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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내가 원하는 대로 안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쓰레기통을 치우고 새 봉투를 갈아끼우는 중에 내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말이다. 나는 버려야 한다 여기는데 하나님은 버리지 말라 하시고 나는 아끼는데 그분은 버리라 하시는 게 분명히 있긴 한가보다.
2
자녀 세대가 교회 안에서 가장 잘하는 일이 믿는 척하는 것이다. '부모 따라 교회 나왔으니 적어도 내겐 믿는 척해줄 권리는 있다'고 여긴다. 그러다 부모 슬하를 떠나면 반 이상이 교회도 떠난다. 지금 그들이 질문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줘야 한다.
3
"누가 태어나게 해달랬나? 왜 날 세상에 나게 해서 고생시켜?" 하나님께 이렇게 반항하는 이들이 있다. 부모는 왜 서로 사랑했냐고 항의하는 것과 같다. 사랑은 하나님과 사람의 본질이다. 존재가 없으면 사랑을 나눌 수 없어 자유의지도, 생명도 주셨다.
4
하나님이 살아계신데 삶에선 마치 그분이 죽으신 것처럼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듯하다. 그들도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말에는 발끈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니체가 신이 죽었다며 발끈한 데는 역설적인 뜻이 있진 않을까. "너희를 보니 신은 죽었어..."
5
신자가 주 앞에서 놓고 씨름할 것은 자신이 늘 부족하다고 느끼는 그 무엇이다. 그걸 제거하기 위해 씨름하고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결국 그 하나 때문에 다 무너지는데도 손쉽고 만만하거나 거창한 것들로 그 진짜 씨름을 대체하려다 내내 제자리걸음만 한다.
6
"속력이 커져도 알짜힘은 일정하다." 중1 딸아이의 과학 과목을 가르치는 아내의 어깨 너머로 엿들은 진리다. 수학 문제는 아예 내가 못 풀 문제들이다. 실생활에는 구구단 정도가 필요하다지만 사고력 훈련에 좋다 하니 공부 또한 영성훈련에 비견될 만하다.
7
교회를 떠난 이들의 말을 들어보면 의외로 하나님에 대한 오해나 상처로 인해 마음을 접은 경우가 많다. 남아 있는 자들도 이런 문제가 안 풀리면 언젠가는 떠난다. 변증전도를 필요로 하는 이들이 교회 안에도 늘어가는 때이지만 먼 산 불 보듯하는 느낌이다.
8
삶을 갖고 있는 모든 사람은 죽음의 문제를 갖고 있다. 죽음이 내 일이 아닌 듯 여기며 사는 건 삶도 내 것이 아닌 듯 여기며 사는 것과 같다. 내 삶이 진정으로 내 것이 되려면 그 삶을 언제든 일시에 망가뜨릴 수 있는 죽음을 가만히 놔둬선 안 된다.
9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벧후 1:10). 한 번 믿은 자도 택함받은 자리에 계속 서 있어야 한다. 구약과 신약 곳곳이 이런 경고로 가득한데도 신학의 창이 시야를 흐리게 한다.
10
성경이 구원 이후 행함 있는 믿음을 중시한다면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는 말씀에 큰 의미가 있다. 거룩한 삶에 깨어 있지 않으면 신자라도 휴거되지 못할 수 있다.
11
노아의 때와 같이 지금도 마지막 심판의 때와 주의 재림에 대해 관심 갖는 이들이 현저히 적다. 그 재림을 사모하며 준비하는 이들 역시 쉽게 비웃음당한다. 역사는 똑같이 반복되는데도 사람들은 못 알아차린다. 주님보다 실은 세상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12
천국이나 지옥, 종말에 대해 말하면 세상사람들의 귀에 거슬린다고 여기는 기독교, 그래서 이땅의 변혁에 주로 관심 쏟는 기독교는 이념적 기독교라 할 만하다. 진보나 보수나 반쪽 기독교에 치우치는 동안 내세와 현세를 아울러야 할 진짜 기독교는 홀대당한다.
13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정치적 긴장관계를 하나님의 오래 전 예언의 성취와 언약적 섭리의 관점은 제쳐둔 채 약자 보호의 관점으로만 보려는 것이 진보주의자들의 한계이자 이념적 기독교의 민낯이다. 하나님은 세상이 만든 단순한 정치적 역학관계보다 더 크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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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분만 투자해보세요, 사장님!" 길거리의 모델 하우스 앞에서 나는 '사장'이 되고 보험사 텔레마케터의 전화통 안에서는 '아버님'이 된다. 한쪽은 돈이 있어야 한단 말이고 한쪽은 나이가 있어야 한단 말인지. 문제는 그 둘이 정비례 관계가 아니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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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교회든 작은 교회든 어디서나 주께 절대적인 헌신을 드리고 있다면 그는 자유롭다. 큰 교회의 규모나 익명성이 주는 혜택을 일시적으로 필요로 하는 연약한 이들의 경우도 그럴 만하다. 그러나 이 둘에 다 속하지 않는다면 각자의 위치를 재점검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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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안에서 선한 삶을 위한 싸움을 싸우지 않는 자에겐 제2, 제3의 은혜가 임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를 제맘대로 과신하거나 남용하면 누리고 있던 은혜도 차츰 까먹는다. 믿음 안에서 추구하는 선한 삶은 정체되어 있는 것조차 날마다 퇴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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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순종의 거룩한 삶을 살고자 소원할수록 내 죄가 더 잘 보인다. 그 소원 말고는 다른 안경이나 현미경이 없다. 내 삶의 죄가 추상적이지 않듯 거룩한 삶도 마찬가지다. 죄를 더 잘 보게 될수록 하나님의 은혜도 내 삶에서 더욱더 구체적인 실체가 된다.
18
묵상한 말씀에서 느낀 주의 마음과 영광, 나의 연약함과 죄와 구해야 할 도우심을 그대로 기도로 가져오면 기도의 뿌리가 든든해진다. 묵상이 기도로 확장되고 심화되면 하루 종일 그 말씀을 기억하는 데도 유익하다. 묵상은 기도를 돕고 기도는 묵상을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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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은 하나님의 완전수다. 삼위일체를 뜻하는 3과 세상의 사방을 뜻하는 4가 합쳐진 수다. 7일의 한 주간, 일곱 절기와 일곱 교회, 7년 풍년과 7년 흉년. 하나님은 역사를 이뤄갈 때 이 수를 사용하신다. 무엇이든 대충대충 하시는 법이 없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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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교회 다니다가 지금은 그만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기독교를 역사로 못 보고 종교의 하나로만 여긴 이들이 많았다는 뜻이다. 문제는 지금도 교회 안에 있는 이들 중에 그런 종교인들이 많다는 것. 그들만 제대로 전도해도 큰 전도다.
21
기도의 시간에 일상과 사역의 모든 내용들이 들어왔다 나갔다 한다. 주일예배에서 올릴 찬양을 드리거나 설교의 영감을 얻거나 누구를 만나기 전에 그를 주 앞에 올려드리거나 간에 일상이 기도요 기도가 일상이 되면 사역은 영락없이 하나님께 꽉 붙들리게 된다.
22
성도들 앞에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기도에서 나는 눈물 흘리지 않는다. 그러나 나 홀로 하나님 앞에 서는 골방기도에서는 성령님이 내 속에서 눈물을 많이 퍼올리신다. 기도의 눈물은 내가 하나님 보좌 앞에 있다는 걸 깨우쳐준다. 이보다 더 행복할 순 없다.
23
"유리는 투명하다/ 무엇이든 다 허락할 것 같다// 거리낌없이 다 보여줘도 결국 벽이라고/ 속지처럼 끼워져 있는 유리창" 중고도서점에서 본 신춘문예 시집의 한 구절. 내가 시를 좋아하는 이유는 아무도 고민하지 않는 존재의 문제가 시의 존재 이유여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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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와 부모, 자녀와 형제간의 친밀함이 얼마나 따스하고 애틋한지를 느낄 때마다 삼위일체 하나님 서로간의 친밀함을 아주 옅게나마 체감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을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어 삼위일체를 닮은 공동체 관계를 창조하셨다. 그것만도 실은 천국이다.
25
하나님을 무시하고 살아온 날들을 진심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서 마음을 드리고, 십자가를 통한 그 큰 사랑을 받아들인 모든 이들은 주의 자녀다. 이 구원의 출발점을 너무 까다롭게 잡아두면 구원 이후 더 중요한 구원의 과정이 오히려 경시되기 쉽다.
26
성경 말씀에 따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진실한 마음은 하나님의 자녀 된 증거다. 성령의 역사 없이 자연인은 그 마음을 못 가진다. 이보다 더 복잡한 기준을 내세우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성숙시키는 데 집중하지 못하고 구원 그 자체를 우상화하기 쉽다.
27
구원의 확신이 부족하다는 핑계로 하나님과의 만남을 소홀히 하는 이들이 있다. 예수님 안에 열려 있는 구원의 문을 아주 높게 만들어 그 안에 들어가려면 대단한 도라도 닦아야 할 듯 몰아가는 이들도 있다. 모두 시작하지도 않고 끝을 보려는 조급증 탓이다.
28
구원의 확신에 대한 욕심은 보통 사람들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종교적인 어떤 경지나 성취를 자랑하려는 이들의 욕심과 통한다. 하나님은 허락해주신 분량만큼의 믿음을 따라 말씀에 순종하며 한 걸음씩 좁은 길로 나아가려는 자보다 그들을 더 크다 하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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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확신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이들일수록 이미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 받은 자신의 길을 겸손히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을 깎아내린다. 자신은 시작도 못한 길에 이미 들어선 자들을 시기한다. 사탄은 이렇게도 속이고 저렇게도 속여 구원의 길을 못 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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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은혜로 구원의 여정을 내딛는 출발점은 대체로 비슷하다. 그러나 말씀을 이해하고 말씀의 증거들을 알아가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주님과의 관계를 성숙시켜가는 과정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다. 구원은 그 저마다의 성화 과정에서 이탈하지 않는 자들의 열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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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만 있어도 그 생명과 성장의 잠재력을 잘 키우면 열매 맺는 신앙으로 자란다. 많은 이들이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이 믿음의 씨앗을 살리지 못하고 구원의 여정에도 태만하다. 사탄은 우는 사자처럼 이런 자들을 삼키려고 으르릉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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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열성적인 신자로 교회에도 충실했던 이들을 안다. 그들이 지금은 교회에 참여하지 않고 자기 나름의 가치관으로 살아간다. 그들이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저버린 그들에게 구원은 없다. 그들을 봐도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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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 6:47). 이 말씀에서 '가졌다'는 원어 동사의 시제는 과거가 아닌 현재다. 믿음이나 영생을 얻음이나 다 현재 진행형이다. 왕년에 뜨겁게 한번 잘 믿었거나 사실에 대한 단순한 동의 차원의 믿음만으로 끝난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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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들의 명백한 잘못을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고 살아가는 목회자나 신자들의 구원은 아주 위태롭다. 그들은 잘못된 신학에 안주하여 잘못된 신앙을 지속적으로 고집하는 맹신자들이다. 행함 있는 믿음은 진실한 회개가 동반되지 않으면 가장 큰 동력을 잃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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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우들을 보며 작은 교회 교인들의 특성 하나를 느낀다. 다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뭔가 내세울 게 있다고 자부하는 이들이 별로 없다. 정말 내세울 게 없어서가 아니다. 다만 하나님 앞에 특별한 갈급함이 있어 영 기억이 안 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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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진리에 대해 마냥 침묵하면서 자기만 신앙생활 잘 하면 된다고 믿고 살아가는 사람은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은 알게 해주신 만큼 나누길 원하신다. 그래서 참된 하나님나라가 타인의 삶에도 나타나고 확장되길 원하신다. 그것이 제자의 삶이다.
37
설교자는 자신의 개인적인 사상을 전하는 자가 아니다. 성경에 담긴 하나님 말씀을 효과적으로 잘 전달하려는 목적에서만 개인의 역량도 의미가 있다. 설교자의 창의성은 이 한계를 넘을 수 없다. 그래서 그 창의성은 성경을 깊이 묵상하는 데서 기초가 잡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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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존경을 두루 받고자 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온전히 전하기 어렵다. 그들은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삼는 자들"(딤전 6:5)이 되기 쉽다. 사람들의 귀에 듣기 좋은 말로 인기를 얻으려는 이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축소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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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크 없는 차가 위험하지만 엑셀로만 속도를 조절하는 차도 의미 있지 않을까. 맘대로 달리다가 맘대로 아무 데서나 브레이크만 밟으면 멈출 수 있는 세상에선 사람들이 더 거칠어질 듯싶다. 평소에 멈출 때를 생각하고 그때그때 속도 조절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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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한계시록... 요한계시록을 본문으로 삼은 설교를 준비하면서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메모를 하던 중 나온 오타다. 그러나 계시록은 읽을수록 오한이 들 만큼 두려운 계시가 아니다. 미래가 구체적으로 예견될수록 주께 대한 헌신은 더 의미있고 풍성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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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유브라데와 아마겟돈은 모두 실제 장소가 아니라 상징적인 장소다." 한국의 무천년주의 신학자 다수가 추천한 책에서 본 종말론의 한 대목이다. 실제 장소인 므깃도 평원에서 전쟁이 진행될 때 백마 타고 오실 예수님의 재림도 상징으로 치부할 기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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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사함이 얼마나 특별하고 중대한 일인지 모르면 십자가 복음의 가치도 그저 가볍고 쉽다. 복음이 값싸진 건 회개가 가벼워져서다. 믿기만 하면 죄를 용서받지만, 이 사면은 참된 회개의 자리에 있을 때에 한해서다. 회개 없이는 싸구려 가짜 사면만 난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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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선 변증이 생소하지만 이제는 이런 사역이 필요하다." 한국의 유명 신학대 신대원장을 지낸 분이 연구소를 찾아와 전해준 격려다. 이런 격려를 많이 들었지만 들을 때마다 생소하다. 아직도 변증이 많이 생소하고 왠지 갈 길은 여전히 멀게 느껴져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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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신 6:8). 적그리스도가 짐승의 표를 손이나 이마에 주는 건 성경 표절 행위다. 물론 말씀을 버린 자는 그 자리에 짐승의 표를 받게 된다는 점에선 역시 성경이 한 수 위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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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 당시부터 방언은 외국어가 아니었다. 성령의 은사로만 가능한 신비로운 언어였는데, 각 지역민들이 자기들 말로 알아들었다(행 2:8). 지금도 나타나듯 외국어 방언이었다 해도 배운 적이 없다면 그 또한 은사다. 방언의 본질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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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개혁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방언 중지론은 그들 신학의 구조적 약점을 드러낸다. 계시된 말씀만을 중시하는 보수적 태도는 귀하지만, 그러면서도 말씀에 위배되는 신학에 고착될 수 있다. 말씀 자체보다 인간의 교리적 전통에 지나치게 치우칠 때의 부작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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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으로는 이익을 따름이라"(겔 33:1). 들을 게 많아져서인지 사람들이 점점 많이 듣는 걸로 행함을 대신하는 데 익숙하다. 마음이 없으니 귀와 입과 손발이 다 따로따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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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잘 살면 1번 찍지." 길 가다가 얼핏 듣게 된 말이다. 여당을 선호하는 이유가 다양할 수 있지만 잘 사니까 그 기득권을 지키려는 데 있다면 씁쓸하다. 약자층을 위한 정책 여부도 자신만 잘 살면 크게 상관없다는 태도는 적어도 기독교적이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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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 대한 관심은 신자 각자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영역 중 하나다. 다만 그에 대한 관심으로 내세나 시대에 대한 분별 같은 기독교의 또다른 주요 영역에 둔해진다면 시각 균형이 필요하다. 이것도 취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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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금치콩나물된장국. 아내가 끓여주는 국 중에 내가 되게 좋아하는 메뉴다. 아내도 눈치챘는지 "시금치, 콩나물, 된장, 어느 하나 영양가 없는 게 없네~" 하며 거든다. 최소한으로 먹고 사는 것 같다가도 이런 말 들으면 정말 잘 먹고 잘 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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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에서 한 영혼 한 영혼이 주님을 더 깊이 배워가려는 모습에 큰 기쁨을 느낀다. 예전에 목회하면서는 그러려니 했던 게 이제 손에 잡히는 듯하다. 한 영혼씩을 착실히 만나면서 주님을 더 착실히 만나고 싶다. 거기에 목회자의 참쉼이 있는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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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좋은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도 습관이 안 되면 어렵다. 내가 어느 자리에 서서 무슨 일을 하든 뻥 뚫려 있는 건 하늘뿐이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명령은 사람보다 먼저 하나님이 늘 내 곁에 계시다는 걸 잊지 말라는 뜻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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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면 주께 영광 돌리는 삶이 된다. 이것 없이 추상적이거나 정적인 어떤 상태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세 가지의 표현 방식이 평소 내 믿음의 표현 방식이 되어가는 만큼 하나님이 뜻하시는 사람으로 빚어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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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굽은) 나라 가운데에 지극히 미약한 나라가 되어"(겔 29:15). 카이로에 갔을 때 입구부터 무덤들이 즐비한 걸 보고 옛날에 기대어 사는 나라란 말이 실감났다. 웅장한 왕묘 피라미드는 이후 미약해질 이집트에 대한 성경 예언의 극적인 증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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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은 너무 뻔한 거짓말, 유신진화론은 조금 그럴듯한 거짓말이다. 진화론에 신을 동원해도 그 신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다. 어쨌거나 6일 동안에 천지만물을 만들 수 없는 하나님은 무한히 전능한 신일 순 없다. 유신진화론은 하나님을 맘대로 축소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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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려면 한 구절만을 대상으로 하더라도 질문을 많이 던져보아야 한다. 짧은 구절도 범위를 좁혀 깊이 조명해보면 많은 질문이 쏟아진다. 답을 염두에 두면 질문이 안 나온다. 그러나 질문을 많이 던지다보면 그 과정에서 답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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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마음을 드린다면서 기도하지 않으면 마음을 드릴 방도가 없다. 마음만 있고 표현을 안 하면 말 그대로 마음만 있을 뿐 내게는 아무 유익이 없다. 기도는 하나님께 드린 마음을 내가 알게 해주고, 또 하나님과 나눈 그 마음을 은혜로 누리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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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마음을 담는 그릇이다. 하나님께 내 마음을 드릴 때 아무렇게나 데면데면 드리거나 아무 데나 담아 드릴 수 없다. 반드시 기도에 담아 정성스레 나를 올려드릴 때 받으시고 응답하신다. 마음없는 형식적인 기도는 쓸모없는 기도가 아니라 기도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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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이 나서 아픈 데가 있으면 주께 낫기를 구하는 게 먼저다. 하나님은 치유를 위해 의술과 함께 내 믿음의 기도도 사용하신다. 기도만 하고 약을 안 먹는 것, 약만 먹고 기도 안 하는 것 모두 주의 방법이 아니지만, 기도가 덧입혀진 의술에 역사가 많다.
60
염려가 생기는 건 살아계신 하나님보다 내 생각과 추리와 경험을 더 믿어서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보다 내가 더 살아 있어서다. 믿는 만큼 염려가 없어지는데 믿으면 염려할 시간과 에너지가 그만큼 죽어서다. 그렇게라도 염려는 죽이고 믿음은 살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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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마음을 지키기가 쉽지 않나봐." 값싸고 양 많기로 소문났던 동네의 청과물 가게가 요즘은 예전 같지 않다며 아내가 아쉬워한다. 가게가 잘 될수록 값을 더 내리고 하나라도 더 얹어주며 몸을 계속 낮춘다면 돈보다 사람을 얻는 보람이 더 컸을 듯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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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에 둔감해지면 나중엔 죄가 습관화, 인격화된다. 이 성향이 집단화되면 죄에 민감한 이들을 되레 왕따시킨다. 죄와 죄 아닌 것을 자신들의 죄악된 성향으로 구분짓는 시대는 불행하다. 죄를 알려면 먼저 나와 내 속에 거하는 죄를 나눠서 볼 눈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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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무시한 채 은혜받는 데만 열심을 내면 응답 없는 삶으로 인해 결국 미지근해진다. 주께서 죄에 대해 얼마나 민감하신지 모르면 그분과 친밀해질 길이 어디에도 없다. 작은 죄 하나도 하나님의 눈으로 크게 보지 못하면 미지근한 믿음을 끝내 못 벗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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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핵심 중 하나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이며 그 친밀함은 죄를 미워하는 거룩한 삶으로만 가능하다. 이것이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거듭거듭 강조하시는 주된 테마다. 내 죄에 마냥 둔감하신 채로 나를 친근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나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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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을 배워 안다는 것은 이단이 뭔지를 안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신학을 안다고 해서 반드시 정통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그 신학으로 정통을 가리는 일이 빈발할 수 있다. 이단보다 더 교묘한 이 일은 신학을 업으로 삼을 때 곧잘 일어난다.
66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거나 그 사랑보다 더 좋고 뭔가 더 있어보이는 일에 관심이 쏠린 자들은 자나깨나 하나님 사랑 타령인 이들이 못마땅하다. 그렇게까지 사랑하진 말라고 말린다. 숨길 수 없는 넘치는 사랑이 아니면 늘 2% 부족하다는 걸 그들은 모르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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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여쭤볼게요. 절에 좀 안 다니세요?" 길 가는데 웬 여자가 물었다. "도를 아십니까?"보다는 신선했는데 그 절이 그 도를 가르치는 절인가 싶었다. 절도 절 나름이듯 교회도 교회 나름이다. 내가 교회 다닌다고 하면 어느 교회냐 물어볼 것 같았다.
68
신문의 맨 아랫쪽 한 모퉁이에 한 서정시인의 별세 기사가 났다. 언제 태어나 무엇을 했고 무슨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말이 너무도 신문스럽게 태연하다. 죽음을 늘 가까이 하고 살았을 한 시인의 고매한 일생도 정작 그 죽음 앞에선 별로 할 말이 없다.
69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시 56:8). 성경에 시의 한 구절처럼 기록된 말씀이 천국에선 현실이다. 마음이 아파 흘린 눈물은 그냥 땅에 버려진다. 그러나 고난중에도 주님만 사랑하고 그것으로 족하다는 고백에서 우러난 눈물은 천국에 다 담긴다.
70
사람들은 괜히 자기가 자기 일을 만들어 자가발전을 한다. 하나님은 그가 하는 일보다 그를 온전히 가지시길 더 원하시는데 자기 스스로 가치의 경중을 따져 하나님께 자기 맘대로 무언가를 드리려 한다. 가장 확실한 예배가 무언지 알면서도 내내 모른 체한다.
71
예수님의 재림과 휴거, 천국이나 지옥에 대해 말하지 않고 성경을 윤리 교과서 정도로 가르치는 목회자는 성도들이 만든다. 성도들이 깨어 살아 있는 역사로 삶의 전부를 요구하는 참진리에 목말라하지 않으면 목회자도 깨어나지 않는다. 그 성도에 그 목회자다.
72
이스라엘의 회복이나 적그리스도 짐승의 표가 상징이냐 실제 역사냐에 대해 잘 모르면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는 게 좋다. 자칫 많은 성도들을 미망에 빠트리고, 그 자신도 본의 아니게 예수님의 왕 됨을 원치 않는 종(눅 19:27)으로 꾸지람당할 수 있다.
73
"내 앞에서 행하라." 기도할 때 하나님은 성경을 떠오르게 해 말씀하시기도 하지만 내게만 하고 싶은 말씀도 주신다. 그 한 문장 한 문장은 마치 성경의 주석처럼 내 삶에 깊이 들어와 박힌다. 기도는 대화다. 하나님은 기도를 듣고 말씀으로도 응답하신다.
74
찬양과 감사로 시작할 때 기도는 이미 절반 이상 응답되었다. 찬양과 감사에 응답하시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하루 일들을 하나님께 아뢰고 그 중에 감사할 일 감사하고 회개할 일 회개하는 건 까다로운 일이 아니다. 누구든 삶이 있는 자는 기도할 수 있다.
75
매일 삶의 내용이 있는 사람은 모두 기도의 내용 또한 풍부히 가지고 있다. 그 하루 동안 하나님과 어떻게 동행했는지, 얼마나 그분의 사랑을 드러냈는지를 돌아보는 게 기도다. 그 삶의 현장들에서 하나님의 눈길과 음성을 자주 만날수록 기도가 더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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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내 삶이 하나님 앞에 진지하고 진실해지는 것이다. 기도는 주 앞에서 내 삶을 꾸려가겠다는 태도요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고 끊임없이 시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하지 않는 자보다 더 교만한 자가 없다. 기도하는 자보다 더 겸손한 자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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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할 삶의 내용이 분명히 있는데도, 내 힘만으로 감당치 못할 일 투성이인데도 사탄은 기도를 못하게 막는다. 기도를 거창한 종교적 사업처럼 만들려고 안간힘을 쓴다. 기도를 막는 사탄을 이기려면 친숙한 일상의 자리에 기도를 친숙하게 계속 접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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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하나님을 못 만난 이도 기도는 해야 한다. 욥기에 보면 하나님을 찾는 이도 그분께 도우심을 간구하라고 말한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찾은 사람과 찾는 사람, 비신자를 향한 말씀이 다 있다. 기도는 그 모두에게 주어진 일반은총 차원의 명령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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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하나님이 얼마나 정확하신 분인지 보게 된다. 그분이 언급하는 모든 일이 다 역사적 사실로 고증된다. 우리가 다 고증하지 못할 걸 아시면서도 그분은 진실만을 말씀하신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는 만큼 더 정확한 하나님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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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양 은사는 귀중하지만 구원과는 큰 상관이 없다. 신유와 방언과 예언, 온갖 지식과 말씀의 은사를 가져도 그에게 진정한 회개와 거룩의 삶이 없고 성령의 열매가 없다면 구원은 없다. 예수님은 마지막날 그에게 "난 널 모른다"(마 7:23)고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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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새의 동태를 다룬 다큐를 보고 중요한 사실을 느꼈다. 동물은 수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아무런 발전이 없다는 것이다. 늘 발가벗고 사는 그들은 본능 외에 의식주를 개선하거나 문명을 발전시킬 능력이 전혀 없다. 문명은 하나님 형상을 가진 인간만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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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한 믿음은 의문 중에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께 순종하는 믿음이다. 하나님의 성품이나 하시는 일 중에 뭔가 애매하고 이해가 잘 안 되는 게 있으면 확실한 그분의 속성을 붙들어야 실족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절대 선이시며 끝까지 공평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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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족구를 하자고 해서 일대일 족구를 했는데 너무 약했다. 얼마 후 고교 동창 목사한테서 뜬금없이 전화가 와 족구를 하잔다. 몇 일 후에야 이것도 하나님의 배려라고 느꼈다. 작은 은혜도 당연한 걸로 여기지 말아야 하는데, 자주 잊고는 나 혼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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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 29:13). 하나님을 만나려면 나의 전부가 요구된다. 그 만남이 여러 옵션 중 하나인 사람, 교회에 나가주는 걸로 하나님을 달래며 그분과 세상 사이에서 적당히 줄타기하는 사람은 시간만 낭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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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석 교회나 그 교회의 목회자가 우상이 되는 경우를 심심찮게 본다. 이것은 종종 자신이 좋아하고 중시하는 우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 스스로도 잘 못 알아차린다. 교회를 다니면서 진리에 더 가까이 나아가는지가 관건인데 이를 돌아볼 감수성도 무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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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믿고 사는 이는 자신이 자신에게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 그 하나님은 스스로가 봐도 신통찮은 하나님이다. 못하는 게 너무 많고 진짜 하나님이 베풀어주는 게 너무 많다.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이는 빨리 가짜 하나님을 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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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그를 만날수록 천국에 대한 소망과 지옥에 대한 경계가 선명해지면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반대로 그 두 가지가 점점 더 희미해지고 이땅에서 안일한 마음이 들면 그는 미혹이다. 아무리 잘나고 지식 많고 성품이 좋아도 그는 미혹이다.
-안환균 목사의 트위터, 페이스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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