위험하다.
110
"하나님, 나의 약한 모습 이대로 주 앞에 살겠습니다." 기도중에 하나님이 너무도 지혜롭고 위대하시다는 진리가 압도해올 때 나도 몰래 이런 고백을 드렸다. 하나님 앞에선 누구도 강하지 않다. 약한 가운데 있지 않으면 누구도 감히 그 앞에 설 수 없다.
111
복음을 전하도록 하나님께서 주위에 보여주시는 비신자들을 위한 첫번째 전도는 그들을 위한 기도다.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열려 복음이 들려지게 하는 첫 단추는 기도만이 끼울 수 있다. 전도에서 사람의 말과 지혜는 결코 이 기도를 넘어서지 못한다.
112
천국에는 분명히 칼빈주의자들과 알미니안주의자들이 다 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천국에 들어온 이유는 칼빈주의자나 알미니안주의자여서가 아닐 것이다. 칼빈과 알미니우스의 최선을 통해 하나님이 드러내신 구원의 도에 전적으로 자신을 맡긴 사람들이어서다.
113
작은 한 영혼에 집중하면 사역이 자유함을 얻는다. 멀리 선교하러 나가지 않고도 치열한 선교사가 될 수 있다. 누구에게 보이는 일이 없어도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그렇게 일하고도 그 일로 상을 받기보다 그 일을 통해 이룬 주의 성품으로 상을 받는다.
114
한 영혼을 발견하고 섬기는 일은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이미 보여주신 한 영혼이 많다. 한 영혼 섬김은 그렇게 보여주셔도 지나치기 쉬운 그 한 영혼을 제대로 발견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그렇게 주의 눈과 마음을 가지는 것부터가 큰 복이다.
115
칼빈주의로 인해 교회에 회의감을 느끼며 고민해왔다는 한 영혼을 만났다. 딱딱한 변증설교를 듣고 정신이 번쩍 났다는 한 영혼을 만났다. 그 밖에도 변증전도에 관심 가진 교회로 서 있는 것만으로도 한 영혼들을 만나고 뭔가를 흘려보내는 일이 매일 일어난다.
116
얼마나 순종하며 살아야 천국 가느냐고 묻는 이들이 있다. 천국은 하나님과 회복된 관계에 있고, 그 친밀한 관계가 깊어질수록 내 안에 계신 주님이 더 드러난다. 천국은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내 안의 천국에 익숙해진 자는 지옥에 가려고 해도 갈 수 없다.
117
"힘 내!" 힘들어하는 이에게 이런 말은 "네 얘기 이제 그만 듣고 싶어"라는 말처럼 들린다고들 한다. 힘든 사람에게 가장 큰 위로는 그저 곁에 함께 있어주며 그의 말을 충분히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것이 아닐지. 그때 내 존재 자체가 그에게 힘이 된다.
118
사람은 다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처럼 산다. 자신도 모르게 사랑하고 치밀하게 생각하고 예술과 일을 좋아하고 선악을 따지고 약자를 동정하며 산다. 신앙은 이렇게 자신도 모르게 하던 걸 알게 하는 것이다. 따로 신앙의 세상을 만들기보다 삶의 태도가 바뀐다.
119
경건훈련의 생명은 지속성에 있다. 어쩌다 한 번 크게 은혜 받고 한 번 오래 기도한 걸로는 큰 효용이 없다. 작은 훈련이더라도 지속적으로 날마다 쌓아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많은 신자들이 어쩌다 맛만 보고 지나치는 은혜로 인해 진짜 능력을 놓치고 산다.
120
하나님께 지속적으로 나아가지 않는 신자들은 그의 한없이 달콤하고도 자애로운 임재를 맛보지 못한 채 어정쩡한 하나님 부재 속에 살아간다. 세상에도, 주께도 맘을 두지 못해 늘 불평과 낙심 속에 산다. 그들에겐 하나님이 일종의 신비한 부조리처럼 느껴진다.
121
적잖은 학부모들이 세속교육뿐만 아니라 교회교육에서도 일류를 추구하는 듯싶다. 그러나 이런 이들일수록 교회 예배나 교육과 세속교육이 충돌할 때 기꺼이 후자를 택한다. 가장 중요한 신앙교육이 집에서 이뤄진다면 그들의 선택이 자녀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줄까.
122
변증전도 현장에서 칼빈주의 교리는 애물단지에 속한다. 특히 안티기독교인들에게 이중예정론은 기독교 공격을 위한 주된 호재다. 신이 처음부터 천국 지옥 갈 자들 다 정해놓았다면서 왜 인간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느냐며 비난 일색이다. 결코 좌시할 일이 아니다.
123
칼빈주의의 무지막지한 하나님을 놓고 고민하며 신앙의 갈림길에까지 이르러 서성이는 이들이 꽤 많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교리에 아무리 이런저런 치장을 하고 색깔을 입혀도 오해가 안 풀린다. 마땅히 성경의 하나님과 교리의 하나님은 같아야 하지 않을까.
124
코란은 알라 신이 각 개인의 운명과 행위를 처음부터 다 정해놓았고, 그가 선과 악을 창조했다고 가르친다. 전자는 칼빈주의 신관과 흡사하지만,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이 악을 창조했다는 데는 반대한다. 심정적으로 이해하지만, 논리적으론 코란이 더 솔직하다.
125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는 칼빈주의 교리는 듣기엔 아주 은혜롭지만 그 구조적 특성상 신자에게 안일한 신앙생활을 조장한다. 하나님의 초월성이 강조되면서 신자의 세세한 일상 속에 섬세하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은 멀다. 교리에는 강하나 삶은 약해질 수 있다.
126
요즘의 무신론자들은 단순히 신이 없다고 강변하는 이들만이 아니다. 그들은 인간의 제반 문제들을 푸는 데 신이나 종교의 도움을 받지 않겠다는 강한 자존심을 가진 이들이다. 세상살이의 중심에 인간을 전능자로 배치시키려는 세속적 인본주의가 그들의 신관이다.
127
성경에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후 성경 말씀에는 겉뜻과 속뜻이 있다는 걸 알았다. 성경도 얼마든지 종교 경전의 하나로, 교리의 집합소로만 읽힐 수 있다. 그러나 역사 속의 예수님께 눈뜨면 성경은 역사로 읽히며 한 구절마다에 주의 속마음이 읽힌다.
128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려면 아담에게까지 이어지는 그의 족보(눅 3:23-38)와 타인 추종 불허의 독특한 배후를 살펴야 한다. 그의 역사와 배경이 가진 객관성이 그 존재의 진정성을 드러낸다. 그의 말만 직접 듣고 그 배후에 깜깜하면 종교적으로만 보인다.
129
행함 있는 믿음에 관한 진리를 목회적으로 남용하는 목회자들이 있다. 신자들에게 잘못하면 지옥 간다고 협박하면서 교회에 충성하게 만든다. 마치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교회의 제자를 만들려는 심산 같다. 옳은 진리도 강조하는 동기에 따라 화가 되는 경우다.
130
행함 있는 믿음을 강조하면 믿음만 갖고 왜 안 되냐며 언짢아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믿음대로 살아왔다면 행함 있는 믿음을 꺼릴 이유가 있을까. 그 믿음이 옳다면 그때부터 주를 따르고 아니면 주를 적당히 따르기라도 하겠다는 걸까. 그게 진짜 믿음일까.
131
행함 있는 믿음을 행위 구원으로 오도하는 건 오해다. 행위 구원은 출발점이 인간의 자력과 공로에 있지만, 행함 있는 믿음은 성령의 인도와 은혜에 있다. 믿기만 하면 그 순간 구원이 다 완성된다는 건 교리에만 있다. 구원은 인격적 관계가 소통된 결과다.
132
행함 있는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자들은 주로 성경을 증거로 들고,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 믿는 자들은 대체로 교리를 증거로 든다. 성경을 교리로 재단하려는 태도는 위험한데도 후자는 자신들의 교리적 전통과 논리를 성경 자체보다 더 우선시한다.
133
행함 있는 믿음을 행위 구원이나 가톨릭 교리라고 오도하는 신학자들은 그 비판의 주된 근거를 성경보다 교리적 논리에 둔다. 성경 자체를 보면 행함과 순종을 매우 강조하는데도 자신들이 세워둔 이론에 안 맞다는 이유로 성경마저 자기 틀로 비판하는 격이다.
134
"성경에는 신자의 영원한 견인을 말하는 대목들도 있지 않느냐?" 신자의 탈락 가능성에 대한 경고가 성경에 있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이런 말들을 한다. 설령 그렇다 해도 어느 쪽이 더 안전한가? 탈락 가능성에 대해 경계하면 견인은 자연스럽게 따라붙는다.
135
지금 행위 구원으로 비칠 만큼 행함 있는 믿음을 강조하는 건 그동안 교회가 너무 은혜 일변도로 흘러온 경향이 짙어서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성경을 위로하는 데만 주로 사용해와서다. 사랑과 공의에 대한 균형감이 필요한 때다.
-안환균 목사의 트위터, 페이스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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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트위터와 페이스북에 정기적으로 나누는 단상들을 한 번씩 정리해서 변증전도연구소 홈피에 올려놓고 있는데, 타이밍을 놓쳐서 오랫동안 올리질 못하고 이제야 1차로 올립니다. 곧 최근까지의 단상들도 함께 올려 나누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