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새로 단장한 연구소 북카페에서 교회의 큐티 소그룹 리더 모임을 처음으로 가졌다. 다들 말씀 안에서 한 마음이 된다는 게 얼마나 기쁜지 목회는 이 맛이구나싶다. 아무런 외압 없이 본질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 어떤 목회의 영광이 이보다 더할 수 있을까.
2
"하나님, 제가 많이 부족하지만 주께 쓰임받기 원합니다." 요즘 나의 간절한 기도다.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 일은 교회를 통해 내게 맡겨주신 주의 귀한 양떼들이 믿음과 말씀 안에서 온전한 구원에 이르는 것이다. 다른 사역은 다 이 섬김의 부산물이다.
3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주님은 지금 믿음 여부를 문제삼지 않는다. 그 믿음의 열매로 주 앞에서 철저히 자신을 낮추는 성품인가를 강조하신다. 귀 없는 자는 그래도 안 듣는다.
4
끝까지 믿음을 잘 지키면 택함받은 자, 아무리 믿음이 좋아보여도 마지막에라도 넘어지면 그는 처음부터 택함받지 못한 자라는 개혁주의 논리가 성경에는 없다. 무지막지한 이중예정을 성경적인 교리로 만들려고 억지를 부리다가 성한 사람들을 바보 만드는 격이다.
5
개인적으로 내가 개혁주의 신학과 사회복음, 무천년설 종말론을 경계하는 이유가 있다.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 한 영혼의 온전한 구원과 깨어 있음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느껴서다. 물론 어느 영역에서 일하든 최종 심판은 각자의 동기에 따라 가려질 것이다.
6
많은 사람들을 잘못 이끌어 그들의 영혼을 위태롭게 만드는 지도자들의 죄는 특히 크다. 자신의 기득권과 유익을 위해 진리를 왜곡시키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지도자의 언행은 그 자체로 끝나지 않기에 그들의 상이나 벌에는 건짐받거나 실족한 영혼들도 포함된다.
7
미국은 청교도의 신앙유산과 월 가의 세속주의가 공존하는 묘한 나라다. 그래서인지 미국에는 아주 신실한 사람들도 있고 아주 세속적인 사람들도 있다. 미국은 천국의 축소판 같은 세상의 한복판이다. 삶으로 체화된 신앙 없이는 가만히 있어도 미끄러지기 쉬운.
8
한국인은 박사학위를 받는 순간부터 공부보다는 관리 모드로 나아가고, 미국인은 그때부터 더욱 치열하게 평생 공부하기 시작한다는 말이 있다. 내가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하며 배운 것은 학자들의 겸손과 학문하는 분위기였다. 한국에 들어와선 차츰 까먹고 있는.
9
과일과 햄버거가 그려진 신발을 보고 깜짝 놀랐다. 감히 신발과 먹거리를 연관시키려 들다니. 평소에 거리의 간판을 유심히 보는 편인데 가끔은 다양한 상품의 디자인과 모양에서도 사역적인 자극을 받는다. 거기서도 다양함을 즐기시는 활기찬 하나님을 만난다.
10
영적 결벽증을 가진 신자들은 구원의 깊은 바다에 안 들어가고 늘 해변에서 구원의 출발점 부근만 맴돈다. 주께 대한 사랑과 갈급함이 구원의 증거인데도 더 깊은 구원의 여정을 도외시하여 성숙한 구원에 못 이른다. 자기 기준과 확신의 감정이 우상인 탓이다.
11
행함 있는 믿음에 대해 성경이 일관되이 강조하는 걸 무시하는 사람은 맨날 구원의 확인에만 매달리다가 귀한 세월 다 보낸다. 구원의 시작을 지나 구원의 여정에 충실히 참여하면 구원의 확신은 자연스레 따라온다. 확신은 구원의 증거가 아니라 성화의 증거다.
12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주 급진적인 제자도를 요구하신다. 주를 위해 자기 목숨을 잃고자 하면 찾는다는 말씀은 십자가 제자도에 전 생애를 걸라는 뜻이다. 천국에 들어가기가 그만큼 쉽지 않다는데도 여전히 무사태평한 사람은 선택받지 못한 자다.
13
"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 내 삶을 돌아보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순간들이 많았다. 턱없이 과분한 은혜를 너무 많이 누렸다. 분명히 고난의 때도 많았지만 지나고 보면 이런 고백이 절로 나오곤 했다. 이렇게 고백할 때마다 믿음이 조금씩 자랐다.
14
돈 있고 세상에서 잘 나가는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도 예수님을 안 기다린다. 교회에서 많은 일을 감당한다 해도 예수님을 기다리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마지막때는 주님의 다시 오심을 소망하며 기다리는 것이 신실하게 깨어 있는 믿음의 한 척도가 되는 때다.
15
의외로 많은 신자들이 찬양은 주일예배나 기타 공식예배에서 말씀 듣기 전에 잠깐 갖는 준비행사쯤으로 여긴다. 그러나 찬양은 공예배에서도 중요하지만 개인예배에서 더 중요하다. 개인예배에서는 찬양만 90% 이상 드리겠다고 결심하면 예배에 실패하지 않는다.
16
찬양의 능력을 결코 과소평가해선 안 된다. 우리가 천국에서 영원토록 가장 큰 기쁨 중에 드릴 헌신이 찬양이다. 가슴보다 머리가 커진 이들의 특징은 찬양이 메말라 있다는 것이다. 찬양은 기도를 낳고 말씀을 삶에 유입시킨다. 어쩌면 찬양이 영성의 전부다.
You are a holy God
https://youtu.be/PYaTHKPZcAw
Conerstone
https://youtu.be/QvLxZEU02uI
Wonderful
https://youtu.be/6zCjvsyDtRQ
Love like fire
https://youtu.be/jtfICsQqBec
Christ be all around me
https://youtu.be/cmge-ycIkoo
17
하나님은 내가 연인처럼 달뜬 가슴으로 애틋하게 사랑을 고백하는 데서 큰 기쁨을 누리신다. 사랑하면 용서되고 다 해결된다. 주를 사랑하면 회개 없인 견딜 수 없어 엎드리게 된다. 늘 첫사랑이 회복되어 있으면 그는 예외없이 하나님의 첫째 사랑의 수혜자다.
18
기독교는 반지성의 종교도 아니지만 지성만의 종교도 아니다. 지성주의도 반지성주의만큼 위험하다. 세상은 영성을 지성으로 포장하는 데 익숙하다. 지적으로 훈련된 세상사람들에게 지적으로 복음을 납득시키는 건 필요하지만 그들처럼 영성이 지성에 먹힐 수 있다.
19
아내가 기분 좋을 때면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난다. 집 안 어디선가 흥겨운 콧노래가 들리고, 식탁 위의 반찬이 좋아진다. 특히 후자는 전설처럼 말로만 듣던 진실이 우리 집 끼니거리에서도 여실히 확인되는 느낌이다. 아내가 기분 좋으면 밥상조차도 환해진다.
20
글이든 설교든 첫 문장이 딱 잡히면 그 다음 내용도 쏙쏙 제 자리를 찾아 배열되며 잘 풀려나간다. 그런데 글에서 그 서두를 제대로 잡기가 가장 힘들고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많은 묵상과 망설임끝에 그 문장이 주어지면 그때서야 글을 쓸 자격도 주어진다.
21
천국에는 실업이 없다. 하나님과 천사들도 다 일을 갖고 있다. 하나님의 직업은 왕이다. 사람도 천국에선 수많은 이웃사랑의 일들을 감당할 것이다. 이땅에서도 모든 직업은 이웃사랑의 훈련장이다. 천국은 일 중독 없이 바쁜 곳, 진짜 일이 복원되는 곳이다.
22
한때 진보적 복음주의자들을 좋게 여긴 적이 있다. 지금 돌아보니 균형을 외치던 그들이 오히려 심각하게 불균형적이다. 그들은 성경에 있는 말씀들을 골고루 강조하지 않는다. 그랬다면 천국이나 지옥, 종말이나 휴거, 재림에 대해 이토록 무심할 수 없다.
23
진보적 복음주의자들이 개혁주의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것은 잘한 일이다. 그러나 종말론에서 무천년설 일색으로 복음을 거의 현세 중심으로만 해석하고 적용해온 것은 지나쳤다. 그들에게서 예수님이 친히 강조하신 내세나 종말에 대한 설교를 거의 듣지 못했다.
24
내세를 중시하면 현세의 삶을 충실히 채워가게 되는 것이 기독교의 유기적인 생리 구조다. 현세를 중시하다 내세를 경시하면 성도들은 가슴보다 머리가 더 커지는 기형적인 신앙을 갖게 된다. 언제 맞을지 모를 죽음을 늘 준비하는 삶이 가장 현세적인 삶이다.
25
내세를 중시하면 현세도 건지고 내세도 건진다. 현세를 중시하면 현세도 답답하고 내세도 불안하다. 참된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고 세속에서 자기를 지키는 것이란 말씀(약 1:27)을 넘어 지나치게 세상 속으로 들어가면 신자가 세속에서 자기를 놓친다.
26
사탄은 사회복음으로 내세를 경시하게 만든다. 천국과 지옥을 말하면 품위 없는 근본주의적 기독교라 몰아간다. 사회복음은 윤리주의로 현세를 중시하여 변화시키려는 자유주의 신학이 색깔만 바꿔 복음주의에 들어온 격이다. 그 장점에도 불구하고 후유증이 크다.
27
내세보다 현세를 중시하는 교훈은 사두개인의 누룩 같다. 이 누룩에 잘못 맛들이면 헤어나기 어렵다. 잡힐 듯 안 잡히는 신기루의 이상을 좇아갈수록 기독교가 무력하게 느껴진다. 초점을 잘못 두면 기독교도 여느 인본주의적 종교나 사상의 하나쯤으로 전락된다.
28
교회는 성도들이 자기 삶의 자리에서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복음의 증인이자 일상의 삶의 예배자로 살도록 안내하는 데서 더 나아가 지나치게 정치적이거나 사회참여적일 필요가 없다. 교회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어 이중적인 사회참여는 괜한 마찰을 일으킨다.
29
"존재하지도 않는 신을 증오할 수 있는가?" 영화 '신은 죽지 않았다'에 나오는 대사들 중 기억에 남는 말이다. 신이 없다고 굳이 강변하는 건 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순수한 무신론자는 없다. 신에 대한 애증이 없다면 무신론자가 못 된다.
30
"하나님의 피조물 중 그 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존재는 나뿐이다." C. S. 루이스의 말이다. 나는 파리나 꽃, 나무 속에 들어가본 적이 없어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내 속은 안다. 내가 하나님 존재의 증거다.
31
하나님의 형상은 지성, 감정, 의지다. 사람의 몸은 이 형상을 드러내는 통로다. 말하고 보고 듣고 느끼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을 드러낸다. 영이신 하나님의 본질은 볼 수 없지만 그분이 사람의 형상으로 보좌에 앉아 계신다고 해서 어색할 것도 없다.
32
기독교인들의 잘못을 비난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안 믿거나 모른 체하는 자신들의 잘못을 상쇄시키려는 이들이 많다. 그들 중에 제대로 믿는 신자를 한 사람이라도 안다면 그런 이유로 인한 불신의 근거는 무너진다. 진리의 증인은 때로 한 사람으로도 충분하다.
33
기독교에서는 적어도 혼자 도 닦아서 거룩하게 되는 것을 진정한 거룩이라고 보지 않는다. 반드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틀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뤄지는 공동체적인 거룩함이어야 한다. 하나님과 이웃 없이 거룩할 수 없다. 나만의 거룩이란 없다.
34
신자에게 거룩은 완벽한 삶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연합의 관계다. 그래서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것을 생각하고 뜻하시는 것을 뜻하며 행하시는 것을 행하고자 한다. 거룩은 그 인격적인 연합 관계 속의 여정이며 삶의 방향이지 마침표가 아니다.
35
지금은 깨우는 전도도 참 중요한 때다. 실컷 교회 다니고도 구원의 열매를 놓치면 평생 망나니처럼 살다가 지옥 가는 사람이랑 다를 게 없다. 하나님은 이런 경우를 더 안타까워하신다. 교회 안에도 제대로 복음을 들어야 할 미지근한 사람들이 참 많은 때다.
36
주께서 내게 말씀사역을 맡겨주심이 너무 감사하다. 천국에서도 설교하는 일이 있다면 나는 그 일을 계속 하고 싶다. 천국에서도 하나님을 영원토록 알아가고 배워가야 하며, 예수님의 위대한 구속의 사랑을 영원토록 기념해야 한다면 설교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37
휴거나 재림에 대해 말하면 성경에 분명히 나오는 내용인 만큼 사려깊게 검토하고 분별해야 한다고 말해야 정상이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흥분하면서 반대하고 수준 떨어진다고 조롱한다. 이런 자들을 따르고 있다면 그 자신도 무분별의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다.
38
평범한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히 여기지 않고 하나님나라 일을 한다는 사람들은 왠지 미덥지 않다. 사역자든 누구든 그들은 툭하면 국민의 이름을 자주 들먹이면서도 실은 자기 야망을 채우려는 정치가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교회 안에도 정치가들이 적지 않다.
39
딸이 교회에서 피아노 반주를 맡고 있는데, 한번은 집에서 연습하며 희한한 말을 했다. "내게 임하네"라는 가사를 자기는 처음에 "내 게임 하네"로 들었단다. 스마트폰도 없고 게임도 못해본 아이인데도 의식은 톡톡 튄다. 암튼 못 말린다, 요즘 애들.
40
"내 모든 일의 동기는 주님입니다." 기도할 때 가끔 하나님은 내가 고백해야 할 한 문장을 주신다. 사모하는 마음을 어찌 표현해야 할지 모를 때 하나님은 내 입술을 열어 뭔가를 툭 떨어뜨리신다. 혹여 딴 생각 할까봐 그렇게 내 마음의 길을 이끄신다.
41
기도에도 지성, 감정, 의지의 전인적인 요소가 다 들어간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에서 특히 감정의 영역을 소홀히한다. 기도의 초입에서 찬양을 무시하면 기도의 지성소에 들어가기 어렵다. 기도가 건조한 거래처럼 전락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감정을 무시해서다.
42
기도에서도 하나가 풀리면 다 풀린다. 자신이 부르거나 들으면 언제든 은혜의 감동을 느끼는 찬양에서 응어리진 마음이 풀리면 기도가 풀린다. 찬양을 사용하지 않는 건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방편을 무시하는 교만이다. 기도도 나 혼자 다 하는 건 힘이 없다.
43
기도할 때 내가 드리는 찬양의 태도에서 하나님은 내 기도의 진정성을 달아보신다. '찬양만 드리고도, 이 찬양의 가사만으로도 나의 고백은 충분합니다' 하는 마음이 중요하다. 찬양이 기도의 통과의례가 되면 그 이후의 기도도 통과의례의 연장이 되기 쉽다.
44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하는지 모른다. 기도는 예배다. 내 삶에서 하나님을 높여드리고 하나님만을 예배의 대상으로 삼겠다는 신앙 고백이다. 그 사랑의 고백 위에 인격적인 대화와 교제가 이뤄지고 요청이 곁들여지는 게 기도다.
45
하나님은 구하기 전에 이미 내 필요를 아신다(마 5:8). 하나님이 기도에서 가장 먼저 만나기 원하시는 건 내 마음이다. 말을 많이 해야 들으실 줄 알고 리스트만 들이대는 게 중언부언기도다. 마음이 드려지고 통하면 구하는 기도제목도 다 열리고 통한다.
46
나는 새벽 경건의 시간에 말씀묵상의 시간을 가진 후 한 찬양을 반복해 들으며 말씀을 통독한다. 이때 찬양의 입술이 열리거나 기도가 터지게도 하신다. 말씀을 읽으며 찬양을 드리거나 듣는 동안 하나님은 기도를 위한 마음의 길을 열어주시고 깊이 임재하신다.
47
'여호와의 유월절', '예수 사랑해요', '당신은 영광의 왕',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저 멀리 뵈는 나의 시온성'... 내가 새벽에 들으며 따라부르기 좋아하는 찬양들이다. 각자 감동받는 찬양이 다른데 그걸 먼저 꼬옥 붙잡으면 기도가 열린다.
여호와의 유월절
예수 사랑해요
당신은 영광의 왕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저 멀리 뵈는 나의 시온성
48
아침에 말씀과 기도와 찬양을 깊이 체험하면 하루 종일 기도하게 된다. 하루를 무사히 살기 위해 기도하기보다 기도하기 위해 하루를 살게 된다. 주의 임재와 동행을 하루 종일 맛보고 누리며 사는 것, 그것 없이는 다 무의미하다 여기는 삶이 신자의 삶이다.
49
겨울이 지나가는 길목에 발 디딜 틈을 찾는 성긴 눈발처럼 2월이 종종걸음을 친다. 2월의 이미지는 '조금 더 견뎌야지'다. 입춘을 들고 있는데도 봄은 아니다. 정말 여기밖에 못 왔는데 봄을 기대해도 되는 거야? 괜스레 겨울에 미안해지고 봄이 민망하다.
50
요즘 교인들은 사랑의 하나님, 위로의 하나님만 주로 찾으려 한다. 그러나 죄와 회개와 심판을 말하는 것으로도 사랑을 말할 수 있다. 사랑의 하나님이셔서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사랑과 공의는 같이 있어야 진정한 가치를 발한다. 공의가 없으면 사랑도 없다.
51
성경에서 바리새인은 자기 의, 서기관은 자기 지식, 사두개인은 인본주의적인 현세의 일을 우상으로 삼던 자들인데,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지금도 존재한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늘 새롭다. 예수님만을 모든 것으로 삼는 자는 늘 새롭다.
52
의인은 예수님을 못 만난다. 구원받을 수 있는 자격은 오직 하나, 죄인이다. 이 자격을 못 갖춘 자는 아무도 없다. 관건은 죄인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것을 전적으로 인정하냐 못하냐다. 결국 죄인에게도 자격이 필요하다. 자기를 모르는 죄인과 아는 죄인.
53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불가해하다. 화를 한 번만 내도 지옥불을 피치 못한다(마 5:22). 티끌만한 죄 하나라도 못 본 척 넘어가면 하나님이 죄인 되신다. 내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죄 덩어리인 걸 알면 그제야 십자가가 보인다.
54
"야, 쪽팔리게 겨우 지옥이 무서워서 지옥 안 가려고 예수 믿는다고? 기독교를 왜 그리 단순무식하고 작게 만들어?" 이런 식으로 말하는 이들이 있다. 현세의 하나님나라를 중시하다가 더 중요한 걸 놓친 사람들이다. 낫만 사용하다가 기역 자는 잊어버렸다.
55
사람이 끝내 지옥을 자처해서 가는 이유는 하나님을 자기와 같은 사람처럼 생각해서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사람은 사람이다. 하나님의 길은 높고 사람의 길은 낮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셔서 대신 죽으셨다. 그걸 모르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
5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 15:16). 이 말씀에서 택함은 구원으로의 택함이 아니라 사역으로의 택함을 뜻한다. 중도에 버림받은 가룟 유다가 그 증거다. 문맥을 떠나 말씀을 보면 때로 속뜻이 180도 달라진다.
57
성경에서 특정 개인이 거명되는 선택에 대한 말씀들은 대부분 구원이 아닌 사역적 선택을 가리킨다. 아브라함과 모세, 예레미야, 바울이 다 그렇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철저한 복종은 전도자로 쓰임받은 후 버림당할까 두려워서라고 고백했다(고전 9:27).
58
선생은 더 큰 심판을 받는다(약 3:1). 말이 많아 실수도 많지만 자신이 한 말을 쉽게 잊어버려서이기도 하다. 선생 아닌 자들은 말이 적어 잊어버린 것도 적고 불순종도 그만큼 적다. 가르치려면 배나 더 기억력이 좋아야 한다. 아는 만큼 심판도 크다.
59
이제 학업을 마무리해가는 단계에서 뒤를 돌아보며 떠오르는 조언이 하나 있다. 사역을 하며 학위과정을 공부하는 건 너무 힘들다. 사역을 접고 공부만 하든지 사역만 하든지 해야 맞다. 연구소 사역이 없었다면 감히 덤비지 못했을 학위과정에 만감이 교차한다.
60
지옥에 가면 그제야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미워하는 분인지, 사람이 예사로 짓는 작은 죄조차도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알게 된다. 죄와 지옥의 처참함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만천하에 드러났다. 무한히 공의로운 신의 무한한 진노의 불에 붙잡히지 말아야 한다.
61
"구더기가 네 아래에 깔림이여 지렁이가 너를 덮었도다"(사 14:11). 지옥에 구더기와 지렁이가 있다면 지상에서 인간이 징그러워하는 많은 다른 벌레들도 거기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지옥을 막연히 추상적인 장소라 여기는 건 원수를 도와주는 이적행위다.
62
인체에 칼을 대어 생선처럼 회를 뜬다고 생각해보라. 얼마나 끔찍스런 고통일까. 지옥에선 이보다 더 예리한 고통이 영원히 계속된다. 몸이 쪼그라들면 재생되어 고통이 무한반복된다. 아무도 상상조차 못할 공포와 고통이 가득한 지옥만은 죽어도 피해야 한다.
63
교회사의 위대한 영성가들 가운데는 삶이 미지근하고 게을러질 때 참혹한 지옥의 고통을 떠올리면 정신이 번쩍 들게 된다고 말한 이들도 있다. 나는 거기에 십자가의 비참함을 더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십자가의 생생한 고난에서 멀어질수록 영성도 점점 무뎌진다.
64
주님은 제자들에게 지옥에 던져넣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하셨다(눅 12:5). 지금의 제자들은 한 번 믿고 나면 지옥 갈 염려 없으니 안심하란다. 전도할 때도 지옥의 공포로 협박하지 말라고 나무란다. 지옥에 대해 말하길 꺼리면 예수님의 참제자가 아니다.
65
전도할 때 다짜고짜 지옥부터 말하면 역효과만 난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먼저 말하고 인간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떠나 사는 데서 생긴 죄의 뿌리가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 그렇지 못할 때 삶 자체가 죄라는 걸 알려야 한다. 그러면 지옥은 자연히 두려워진다.
66
긍정적으로 말하고 긍정적으로 사는 것은 복음적이다. 다만 그러면서 지옥이나 심판, 죄와 회개에 대해 부정적으로 경고하고 일깨우는 것까지 삼켜버리면 배도로 전락한다. 성경에서도 거짓선지자들은 재앙과 심판을 말하기보다 거짓평안을 조장하고 진실을 왜곡했다.
67
교인들이 떨어져나갈까봐 죄와 회개, 심판을 외치지 않는 목회자들은 주의 종이 아니다. 자기 자리를 보전하려고 사람의 눈치를 보고 주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선포하지 않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결국 교회성장과 자기 보전의 우상을 열심히 섬기고 있다.
68
천국은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은데 그걸 발견한 사람이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다(마 13:44). 지금 신자들 중에 천국을 이만큼 가치있는 걸로 여기는 이가 얼마나 될까. 오히려 한줌도 안 될 세상 자랑과 안락에 마음을 다 팔고 있진 않는지.
69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4). 예수님은 청함과 택함을 구분하지만 많은 이들이 제맘대로 이 구분을 무시한다. 구원받고 교회에 소속된 것은 청함받은 것이다. 예복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로 각자가 입고 들어가야 한다.
70
행위 구원은 예수님의 피도, 성령님의 도우심도 없이 인간이 자력으로 구원받으려는 타종교들의 구원관이다. 행함이 있는 믿음은 부패한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 거룩함에 이르는 능력을 얻어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는 것이다(벧전 2:2). 행위 구원과 다르다.
71
하나님을 알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순종하게 된다. 우선순위는 그분을 아는 것이다. 주님은 순종할 능력이 없는데 순종하라고 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을 알려면 그분을 사모하고 그분과 잠잠히 교제하면 된다. 사랑할 줄 아는 모든 자는 순종할 줄도 안다.
72
개혁주의 5대 교리 가운데 단 하나라도 비성경적이라는 게 밝혀지면 그 전체 체계가 다 무너지고 만다. 모든 교리가 연속적으로 한 논리로 묶여져 있어 그래야만 합리적이다. 이것은 장점이자 단점인데, 비교적 강한 교리도 최약체 교리만큼 의심받기 쉬워서다.
73
지역교회에서 세미나를 해보면 아쉬운 대목이 있다. 목회자들이 성도들과 함께 자리에 앉아 끝까지 강의를 경청하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목회자들은 쏙 빠져나가는 교회가 있다. 바쁘다는 핑계로 책 몇 권 읽을 시간을 벌어줄 축적된 지식을 너무 쉽게 포기한다.
74
오프라인과 온라인 목회가 구분된다. 심정적으로 오프라인 목회가 더 가깝지만 주님은 둘 다 똑같이 귀하게 여기라 명하신다. 이는 온라인 성도들 역시 온라인 만남을 오프라인과 별개로 여기면 안 된다는 의미다. 하나님나라에는 온라인 오프라인이 따로 없다.
75
다가올 큰 재앙들에 대해 경고하며 세상에 붙은 마음을 떼라고 거듭 말해도 귓등으로 듣고 마는 이들이 많다. 그들은 말로만 하나님을 사랑하며 실은 세상과 자기 일을 더 사랑한다. 재앙의 날이 닥치고 나서는 그들의 속마음이 들켜버려서 돌이킬 면목도 없다.
76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시 51:6). 사람이 진실하면 주님도 함부로 대하시지 않는다. 진실함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두루 통한다. 진실함은 매우 신적인 특성을 지닌 어떤 것이다. 중심이 진실하면 방향이 잘못되어도 회개의 자리로 돌아온다.
77
성경은 과거에 얻은 구원과 현재 이뤄가는 구원, 미래에 얻을 구원을 구분한다. 예지예정론 대신 이중예정론을 믿는 자들은 결국 구원 결정론을 주장하게 되어 구원의 시제를 얼버무린다. 그들의 말만 믿고 구원은 떼놓은 당상인 줄 알다가는 영원히 큰코다친다.
78
"직원들이 월급받는 거랑 일찍 퇴근하는 것만 생각하며 일하는 것 같애. 생각이 없어." 식당에서 우연히 엿듣게 된 말이다. 사람들의 삶에 하나님이 예비해두신 계획을 100% 이루는 자는 거의 없을 듯하다. 삶의 틀이 아닌 내용 채우기는 각자의 몫이다.
79
항상 순종하려는 자는 주의 말씀이 위로가 되지만, 순종에 무관심한 자는 말씀이 부담된다. 늘 감사하며 기뻐하려는 자는 주의 말씀이 그때그때 지혜가 되고 능력이 되지만, 그런 삶에 무관심한 자는 말씀에도 아쉬울 게 없이 무심하다. 말씀도 빈익빈부익부다.
80
"창피한 줄 알아라!" 이 말은 신앙의 삶에도 자주 적용해야 할 충언이다. 이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내가 더 많이 부끄러움 당할수록 훗날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을 덜 당한다. 하나님을 면전에 모시고도 속없이 뻔뻔하게 철면피처럼 살게 될까 두렵다.
81
죽음에 깨어 있는 사람이 삶에도 깨어 있다. 이땅에 분명히 있던 사람이 어느 순간부터 흔적없이 사라진다는 게 이상하지 않은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다. 죽음을 심각하게 직시하지 못하면 삶에 심각하게 속는다. 늘 죽음을 준비하는 삶이 늘 살아 있는 삶이다.
82
개혁주의 신학에 세세한 장점이 많고 나도 그것을 사랑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개혁주의 5대 교리, 곧 전적 타락, 무조건적 선택, 제한속죄, 저항 못할 은혜, 성도의 견인과 크게 상관없이 하나님과 인간, 세상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추구할 때 두드러진다.
83
전통은 중요하지만 전통주의는 위험하고 교리는 참 중요하지만 교리주의는 위험하고 때로 해롭다. 개혁주의는 이름만큼 그리 개혁적이지 않다. 500년 전 교리를 발전시키기보다 오히려 더 수구적으로 도그마화해온 듯한 느낌이다. 점진적 계시의 발전도 멈췄다.
84
가톨릭은 성경보다 교회 전통을 더 중시하면서 타락해갔다. 이제 개신교도 비슷한 경로로 타락의 정점을 찍지 않을까 염려된다. 진리 여부를 가리는 건 성경보다 전통적으로 뭘 믿어왔느냐가 되어간다. 거기에 수많은 먹이사슬 구조가 진리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
85
개혁주의자들은 설교할 때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고 전하면 안 된다. 스스로가 그렇게 안 믿어서다. 그러나 그렇게 전하지 않으면 복음에 능력이 없고 회심할 자도 안 나온다. 이런 자연스런 메커니즘 자체가 제한속죄론이 진리가 아님을 입증한다.
86
예수님이 정말 모든 사람를 위해 죽으셨다면 반드시 나 한 사람을 위해 죽으신 것도 맞다. 어디 가서 따로 확인서를 뗄 필요도 없다. 이 작은 나를 위해서도 크신 하나님이 죽으셨다. 그래서 무한감사요 그래서 그를 절대로 떠날 수 없는 게 기독교신앙이다.
87
다수가 신봉한다고 옳은 교리인 것도, 추종자가 적다고 진리인 것도 아니다. 유독 한국에서만 개혁주의 신학이 대세를 이루는데 미국에선 개혁주의도 소수다. 한국에서도 영향력의 다소를 떠나 객관적으로 성경적인 진리인지 여부에 대해 정당히 가려야 할 때다.
88
예수님이 액면 그대로 모든 사람 각자를 위해 안 죽으셨다면 누구를 위해서도 죽으신 게 아니다. 확인할 방법이 없어서다. 내가 선택받았다는 걸 어떻게 아는가. 주님이 바로 나 한 사람을 죽기까지 사랑하셨다는 사실에서만 안다. 죽고 나서 알면 너무 늦다.
89
"주님은 선택받지 않은 자들을 위해선 한 방울의 피도 안 흘렸다." 개혁주의자들의 제한속죄론은 내가 가장 크게 반대하는 교리다.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2)는 말씀에 정면위배되어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90
"하나님은 자신의 절대주권으로 반드시 우리를 거룩한 삶으로, 천국으로 이끄시고야 만다." 개혁주의자들의 설교에 단골로 등장하는 멘트다. 이만큼 은혜로운 설교도 드물다. 그러나 끊임없이 사람의 인격에 거룩한 삶을 호소하고 설득하는 성경에는 없는 은혜다.
91
"이렇게 명망있고 실력있는 누구누구도 개혁주의자니까 나도 개혁주의를 지지한다." 개혁주의자들에게서 가끔 듣는 말이다. 한마디로 사람을 믿는다는 소리다. 학맥과 인맥이 교계에도 여러 모양으로 스며들어와 있다. 그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 수 있다.
92
개혁주의자들은 하나님이 까닭없이 어떤 이는 지옥으로, 어떤 이는 천국으로 무조건 예정하셨다고 믿는다. 내가 성경에서 만난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하나님이 공평하시다는 건 우리 이성으로 이해 가능한 범위 안에서다. 하나님도 혼자 공평하실 순 없다.
93
"하나님은 잔잔한 바다에만 닻을 내리신다." 바실레아 슐링크의 말이다. 분주하게 떠들고 돌아다니는 마음으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면 그 하나님은 자신이 만든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법도와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자기 맘대로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은 없다.
94
신자 각자가 택한 길을 가는 데서는 타인의 조언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가보다. 개혁주의자를 한 분 만났는데 인간적으로는 가까워도 신학적으로는 서로 멀다는 게 느껴졌다. 서로의 길을 축복하며 하나님 앞에 서는 걸로 답해야 한다. 신앙의 길은 각각이다.
95
치실을 사려고 편의점에 들렀는데 찾아봐도 없다. 주인한테 도움을 청하자 분명히 있으니까 염려 말라신다. 한참을 찾더니 내가 찾던 것과 다른 브랜드를 건져 올리셨다. 난 그조차 못 봤지만 찾았다는 느낌은 없었다. 진짜와 짝퉁은 누가 찾느냐로도 갈라진다.
96
걸을 때 의식적으로 보폭을 넓게만 해도 운동효과가 크다. 많은 사람들이 걸을 때 두 다리를 무심한 작대기인 양 취급한다. 걸어다니면서 정말 에너지를 낭비할 수도, 보충할 수도 있다. 누군가와 대화 나누며 거닐지 않는다면 두 다리를 그냥 놔두지 말 것.
97
현대인이 아득히 먼 1세기 상황을 담은 책들에 관심 갖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성경은 왜 그리 친숙하고 모든 말씀이 다 내게 직접 주는 말씀 같을까. 과거사를 오늘의 시각으로 풀어낸 사극처럼 하나님은 과거에 이미 현재의 나를 보시고 성경에 다 담으셨다.
98
존 스토트는 성경에 대한 무지도 신자들이 받을 심판 항목에 든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심판날에 펼쳐질 책들 중에 성경도 들어 있지 않을까. 하나님께서 미리 공고하지 않은 죄가 없고 미리 베풀지 않은 은혜가 없다. 시간상 구원자와 심판주의 자리만 바뀐다.
99
무한하지 않으면 심판주가 될 수 없다. 이땅에 살았던 모든 사람의 죄를 고시를 패스한 일개 법정 공무원이 잡아낼 수 없다. 모든 사람의 모든 순간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나라도 놓치면 자격 미달이다. 무한하면서도 완전히 거룩한 자만 다 심판한다.
100
하나님을 마침내 만나게 된 그때부터 그분이 존재하기 시작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은 그 전에도 항상 존재해오셨다. 내가 내 눈만 가리고는 하늘이 없다고 우겨왔다. 하늘이 내 위에 항상 있듯 하나님도 항상 계셨다. 내 일거수일투족을 나보다 더 잘 아신다.
101
"그거 내 손길이야!" 안팎으로 내 몸의 정교함을 느낄 때마다 주의 세미한 음성을 듣는다. 인공물은 뭐든 끝까지 쪼개 들어가보면 결국 조악하고 거칠다. 하나님이 지으신 나비의 가녀린 날개의 대칭 비율은 완벽하다. 사실은 천지가 매순간 눈부셔야 제대로다.
102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눅 10:42). 주님은 나를 안 빼앗기는 데 관심이 많은데 나는 남 걱정, 일 걱정에 나를 빼앗긴다. 내가 먼저 영적으로 살아야 타인을 살린다. 내가 주 안에 거하면 다른 걱정거리도 주님 손에 잡힌다.
103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주소서 하라"(마 9:38). 추수할 일꾼들은 초신자가 아니라 성숙한 성도들이다. 큰 교회에서 잘 훈련받은 일꾼들의 파송은 예수님도 염두에 두신 추수 계획 중 하나일 듯싶다. 거기에 분립 개척도 포함된다.
104
성도들을 위해 기도할 때 예배시 그들이 앉는 자리를 마음으로 돌며 이름 부르며 기도한다. 한 바퀴 쭉 다 돌면 강단에 서 있는 내가 남는다. 하나님은 내가 우선순위에서 말째임을 보게 하신다. 성도들이 나보다 더 많은 상급을 받아야 진짜 목회라 하신다.
105
은행에 넣어둔 돈이 갑자기 인출 정지된다면 어떨까? 현금을 따로 챙겨두었는데 화폐가 갑자기 바뀐다면? 급기야 표 하나로 모든 매매를 진행한다고 강압해온다면? 이미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에 묶여 돌아가는 세상에서 이 온라인 돈폭풍을 피해 갈 자가 있을까?
106
"하나님, 오늘 기침해선 안 될 시간은 찬양할 때와 설교할 때입니다. 꼭 기억해두세요." 주일 아침에 이렇게 기도할 때만 해도 계속 기침이 나와 염려가 컸다. 근데 정말 예배때 거짓말처럼 그 시간에만 기침이 한 번도 안 나왔다. 예배가 무섭긴 무섭다.
107
잘 웃고 잘 먹고 잘 자는 사람. 테레사 수녀가 사람을 뽑은 기준이다. 어떤 이가 정말 믿음을 가졌나 보여주는 증거란다. 만사를 다 자신이 해결해야 할 것처럼 인상쓰고 있으면 밥맛이 없어지고 잠도 못 잔다. 내 한계를 인정하면 이만해도 웃을 수 있다.
108
가족은 내가 아무것도 할 일 없는 자처럼 그들과 함께할 때 가장 좋아한다. 유학시절 늘 빠듯하게 사는 게 몸에 밴 나는 가족시간에도 마음은 딴 데 두곤 했다. 하나님은 가족을 통해 나를 비우게 하셨다. 그분과 함께할 때도 이제 난 다른 할 일이 없다.
109
상담하다보면 처음엔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막막하다. 근데 계속 듣다보면 자연스레 꼭 해주고 싶은 말이 떠오른다. 분명 내 생각이라기엔 낯선 것인데 어디서 주어지는지 정말 오래 전부터 내가 품어오고 키워왔던 것 같은 조언이 튀어나온다. 성령의 역사다.
110
신자가 작은 교회에서 작은 교회로나 큰 교회로 이동하는 건 묘수가 못된다. 그러나 큰 교회에서 작은 교회로 이동하는 건 여러모로 가치 있다. 큰 교회가 성도들을 선교적으로 잘 훈련시킨 증거 중 하나는 그들 스스로 작은 교회로 가려 하는 헌신이 아닐지.
111
교회나 개인이 선교사를 후원한다는 건 그에게 일방적으로 혜택을 베푸는 게 아니다. 그는 대등한 동역자로서 후원자에게 오히려 축복의 통로가 된다. 실은 그의 필요를 친히 채우는 분은 하나님이시기에 후원자는 주는 것 없이 일방적인 축복을 그에게서 받는다.
-안환균 목사의 트위터, 페이스북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