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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FID 태그가 부착된 차량 번호판이 곧 도입된다고 한다. 자동차로 어디를 여행하든 정밀한 추적이 가능한 시대가 조만간 도래할 모양이다. 짐승의 표는 특정한 표이기 전에 거대한 하나의 인프라다. 시시각각 더 목을 조여오는 그 사슬은 아는 사람만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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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이 잘못된 지성주의는 지식의 바벨탑을 쌓고는 사람들에게 올라와보라고 한다. 이러저러하게 공부하면 그 세계를 알 수 있다며 본의 아니게 율법주의를 조장한다. 진리는 결국 가난한 마음의 문제요 죄를 애통해하는 회개에서 열린다는 진실은 계속 흐트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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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있는 자는 넘어져도 회개하고 다시 일어선다. 믿음 있는 자는 죄를 짓지 않는 순종의 행함을 통해 자신의 믿음을 증거하고자 한다. 은혜만 강조하면서 죄 짓는 삶에 무감각하고 회개하지도 않는 자는 믿음 없는 자다. 그래서 구원은 끝까지 믿음만으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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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짓는다고 구원이 취소된다면 아무도 구원받지 못한다. 믿음 있는 자도 죄 지을 수 있지만 죄 짓는 삶에 안주할 순 없다. 알곡은 끝까지 믿음으로 주님 안에 붙어 있는 자요 가라지는 죄 짓고도 회개와 성결로 나아가지 않는 삶으로 믿음을 저버리는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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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만으로의 구원을 하나님 은혜로 인한 구원이라 믿는 자들은 믿음을 오해하곤 한다. 처음부터 믿음은 행함을 포함한다. 참으로 말씀을 믿는 자는 참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의 행함을 드러낸다.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 행함 있는 믿음은 산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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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믿음으로 사는 게 실감나지 않는 사람은 삶에서 말씀으로 자기 뜻을 포기해본 적이 없어서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건 내 뜻대로가 아닌 하나님 뜻대로 산다는 것이다. 자기 뜻을 포기하면 죽는 줄 아는 그 두려움이 최고의 불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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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마 26:38). 십자가 앞에선 죄 없는 주님도 자기 부인이 어려워 고민하며 눈물로 기도하셨다. 십자가의 길을 만만하게 보는 사람은 아직 한 번도 그 길을 가본 적이 없다. 그 길에는 자동 에스컬레이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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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 지옥을 중시하는 자는 이땅에서 하나님나라도 중시하게 된다. 그러나 이땅에서 하나님나라만 말하고 천국과 지옥은 숨기는 자는 하나님나라 편이 아니다. 지금 하나님나라는 정치적인 나라가 아닌 영적인 나라로 영혼 구원의 사명이 가장 중대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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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예배로 주 앞에 내 시간을 온전히 낭비하는 것도 일종의 자아의 죽음이다. 찬양 가사에 나의 전부를 던지고, 잡념과 염려와 내 계획을 내려놓고 기도와 말씀에 전심으로 매달리는 것도 죽음 없이는 불가능하다. 날마다 죽으려면 예배에서 먼저 죽어야 한다.
O praise the 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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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화수목금토일이란 사이클 없이 그냥 하루하루를 같은 날로 산다면 어떤 느낌일까. 현행 일주일의 단위는 천지창조의 일주간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다. 완전수인 7일 단위로 하루를 산다는 건 모두가 지금도 날마다 창조의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는 의미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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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 마!" 창문에 스티커 붙이는 아내를 옆에서 도와주다가 내가 던진 말이다. 긴 스티커를 붙여나가다 중간에 살짝 울게 되는 걸 보고 조심하잔 뜻으로 외친 말에 폭소가 터졌다. 비슷한 말 같지만 뜻이 다른 말인데 어떻게 바꿀지가 영 생각이 안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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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나 여타 강단과 달리 교회 강단은 동일한 텍스트로 동일한 청중에게 늘 새로운 말씀을 전해야 한다. 설교자가 더 많이 연구하고 더 깊이 묵상케 하는 데 이만한 자극이 없다. 사람은 게을러 자극이 없으면 더 안 움직인다. 강단이야말로 탁월한 조련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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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만 구워진 기독교는 믿음 이후 주님께 순종하려는 생각 없이 살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에이든 토저의 말이다. 옥한흠 목사님은 사역의 말년에 성도들이 싫어해서 행함 있는 믿음을 강조하지 못했다며 후회하셨다. 생명은 생명을 걸어야 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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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기적적인 은사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런 은사를 가진 이들은 그것으로 성도들을 자기 통제 아래 두려 해선 안 된다. 성도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절대적이고 그 관계를 돕는 교회는 상대적이듯 은사도 성도와 교회를 돕는 데서 지나쳐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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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믿고 싶다 해서 아무렇게나 믿는 게 아니다. 성경이 어떤 책인지 알고 그 주인공인 예수님이 왜, 어떻게 인류역사에 오셨는지 차근히 살피는 최소한의 인격적 지식이 필요하다. 자신의 죄인됨은 먼저 창조, 타락, 구속의 역사에 대한 지식으로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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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밥만 먹지 그 밥이 식도를 거쳐 위에 들어가고 거기서 피를 통해 온 몸의 세포를 살리는 과정은 모른다. 그 경로를 내시경으로 다 들여다본다면 자기 몸이 꽤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애초부터 내 몸은 내 것이 아니고 창조주의 것임을 그제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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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각자가 죽은 이후에 어떻게 되는지를 모른다고들 여기지만 실은 삶이 어떤 건지도 똑같이 모른다. 죽음 이후 살아 있는 동안 저지른 죄가 영원히 문제가 된다는 것만 알아도 삶과 죽음에 대해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핵심사항을 제대로 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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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지옥을 피하고 천국에 가는 것이 삶의 가장 중요한 초점이 못 되면 미끄러지기 너무 쉬운 때다. 내세를 경시하는 분위기로 사람들의 눈이 멀어져간다. 내세에 대해 준엄한 경고로 일관하는 성경을 무시하면 영원히 때늦은 후회로 가슴을 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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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갈수록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벌여나가기보다 이미 주신 관계를 더 잘 가꾸고 심화시키는 데 마음이 간다. 그 안에 이미 주님이 내게 원하시는 성품훈련이 다 든 것만 같다. 내가 건성으로 대한 것들을 원위치로 돌리기에도 남은 시간이 부족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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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한테 다 일러줄 거야." 3세 시리아 아이가 테러 부상으로 죽어가며 남긴 말이라고 한다. 이땅의 폭력과 비행에 사람들은 무감각해도 하나님은 섬세하게 느끼시고 낱낱이 다 아신다. 순진한 아이조차도 죽음이 임박해서야 하나님께 일러바칠 생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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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최상의 선물이다. 선물이기에 주신 대로 받아야지 이제 와서 나의 호불호로 재려 들면 실례다. 바꿔달라 하면 이미 선물이 아니다. 배우자든 자녀든 주신 대로 받고, 그 안에서 선물로 주신 주의 뜻에 맞게 하나를 이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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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를 대하듯 섬길 지극히 작은 자 하나(마 25:40)는 애써 찾아다녀야만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다. 가까운 가족과 이웃이거나 하나님이 그때그때 보여주시는 사람이기 쉽다. 이 섬김을 운동이나 사상으로 만들어 요란을 피울수록 이런 이웃이 잘 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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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마 25:46). 지옥의 고통과 형벌이 영원하지 않다면 천국의 복락과 상급도 영원하지 않다. 영벌과 영생이 한 문맥 안에 정확히 대비되어 있어서다. 섣부른 인본주의로 사람을 위하려다 하나님 말씀을 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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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자들 중에 자기 전제나 선호 사항을 말씀에 자꾸 대입하려는 이들이 있다. 지옥멸절설이나 유신진화론이 대표적이다. 세상사람들의 눈치를 보다보면 성경을 사람들의 구미에 맞추려 한다. 배도는 경계지대에서부터 아주 고상하게, 무식하지 않게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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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계 13:15). 알파고 같은 인공지능 로봇이 말세에 말하는 우상 같은 존재로 진화할 듯싶다. 두 증인의 죽음을 온 세계가 보게 하는(계 11:9) 인공위성 TV의 등장을 예고한 성경은 알파고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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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당하고 굴욕당할 때가 내 육신적인 자아를 죽일 중대한 찬스다. 다 잘 될 때는 자아가 죽을 필요 없다. 무시당할 때 분노하는 건 내 자아가 시퍼렇게 살아 있다는 증거다. 상처 안 받을 환경만 찾는 건 때로 내 자아 보호본능의 지극한 이기심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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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에게 카리스마가 너무 강하면 넘어지기 쉬운 걸 많이 보았다. 아무리 말이나 글, 사역이 좋아보여도 그 출처가 인격인지 은사인지 유심히 본다. 지적이든 영적이든 은사에서만 나온 것은 타인에게 일정한 도움을 주지만 자신에겐 유익이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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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방에 훅 간다." 세상사람들이 지어낸 말이지만 영적으로도 의미심장하다. 자주 책망받고도 계속 목이 곧은 자는 갑자기 패망당한다(잠 29:1). 하나님말씀에 순종할 기회가 늘 있는 듯 여긴다면 오산이다. 영적, 육적 건강은 평소에 잘 챙겨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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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관건은 돛단배를 타듯 성령의 인도를 따라 함께 바람과 파도를 타는 것이다. 기도하다가 찬양하게 하거나 말씀을 읽게 하거나 방언하게 하면 거기에 순종해야 한다. 기도는 살아 계신 성령의 인도와 감동에 이끌려가야지 내 마음대로 흘러가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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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현장에서 감동 주시는 것을 따라 기도하면 자연스런 은혜가 아주 빨리 마음에 스며든다. 조급함과 욕심을 버리고 성령의 인도에 따를 때 기도하기에 가장 좋은 마음밭이 된다. 형식적으로 기도 시간을 때우면 은혜를 받기보다 내가 만들려 하다가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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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앞에서 한 여자 청년을 만났는데, 연구소 간판을 쳐다보며 이름을 읽고 있었다. 왜인가 물으니 변증에 관심이 많아서란다. 문득 내가 못 보고 지나친 관심자들이 많았겠구나 싶었다. 밖에 내건 작은 간판도 제자리에서 부지런히 변증사역을 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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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숱이 정말 많네." "뭔 소리? 옛날엔 정말 많았는데 많이 빠진 거야. 나이드니까 그냥 빠지더라." 버스에서 중년 여성들이 나누는 대화가 들렸다. 들으라고 하는 이야기는 분명 아닌데 너무 또렷하게 들렸다. 많은 사람들이 듣고 심란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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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가 하나님과 친밀하지 못하면 자신이 한 일이나 공로로만 그분께 인정받으려 한다. 율법주의에 자신도 모르게 빠져든다. 자녀로 살지 못하고 종으로 산다. 그것이 얼마나 피곤한 삶인지 알면 열 일 제쳐놓고 하나님 앞에 먼저 엎드린다. 모르니까 고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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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제자들은 "누가 더 크냐?"로 다투었는데 세례요한은 처음부터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며 마음을 비웠다. 진심으로 남을 축복하는 사람은 비교의식이나 열등감에서 자유로워진다. 남보다 잘 되려는 사람은 결코 그 맛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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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만 나면 성경을 읽겠다고 결심해보라. 온 세상에 뉴스와 사람의 정보가 범람하는 때여서 좀더 과도한 결심이 필요하다. 시간을 어디에 써야 할지는 기준점을 세우고 난 후 정해야 한다. 그 기준점이 어디냐에 따라 시간을 흘려보내기도 하고 사용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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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이 아름다운 건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이 있어서다. 지옥이 추한 건 끝까지 자기를 고집하던 자들이 영원히 자기로 남는 곳이어서다. 이땅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지 못하면 사람은 짐승과 다를 바 없이 추락한다. 지옥에는 생명 아닌 '반생명'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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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 갈 사람은 지옥에 깨어 있는 사람, 지옥 갈 사람은 지옥이 두렵지 않은 사람이다. 천국과 지옥이 대수롭잖은 듯이 사는 사람만큼 무모한 사람이 없다. 이땅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사는 사람은 영원히 죽는다. 이 진리를 알고는 모르는 것처럼 못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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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년 전 고대인들이 아직도 지옥에 살아 있다. 사람에게 진짜 문제는 죽는 게 아니라 안 죽는 것이다. 지옥에선 항상 지내온 날이 문제가 아니다. 영영히 어둠 속에서 살아가야 할 미래가 진짜 문제다. 지옥에는 미래가 없는데 그 미래가 정말 영원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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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마 24:29). 그렇게 별들이 떨어지고 권능이 흔들리기 전까지는 든든히 붙잡고 있는 분이 계시다는 뜻이다. 큰 환난에 남겨지는 것은 예수님이 안 붙잡아주셔서다. 지금 견고해보여도 아무 소용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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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구도자일 때 쓸쓸하고 깨끗한 겨울바다를 좋아했다. 사람들이 북적대는 여름바다보다 더 바다 같았다. 뭍에서 못 느끼는 하나님을 바다에서 느꼈다. 불변하시는 끄떡없는 하나님, 불필요하게 많아보이는 바닷물보다 더 광대한 하나님이 거기 출렁이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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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못 만나면 인생의 비밀이 끝내 안 풀린다. 꽃이 왜 저기 있는지, 왜 아무 이유 없이 아름다운지, 왜 인생들이 그토록 사랑에 울고불고 생난리를 피우고 때로 목숨까지 내걸고 덤비는지 끝내 모른다. 하나님이 답인데 엉뚱한 답을 붙잡고들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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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세상의 사랑 노래들이 구원의 모형을 있는 그대로 진하게 보여주는 듯 느껴진다. 영화나 드라마, 소설과 그림 같은 예술작품도 비슷한 기능을 수행한다. 모형에 기대어 구원에 이르려 하거나 모형으로 구원을 삼는 사람들이 대다수라는 게 유감스러울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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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그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마 24:21).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큰 환난이나 적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 묵시 형태가 아닌 복음서와 서신서에도 그대로 나온다. 애써 이런 말씀을 상징화시키는 이들은 주님보다 더 중요한 뭔가를 기다리는 사람들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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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중에 사람이 죽을 때는 동물처럼 장례 절차도 없이 그냥 처리하지 않는다는 말에서 사람의 존귀함을 느꼈다." 교회 새가족반에 참여중인 한 비신자의 말이다. 구도자들이 진지하게 한 걸음씩 예수께로 나아오는 모습을 보며 긴장감과 희열을 동시에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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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작심하고 요한복음과 로마서를 하나님께서 마음눈을 열어주실 때까지 전심으로 집중해서 읽는다면 그는 오래지 않아 큰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에 집중하지 못해 생명을 놓치고 있다. 단순히 집중하지 못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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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감동받아야 이웃에게 감동을 끼칠 수 있다. 내가 은혜 받아야 이웃에게 은혜의 통로가 될 수 있다. 내가 하나님께 직접 받아 누려야 할 감동이나 은혜가 고갈되면 그것을 회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주의 사역이다. 주의 도구는 나이지 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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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아주 작은 노력을 하나님은 아주 귀하게 보신다. 반드시 감동 주시고 위로하시고 종내에는 주를 더 온전히 닮아가게 하신다. 늘 무언가 큰 것을 노리고 구하는 자는 괜히 에둘러 갈 뿐이다. 개미처럼 작은 거 하나라도 부지런히 실어나르는 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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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만한 자에겐 성경이 어리석게 보이나 주의 자녀에겐 생명과 같다. 주님이 각 상황에서 뭐라 말씀하시는지, 그 입에서 떨어지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숨죽이며 촉각을 곤두세운다. 주님은 거침없이 누구도 예상 못할 말을 던지신다. 주와 내통한 자만 알아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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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은 역사 속에 한 글자도 그냥 떨어지지 않고 정확히 성취되어왔다. 창조주의 말씀에는 거짓말이 하나도 없어 모든 사람의 생명과 직결된다. 무시하든 인정하든 모든 사람은 그 말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말씀을 처음부터 하시지 않았다면 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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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이 현금 없는 사회로 빠르게 진입하고 전산망 하나에 모든 사람이 점점 더 깊이 한데 얽혀 들어간다. 그래도 여전히 매매용 짐승의 표는 상징일 뿐이라 믿는다면 그가 성경을 아는 기독교인인 것이 아깝다. 그가 믿는 하나님은 역사의 하나님이 아닌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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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천국에서 왕으로 부름받았다." 기도할 때 주님이 주신 감동이다. 나뿐 아니라 신자는 다 왕의 부르심을 받았다. 'No cross, No crown'의 이치를 무시하기에 이 부르심이 낯설 뿐이다. "그들이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계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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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거듭나면 먼 별나라 이야기 같아보이던 성경 말씀들이 손에 잡히듯 알알이 다 사실이요 역사적 현실인 것을 알게 된다. 특히 영원한 천국에 대한 묘사는 너무도 생생해서 이땅에서 천국땅을 밟고 사는 것 같다. 그 은혜를 매순간 기억할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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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문을 닫고는 자기도 안 들어가고 들어가려는 자도 막는 지도자들이 있다(마 23:14). 그들을 분별하지 못한 채 따르는 자들 역시 큰 미혹에 빠져 있는 것이다. 교리로는 이단이 아니라 해도 생명을 못 얻는다는 면에서 끝이 다르다는 이단과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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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천국의 영광을 미리 본 자는 이 세상을 그 천국의 렌즈로 본다. 세상에서 주와 복음을 위하여 고난받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 싫어하시는 일이 무엇인지에 민감해지는 만큼 내 삶은 천국의 영광에 더욱 깊이 조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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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영혼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목회하지 않으면 내게 상급은 없다. 그 사랑은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기에 하나님만이 나의 지극히 큰 상급이시다. 주님을 더 깊이 알고 그 사랑만을 더 널리 전하길 소원하고 엎드리면 주께서 친히 앞서 행하시는 게 목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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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인류역사 가운데 성경이 없고 예수님이 없다면 다른 모든 나라와 개인의 역사가 무의미해진다. 어디에 기준점을 잡고 틀을 두어야 할지 무중력 상태에 빠진다. 성경이 없고 그 책의 주인공이 없었다면 서양사도, 문명도 없고, 과거와 현재, 미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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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전도는 복음의 내용 이전에 사람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것이 더 우선이 된 듯싶다. 먼저 친구가 되고 진실한 대화의 상대가 되지 않고는 맘문을 못 연다. 선포가 여전히 중요하지만 진정 어린 관심 없이는 그 선포의 내용마저 미심쩍게 여겨질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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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 위해서야." 교회가 개척될 때 아내가 만난 주의 음성이다. 고생길이 뻔한데 그 길이 아내를 위한 것이라는 하나님의 아버지 마음이 진하게 느껴졌다. 살다보면 특정 상황에 들어가보지 않고는 체득할 수 없는 게 있다. 날 위한 하나님의 뜻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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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꿈에 아내가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자신의 눈물로 씻는 걸 보았다. 난 그 앞에서 예수님이 실체로 오셨는데 사람들은 아직도 모형을 붙잡고 산다고 설교하며 눈물을 펑펑 쏟았다. 그러고 나서 잠이 깼다. 예수님과 아내와 내가 함께 있었던 꿈은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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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하나님의 폭력성을 비난하며 무차별 공격해오는 학생을 만나 한참을 씨름했다. 구약 계시를 완성하려고 모형적으로 이뤄야 했던 특별한 사건들을 일반화시키면 엉뚱한 오해가 생긴다. 첫 사람처럼 지금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면서 온갖 불신앙이 싹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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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때에는 세상이 물로 망했지만 마지막때에 세상은 불로 망한다(벧후 3:6-7). 그 불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불인지 땅에서 사람들이 뿜어내는 불인지는 모르지만 후자라면 핵일 가능성이 높다. 2천 년 전 한 고대인의 예언치고는 개연성이 아주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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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묵상한 말씀을 하루 종일 기억할 방법 중 하나가 세 끼 식기도를 활용하는 것이다. 식기도를 간단히 드릴 때마다 그날 주신 말씀을 기억하며 주께 아뢰고 나를 일깨운다. 육의 양식은 꼬박꼬박 챙기면서 영의 양식은 뒷전인 이들에게 소박한 자극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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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한두 줄이라도 어제 일을 돌아보는 일기를 쓰면 세상에 파묻혀 사는 데서 벗어나진다. 특히 하루 일과 중 나를 언짢게 하거나 화나게 한 일을 적어보라. 회개거리들을 그냥 지나치는 데 익숙한 내 모습이 보인다. 일기 없이 살면 죄에 마냥 둔감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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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 2:3). 이 말씀만 늘 기억하고 지켜도 그때그때 자아를 죽일 수 있다. 나보다 남을 낮게 여기는 게 이기심과 자기애로 똘똘 뭉친 내 목숨이다. 그 목숨을 타인 앞에 내려놓을 줄 알면 주님만큼 겸손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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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이 성화에 좋다. 교회나 가정, 직장에서 웃음이 많으면 건강하다는 징표다. 웃음은 가볍고 만만해보여도 거짓으로 못 지어낸다. 진심 없이는 웃지 못한다는 면에서 웃음은 거룩하다. 때로 거기서 딱딱한 몸이 녹고 감정이 치유되고 죄가 무력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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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인권침해 논란으로 폐지된 테러방지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나는 이 법이 앞으로 전개될 빅 브라더 사회의 폐해를 경고해야 할 기독교 신앙의 자유까지 위협하지 않을까 염려된다. 이슬람이나 동성애 문제와 달리 교계의 관심도 거의 전무한 영역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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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누리라고 순리로 주신 모든 것은 얼마나 포근하고 자연스럽고 아름다운가. 남녀간의 사랑은 심정적으로도 자연스럽고 육체적으로도 아름답고 합당하다. 동성애는 육체적인 구조상으로도 반자연적이어서 심정적인 울림도 부자연스러워야 자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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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죄인임을 인정치 않으면 예수님을 구원자와 주님으로 못 받아들인다. 이 구원의 출발점이 이미 자기 포기였고, 믿음 이후의 삶에도 지속되어야 한다.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포기의 연속이며 그 열매다. 처음에 한 번 포기한 걸로 끝난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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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나를 대신해 죽으신 진리는 믿음 이후 성화의 과정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계속해서 나는 죽고 내 안에 사시는 예수님으로 살아야 한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경험한 출애굽과 광야의 여정이다. 출애굽만의 구원에는 가나안땅으로 가는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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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섭함과 원통함을 풀지 않고 용서치 못하고 자랑하고 시기하는 게 육신적인 내 자아의 활동이다. 그 자아에 계속 미련을 갖고 힘을 보태주고 합리화하고 격려해주는 한 진리 안에서의 참된 자유함은 요원하다. 그러고도 자유를 얻었다는 사람들은 다 미심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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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 포기는 현실 도피와는 다르다. 힘들지만 내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포기가 아니면 내 뜻을 그대로 주장한 포기일 뿐이다. 사탄은 엉뚱하고도 손쉬운 짝퉁 포기를 부추기는 데 명수다. 내 뜻에 미련을 못 버리면 포기하면서도 그에게 잡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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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나에게 자아를 포기하라 하심은 나를 하나님을 빼닮는 엄청난 수준에까지 격상시켜 존중해주시는 것이다. 내가 나로 남으면 나로만 남지 않고 끝내 죽어버린다. 그 죽음을 사전에 방지할 방법은 내가 미리 죽는 것이다. 영적 조삼모사가 사람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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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싼 구원과 값싼 복음, 기복주의 신앙이 당연시되는 때에 행함 있는 믿음, 자아 포기의 진리를 강조한다는 게 참 부담스럽다. 그러나 우리 신앙의 본이 되시는 예수님이 가신 길을 외면하면 구원이 없다. 십자가는 묵직한 사형틀이지 팬시용 목걸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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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머리 얼마야?" 밥 먹다 내게 던진 아내의 말에 딸이 놓칠세라 농담을 건다. "아빠 머리가 얼마냐고요?" 그러고보니 머리를 잘랐다는 말도, 머리 깎았다는 말도 다 무지막지하고 흉하긴 하다. 그래도 말은 때로 너무 따지고 들면 싱겁고 구차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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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자아에 지성, 감정, 의지가 있어 겉으로 보면 지극히 정상적이고 세련되기까지 하다.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고 큰 일도 해낸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에 깨어 있지 못하고 그분과 친밀하게 교제하지 못하면 영적으로 둔감해져 결국 영적 생명이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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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충만의 반대말은 자아충만이다. 자아, 곧 육신을 처리하지 않은 채 거창한 일들을 열심히 하면 결과는 뻔하다. 마지막날 예수님께로부터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는 말을 듣는다. 자아충만은 자기 영광만 구하는 불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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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서 죄가 들어오고 육신적인 자아가 형성되었다. 그 자아가 포기되려면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는 길밖에 없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난 내 영에 성령이 내주하신다. 말씀에 순종할 때마다 성령이 충만한 영적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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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전 6:17). 성령으로 거듭나면 내 영이 살아나고 성령과 연합된다. 그러나 성령이 인도하는 말씀 순종의 삶을 거부하면 육신적으로 산다.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고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산다(롬 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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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선한 것이 없다는 걸 알면 하나님 앞에 내 공로를 못 내세운다. 오직 하나님이 주신 걸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나를 내려놓지 않는 건 정죄받을 제목들을 고집하는 것이다. 온전히 선하신 하나님과 맞먹으려는 교만을 버리는 게 자기 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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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통한 중에 하나님을 드러내는 이들도 있고, 고난 중에 하나님을 드러내는 이들도 있다. 형통하든 고난 가운데 있든 문제는 내가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며 사느냐다. 자아를 말씀에 굴복시키지 않고는 형통함이나 고난이 결국 다 자기 의, 자기 영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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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개혁주의 신학을 사용하셔서 한국교회의 부흥에 귀하게 일조하도록 섭리하셨다고 믿는다. 그러나 보수신학의 보루와도 같은 개혁주의 신학의 장점을 사용하셨다. 특정 신학의 쓰임만 보고 그 신학의 부족한 부분까지 다 용인하신 걸로 여기면 큰 오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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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독고탁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만화를 되게 좋아했다. 그땐 만화로만 그려지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포근해보였다. 그 안에도 세상에 있는 모든 종류의 고통과 아픔이 있었지만 만화 이상으로 심각해질 수 없었다. 만화 같은 세상도 어릴 때가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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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만이 내 눈물의 주제가 되고 내 모든 걸 던져도 아깝지 않은 분이다. 그 앞에 내 마음을 다 쏟아부어도 어디서인지 또 쏟아부을 게 나오고 또 나오는 분이다. 보잘것없는 나지만 주님은 내 사랑을 얻으려고 오랫동안 기다려주셨다. 그게 너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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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도 모르게 영적으로 교만해진다 싶으면 하나님은 내 부족함을 보이셔서 나를 낮추신다. 낮추는 정도로도 내가 잘 알아차리지 못하면 기도의 자리에서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백하게 하신다. 이것이 내가 하나님께 받아 누리는 가장 큰 은혜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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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는 놈 위에 나는 놈, 나는 놈 위에 붙어다니는 놈이 있다고 한다. 아무것도 혼자선 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주님께 늘 붙어다니길 소원한다. 내가 붙어다니는 걸 성가셔 하지 않는 분은 주님이 처음이다. 부부간의 사랑도 주의 사랑만큼 밀착적이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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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선택하는 건 배우자를 선택하는 일과 비슷하단다. 사람은 다 같은 사람이고 교회도 다 같은 교회인데 각자에게 맞는 교회는 천차만별이어서일까. 안에 들어가본 적 없이 자신이 보기에 다른 교회들이 부족해보인다고 해서 함부로 쉽게 비난할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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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에 비하면 눈깜짝할 새도 안 되는 이 세상을 아주 잠깐 살면서 세상에 연연하느라 영생의 세계를 놓치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거래도 없다.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이 세상에서 바보 같아보여도 이땅에서 영원을 미리 본 사람이다. 그가 진짜 그리스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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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심각성을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예언자적 메시지만으로는 부족하다. 상처를 치유하고 위로해주는 제사장적 메시지도 필요하다. 그러나 전자가 현저히 약화되고 후자가 보편화되면 진정한 치유가 안 일어난다. 십자가를 통하지 않으면 상처가 더 만성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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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할례와 같은 의식적인 율법의 행위로는 결코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복음을 믿은 이후 성령을 따르는 순종의 행함은 영생을 얻는 데 결정적이라고 강조한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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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읽었던 책들을 다시 읽으며 느끼는 건 생소함이다. 줄 치고 별표까지 해둔 대목들도 다 처음 보는 듯 낯설다. 이럴 때마다 책은 한 번 정독하기보다 여러 번 속독하는 게, 무조건 많이 읽기보다 하나라도 기억하고 활용하며 실천하는 게 낫겠다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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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티는 미시적인 접근을 할수록 좋다. 그저 지나쳐버리기 쉬운 짧은 본문을 계속 반복해서 읽고 되씹고 묵상해보라. 이전에는 그 본문에서 전혀 보지 못했던 걸 보게 되고 듣지 못했던 걸 듣게 되고 느끼지 못했던 걸 느끼게 된다. 그것이 묵상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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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예수님이 몰아붙이셔서 엉겁결에 시작한 변증전도 사역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시키신 사역은 그분이 친히 책임지신다는 것 하나만은 철저히 체득했다. 여전히 부족하고 거창한 비전 같은 것도 없지만 이후에도 주님 마음에 합한 사역만을 지향하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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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많이 컸네~" 서너 살쯤 된 애가 유모차에 탄 어린 동생에게 던진 말이다. 내가 볼 땐 거기서 거긴데 그는 동생이 대견한 듯 연신 감탄사를 발한다. 하나님이 위에서 보시면 다 까만 머리만 보인다. 용서받은 죄인들의 잘난 척은 어떻게 보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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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이 체질화되면 영적인 사고가 일상화된다. 일상의 삶속에서 만나는 사물과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만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삶속에 말씀이 들어오게 된다.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귀를 여는 것이 곧 적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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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은 이방인도 이제 예수님의 피로 유대인이 가졌던 언약백성의 지위를 얻었다는 것이다(엡 2:1-22). 구원의 출발점을 은혜로 시작하고, 그 은혜의 능력으로 순종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그 안에서 행함의 법도는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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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6). 흔히들 믿음을 강조한 로마서와 행함을 강조한 야고보서의 구원관이 다른 듯 여기지만 그렇지 않다. 둘 다 믿음 이후 믿음의 열매인 순종의 중요성을 똑같이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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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목적은 자아실현이 아니라 반자아실현이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말이다. 내가 누구인가, 왜 사는가에 대한 의미를 추구하는 시대에 기독교만은 자기개발이나 자아실현을 위한 도구로 전락될 수 없다. 신자의 의미는 오직 예수님을 닮는 것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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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만큼 교회가 세상 문화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할 영역도 드물다. 교회가 세상을 등진다면 교회의 존재 가치가 현저히 축소된다. 구원받는 즉시 다들 하늘로 올라간 것 같은 교회는 성경적인 교회가 아니다. 세상의 한복판에서 세상을 뛰어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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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 대한 기독교인들끼리의 갑론을박을 보면 답답해진다. 매번 하나님의 섭리는 이런 소모적인 싸움을 거쳐야만 이뤄지는 걸까. 정치행위에 대한 감시와 비판의 기준이 애매모호할 때는 다들 한 발 뒤로 물러서 기도하는 것으로 시간을 아끼는 게 낫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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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이야기는 세상 사람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기도는 신자들만 가능하다. 기독교인들끼리 벌이는 정치 논쟁의 결과는 세상이 이끌어내는 수준과 거의 비슷하지만 기도의 결과는 세상이 감히 흉내내거나 예상치 못할 영역이다. 무엇이 하나님나라에 더 유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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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요즘 집에서 신문을 많이 본다. 시사상식이 좀 늘어가나 했더니 뜬금없는 질문에 확 깼다. "힐러리가 민주당이고 트럼프가 공화당이면 당연히 민주당 밀어야 되는 거죠?" 이유는 공화당을 공산당으로 알아서란다. 딸은 아직도 글자 하나로 세상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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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지도부는 남북간에 전면전이 나면 그 순간 자신들의 정권도 끝난다는 사실을 잘 안다. 사람의 계획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전쟁이어서 이 전쟁은 하나님께 속해 있다. 중동전과 한국전, 세계대전은 연쇄적으로 연결되어 종말의 환란기를 열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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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큰 전쟁이 일어나도 끝까지 세상사람들의 논리로만 바라볼 뿐 하늘을 보고 세상끝을 보라고는 말 못하는 지도자들이 많다. 그들은 주님이 이르신 종말을 안 믿는다. 땅에 속한 천지의 기상 분석에만 열중할 뿐 시대는 분별치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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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평화로워보일 때도 일어나고 위태로워보일 때도 일어난다. 각자의 마음에 영적 전쟁이 심각한데도 이땅의 평화에 기대어 목숨을 잇고자 한다면 진정으로 사는 게 아니다. 이땅에 평화로운 통일을 원한다면 교회가 먼저 깊은 회개로 하나님과 화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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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설교든 성경 본문을 읽어놓고 그 말씀과는 상관없는 딴 소리를 하면 설교가 아니다. 설교에서는 무슨 말을 하든 거기에 본문이 스며들어 있어야 한다. 딴 소리를 해도 본문에 줄이 닿아 있으면 딴 소리가 아니다. 설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본문 중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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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자가 자신은 단지 주님의 심부름꾼으로 말씀에 대해 어긋난 주장을 하지 않도록 늘 조심한다는 의식이 없으면 자신도 모르게 교주처럼 된다. 하나님만을 높이고 말씀을 자기 생각보다 더 중시하지 않을 거면 사역자가 되기보다 차라리 장사꾼이 되는 게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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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마 19:23). 예수님은 믿음이 약하거나 선택받지 못한 자가 천국에 못 들어간다 하시지 않는다. 자기를 내려놓지 못한 부자 청년 같은 이가 못 들어간다. 너무나 익숙한 말씀도 교리에 가려지면 그 뜻도 가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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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눅 21:19).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한 번 믿은 신자의 영원한 견인을 믿는 개혁주의자들은 주님의 이런 말씀이 당황스럽다. 예수님은 개혁주의자가 아니라 친히 자기 부인의 삶과 죽음에 인내의 모범을 보이신 분이다.
-안환균 목사의 트위터, 페이스북에서
첫댓글 2월 말부터 3월 중순까지 트위터와 페이스북에서 나눈 140자 트윗 형태의 단상들을 사진과 함께 한데 모았습니다. 짧은 글들의 모음이지만 제가 섬기는 변증전도 사역의 한 분야인 만큼 변증전도연구소 홈피에 정기적으로 데이터베이스화해놓고 있습니다. 가끔씩 전체적으로 큰 흐름을 느끼며 훑어보시고자 하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